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성훈의 무대 철학을 다 듣고 나니, 진이 빠졌다.
“후우우.”
진짜 눈을 빛내며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데, 듣다가 귀가 찢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수다에 파묻혀서 쓰러진다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체감했다.
‘그래서 성훈의 속사정이 대체 뭐지?’
퀘스트는 떴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우주나 정민, 호진 그리고 나까지.
전부 뭐가 속사정인지 유추할 수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훈은 달랐다.
가족 문제도, 개인의 자신감 문제도, 돈 문제도 아니었다.
설마.
‘우리 그룹에 대한 고민인가?’
띠링!
그와 동시에 추가 메시지가 왔다.
[성훈의 속사정 ? 더 나은 올리오스를 위한 진일보]
[성훈을 설득하세요.]
[성훈이 납득하고 인정하는 순간, 보상을 지급합니다.]
진짜였네.
그만큼 그룹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떤 식으로 어떻게 설득을 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형들 나 왔어!”
예능 출연에 관련된 미팅으로 방송국에 갔던 우주가 돌아왔다.
얼굴에 미소가 가득 담겼다.
얘기가 좋았나 본데?
“나 너튜브 예능 프로그램 녹화하기로 했어! 우주카페라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손님이 찾아오는 컨셉이래.”
“잘 됐다. 그럼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거야?”
“응! 아마 일주일에 한 편씩 들어가고, 8회차까지 진행하기로 계약했어.”
8회.
총 두 달.
너튜브 파일럿 프로그램치고는 상당히 긴 분량이었다.
우주의 실력을 방송국에서도 믿는 거구나.
“아. 그래서 말인데.”
입이 근질거리는 모습이었다.
“뭐가 또 있어?”
“당연하지. 흐흐흐.”
“뭔데?”
“그 우주카페의 첫 게스트가 올리오스야!”
“진짜?”
“응! 내가 그거 아니면 못한다고 했거든.”
칭찬해 달라는 듯 우리를 보는 우주.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이 기특한 놈.
“이 자식!”
우리는 달려들어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한 막내에 대한 우리 나름의 칭찬이었다.
우리보다 더 어른스러운 막내의 모습이 참으로 대견했다.
“근데 프로듀서님이랑 얘기는 된 거야?”
“응. 가기 전에 먼저 물어봤어. 형들이랑 한 번은 같이 나가고 싶다고.”
참 기특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PD도 대단하네. 그걸 허락했다는 게.
부담되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첫 방송, 첫 게스트.
방송의 흥망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첫걸음인데 올리오스 전원을 부르다니.
‘승부수라도 있는 건가.’
표정에 생각이 드러난 걸까.
“PD님도 우리의 케미를 인상 깊게 봤대.”
“그래?”
“응. 그리고 음방 1등도 하고, 인지도도 올라가고 있으니 괜찮을 거 같다고 하시더라고.”
그런 비하인드가.
확실히 지상파 음방 1등을 찍은 것이 큰 도움이 된 건 분명했다.
흥얼거리는 우주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우주 예능 1회에 다 같이 나가는 거야?”
“응!”
호진의 말에 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신기하네…. 우주가 진행하는 예능이라니.”
우리는 감상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앨범이 성공할 수 있을까 없을까만 고민했던 우리였다.
싱글 앨범이 나름 성적을 냈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싶을 때가 있었으니까.
내가 몇 번이고 자신감을 가지자고 말했을 때와 정말 성과를 얻었을 때 느끼는 감상은 차원이 다를 거다.
“이번에 우리를 제대로 보여줄 필요가 있을 거 같네.”
성훈이 말했다.
그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우주가 진행하는 첫 예능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열심히 할 생각이었다.
좋은 일은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이서 프로듀서가 우리를 불렀다.
“우리한테 들어온 광고 리스트다. 한번 확인해 봐.”
기다렸던 광고 소식.
“이게 저희한테 들어온 거예요?”
“와, 미쳤다.”
“화장품 광고도 있네요.”
“와….”
멤버 모두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 성훈마저도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당연하지.
사람들이 우리를 그만큼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쫘악 펼쳐진 네 개의 광고.
