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32화 (32/236)

<제32화>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 모든 사람한테 꼬박꼬박 인사해야 한다. 차에서 내리면 거기서부터 시작이야. 고개 푹 숙인다는 생각으로 인사하고 다녀. 이 바닥에서 잘못 걸리면 그 이미지 개선하는 데 시간 한참 걸린다.”

황이서가 백미러로 메이크업을 마친 우리를 보며 몇 번이고 강조했다.

준비하는 것만 무려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방송국 들어가는 것부터 데뷔 무대라고 생각해. 너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PR 무대. 무대 위에서만 잘 보이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자기 PR이 중요한 시대야. 감독한테, 작가한테, 최소한 FD한테도 잘 보여서 아주 작은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어야 해. 지금의 너희에겐 그런 작은 것도 중요한 시기야.”

그 말이 맞았다.

자기 PR.

첫인상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건 몇 번이고 말해도 입이 아프지 않다.

그래 백스테이지 역시 본 무대만큼 중요한 자리지.

“알겠습니다.”

“네!”

바짝 군기가 든 우리는 황이서의 말에 우렁차게 외쳤다.

데뷔 무대를 갖는 우리가 걱정돼서일까?

황이서는 가는 내내 이런저런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스태프라고 무시하지 말고. 지금 방송국에서 너희보다 경력 짧은 사람 없어.”

“괜히 여기저기 둘러본다고 단독 행동하지 말고.”

“여자 아이돌 보인다고 추근거리지 말고. 이건 진짜 중요하니까 명심해라.”

황이서의 잔소리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나니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잘 전해졌다고 생각했는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말하지는 않았다.

“후우, 내부 평가 때보다 훨씬 긴장된다.”

“나도 그래. 건하 형은 어때?”

“괜찮아.”

이보다 더 긴장될 일도 많이 겪어봤으니까.

“저번에도 그랬지만, 건하 형은 진짜 긴장 안 하는구나.”

이런 일 정도야 우습지.

주주총회에서 돈 잃고 악귀처럼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 앞에 몇 번 서 보면 몰라도 알게 된다.

그런 인간들 앞에서 서면 인간이 얼마나 담대해질 수 있는지.

그럼 이런 건 눈 감고도 헤쳐나갈 수 있다.

그렇다고 원래 세계에서 겪은 일을 말해줄 수는 없으니.

“청심환이라도 먹을래?”

대답 대신 금박지에 돌돌 말려진 청심환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진짜 효과 있는 거야?”

“먹는 사람은 효과 있다던데?”

“난 안 먹을래. 아재들이 먹는 약처럼 생겼다.”

정민과 우주는 청심환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 괜찮아. 너무 떨리면 하나 먹어둬.”

“나.”

가만히 보고 있던 호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무대 메이크업 때문에 그런가 싶었는데, 긴장해서 얼굴에 피가 돌지 않는 거였다.

센터가 저렇게 죽을상이 돼서야.

“호진이 너는 진짜 하나 먹어야겠다.”

“…고마워.”

청심환을 받아 든 호진이 입에 꿀꺽 삼켰다.

“안 써? 맛이 어때? 효과가 확실히 느껴져?”

우주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호진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

“좀, 쓰네. 효과는 잘 모르겠어.”

“당장은 효과가 안 날 거고, 한 시간 뒤에 나타날 거야. 우리 공연은 한참 뒤니까 무조건 효과 볼 수 있어.”

호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감에 창백해졌던 얼굴색이 조금 돌아온 느낌이었다.

“나도 하나 먹을까…?”

호진의 얼굴색이 펴지는 걸 보던 우주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도착하려면 삼십 분 정도 더 걸린다고 하니까, 졸린 사람은 잠깐 눈 좀 붙여. 방송국에 도착하면 정신 없을 거다.”

“대기실에서도 너희 바짝 깨어 있어야 하니까. 아마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선배님들이랑 같은 대기실 쓸 거다. 이따가 선배들한테 인사 돌려면 지금 조금이라도 쉬어.”

지금 아니면 못 잔다는 성훈과 황이서의 말에 다들 억지로 눈을 감았다.

“앗, 그럼 잠깐만 잘게요. 머리 망가지니까 자세는 조금 틀어서….”

잠시 자세를 고쳐 잡은 우주가 이마를 창문에 기대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눈을 감았다.

저 자세로 정말 잠을 잘 수 있는 건가.

*    *    *

올리오스가 처음으로 데뷔 무대를 가질, YBC 방송국.

음악 방송 뮤직에어(Music-Air)에 출연하는 가수들을 기다리는 팬들로 건물 앞이 복작거렸다.

대포 카메라부터 가벼운 핸드폰 카메라까지.

이곳까지 와서 가수들의 얼굴을 보려고 기다리는 팬들은 대부분 열성적인 응원 팬.

내 가수가 사복을 입은 채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찍고 싶은 팬들은 목을 빼며 새로 들어오는 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저거 주환 오빠 차 아니야?”

혹여나 눈에 익은 차가 오면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바라보았다가.

“안녕하세요! 블루카펫입니다!”

“아니네….”

