<제97화>
진짜 커피 머신으로 내려주는 줄 알았더만.
“제가 아직 바리스타 자격증을 못 따서요. 하하하. 나중에 자격증을 따게 되면 그때는 제대로 커피 뽑아서 대접할게요.”
종이컵에 커피믹스와 원두커피를 따라준 우주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바리스타 자격증이 없어도 커피는 내릴 수 있다는 태클은 아무도 걸지 않았다.
노린 거구나.
뻔뻔하게 넘어가서 그런가.
가볍게 웃을 수 있는 포인트였다.
현장의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덕일까.
우주의 얼굴에 긴장감이 풀어졌다.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여러 예능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우주였다.
차기 예능돌이 될 거라는 평가를 증명이라도 하듯 현장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예능계의 황소가 있다면 딱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나는 MC로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선보이는 우주를 감탄 어린 눈으로 보았다.
진짜 잘하네.
능수능란하게 멘트를 따는 것도 그렇고, 우리에게 하나하나 적재적소의 멘트를 던지고 이를 받아주는 것도 그렇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중간중간 화제가 될법한 소스를 던지는 것도 그렇고.
같이 방송하는 나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방송감이 좋았다.
이걸 재능이라고 하는 걸까.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을 거다.
나는 물론이고, 우주마저도 놓치는 부분들 말이다.
그럼에도 충분히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
부담이 덜해서 우주 역시 마음을 다소 놓은 거 같고.
어쩌면 이 너튜브 예능으로 시작하는 지금이, 우주에겐 더욱 좋은 일이 될 거라고 확신했다.
우주의 리드를 받으며, 우리는 한 시간짜리 녹화를 무사히 끝냈다.
카메라도 적고 게스트도 우리 멤버끼리만 있어서 그런가.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다른 지상파나 케이블 방송에 비해서도 녹화 시간이 정말 짧았다.
이것저것 대기하는 시간까지 합쳐도 고작 두 시간.
지상파 예능이었다면 적어도 네 시간 이상 소요됐을 텐데 말이다.
‘예능 프로그램 사이에 짧게 공연하는데도 대기시간이 길어서 두세 시간이 걸리는데.’
그래 봐야 나오는 건 2분조차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들었다.
그런 거로 따지면 여유 있는 녹화가 아닌가 싶었다.
“아마 이런저런 편집을 마치면 20분짜리 영상이 될 겁니다.”
PD는 홀가분한 얼굴로 마무리 멘트를 던졌다.
“근데 우주 씨, 기대 이상인데요? 솔직히 이 정도로 잘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진짜 편하게 잘 나왔습니다. 활동적인 느낌에 신선함이 가미돼서 좋네요.”
“부족한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하하하! 부족한 건 없어요. 여기서 제가 말 잘못 하면 우주 씨 포텐셜을 해칠 거 같아서 그래요.”
PD가 이 정도로 칭찬하는 걸 보면, 확실히 잘 나온 모양이었다.
“올리오스 팀도 좋네요. 은근히 예능감이 있어요. 진짜 나중에 다들 패널로 한번 나가는 거 어때요?”
“그럴 수만 있으면 좋죠.”
“나가면 무조건 히트할 겁니다.”
그렇게 첫 녹화가 끝이 났다.
돌아가는 길에 조수석에 앉은 황이서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첫 예능 MC를 맡은 방송이라 따라온 그였다.
“아마 이 방송 끝날 때까지는 우주가 가끔 연습에 빠지게 될 거다. 너희도 알다시피 MC를 본다는 게 촬영 날만 나가서 하면 되는 게 아니니까. 기획 회의부터 제작 회의까지 나가야 할 거다.”
알고 있다.
외부에서 열심히 일하는 만큼 포기해야 하는 게 있어야 할 테니까.
“형들, 미안해.”
“괜찮아.”
나는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만큼 밖에서 고생하는데 이해해야지.
다만.
“그렇다고 연습을 소홀히 하면 안 된다.”
“걱정 마. 둘 다 열심히 할 거야!”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아이였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우주가 열심히 하는 만큼 우리도 열심히 해야지.
돌아가는 내내 차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래.
이때만 해도 그랬다.
* * *
우주는 MC라는 이유로 방송국에 종종 불려갔다.
미리 황이서가 공지했던 대로 주기적으로 방송국으로 가, 예능의 방향성과 더 나은 발전을 위한 회의를 했다.
