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오늘은 가사도 정해지지 않은 즉흥 녹음이니까 가이드 딴다고 생각하고 녹음하면 돼.”
“가이드 녹음이요?”
정민의 질문에 진효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늘 예정보다 회의가 일찍 끝났으니까. 시간이 남았는데 그냥 돌아가는 건 아깝잖아. 내가 허밍을 해주는 것보다, 한 번은 너희 목소리로 녹음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알겠습니다!”
정민과 성훈은 신이 나 있었다.
회의에 비교적 참여하지 못했던 호진과 우주도 녹음은 괜찮은 모양이었다.
회의에 참여를 못 하고 소외된 게 지루할 뿐이지, 다들 노래 자체는 좋아하는 애들이었다.
“전원이 노래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두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이드를 불러볼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예!”
“그럼 성훈이부터 해보자.”
“알겠습니다.”
거의 같이 작곡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성훈이었다.
진효원과 함께 들어간 성훈은 목을 가다듬었다.
약간은 긴장한 기색이었지만.
-따라라란. 둔둔.
음악이 시작되자, 표정이 바뀌었다.
긴장했다는 것마저 잊어버린 듯 전력으로 노래를 불렀다.
성훈의 청량한 목소리와 진효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화를 이뤘다.
정식 녹음 때와는 달리, 큰 실수를 하지 않으면 중간에 끊질 않았다.
성훈이 부른 가이드 라인을 따라 차례대로 정민, 우주, 호진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전부 이해해야 한다는 진효원의 말처럼, 우리는 모든 가이드 노래를 끝까지 불렀다.
“자, 마지막은 건하 차례네.”
진효원과의 듀오.
가이드 녹음이라지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내 최고의 여가수.
최고의 싱어송라이터.
농담으로 국힙원탑이라는 이야기까지 듣는 그녀.
대충대충 했다가 밑천이 다 드러나 버리면 그것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악의 모습은 보이지 말자.
스스로 다짐하며 마이크 앞에 섰다.
“너무 긴장하지 마.”
“선배님이랑 같이 무대에 서면서 떨지 않을 사람은 없을걸요?”
“후후, 칭찬이 과하네.”
내가 긴장이 풀렸다고 생각했는지, 진효원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성훈의 가이드 라인과 함께, 정민과 진효원이 완성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따리리라란~.”
진효원의 목소리가 녹음실에 퍼진다.
귀를 간지럽히는 듣기 좋은 목소리를 감상하며, 그녀와 화음을 맞췄다.
내 목소리가 진효원의 노랫소리에 섞이며 조화를 이뤘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B)]
녹음실에서도 뜨네.
시작이 좋다.
내 마음에 쏙 드는 목소리였다.
‘어머, 얘 봐?’
노래를 부르던 진효원은 과감하게 치고 들어오는 건하의 소리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귀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성훈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성훈과 호흡을 맞췄을 때는 귀가 호강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놀랄 정도로 성훈은 가창력이 뛰어났다.
반면 건하와 호흡을 맞췄을 때는 성훈처럼 잘 부른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하진 않았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편안해지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성훈의 목소리가 콘서트에 어울린다면.
건하의 목소리는 불 꺼진 방, 잠이 들기 전 침대 위에서 듣는 게 가장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조곤조곤하게 말하듯 내뱉는 건하의 목소리가 진효원의 보컬을 받쳤다.
이상하게 건하와 노래를 부를 때 마음이 편했다.
음색의 조화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건하의 노래 실력이 성훈보다 더 좋아서도 아니었다.
성훈과 비교하자면, 당연히 성훈의 노래 실력이 더 뛰어났다.
그런데 단순히 보컬의 실력과는 다른 무언가가 건하의 목소리에 숨어 있었다.
평소에 보컬의 실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진효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도 더 잘한다고 말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만큼 건하의 보컬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아.’
1절을 다 부르고 브릿지 부분에 돌입해서야 왜 그런지 알 거 같았다.
팀 내 보컬에서 주인공을 맡는 성훈.
받쳐주는 역할을 맡은 건하.
건하는 지금도 진효원을 받쳐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연기에 비유하자면, 진효원과 성훈의 조합은 주연과 주연의 조합.
두 주연이 서로의 톱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느낌이었다면.
진효원과 건하의 조합은 주연과 조연의 느낌이었다.
그의 노래가 그녀를 더욱 빛내주고 있었다.
‘센스가 좋아.’
기본기만큼이나 눈에 들어온 것이 건하의 센스였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진효원은 스스로가 건하와 노래를 부르며 웃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로 노래에 몰입했다.
그저 가이드에 불과했지만, 진효원은 자신이 부를 수 있는 최대까지 끌어올렸다.
그녀는 건하가 점점 마음에 들었다.
‘왜 팀원들이 건하를 그렇게 잘 따르는지 알 것 같네.’
진효원은 훌륭한 후배들을 바라보며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쉬웠다.
이들이 그녀와 같은 소속사가 아닌 것이.
같은 소속사였다면 스케줄이 없는 날마다, 매일같이 불러서 하드 트레이닝을 시켰을 텐데.