“언니! 사랑해요!”

누군가는 실망을, 누군가는 기쁨에 가득 찬 외침을 뱉어냈다.

눈에 익은 아이돌이 내릴 때마다 수많은 카메라에서 셔터 소리가 들렸다.

기자들보다 몇 배는 열성적인 팬들이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하나, 둘, 셋. Step Up! 안녕하세요, 에잇보이즈입니다!”

“안녕하세요”

“Get your heart! 안녕하세요. 서밋하트입니다!”

포토존에 선 가수들이 팬들과 기자들을 향해 인사했다.

가수 한 팀이, 한 명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는 더욱 커졌다.

특히 자신의 아이돌이 나올 때 외치는 팬들의 함성은 누구보다도 더 컸다.

“오늘은 평소보다 화력이 약하네요.”

“아무래도 대형 아이돌이 없는 무대라서 그런지, 팬들도 적고 직찍러들도 그리 많지는 않네요.”

“그래도 방금 지나간 에잇보이즈나 블루카펫도 나름 인지도 높지 않나요?”

“그렇긴 한데, 솔직히 라이언이 이번 주에 컴백했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죠.”

“아, 그렇네요.”

“그래서 지금 신인들 엄청 많잖아.”

“그래도 다음 주엔 라이언이 컴백 무대 가지니까 사람들이 더 몰리지 않을까요? 그때는 더 일찍 와야겠는데.”

“소문으로는 무대 안 선다는 얘기가 있던데요?”

“예? 그럼 음방 없이 활동하려는 건가?”

“글쎄요. 사실 라이언 정도면 음방에 얽매일 수준은 아니긴 하죠.”

“그렇긴 한데….”

미디어Y에서 유일하게 YBC에 찾아온, 연예부 막내 홍찬식 기자는 직찍러들의 이야기를 귀담았다.

막내는 현장에 가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며, 지원도 없이 혼자 강제로 불려온 홍 기자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기삿거리 없다고 짬처리하는 거지.’

옆에서 중얼거리는 직찍러들의 말처럼, 기사가 될법한 아이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팬이 아닌 사람들도 알법한 아이돌들은 활동을 잠시 쉬거나 복귀를 준비하고 있어서 사실상 기사로 쓸법한 애들은 거의 없었다.

“하아, 퇴근하고 싶다.”

오늘따라 퇴근 욕구가 너무 넘쳐 흘렀다.

평소에도 퇴근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더 그랬다.

그렇다고 할 일을 소홀히 하면 돌아가서 분명 깨지겠지.

그것만큼은 사양하고 싶다.

오늘은 아무런 잔소리 없이 퇴근하고 싶단 말이다.

“또 들어오네.”

커다란 밴이었다.

저게 어디 소속사 밴이었지?

아, 분명 얘기를 들었는데.

선배가 하도 닦달해서 몇 번이고 외웠는데도 막상 들어오는 밴을 보면 이게 저거 같고 저게 이거 같아서 구분이 어려웠다.

‘번호판이 2080….’

“아.”

GH 엔터의 차량이었다.

몬스터즈는 아닐 테고.

‘이번에 데뷔한다는….’

홍찬식 기자는 카메라를 들었다.

혹여나 괜찮은 기삿거리가 쓰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밴에서 남자 다섯이 내렸다.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데뷔하는 애들인데 알 리 없지.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얼굴이 장난기가 많은 소년 같은 푸른 머리의 남자가 가장 먼저 내렸다.

180은 훌쩍 넘길 정도로 큰 키와 서글서글한 눈매와 복슬복슬한 곱슬머리 때문에 한 마리 커다란 강아지처럼 보이는 남자가 뒤를 따랐고.

몽환적이라고 해야 할까? 절로 시선을 끌어당기는 특출 난 외모를 가진 남자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쭈뼛쭈뼛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가 내렸다.

‘전부 비주얼이 괜찮네.’

전체적으로 비주얼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연예부 신인 기자라지만 여기저기 촬영장과 세트장, 음악 방송을 돌아다니며 아이돌을 지겹도록 봐왔던 자신이다.

잘생긴 것에는 이골이 난 그의 눈에도 전부 나쁘지 않았다.

각자 개성이 돋보이는 외모를 가진 멤버들이 조화롭게 모여, 시선을 잡고 있었다.

색색으로 예쁜 머리도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홍 기자는 마지막에 내리는 멤버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쟤는 물건인데?”

눈부신 금발로 염색한 마지막 멤버.

작은 얼굴과 또렷한 이목구비.

잘생긴 건 둘째 치고, 신인답지 않은 당찬 모습과 살며시 짓는 미소가 자꾸만 눈이 가게 했다.

분명 옆에 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검은 머리 멤버가 더 잘생긴 거 같은데.

‘자꾸 왜 쟤한테 눈이 가지?’

이름이 궁금했다.

왠지, 저 친구로 기사를 쓰면 조회 수가 잘 나올 거 같은 그런 기자의 감이 자극했다.

“일, 이, 삼, All we once!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입니다!”

올리오스.

‘기억해 둬야겠어.’

홍 기자는 빠르게 그 이름을 메모했다.