우주의 캐릭터를 보고 만든 프로그램이다 보니, 작가와 PD가 짠 기획과 대본을 우주에게 묻고 함께 만들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우주에게 기대를 건다는 뜻이겠지.
3회차 녹화를 마쳤을 즈음, 너튜브 프로그램 ‘우주카페’의 첫 방송이 나왔다.
초저예산 토크쇼.
배경은 카페지만, 종이컵에 스틱형 원두커피를 타 먹는 모습에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저거 협찬 아님?ㅋㅋㅋㅋㅋ
-저거 타줄 거면 바리스타 복장은 왜 입힌 거냐곸ㅋㅋㅋㅋ┖그게 매력임. 잘생겼잖아.
┖저런 알바생 있으면 바로 단골됐다.
그 모습이 짤로도 몇 개 따져 돌아다니기도 했다.
-○누 로고 옆에 붙여봤다.
┖아씹ㅋㅋㅋㅋㅋㅋ 광고짤 아니냐곸ㅋㅋㅋㅋㅋ
┖커피포트로 쪼르륵 따르는 거 귀엽다 진짜.
┖멤버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 봨ㅋㅋㅋㅋ
미래의 광고 모델이라며 극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빠르게 소문이 퍼진 덕분에 우주카페의 1회차 1주일 차 조회수는 100만을 훌쩍 넘겼다.
대박이었다.
이 기세라면 2회차부터는 100만은 물론 기세만 잘 타면 200만도 가능한 수치였다.
그러나 마냥 기분만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우주야, 거기가 아니지.”
성훈의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반주로 흐르던 우리의 수록곡의 반주가 끊겼다.
앨범 활동 때는 춤을 추지 않았던 수록곡에 새롭게 안무를 입히는 중이었다.
당시에는 워낙 곡이 많았기에, 수록곡 모두에 안무를 넣지 못했다.
수록곡에 전부 댄스곡만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활동이 끝이 나고, 여기저기 행사에 나가면서 우리는 보다 다양한 댄스곡이 필요해졌다고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All we once’, ‘New Taste’, ‘Angel’, ‘Vocalist’.
우리가 본격적으로 군무를 갖고 있는 곡은 이렇게 네 곡이었다.
적지 않은 곡이었지만, 사실상 진효원의 노래인 ‘Vocalist’를 빼면 세 곡.
행사에서 쓰기에는 다소 적었다.
물론 수록곡 중에도 좋은 노래가 많았고, 노래만 불러도 되는 발라드곡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음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댄스곡 하나 정도는 더해도 좋지 않을까 싶어, 우리가 자발적으로 제안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동작으로만 구성해서 새로 짠 안무였다.
문제는 우주가 개별 스케줄 때문에 평소보다 많이 바빴다는 것.
그리고 우주가 평소에도 댄스 안무를 따라가기 버거워했다는 점.
[최우주]
[나이: 20]
[노래: B]
[춤: B+]
[외모: B]
[예능: A]
트레이닝과 몬스터즈와의 합동 공연 덕에 우주의 춤 스탯이 B+급으로 오르긴 했다지만, 이 스탯은 그저 현재 최대로 나타낼 수 있는 포텐셜을 보여주는 것뿐.
연습이 동반되지 않으면 B+급 스탯이어도 엉망으로 출 수 있었다.
호진이처럼 A급 이상은 되지 않고서야….
“최우주.”
성훈이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날카로워졌다.
“연예인 다 된 거야?”
“그건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왜 기본적인 동작도 틀리는 건데.”
“그게 방금은….”
“몇 번이고 봤다. 같은 부분에서 계속 실수하잖아.”
“…….”
성훈의 말이 계속될수록 우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형들 따라 가겠다고 발버둥 치는 아이한테 너무 세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우주가 지금 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아.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성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자고 약속한 순간부터 유난히 초조해했던 그였다. 본인은 물론이고 멤버들에게 보다 더 강한 열정을 요구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주가 계속해서 쉬운 안무를 틀리니 답답한 기분도 알겠다.
그런데 문제는 그 상대가 우주였다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예능으로 어렵게 자신감을 찾아가던 애한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실수를 한 우주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접근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거다.
“우주 너는 끝나고 추가 연습하고 와. 제대로 출 때까지 계속 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잠깐만, 성훈이 형. 그건 안 돼.”