연예인들이 광고 중에서 최고로 친다는 화장품 광고도 있었다.
비록 신문 화보 광고였지만, 그것도 화장품 광고지.
TV 광고도 하나 있었다.
라면 광고였는데, 봄 시즌에 맞춰서 광고를 낸다고 했다.
이 라면 광고를 제외하면 전부 화보 광고였다.
“너희들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을 선에서 선정했다. 열 개 정도 들어왔는데, 이미지와 맞지 않거나 단가가 맞지 않는 건 거절하고 남은 게 그 정도야.”
황이서가 광고 리스트와 기획 컨셉, 간단한 콘티를 나눠주며 말을 이었다.
“전부 다 받아도 되고 전부 다 거절해도 좋다. 너희의 선택이야.”
우리의 선택이라는 그 한마디에 GH 엔터가 갖는 지향점을 알 수 있었다.
소속사 아이돌과 소속사의 공생.
이건 황이서 프로듀서의 배려였다.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부분을 선택하라는.
이런 활동들은 소속사가 소속 연예인에게 일정 부분 강요할 수 있는 문제였다.
소속사 역시 수익 창출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업. 아이돌을 키워주기 위한 자선단체는 아니었다.
나는 가만히 광고 리스트를 보았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화장품 화보 광고와 TV 라면 광고였다.
누가 봐도 가장 무난한 광고들이었다.
특히 라면 TV 광고는 유명 배우들부터 성공한 스포츠 스타, 그리고 아이돌까지,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많이 찍는 1티어급 광고였다.
‘화장품만큼이나 성공의 척도를 보여주는 광고지.’
나머지 두 개는 음료수 광고와 과자 광고였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화보 형태로 사진을 찍고 배포하는 광고.
‘거절할 게 없는데.’
이미 한 차례 걸러져서 그럴까.
내 생각에 나쁜 광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 좋은데요?”
솔직한 감상이었다.
거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광고는 전혀 없었다.
광고를 찍으면서 생길 수 있는 리스크는 아이돌로서의 이미지 소비였지만, 네 개, 그것도 화보 형태의 광고가 세 개였다.
다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게 내 생각이었다.
“저는 다 받아도 괜찮을 거 같아요. 스케줄 꼬이는 것도 없고….”
“다른 멤버들은?”
다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처음 광고가 들어왔다는 말에 눈을 반짝이던 다른 멤버들.
자기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는 성훈마저도 설레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저도 건하 형이랑 같은 생각이에요.”
“엄청 많은 것도 아니고, 첫 광고라고 생각하면 네 개 다 좋은 거 같습니다.”
“다 하루 만에 찍는 일정이네요?”
“스튜디오에서 찍는구나.”
일정은 굉장히 타이트했다. 두 가지 일정을 전부 소화하는 게 가능할까 의문도 들었지만, 우리의 대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만장일치로 광고를 다 받기로 했다.
우리의 예능 촬영과 광고 촬영이 같은 날로 정해졌다.
* * *
기념비적인 우주의 첫 예능.
정확히는 우주가 처음으로 MC를 맡은 너튜브 예능 프로그램.
과거 지상파 예능에 나갔을 때와는 담당하는 인원의 수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다.
지상파 예능에선 수십 명의 스태프와 열 대가 넘는 카메라가 우리를 찍었지만, 너튜브 프로그램이라 그럴까.
카메라 두 대와 메인 PD를 포함한 스태프 여섯 명이 촬영 인력의 전부였다.
출연진과 거의 비슷한 스태프 수라니.
너튜브 예능이 지상파 방송에 비해 규모가 작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작은 건 우주카페에 대한 투자도 크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금은 걱정이 됐지만.
“자, 아마 같은 그룹의 멤버라서 오히려 더 어색할 수 있어요. 약간의 상황극을 넣을 거거든요? 그 묘한 어색함이 백미입니다. 아시겠죠?”
메인 PD가 가진 열정이 대단했다.
출연진인 우리보다 열정을 불태웠다.
우주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매일같이 방송 컨셉과 방향, 앞으로 어떤 식으로 찍을 건지를 주기적으로 보냈다고 들었다.