그녀의 뒤를 이을 한국 최고의 보컬의 자리를 이 아이들이 가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남았다.
진효원은 입맛을 다시며 가이드 녹음을 마쳤다.
오랜만에 녹음을 하면서 마음이 충족되었다.
“저번보다 훨씬 좋아졌네?”
“저번이라면 언제 말씀하시는 거죠?”
“처음 너희 무대 봤을 때 말이야.”
“아, 그때….”
“음색도 부드러워졌고, 노래도 말끔하게 잘 내뱉고, 무엇보다 호흡이 안정돼서 듣기가 좋다.”
“감사합니다.”
유독 다른 애들에 비해 성장이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더 탐이 났다.
이렇게 빠른 성장을 하는 아이라면, 자신이 옆에 붙어 있을 때 무시무시하게 자라날 텐데 말이다.
‘한 번 더 호흡을 맞추고 싶은데.’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앞으로 함께 할 녹음은 많다.
급하게 무리해서 이 감각을 해치지 말자.
멤버들과 각각 듀엣으로 불렀을 때 느끼는 이 감정.
이 감정을 가지고 곡을 분배하고 노래를 완성해야 하니까.
“고생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겠지.
* * *
[업적 – 슈퍼스타의 영감]
[보상: 노래 스탯 +1]
[노래: 50 → 51 (B)]
공짜로 스탯 하나가 올라갔다.
나쁘지 않았다.
B 등급부터는 스탯 하나를 올리기 위해서 25만 포인트, 즉 1 오픈 마일리지만큼의 재화가 필요했다.
심지어 평범함(F)의 디버프로 두 배의 재화가 필요해졌으니, 사실상 스탯 하나 올리는 데 2 오픈 마일리지나 필요한 셈이었다.
그걸 공짜로 얻었으니, 어지간한 업적 하나 깼을 때 얻을 수 있는 재화를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내 한계에 대한 고민을 생각하게 된 자리였지만, 그만큼 수확도 있었다.
단순히 내 능력치뿐 아니라.
“진효원 선배님은 확실히 다르시네.”
“솔직히 감동했어. 같이 부르는데 내가 더 잘 부르는 느낌마저 들더라.”
대스타와 함께 작업했다는 사실에 멤버 모두가 의지를 다잡았다.
황이서는 그런 멤버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스텝 업이라고 생각할 테니, 어쩌면 당연했다.
소속 아이돌이 더 발전하는 걸 싫어할 프로듀서가 어디에 있을까.
“애들아.”
“예.”
“모레부터는 두현이랑 같이 다닐 거다. 나는 현장에서 물러나고 너희들 스케줄 관리랑 PPL이나 협찬 쪽 관리해야 하니까 논다고 생각 말고.”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어떻게 프로듀서님이 노는 거겠어요.”
“아무튼 나 없다고 늘어지지 말고, 입 조심하고, 인사 똑바로 하고, 두현이 말 잘 듣고….”
“프로듀서님, 누가 보면 저희 애들인 줄 알겠어요. 저희 그래도 다 성인이에요. 우주 빼고.”
“아니, 열아홉이면 거의 성인이지. 나도 네 달만 있으면 스물이라고?”
그 모습을 보던 황이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희도 내 나이 돼 봐. 스무 살이나 열아홉 살이나 똑같다.”
이해한다.
서른셋이 넘어가면 열아홉이든 스물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 애들처럼 느껴지지.
공감하긴 하는데.
‘따지고 보면 나도 비슷한 또래인데.’
동년배한테 애들 취급을 받는 건 좀 그렇단 말이지.
“아무튼 너희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혹시 모르니 계속 주의해. 연예인은 항상 사방에 듣는 귀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넵!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황이서가 말 뒤꽁무니를 이어 잡았다.
“너희 모레 공중파 TV 인터뷰 있다. 나 없이 두현이랑 같이 진행할 첫 공식 스케줄이다.”
“예? 공중파 인터뷰요?”
“<연예가 좋다> 알지? 공중파 연예계 뉴스 프로그램. 거기에서 ‘기대되는 유망 스타를 만나다’로 너희를 캐스팅하고 싶다네? <주중 아이돌>에서 보여준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찾는 거 같더라. 이번에 인터뷰 잘하면, 순풍 타고 올라갈 수 있으니까. 준비 잘해. 괜히 말실수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 * *
녹음을 마친 진효원은 절친한 후배의 문자를 받고 식당을 찾았다.
유명 일식집.
하루에 정해진 손님만 예약을 받아, 셰프가 직접 요리를 만들어 대접해 주는 일식 오마카세로 유명한 고급 식당이었다.
은은한 조명을 지나, 별도로 마련된 룸으로 들어가니.
“선배, 오셨어요?”
몬스터즈의 한진성이 작곡가 권예은과 함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진성, 권예은, 진효원.
각자의 업계에서 탑을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세 사람은 이렇게 종종 모여 함께 밥을 먹으며 음악 얘기를 나누는 모임을 가졌다.
서로 다른 음악 색깔에 다른 지향점 때문에 자신들의 음악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을 훌쩍 보내곤 했다.
