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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86화 (86/236)

<제86화>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세 대의 검은 차가 건물 앞에 떡하니 세워져 있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외제차였다.

외제차 앞에선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서 있었다.

“와, 저게 뭐야.”

정민이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건하야, 저분이 네 아버지셔?”

호진이 정장들 사이에 선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중년인을 보며 말했다.

윤건하가 그대로 늙으면 딱 저 얼굴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선이 강한 얼굴을 가진, 일명 미중년이었다.

까칠한 성격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썹을 찡그렸다.

얼굴만 봐서는 모르겠다.

애초에 한 번도 본 적도 없었다.

핸드폰의 사진에도 액자에도 윤건하의 기록엔 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으니까.

목소리를 들으면 알지도 모르겠다.

한 번은 들어 봤으니까.

“맞는 거 같아.”

“맞는 거 같다고?”

“너무 오랜만에 봐서 기억이 안 나네.”

나는 당황해하는 호진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중년인을 보았다.

“머리가 그게 뭐냐.”

익숙한 목소리였다. 전화기에서 몇 번이고 들었던 목소리.

아버지의 목소리가 맞았다.

황룡그룹의 윤택수 회장이 윤건하의 아버지였다고?

‘이런 게 출생의 비밀이라는 건가.’

당황스러웠다.

강단 있는 중후한 목소리가 범상치 않음은 예상했지만, 그룹의 회장이라니.

게임에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윤건하로 살면서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황룡그룹은 대한민국에서 50위 안으로 손꼽히는 거대 기업이라고 했다.

대부분 중공업 쪽에서 힘을 쓰고 있는 기업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원래 세계도 아니고, 내가 기업 순위를 외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윤택수가 내게 다가왔다.

저벅저벅.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적막을 깼다.

세 걸음 정도 사이를 뒀을 때였다.

“TV에서 봤다. 1위를 했더구나.”

“예, 1위 했습니다.”

“…이게 대답인 거냐?”

무슨 대답을 말하는 걸까.

그와 전화를 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소속사를 옮겨서 데뷔할 정도로 절박했더냐?’

‘예, 뭐든 해야 했으니까요.’

‘제대로 성적을 내지 못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전 여기서 무조건 성공할 거거든요.’

무조건 성공해서 독립하겠다고 말했던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네. 이게 대답입니다.”

“재밌구나. 재밌어.”

나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윤택수 회장을 마주 봤다.

‘조만간 찾아가마.’

찾아오겠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안부가 기억났다.

찾아온다는 게 이런 뜻이었던가.

나는 윤택수와 함께 온 여섯 명의 수행원을 보았다.

사람들을 대동하고 올 줄은 몰랐다.

협박이라도 할 셈인가.

“혹시 GH 엔터의 대표님 되시오?”

윤택수 회장이 내 뒤에 선 황이서에게 물었다.

“GH 엔터테인먼트의 황이서 프로듀서입니다.”

“잠시 아들과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소? 스케줄이 있다면 나중에 시간을 내도록 하지요.”

황이서가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지요. 오늘 스케줄은 다 끝났으니까요. 괜찮으시면 안에….”

“괜찮소. 차에서 짧게 얘기만 나눌 거라.”

“알겠습니다.”

황이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 모습이었다.

“이따 다녀와서 설명해 드릴게요.”

“알았다.”

나는 윤택수 회장과 함께 그가 탄 차에 올라탔다.

[메인 퀘스트: 윤건하의 속사정]

[재벌가의 아들, 윤건하]

[성공 시: 20 오픈 마일리지]

무려 20 마일리지가 걸린 퀘스트였다.

이전 퀘스트와는 달리 실패했을 때의 페널티는 따로 적혀 있지 않았다.

수행원들이 문 앞을 지킨 채로 나와 회장만이 고급 외제차의 뒷좌석에 앉았다.

일명 회장님들이 타는 차라며 유명한 고급 세단.

탑승하는 순간 승차감이 어마어마했다. 쿠션이 엉덩이를 가볍게 끌어안는 감각이 익숙했다.

과거 사업가 시절 윤건하일 때 지겹게 탔던 차와 비슷한 승차감을 지녔다.

차에 올라타자 무거운 적막이 공기를 짓눌렀다.

윤택수 회장은 말없이 전방을 주시했다.

