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43화 (43/236)

<제43화>

“아, 선배님.”

“어서 와서 앉아. 다 세팅해 놨으니까.”

진효원의 말대로 그녀의 레코딩 장비들 뒤편에 놓인 테이블엔 자리마다 물과 정리된 자료들이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립다.

사업가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에 회의할 때 늘 이런 식으로 자료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말이지.

업무용 노트북과 PPT 자료들이 워낙 좋아진 후에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전까지는 저렇게 종이로 자료를 만들어 자료를 배포하곤 했다.

회의 전에 이렇게 정리된 자료들을 보면 마음이 놓여서, 아이디어가 잘 나오는 나름의 습관이 있었다.

‘편안해지네.’

아무래도 오늘 작업은 괜찮게 나오겠다 싶었다.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으면 돼.”

따로 이름표가 적혀 있지 않아, 우리는 들어온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다.

“아이쿠.”

안으로 들어가던 성훈이 미끄러져 휘청거렸다.

늘 걸음걸이까지 철저하게 따져가는 그답지 않은 실수였다.

“죄, 죄송합니다.”

어쩐지 말도 더듬고, 초점도 흐리멍덩하게 맞지 않았다.

얘가 왜 이러지?

상태가 너무 안 좋은데?

진효원은 우리의 건너편에 자리 잡았다.

“다들 잘 지냈어? 저번에 보니까 방송 3사에 전부 출연했더라.”

“예,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쁜 후배들의 시간을 뺏은 게 아닌지 모르겠네.”

“괜찮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진효원 선배님이신데요. 핫핫핫! 그렇지? 얘들아? 핫핫핫!”

역시나 성훈이 가장 빨랐다.

성훈은 사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존경하는 대선배와 함께 작업한다는 사실에 완전히 들뜬 상태였다.

우리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

성훈은 그중에서 가장 티가 났다.

저 어색한 웃음을 봐라. 헤벌쭉 입꼬리가 올라간 게 꼭 캣닢을 핥은 고양이 같았다.

그 표정 관리 잘하던 유성훈은 어디 갔나 몰라.

방금 실수한 것도 대선배 앞이라 긴장한 거 같았다.

“그냥 피처링으로 끝내는 작업이면 곡만 보내주고, 거기에 맞는 가사와 벌스만 받고 녹음하면 끝이지만…. 공동 작업은 그러면 안 되지.”

나는 그녀가 준비한 자료를 확인했다.

-진효원×올리오스 타이틀곡

-제목: 미정

“노래의 컨셉과 스타일에 대한 요약은 파일에 다 있어.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무대 구성은 어떻게 할 건지도 전부 다 적혀 있으니, 천천히 읽어보고.”

“어? 무대 위에서 영감을 얻으셨다고 적혀 있네요?”

정민이 놀라 물었다.

잠깐, 무대 위?

“맞아. 이번 곡은 무대 위에 있는 느낌을 표현한 곡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야.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고 함께 무대를 만들어가는 동료 가수들과 호흡하는 느낌이지.”

그녀의 말에 환해진 정민의 얼굴이 내 쪽으로 향했다.

공감을 바라는 얼굴.

우리가 첫 무대를 뛴 이후에 얻었던 정민의 영감이 떠올랐다.

게임 속 이벤트의 장면들.

정민과 내가 나눈 대화.

“우리 저번에 무대 끝나고 얘기한 거 말씀하시는 거지?”

“응응! 맞아. 그거!”

정민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곡 작업을 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눈치였다.

“저 이거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아요! 건하랑 무대가 끝나고 비슷한 얘기를 했었거든요. 무대 위에서 관객들을 바라봤을 때의 느낌을 갖고 곡을 만들면 좋겠다고요.”

“그래? 올리오스와 내가 통한 건가? 이건 마음에 드는데?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거니까.”

“와, 이런 우연이….”

“같은 무대를 보더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른 것처럼 정민이 네가 얻은 아이디어가 내 곡과 어떻게 다른지 보는 것도 재미겠네.”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진효원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금은 프로토타입이야. 오늘 너희와 이야기하면서 더 발전시켜서 완성할 생각이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오늘 안에 완성하지 않아도 되니까 부담은 갖지 말고.”

-♬♪♩♩~.

인트로가 시작되고, 자리에 있던 우리는 모두 입을 닫고 노래에 집중했다.

드럼 비트가 깔리며 기타의 음율이 그 위를 덧씌웠다.

어쿠스틱 기타의 소리와 드럼의 조화만으로 이미 완성된 곡처럼 느껴졌다.

이게 프로토 타입이라고?

진효원의 그간 노래와는 다르게 bpm이 상당히 빨랐다. 평범한 발라드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변화무쌍한 음악 스타일을 가진 그녀였지만, 대체로 서정적인 발라드가 많았다.