추가로 연습을 더 시키다니.
나나 호진이나 정민이는 몰라도 우주는 안 된다.
“얘 내일 촬영 있어.”
“…….”
내 말에 성훈이 나를 노려봤다.
“그러면 애가 이렇게 연습이 부족한데 그냥 두자고?”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컨디션 관리를 시켜야지.”
“그러면 너는.”
“응?”
“너는 왜 저번에 연습량 부족해서 미숙했을 때 호진이랑 같이 끝까지 남았는데?”
“그때는 우리 모두 데뷔하기 전이었잖아. 연습만이 살길이었고.”
“그런데 지금은 데뷔했으니까 연습 좀 안 해도 된다?”
성훈의 얼굴이 구겨졌다.
보기 드물게 자신의 감정이 드러난 상태였다.
본인의 감정을 가슴에 묻는 데 도가 튼 사람이 성훈이었다.
그만큼 화가 난 걸 거다.
같이 세계를 노리자고 먼저 제안한 내가 연습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을 해버리니까.
그렇게 화내다가 팔자주름 생기면 큰일인데.
“일단 나가자. 애가 듣는 곳에서 할 말은 아닌 거 같아.”
“야, 우주도 어른이야. 올해 성인이 된 어른이라고. 얘도 들을 건 들어야지. 언제까지 막내라고 감싸고 돌 건데?”
“감싸고 도는 게 아니지. 현실적으로 보자는 거야. 우주가 컨디션 조절 잘못했다가 예능 촬영 망쳐버리면, 그럼 그건 누가 책임질 건데? 형이 대신 욕 먹어줄 거야?”
“무대 위에서 우주가 실수하면 우주만 욕먹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연습을 안 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야. 형, 연습량이 부족하면 연습의 수준을 높이면 되잖아.”
“…연습의 수준을 올린다고?”
“그래.”
“건하야, 그게 된다고 보는 거야?”
“물론이지. 단순히 밀어 붙인다고 고쳐질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이보다 연습의 수준을 어떻게 올릴 건데? 이거 우리 다음 행사에서 보여 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는 거야. 단기간에 올릴 수는 있어?”
그래.
그렇게 물어봐야지.
지금보다 단기간에 연습의 질을 올리는 방법.
딱 하나가 있다.
‘트레이닝.’
내가 가진 트레이닝 시스템.
포인트를 투자해서 멤버의 스탯을 늘리고 스킬을 더해주는 시스템의 힘 말이다.
‘춤 스탯을 올려주면 지금보다는 수월하게 춤을 배울 수 있어.’
올라간 포텐셜을 이용해서 호진과 내가 옆에서 밀착 마크를 해준다면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다.
그래.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지.
하지만 가능한 방법을 갖고 있었다.
우주에게 싸늘하게 대하는 성훈의 의도는 명확했다.
연습이 부족하니, 연습량을 늘리자.
지금 계속 같은 실수를 하고 있으니까 자각해.
아마 평소의 성훈이었다면 무뚝뚝해도 다정하게 얘기했겠지.
그 역시 초조한 걸 거다.
모두가 그랬다.
목표를 너무 높게 설정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세계를 노리자는 목표는 조금 더 숨길 걸 그랬나.’
그때의 발언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목표가 큰 만큼 우리의 동기 역시 확실하게 굳어졌으니까.
이건 성장에 따른 성장통이었다.
우주도 자기 나름대로 부담을 갖고 있고, 성훈도 갖고 있는 거다.
그러니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내가 해결을 해야만 했다.
내가 리더니까.
“일주일 동안 내가 밀착 마크할게. 나한테 방법이 있어.”
“밀착 마크한다고?”
“촬영장도 따라가고 계속 동선 잡아주면 되잖아.”
“…….”
“굳이 따로 남겨서 혼자 추게 하지 않아도 돼.”
성훈이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봤다.
“나만 나쁜 놈인 거지?”
“형,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한번 해봐. 그런데 일주일 안에 결과 안 나오면, 그때는 진짜 각오해야 할 거야.”
성훈의 눈이 우주에게 향했다.
“응. 각오할게. ”
“우주 너도 마찬가지야.”
“진짜 애한테 왜 그래?”
“너야말로 너무 감싸고 돌지 마.”
성훈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