“잘 지내고 있는 거 같더구나.”

“…예.”

“아비 몰래 연습실을 다니면서 연습하던 놈이 중학교 졸업하자마자, 가출해서 연습실에 가더니 이렇게 데뷔를 하고 말이야. 너 때문에 최 실장이 여러모로 곤란해했어. 그건 알고 있나?”

뭐지? 무슨 내막이라도 있나?

“쯧, 미성년자는 계약이 안 된다면서 최 실장한테 보호자를 자처해 달라니, 생각이 있는 게냐?”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누굴 닮아서 그런 건지….”

미성년자는 연습생 계약이 되지 않는다는 걸 해결하기 위해 최 실장에게 부탁했다니.

친족의 허락만 가능한 거 아니었나?

하긴, 황룡그룹의 회장을 모시는 실장인데 그럴 능력이 없는 게 이상하지.

“알고 계셨습니까?”

“설마 최 실장이 내게 말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언젠가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했습니다.”

“여태껏 나는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네가 선택한 길이고 언젠가 벽에 막혀 돌아올 거라고 봤으니.”

여전히 윤택수의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늘 얘기했지. 뭐든 최고를 목표로 하라고.”

“예.”

사실 듣질 않아 모른다.

그러나 황룡그룹의 회장이라면 늘 입에 달고 살았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최고에 도달한 건 좋지만 우물 속 미꾸라지 중에 최고라고 일컬어도 미꾸라지일 뿐이다.”

윤 회장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태산같이 깊고 강인한 눈매.

거대 그룹의 회장이 낼 수 있는 진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회사로 돌아올 생각은 없느냐? 아직 시간은 많다. 네 나이가 스물이니 다시 공부하기에 늦은 나이는 아니다.”

“…….”

“네가 처음 아이돌을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황룡그룹을 이끌면 된다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말하는 거다.”

윤건하가 왜 도망치듯 MAE 연습생 시절을 보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다른 의미로 느껴지는 부담감에 도망친 거다.

본인이 하고 싶은 꿈을 찾기 위해, 정해진 길을 걷고 싶지 않아서.

“1등을 했음에도 다시 오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1등은 축하할 일이지만 아까도 말했듯 미꾸라지 중 대장일 뿐이다.”

윤택수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자신의 확고한 생각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내는 버릇이었다.

“그것이 황룡그룹을 이끄는 것보다 더 큰 일이 될 거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뭐?”

나를 보는 윤택수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성공한 문화 소스가 터트릴 수 있는 잠재력은 충분히 황룡그룹과 버금갈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황룡그룹과 버금간다?”

그는 우리를 우물 속 미꾸라지라고 말했다.

거대 기업에 비해선 작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든 승천하는 용이 될 수 있는 게 아이돌이었다.

“예. 최근엔 아이돌 산업 역시 해외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동남아, 일본, 중국 그리고 이제는 미국과 유럽까지. 분명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어요. 해외에서 성공한다면 아이돌 멤버 한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치가 훨씬 더 커질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월드 스타.

그게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네가 그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예.”

윤택수는 내 눈을 응시했다.

“지금은 국내 음원 1등으로 기뻐하지만, 머지않아 세계에서 1등을 할 수 있는 그룹이 될 겁니다.”

“…자신 있는 게냐?”

“물론이죠.”

이래 봬도 자신감 없으면 시체거든.

“…….”

나와 시선을 교환하던 윤택수 회장이 손가락으로 의자를 두드렸다.

“재밌군. 황룡그룹과 버금갈 수 있다라…. 그럼 나와 내기 하나 하지 않겠느냐?”

“내기 말입니까?”

“그래. 다음 앨범도 이번 앨범처럼 1위를 하거라. 만약 네가, 너희 그룹이 다음 앨범에도 지금과 같은 성적을 낸다면….”

윤택수 회장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너를 회사로 부르는 일은 관두고, 네가 하는 그 아이돌에 투자하도록 하겠다.”

“투자 말씀이십니까.”

“그래. 성공할 수밖에 없는 상품이 눈에 들어왔는데, 투자를 안 하고 배길 수 있겠느냐?”

윤택수 회장이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되든 그에겐 손해가 없는 내기였다.