아이돌과 작업하는 것 때문일까?

이번 곡은 평소 그녀가 작업하던 곡보다 리듬과 템포가 훨씬 빨랐다.

“흐으응, 흐응~.”

멜로디를 넣는 진효원의 허밍이 비트와 조화를 이뤘다.

“여기서 성훈이가 들어올 거야.”

“제가 말입니까?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바로….”

“괜찮아. 천천히 해도 되는 작업이니까.”

진효원이 성훈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마치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잔뜩 긴장한 성훈이 외쳤다.

누르면 바로 띵동 하고 울리는 초인종 같다.

살짝 톤이 낮아진 리듬으로 흥얼거리는 진효원.

그녀가 만든 하모니가 절로 귀를 즐겁게 했다.

“그리고 여기서 화음. 아마 성훈과 건하, 내가 같이 들어갈 거 같아.”

진효원은 노래 중간중간 자기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작곡을 했는지, 어떻게 무대를 구성했는지 코멘트를 달았다.

“훅은 올리오스 멤버들과 내가 번갈아 가면서 들어갈 건데, 이건 분량을 나눌 필요가 있겠지? 그리고 이다음에 랩 벌스가 하나 필요해. 우주가 해줄 수 있지?”

“예! 가능해요!”

프로듀서의 세밀한 디렉팅을 받는 기분이었다.

‘역시 프로구나.’

능수능란한 진효원의 디렉팅에 감탄했다.

공동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진효원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었다.

그녀의 곡이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곡이 끝나고.

“이제 동업자들의 의견을 좀 듣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비트가 강한데, 이건 의도하신 건가요?”

먼저 입을 연 건 정민이었다.

“맞아. 아이돌 그룹과 같이하려고 생각한 곡이라서 일부러 조금 더 강하게 가져가 봤어.”

“주제넘은 의견일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도입부에서는 약하게 가져갔다가, 2절로 넘어가는 브릿지에서 비트를 키우면서 속도감을 가져가는 게 어떨까요?”

그 이후로 전문 용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민과 진효원을 중심으로 곡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의논을 나눴고, 그 사이에 성훈이 자신의 의견을 냈다.

정민의 피드백을 받은 진효원이 놀라며 곧장 곡에 반영시켰고, 실시간으로 노래가 바뀌기 시작했다.

“건하는 어때?”

“나쁘지 않은데?”

그리고 정민은 피드백을 건네는 중간중간 내게 의견을 물었다.

마치 내게 확인을 받지 않으면 통과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정민이 건하를 많이 의지하고 있구나?”

진효원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건하가 주는 아이디어가 엄청 좋아요. 그 순간 센스는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걸요?”

정민아, 그렇게 말해주는 건 좋은데.

오늘은 좀 피해줬으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진효원과의 만남은 원래 게임 스토리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현실과 게임의 간극이 가장 멀리 떨어진 상황.

내가 뭐라고 한마디를 얹기가 어려웠다.

음악에 대해서 뭐를 알고 조언을 준 게 아니라, 내가 원래 살던 세계에서 보았던 게임 속 지식을 활용했던 것이니까.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밑천이 드러날 게 뻔했다.

그래서 한마디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정민의 말로 인해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순간의 센스라…. 창작의 상황에서 그 센스가 모자란 2%를 완성하기도 하지.”

진효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러고 보니 우리 건하가 오늘 노래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해주고 있네. 혹시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와, 이거 곤란하네.

악의 없는 정민의 저 순수한 얼굴에 한마디 할 수도 없고.

결국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그러니 내가 해결해야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닙니다. 노래는 좋아요.”

“그래? 감이 좋은 건하가 그렇게 얘기해 주니 뭔가 힘이 나네.”

“그런데요.”

“뭐가 걸리는 게 있니?”

나는 노래를 들으며 느꼈던 감각을 생각했다.

좋다. 분명 좋은 노래였다.

그녀가 무대 위에서 느꼈다는 영감이 어떤 건지도 알 것만 같았다.

빠른 비트, 완성된 화음. 마치 사람들의 떼창을 연상시키게 하는 브릿지의 멜로디.

관객들과의 호흡.

무대 위를 즐기는 가수들.

이걸 전부 노래 안에 녹여내려고 하니, 막상 함께 노래를 즐겨야 할 관객들이 같이 즐길 타이밍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떼창은커녕, 단순히 듣기만 하는 노래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동안 진효원이 불렀던 곡보다 빠른 비트를 작업하는 게 처음이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 같았다.

이런 실수는 종종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화장품 사업에 열을 올리던 시절에 했던 실수였으니까.