우연히 가지게 된 이 자리를 모두 좋아해 진효원을 중심으로 꽤 여러 번 모였다.
오늘은 의외로 한진성이 따로 모이자고 자리를 잡았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올리오스랑 내가 작업한다는 걸 알고 시간을 잡은 거겠지.’
하여간 본인이 마음에 든 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건 여전했다.
예전에 그녀가 샘플링을 했던 곡이 너무 마음에 든다면서, 몇 달 동안 그 곡을 달라고 끈덕지게 달라붙었던 과거가 떠올라 몸서리쳤다.
“오늘 일이 재밌었나 봐? 평소엔 지각은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 조금 늦었네?”
권 작곡가가 시계를 보며 농담조로 말하자 진효원은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에 드는 후배가 더 생겨서요. 그 친구들이랑 같이 작업하다가 조금 늦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그래?”
진효원의 말에 한진성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선배, 제가 아는 사람이죠?”
“맞아.”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모습이 퍽 얄미웠다.
“뭐야? 혹시 아까 진성 군이 말한 그 사람인가?”
“맞을 거예요. 건하 군 말한 거 맞지?”
“역시 귀신이시네요. 진 선배님.”
“한 후배도 마음에 들었나 보네? 여기저기 벌써 후배 이름을 얘기하는 거 보니까.”
“그냥 마음에 든 게 아니라, 팍 꽂혔거든요.”
말을 마친 한진성이 가슴을 툭 내리쳤다.
그 모습에 권예은이 감탄했다.
“대체 어떤 애길래 둘 다 꽂혔는지 원.”
“누나도 보면 딱 꽂힐걸? 애가 특별한 재능이 있는 거 같거든.”
권예은이 손사래를 쳤다.
“궁금하긴 한데, 됐어. 괜히 봤다가 너희랑 경쟁하고 싶은 마음 없다.”
그녀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이 둘과 경쟁하면 당연히 이길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재능 있는 친구더라.”
“그렇죠? 선배님이라면 알아줄 거라 생각했어요.”
“타고난 센스가 있어. 나름대로 노력하는 거 같고. 여러모로 길게 보고 키우면 대성할 친구야. 아마 성훈이라는 친구랑 같이 유닛으로도 나올 수 있겠더라.”
“그래요? 건하가 같이 하겠다고 했나요?”
“그런 건 아닌데, 노래 부르는 스타일이 둘이 잘 어울리겠더라고. 건하가 성훈이랑 잘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흠…. 저는 오히려 다르게 봤는데요.”
“그래?”
“건하는 솔로로 나오는 게 더 영향력이 클 겁니다.”
“또 갈렸네.”
“늘 있는 일 아닙니까?”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은 묘한 기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진효원은 이런 게 좋았다.
같은 대상을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시점의 차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때마다 자신의 시야 또한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같이 노래를 불러보니, 생각보다 받쳐주는 데 특화되어 있더라. 성훈이 내지르는 창법으로 사람들을 끌어주면, 건하가 화음을 넣어주면서 같이 하모니를 이루면 좋을 거 같던데?”
“저는 생각이 달라요. 두 사람이 유닛으로 구성되면 분명 싸울 겁니다. 그러다 멤버 중 하나가 나갈 수도 있을걸요?”
“그래?”
“건하 걔도 한 성깔 해요. 받쳐주는 것처럼 보이는 거, 그거 다 연기일 겁니다. 걔도 무대의 주인공이 될 놈이에요. 이번 데뷔 앨범 보세요. 비주얼 센터에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잖아요.”
의외였다.
그녀는 윤건하를 전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그건 외모 때문이 아닌가?”
“외모만 가진 애가 서브 보컬까지 꿰찼을까요? 선배님 앞에선 아닌 척했지만, 욕심이 있는 애예요.”
“그래?”
말하던 한진성이 피식 웃었다.
건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친구가 저랑 처음 만나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진효원은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먼저 그래미 가겠답니다.”
“뭐?”
“거기서 저를 기다리겠다던데요?”
“농담이겠지.”
“눈빛은 진심이었어요. 그런 눈으로 농담할 수 있는 친구라면 사기꾼을 해도 성공했을 겁니다.”
윤건하와의 추억을 회상하던 한진성이 다시금 피식 웃었다.
“재밌는 친구예요. 한번 유심히 보세요. 아마 그 속에 야수 한 마리가 숨어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한진성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는 윤건하를 그저 잘하는 후배로 보고 있지 않았다.
‘반드시 진효원 선배를 넘을 겁니다. 그래서 한국 최고의 보컬이자, 싱어송라이터가 될 거예요.’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 포부를 말하던 한진성이 그녀에게 보였던 그 눈빛이었다.
이기고자 하는 라이벌을 만났을 때의 눈빛.
한진성은 이 자리에 없는 윤건하를 생각하며 투지를 다지고 있었다.
“얘들아, 이제 나도 알 법한 얘기 좀 해주면 안 될까?”
권예은의 부탁에 그제야,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다시 이어진 음악에 대한 열띤 토론은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