내가 성공한다면 투자금을 유치해 이익을 보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를 다시 회사로 데리고 가는 것.

그의 입장에선 공정한 내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내게도 손해가 없는 내기였으니까.

실패한다면 황룡그룹에 돌아가겠지.

아마 아이돌을 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분명 다시 캐릭터 삭제라는 말을 꺼낼 게 분명했다.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성공하면 그만이야.’

절대 실패할 리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럼 제가 성공하면 조건 없는 투자를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조건 없는 투자?”

“예. 얼마든 저희가 말하는 금액을 투자해 주시는 겁니다.”

“당돌하구나.”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대답을 미룬 윤택수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말을 마친 윤택수 회장이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부자지간을 떠나, 성인들 간에 오고 간 딜이니 악수로 끝내야지.”

나는 그런 윤 회장의 손을 맞잡았다.

내 손을 맞잡은 그는 웃고 있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알았다. 가보거라.”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 건하야.”

“예, 아버지.”

윤 회장이 나를 보며 잠시 입을 다물었다.

“1위 축하한다. 내가 축하를 하지 않았더구나. 앞으로도 열심히 하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처음으로 부르지 않았나?

나는 문을 닫으며 생각했다.

내가 밖으로 나가자, 윤택수 회장의 수행원들이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부르릉.

차는 자리를 떠났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 * *

윤택수 회장은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어른이 다 됐구만.”

그의 마음을 썩였던 외동아들이었다.

황룡그룹 회장의 유일한 자식.

아이돌이 되겠다며, 중학교 때 집을 나가기까지 했던 어린아이.

그거 때문에 많이 싸웠다.

건하는 누구보다 그룹을 이끌 리더가 되어야만 했다.

자신을 이어 3천 명이 넘는 황룡의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대표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딴따라 같은 일은 하지 말라며 말렸다.

그리고 돌아온 건, 가출이었다.

연예인이 되겠다며 무작정 집을 나갔다.

그리고 연습생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들어오겠지 싶어서 기다렸다.

그러나 건하는 먼저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그 소심한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만약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말릴 수 있지 않았을까?

글쎄.

돌아오라고 몇 번 연락했지만, 받지 않았다.

답신조차 하지 않은 건하였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렇게 잊고 살던 중 박힌 부재중 전화.

포기하겠다고, 돌아오겠다고 전화를 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그냥 외로워서 연락했습니다.’

그 말이 왜 이렇게 가슴에 와닿던지.

하지만 돌아오지는 않겠다고 했다.

끝까지 해보겠다고.

‘정말 1등을 할 줄이야.’

“최 실장, 노래를 틀지. 차가 너무 조용하군.”

윤 회장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최 실장에게 말했다.

최 실장이 신속하게 플레이어를 틀었고.

-너를 기다리는 지금 이 시간이 설레서 두근거려.

차 안에서 올리오스 ‘All we once’가 울려 퍼졌다.

올리오스가 복귀했을 때, 윤 회장은 이 노래를 다운받았다.

음원부터 음반까지.

복귀 전에 왔던, 외롭다는 아들의 전화 때문이었을까.

황룡그룹의 냉혈한이라는 별칭까지 지닌 윤택수 회장은 이전이라면 하지 않을 변덕을 부려 아들의 노래를 샀다.

듣기 좋았다.

‘세계로 나가겠다라….’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다면 한 사람이 낼 수 있는 브랜드 파워가 그룹보다 훨씬 더 강해질 거라는 윤건하의 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해외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이, 국내 10대 계열사들보다 외국인들에겐 더 유명할 테니까.

윤택수 회장은 그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건하도 알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포부를 밝힌 것이다.

자신은 세계로 나가겠다고.

“누굴 닮아서 그리 당돌한 건지.”

올리오스의 노래를 듣던 윤택수 회장의 입에서 미소가 흘러나왔다.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윤건하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기대가 되었다.

1위를 차지했던 건하가 다음 앨범에도 1위를 차지할 수 있을지를 말이다.

“흐으으음.”

아들, 건하의 파트에서 윤 회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가사를 따라불렀다.

건하와는 다르게 심각한 음치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애초에 거기서 윤 회장이 심각한 음치라고 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좋군. 좋아.”

간만에 아내의 묘소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윤 회장이었다.

* * *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

황이서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물었다.

하아,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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