자사 상품 중 가장 잘 나가는 제품 두 개의 장점을 섞어서 신제품을 출시했는데 도리어 장점을 섞다 보니 특색이 사라져 망한 적이 있었다.

장점이 사라지고 단점이 부각된 적도 있었지.

지금 진효원의 노래가 그런 느낌이었다.

생각해둔 여러 장점을 다 보여주느라 정작 핵심을 놓친 그런 느낌.

“이걸로는 관객들이 따라 부르기 어렵지 않을까요? 노래도 너무 높고, 그렇다고 따라 부를 정도로 멜로디가 단순하지도 않아서요.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할 거 같습니다.”

“지금 그 말이 이 곡에 부족했던 2%네.”

진효원이 손가락을 튕겼다.

“전 이 부분에 아마추어라 깊게 생각하시지는 마세요.”

“아니야. 정확한 핵심을 찔렀네. 호오…. 정민이가 왜 그렇게 건하를 좋아하는지 이제 알 거 같은데?”

“건하가 핵심을 진짜 잘 찔러줘요. 작곡할 때 생각 못 하는 부분을 정말 잘 봐준다니까요. 처음에는 프로듀서님인 줄 알았어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별거 아닌 말인데.

왜 이렇게 부담스럽게 바라봐주는 건지.

“크흠흠!”

굳이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진효원과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다 보면 끝내 해결할 일이었다.

그 과정을 조금 단축한 것일 뿐.

많은 실패를 통해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감각적인 말이네요. 그럼 역시 일단 벌스 부분의 리듬감을 수정하고 훅 부분은 템포를 유지한 채 가사를 조금 줄이는 게….”

진효원과 정민, 그리고 성훈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금 이어갔다.

열정적인 세 사람에 비해 호진과 우주는 다소 지루한 듯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

괜히 손톱을 매만지고, 입맛을 다셨다.

나름대로 이야기를 들으며 의견을 냈지만.

“우주의 발상이 좋기는 한데, 무대에서 꾸미기엔 현실성이 조금 부족해서.”

진효원에게 부드럽게 까였다.

이러니 재미가 없는 게 당연했다.

멤버마다 장기가 다른 거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호진이는 이미 저 세 명의 기세에 눌려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    *    *

그렇게 한 시간 하고도 반이 지났다.

-♩♪♩♬♪~.

“이거면 되겠다.”

완성된 프로토타입의 노래를 들은 진효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결과물에 만족한 눈치였다.

“그럼 잠깐 쉬고 녹음 간단하게 해볼래? 가사 없이 허밍으로만 해보려고. 너희 음역대도 확인할 겸.”

“네, 알겠습니다!”

뻐근하다.

앉아서 회의만 하니 엉덩이에 쥐가 날 것만 같았다.

연습생이 된 이후 이렇게 오래 앉아 있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서, 이젠 많이 움직이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춤추고 싶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

조금 피곤할지도 모르지만, 그게 더 즐거울 거 같았다.

‘이러고 보니, 나 아이돌 다 됐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다 적응하더라니까.

“그럼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아, 저도!”

우주가 나를 따라왔다.

“후우, 진짜 힘들다. 나는 작곡이랑 안 맞는 거 같아.”

사무실 밖으로 나온 우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벌써 진이 빠진 듯 혀를 내둘렀다.

“정민이 형이나 진효원 선배님은 어떻게 저런 게 머리에서 나오는지 모르겠어. 진짜 놀랍다니까.”

“공감한다.”

“그런데 블랑 뮤직 건물도 시설 되게 좋다.”

작업실에서 나온 우주는 화장실을 가는 내내 쉬지 않고 떠들었다. 마치 회의하는 동안 하지 못한 말을 대신 채우려는 듯했다.

심지어 누가 지나가면.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의 우주입니다! 여기 옆에 계신 형은 같은 그룹 윤건하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체 홍보까지 잊지 않았다.

“얼굴 좀 씻고 있을게.”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릴게.”

“너도 볼일 때문에 나온 거 아니었어?”

“그런 건 아니고, 약간 재미가 없어서….”

우주가 혀를 비죽 내밀며 웃었다.

왜 나온 지 알겠다.

재미가 없었구나.

그를 마주 보며 실없이 웃은 나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주가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과금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정민과 진효원의 사이에서 제대로 된 의견을 내보이지 못했다.

그들은 지금의 나도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리더인걸.’

본의 아니게 맡게 되었지만, 적어도 리더가 되었다면 멤버들 사이에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게 당연했다.

남들보다 모든 게 뛰어나진 않더라도,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야만 했다.

그런데 이게 다 뭐냐.

아무것도 못 했잖아.

이러면 나를 의지하는 정민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냐고.

‘이래선 안 돼.’

다른 사람은 다 괜찮다고 말해도 내가 용납할 수 없다.

‘역시, 과금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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