*    *    *

“후우.”

숨 딸려 죽는 줄 알았다.

‘여기 봐주세요!’

‘이쪽도요!’

‘활짝 웃어주세요!’

포토존에 대한 감상은.

수많은 사진 작가 앞에 선 모델 느낌이었다.

커다란 대포알 카메라를 든 직찍러들의 요구에 따라 미소도 지어보고 손도 흔들어보고, 카메라를 바라보기도 하고.

특정 아이돌을 보기 위해 온 팬들은 그저 신기한 얼굴로 잠깐 바라보다 말뿐, 우리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 중에 대부분은 직찍러들이었다.

‘고생하셨어요.’

업무를 마친 그들은 미련 없이 우리에게 관심을 끊었다.

진정한 프로였다.

‘기자들보단 낫네.’

첫 회사 소유권 관련 재판으로 법정을 찾았을 때 나를 물고 늘어지던 기자들은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무리 같았다.

저 정도면 양반이지.

쿨하게 떠나는 직찍러들을 향해 고개를 푹 숙인 기억이 났다.

감사합니다!

쿨하게 보내줘서 고맙다는 의미로다가.

물론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애들은 어리바리했지만 말이다.

“어떻게 찍었는지 기억도 안 나.”

정민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느낌이다.”

“아까 사람들 봤어? 100명은 넘게 있던 거 같은데.”

“100명이 뭐야. 200명은 되는 거 같았는데?”

“다들 집중해. 이제 허리 계속 접어야 하니까.”

황이서가 우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우리를 보는 그의 미소에는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조뺑이 칠 거다. 크크크.”

[업적 – 100대1]

[대중 앞에서 성공적으로 어필했습니다.]

[보상: 1 오픈 마일리지]

핸드폰에 뜬 간단한 업적이 깨졌다는 메시지를 훑다시피 읽었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우리가 인사해야 할 곳은 너무 많았으니까.

“일, 이, 삼, All we once!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입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스태프, 선배 가수, 아이돌, 구분이 없었다.

이러다가 공연 올라가기도 전에 목이 나가고 허리디스크 오겠다.

*    *    *

황이서를 필두로 대기실을 다니며 선배들에게 우리의 얼굴을 인식시켰다.

일부러 얼굴을 비쳐야 사람들이 알 거라는 황이서의 말이었다.

‘혹시 아냐? 너희가 마음에 든 선배가 좋은 제안이라도 할지.’

일부러 과장되게 웃으며 우리를 질질 끌고 갔다.

대기실을 전부 다 돌고 나니, 벌써 허리가 뻐근했다.

덕분에 긴장할 새도 없었다.

일부러 그런 걸 거다.

어떻게든 애들의 긴장감을 덜어주기 위해서.

리허설까지 끝이 나고 나서야 우리에게 배정된 손바닥만큼 작은 대기실로 올 수 있었다.

아주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그마저도.

“일, 이, 삼, All we once! 안녕하세요. 올리오스입니다!”

우리와 같은 대기실을 쓰는 선배 아이돌을 만나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프로듀서님, 저희 앨범 언제 발표되나요?”

“지금쯤 나왔을 거다.”

시계를 확인한 황이서 역시 얼굴에 초조한 빛이 감돌았다.

아무래도 이번 앨범의 성적 때문일 거다.

“흐으, 오늘 무대만 아니었어도 시간마다 새로고침 눌러서 몇 명이 좋아요를 눌렀는지 확인할 텐데.”

“우주야, 오늘 봐봤자 그다지 효과 없을 거다. 누구 후광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온전히 우리 힘으로 쏟아내야 돼.”

“흐으윽….”

우주가 짐짓 우는 척을 하며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 그런 건 걱정 마라. 우리 홍보팀이 알아서 잘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겠…죠?”

“당연하지. 이제 무대에도 올라갔으니, 어그로를 계속 끌어야지.”

황이서가 호탕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다.

어그로.

어떻게든 우리가 있음을 알려야만 했다.

“이번 무대 잘해야 한다. 저기 무대 아래에서 기다리는 사람들한테 알려줘.”

우리를 마주 보는 황이서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너희가 지금 여기에 있다고.”

“올리오스! 무대 준비해 주세요! 사전 녹화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    *    *

[메인 퀘스트: 첫 무대를 완벽하게 소화하세요!]

[감독과 관객들에게 자신의 스타성을 증명하세요.]

[성공 시: 5 오픈 마일리지]

[실패 시: 인지도 하락]

다시 나타난 새로운 퀘스트.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크업과 Angel 앨범에 맞는 스타일링을 마무리한 뒤 무대에 올랐다.

다수의 카메라가 우리를 동시에 찍고 있다.

아직 관객들은 들어오기 전.

모든 사람이 우리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 스탠바이 들어가겠습니다. 각자 위치에 서주세요. 올리오스! 긴장하지 말고, 하던 대로 갑시다. 한 번에 갑니다. 괜히 NG 내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하얀 정장의 옷매무새를 마지막으로 정리하며 숨을 삼켰다.

준비하시고.

“3, 2, 1. 액션!”

Angel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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