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우주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뭔데?”
“간단해. 심플한 개인기이긴 한데, 내가 옛날에 자주 썼어.”
“옛날이면, 중학생 때?”
“비슷하지.”
“그럼 약할 텐데.”
“반응 미쳤어. 이거 하면 다들 배꼽 잡고 굴렀다니까? 깔깔대서 배꼽 사라졌다고 난리 치고 그랬어.”
“중학생 때 한 거 맞아? 리액션이 너무 아재 리액션인데.”
아재 리액션이라.
좀 찔리네.
사실 맞다.
이거 내가 원래 세계의 윤건하의 몸으로 몇 번 한 개인기거든.
대단한 건 아니긴 한데.
회사에서 신입사원들 긴장 풀어주기 위해서 썼던 개인기였다.
‘아 대표님! 너무 웃깁니다!’
‘제 배꼽 어디 갔습니까? 이거 사라진 거 같은데요?’
‘하하하하! 방금 그거 엄청 재밌었어요!’
‘개그맨 하셔도 되겠어요.’
그래.
딱 이런 반응.
추억 보정이 아니라 진짜 리얼 반응이었다.
다들 얼마나 좋아했다고.
“한 번 봐. 내가 보여줄게.”
“오케이 알겠어.”
“크흠흠.”
내가 몇 번이고 보여줬기 때문에 자신 있는 개인기였다.
새로운 몸으로 하는 거지만 재미는 보장한다.
“나는 입을 닫고도 살려달라고 말할 수 있어. 어디 조난을 당하거나, 입을 벌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구조 요청을 보낼 수 있는 개인기지.”
가슴을 활짝 편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오므린 채로 크게 외쳤다.
“살. 려. 주. 세. 요.”
“…….”
잘 안 들렸나.
“살. 려. 주. 세. 요.”
나는 내 필살 개인기를 본 우주를 보며 물었다.
“어때?”
“어, 음….”
“재밌지? 이게 입술을 닫고 말할 수 있다는 부분이 포인트거든.”
“하. 하. 하. 하. 재밌네. 하. 하.”
“짜식, 너도 좋아하는구나?”
“하, 하하. 하하하하. 그러게. 하하하하.”
핵인싸 우주를 웃길 정도면 방송에서도 먹히겠다.
확신했다. 이건 통한다.
* * *
자신 있게 웃는 건하를 바라보던 우주는 심각한 내적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말해줄 걸 그랬나? 재미없다고.’
“하하하하!”
그런데 저렇게 해맑게 웃는데 어떻게 말해.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어.’
건하 형이 말했잖아.
솔직하게 피드백을 해줘야 발전할 수 있다고.
“건하 형.”
“응?”
“그게 말이야. 방금 그 개인기….”
“아, 결정적일 때 쓰라고? 나도 알아. 끝내주지? 이거 쓰면 무조건 빵 터진다. 내가 약속할게.”
“아니, 그게 아니라….”
“응? 뭐 있어?”
쉽게 보지 못한 건하의 들뜬 미소가 자꾸만 우주의 가슴을 찌른다.
아, 얘기해 줘야 하는데.
저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말해.
형 개인기 진짜 재미없다고.
우주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고민과 고민, 고민을 거듭한 그는 끝끝내.
“차, 차라리 미리 개인기를 자세하게 말해주는 게 어떨까? 보는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이야.”
“쉽게 이해한다라…. 하긴 개그는 바로 머리에 꽂혀야 하니까. 역시 예능캐 우주답네.”
“으, 응….”
솔직해지지 못했다.
‘이 정도면 조금은 나아질 거야.’
적어도 민망하진 않겠지?
잔뼈 굵은 이창모 선배님도 계시니까.
* * *
방송이 시작됐다.
대기실에서 점잖고 서글서글했던 이창모는 카메라가 돌자마자 반전됐다.