심지어 촬영 스튜디오로 사용할 작은 개인 카페도 PD가 발품을 팔아서 찾은 분위기 좋은 작은 카페였다.
여길 빌리기 위해서 수도권에 있는 개인 카페 오백 곳을 직접 찾았다고 했다.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는 카운터 앞에 바처럼 길게 늘어선 테이블과 의자들.
생김새만 보면 와인바와 비슷한 구조였다.
그 열정 넘치는 우주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불꽃 같은 PD였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저 열정의 방향이 잘 맞는다면 성공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5분 뒤에 스탠바이 들어가겠습니다!”
PD가 우리를 보며 외쳤다.
“형들! 촬영 들어가기 전에 사진 찍자!”
컨셉에 맞게 바리스타의 옷을 입고 메이크업을 마친 우주가 핸드폰을 들며 말했다.
“내가 MC를 맡는 첫 예능이잖아. 이런 건 찍어서 올려야지.”
“올려도 되는 거야?”
“여기 카페 로고만 안 보이면 된대.”
“그래?”
괜찮겠지.
우리는 핸드폰을 든 우주의 옆에 옹기종기 모였다.
“자, 그럼 김치!”
우리 모두 환하게 웃으며 V를 그렸다.
모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우주가 긴장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같이 사진을 찍자는 것도 긴장감을 가라앉히기 위한 방법일 테지.
“후우우.”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며 손을 터는 우주의 손을 잡았다.
긴장한 탓에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렇게 추운데도 손은 핫팩처럼 뜨거웠다.
그의 손을 꽈악 잡자, 우주가 나를 보았다.
“하던 대로만 하면 돼. 그럼 잘할 수 있을 거야.”
“건하 형….”
“자기 자신을 믿어. 알았지?”
“응, 알았어. 고마워.”
이전처럼 모두가 함께 오르는 무대가 아니었다.
작은 너튜브 예능이었지만, 메인 MC.
우리가 함께하는 첫 녹화가 끝이 나면 이제부터는 혼자 무대에 올라가 오롯이 해내야만 했다.
그런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한 격려였다.
다른 멤버들도 응원을 건넸다.
혼자서 MC의 첫발을 내딛는 막내를 격려해주는 훈훈한 모습이었다.
마지막에 성훈이 우주의 어깨를 붙잡았다.
“힘내라.”
성훈다운 간결한 격려였고, 그 한마디가 우주에게 큰 힘이 된 모양이었다.
“그럼, 나 다녀올게.”
게스트인 우리와 다르게 오프닝을 찍어야 하는 우주는 서둘러 카메라 앞에 섰다.
우리는 문밖에서 그런 우주의 멘트를 지켜봤다.
추운 겨울의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우주에게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처음 개시한 우주카페의 우주입니다!”
우주의 멘트는 어느 때보다 자연스러웠다.
방금까지 긴장해서 덜덜 떨던 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근데 여기서 뭘 하죠? 바리스타 컨셉이라고 의상도 갈아입긴 했는데 저 커피 내릴 줄 모르는데.”
“손님들 오시면 커피 내려주시면 됩니다.”
PD와 티키타카를 주고받는 우주의 오프닝은 베테랑 MC처럼 부드러웠다.
부드럽게 오프닝을 마친 우주가 우리를 가리켰다.
“오늘의 첫 손님이 있잖아요. 지금 문밖에 계시는데, 날도 추운데 빨리 들어오라고 할까요?”
우주가 손짓했고, 우리는 문을 열었다.
“우주카페의 개시 손님, 올리오스입니다!”
짝짝짝.
스태프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우리는 바처럼 생긴 테이블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우리 형들! 진짜 최고로 잘생겼죠?”
헤실헤실 웃던 우주가 커피를 내주겠다며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두 메뉴만 가능합니다!”
자신 있게 외친 우주의 손에는 두 봉의 커피 스틱이 있었다.
하나는 노란 믹스커피, 그리고 다른 하나는 원두커피 스틱이었다.
믹스커피가 카페라떼고, 원두커피가 아메리카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