“오늘의 게스트는 얼마 전에 데뷔한 GH 엔터테인먼트의 기대주! 제2의 몬스터즈를 꿈꾸는 올리오스입니다!”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울렸다.
마이크가 없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화끈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 번에 주목됐다.
이게 프로 MC구나.
자신의 캐릭터에 걸맞게 변신한 그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일, 이, 삼, All we once!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입니다!”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의 막내, 귀염둥이 최우주라고 합니다!”
상큼한 우주의 인사.
“안녕하세요. 랩과 작곡, 서브 보컬을 담당하고 있는 정민입니다. 이름은 외자예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정민의 공손한 인사.
“안녕하세요오. 안호진입니다. 메인 댄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용기를 끌어낸 호진의 대견한 소개와.
“워우워어. 안녕하십니까. 메인보컬인 유성훈이라고 합니다!”
“오오~ 여기서 바이브레이션을 넣어?”
시작부터 애드리브를 부르며 자신을 주목시킨 성훈의 소개가 이어졌다.
“올리오스의 비주얼을 담당하는 윤건하입니다. 잘부탁드립니다!”
몇백 번이고 해온 자기소개를 마치기가 무섭게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리더라고 말하는 멤버가 없는데, 누가 리더에요?”
리더라.
딱히 정하고 활동하진 않았다.
가장 나이가 많은 성훈이 암묵적으로 리더 느낌으로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정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하나.’
속으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엥? 나?”
모두가 똑같이 나를 가리키는 손짓에 나도 모르게 바보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여기서 리더라고 할 사람은 건하 형밖에 없지.”
“건하가 진짜 대단한 게, 무대에서 절대 안 떨어요. 무슨 무대든 누구 앞이든 긴장하는 법이 없더라고요.”
“한 살 어린 동생인데, 배울 게 많은 친구입니다.”
“최고예요….”
어.
나를 꼽아준 건 고맙긴 한데, 미리 상의를 좀 해주는 게 어떠냐.
“건하 씨는 다른 생각인 거 같은데? 누가 리더 같아요?”
그 찰나의 표정 변화를 캐치한 이창모가 내게 들이댔다.
어떻게든 방송 거리를 만들려는 프로의 눈빛이었다.
“저도 저 같아요. 제가 리더감이긴 하죠. 원래 생각해 둔 멤버가 있었는데, 다들 절 뽑아주니까 저도 절 뽑을래요.”
“어? 그럼 건하 씨는 누굴 뽑으려고 했어요?”
“예? 아, 저는 성훈이 형이요.”
“호오, 왜죠?”
“엄청 철저하거든요. 우리 멤버 중에서 가장 규칙적이고 엄한 형이라 리더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크으, 역시 맏형이 맡아야 한다?”
“그렇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그거 이미 리더로 당선된 사람이 말하면 왠지 얄미운 거?”
“에이, 아니에요.”
이창모가 크하하 웃었다. 배를 잡고 과장되게 웃던 그는 곧 표정을 지우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반가워요. 난 공채 개그맨 22기 이창모. 데뷔 27년 차. 옆에 이 친구는 공동 MC 빌리지.”
“반갑습니다.”
일일이 악수를 마친 이창모가 시원하게 웃으며.
“자 이제 자기소개를 했으니 말 놔도 되지? 내가 한참 선배고 형이잖아.”
“아, 네! 물론이죠.”
특유의 껄렁껄렁한 말투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러면서도 뉘앙스나 단어의 사용 때문인지 불편하거나 강압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역시 프로다.
“자, 새로운 아이돌이 찾아오긴 했는데, 여기 생각보다 만만찮은 곳이거든? 그냥 맨몸으로 오면 조금 곤란한데, 각자 내세울 만한 개인기 정도는 가져왔지?”
“옙!”
우주가 눈을 빛내며 앞으로 나섰다.
“좋아. 다들 의욕적인 모습 좋은데? 그럼 리더부터 나서볼까? 원래 이런 건 리더가 먼저 솔선수범하는 거야.”
크흠.
벌써 내 차례인가.
사실 우주 다음에 클라이막스로 터트리려고 했던 건데.
차라리 처음에 위밍업으로 가는 것도 좋지.
“입을 닫고 발음을 똑바로 할 수 있습니다. 이거 하나면 괴한에게 납치당해서 갇혀있거나, 산에 조난을 당하거나, 물에 빠졌을 때 충분히 주위에 구조를 요청할 수 있어요.”
“오, 어떻게 하는 건데?”
“입을 이렇게 읍, 하고 닫고….”
입을 앙, 하고 오므렸다. 입술을 앙다문 채, 또박또박 큰소리로 머리에 생각했던 대사를 외쳤다.
“살. 려. 주. 세. 요!”
입을 다문 채로 아나운서만큼 똑바른 발음을 낼 수 있는 것.
내가 지닌 회사생활 필살 개인기!
“어…. 이거면 조난당해도 살 수 있다고.”
“물론입니다!”
“야, 차라리 으으으으읍!!!!!! 이게 더 효과 있겠다!”
이창모가 입을 닫은 채 발악하며 뱃심으로 소리쳤다.
쩌렁쩌렁.
필사적인 이창모의 외침이 다시 스튜디오에 울렸다.
“이, 이거 별론가요?”
“어어엄청! 별로였어. 이 개인기 많이 아쉬운데?”
어라?
사원들은 진짜 잘 웃어줬는데.
‘하.하.하. 정말 재밌어요. 사장님!’
‘대표님, 개그맨 하셔도 되겠어요!’
‘제 배꼽이 어디 갔죠? 아, 대표님 개인기 때문에 사라졌잖아요! 하.하.하.’
잠깐만.
너희 접대 웃음이었냐.
어쩐지 눈이 다 죽어 있더라.
‘우주 너도?’
아랫입술을 꾹 다문 우주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예능: 25 (E+)]
나는 뒤늦게 내 부족한 예능 스탯을 확인했다.
아.
이거 분위기 박살 낸 거 같은데.
* * *
망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 구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예전에 유명했던 성대모사 개인기 해보겠습니다!”
이 분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주가 나섰다.
“오? 진짜? 할 수 있어? 방금처럼 이상한 거 하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오케이, 만약 여기서도 실패하면 오늘 촬영 끝나는 거야.”
“넵! <막장도시>에서 감초 역할로 유명했던 정이수 씨의 성대모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진짜? 그거 어려울 텐데?”
호기롭게 나선 우주는 곧바로 유명 배우의 성대모사를 시작했다.
“같은 동포끼리 왜 이럼까. 합법된 지가 언젠데.”
“이야, 진짜 똑같네?”
“내 아임다! 진짜 아임다!”
“오오오.”
“내가 누군지 알아? 하얼빈의 양첸이야.”
이창모의 반응이 좋다.
“더 없어? 또?”
내 개인기로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우주 덕분에 다시 치솟아 올랐다.
한 번 삘을 받은 우주는 그대로 자기가 갖고 있는 성대모사 개인기 다섯 개를 우수수 쏟아냈고.
“저희 성훈이 형이 대기실에 있으면 하는 로봇 춤도 보여드릴게요.”
이제는 성훈이까지 따라 하기 시작했다.
“아, 이건 약한데?”
“아임다! 이거 강함다!”
성대모사 성공으로 긴장이 풀린 우주는 제대로 불이 붙어 녹화 분위기를 살렸다.
그야말로 환장의 똥꼬쇼였다.
고맙다 우주야.
네가 날 살렸다.
우주 아니었으면 진짜 민망할 뻔했다.
다음으로 이어진 개인기도 나름대로 반응이 좋았다.
정민은 유명한 래퍼를 따라 한다며 모창을 했는데, 이것도 생각보다 아쉬웠지만.
“니 지금 그걸 모창이라고 한 거니? 나랑 장난치니?”
우주가 틈새로 나와 친 성대모사 애드리브로 분위기를 살려줬다.
호진은 춤을, 성훈은 노래를 보여줬고 스태프들 반응이 괜찮았다. 특히 성훈의 노래를 들은 여성 작가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우주가 MC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며 이끌어갔다.
이번 노래의 컨셉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고, 멤버들의 특징들을 갖고 이야기하는 이미지 게임도 진행했다.
전체적으로 방송은 굉장히 편했다.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
이창모와 빌리지의 능숙한 진행과 까칠함 사이에서 돋보이는 부드러운 멘트들이 굉장히 스무스하게 대화를 이끌어냈다.
그 탓일까.
“건하 형이 재벌 2세예요. 혼자서 편의점 싹쓸이를 한다니까요? 저번에 대표님 몰래 저희끼리 과자를 먹었는데….”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우리끼리 비밀스럽게 먹었던 것까지 술술 털어내더라.
우주 너무 신났어.
그리고 재벌 2세가 아니라 재벌이‘었’어.
“이거 얘기하면 대표님한테 혼나는 거 아니에요?”
“아, 편집, 편집해 주세요. 저희 혼나요.”
우주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손가락 가위질을 했다.
PD와 카메라 감독의 표정을 보니, 편집은 글렀다.
노래 홍보를 걸고 진행한 게임도 어렵사리 성공했다.
몸으로 말해요 퀴즈였는데, 문제가 꽤 어려워서 1초 남기고 간신히 다 맞출 수 있었다.
진짜 하마터면 못 맞춰서 홍보도 못 하고 쫓겨날 뻔했다.
‘진짜 쫓아내진 않았겠지만.’
게임까지 성공한 우리는 자랑스럽게 스튜디오에서 우리 노래를 홍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네가 옆에 있다면.
지금 너를 보지 못해 느끼는 떨림이.
너를 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로 느껴지겠지.
노래가 끝나고 마지막 인사를 마치는 것으로.
“이상으로 주중~ 아이돌이었습니다!”
방송이 끝났다.
“오케이! 좋았어요!”
PD의 외침과 이창모의 후련한 표정이 진짜 끝을 알렸다.
“다들 고생했어. TV 예능 처음인 거 같은데, 다들 잘하더라.”
이창모가 씨익 웃으며 격려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건하도 되게 잘했어. 개인기는 끔찍하긴 했는데, 개그 실패하는 순간 보여준 리액션이 괜찮더라. 나중에 재미없는 컨셉으로 예능에 나와도 되겠어.”
“예?”
“반응 좋을 거야. 표정 진짜 기가 막혔거든.”
“어…?”
그게 재미가 있었다고.
“이거 봐. 이 표정. 크크크, 이거 일부러 하는 건 아니지?”
“아, 네.”
“센스가 좋네. 재미없는 캐릭터 살리기 쉽지 않은데 말이야. 우주 저 친구가 진짜 예능 쪽으로 물건이긴 한데, 받아주는 역할로 건하 씨가 적합하겠다. 나중에 또 예능 나갈 일 있으면 진지하게 생각해봐.”
재밌다는 이야기 때문에 다음 얘기를 듣지 못했다.
우주에 대해 칭찬을 해주고, 그에 우주가 되게 기뻐하는 건 봤는데….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 표정이 재미가 있다고.
거울 속 나를 바라봤다.
개인기를 실패했을 때 지었다는 표정을 따라 지어봤다.
당황해서 풀린 동공, 살짝 벌어진 입 당황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콧구멍.
평소보다 얼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바짝 당긴 고무가 놓았을 때 팽 돌아가는 것처럼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처럼 보일 뿐이지, 전혀 웃기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실눈을 가늘게 뜨고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면 동네 바보처럼 보이긴 했다.
많이도 아니고 진짜 조금. 진짜진짜 쪼끔.
‘이게 재밌는 건가?’
나는 모르겠는데.
아, 어렵다. 예능의 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