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억 들고 데뷔합니다-29화 (29/236)

<제29화>

“안녕하세요!”

우리는 황이서 프로듀서와 스타일리스트 김예리와 함께 샵에 도착했다.

화려한 조명과 반짝이는 시설들 그리고 미용실 특유의 염색약 냄새가 우리를 맞이했다.

알기로는 이 샵이 GH 엔터의 아이돌, 배우들을 전담으로 스타일링 해주는 곳이라고 했다.

“어머, 어서 와요. 황 프로, 이 친구들이에요? 진짜 잘생겼다.”

원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황이서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저희가 보낸 스타일링 리스트는 다 받아보셨죠?”

“물론이죠. 첫 데뷔작부터 굉장히 과감하게 가는 거 같은데요?”

“확실한 캐릭터가 필요하니까요.”

“이렇게 꾸미면 눈길은 확 가겠네요.”

“그럼, 내일 바로 MV 촬영이 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요. 우리가 잘 만들어 줄게요. 늘 그랬던 것처럼.”

황이서가 디자이너 원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데뷔곡 컨셉이 정해짐과 동시에 받았던 여러 스타일링 후보를 살폈다.

‘머리카락이 진짜 화려하네.’

화사한 노란색, 눈부실 정도로 하얀색, 사파이어와 닮은 푸른색, 부드러운 느낌이 드는 분홍색 등.

대부분 채도가 높은 색상이었다.

천사라는 컨셉 때문이겠지.

같은 색상이어도 반대로 호진은 조금 어두운 느낌이 나는 색상들이 많았다.

황 프로듀서는 그런 어두운 색상들과 밝은 색상이 조화롭게 이어지기를 원하는 거 같았다.

사실 샵에 오기 전부터 우리는 각자 어울릴 것 같은 색상을 생각해뒀다.

호진은 지금 머리보다 더 검은색으로 염색하기를 원했고, 성훈은 밝은 브라운으로, 나와 함께 천사역을 맡을 우주는 밝은 푸른색, 정민은 어두운 톤의 붉은 색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

염색 샘플을 한참 쳐다보던 나는 마음을 정했다.

“이 색으로 하고 싶습니다.”

나는 화사한 레몬색 머리카락 샘플을 가리켰다.

역시 천사라면 금발이지.

“이 색이면 시간 오래 걸릴 각오 좀 해야겠는걸?”

“그렇게 오래 걸리나요?”

“그럼요. 엄청 지루할 거예요.”

기다리는 건 자신 있다.

염색이 길어봤자 얼마나 길다고.

*    *    *

장장 열 시간에 걸쳐 탈색과 염색을 이어갔다.

“후우, 지친다.”

머리에 약품을 바른지 장장 열 시간.

탈색 한 번으로 다 될 줄 알았던 내 안일한 생각은 세 시간 만에 사라졌다.

두 번째 탈색 약을 바르기 위해 다시 머리를 감는 순간, 지루할 거라는 디자이너의 말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지.

네 번에 걸친 탈색을 마치고, 더 예쁜 색을 내기 위한 보정 염색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염색한 내 머리를 확인하는 순간.

“오….”

이거 진짜 예쁜데?

나는 거울 속에 비친 화사하게 빛나는 내 머리카락을 보며 탄성을 뱉었다.

거의 하얀색이나 다름없는 금발이었다.

조명을 받은 머리카락에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순간 거울에 비친 사람이 내가 맞나 의심할 정도였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니 인상도 달라지네.’

뭔가 평소보다 더 발랄해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랬다.

평생 염색이라고는 가끔 나는 새치 염색이 전부였던 윤건하에게 이런 과감한 염색은 신세계로의 도약이나 다름없었다.

“어색하네.”

나는 탈색으로 노랗게 변한 머리를 보며 말했다.

나와 함께 내 염색한 머리를 확인한 디자이너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 잘 나왔다….”

넋을 놓고 머리카락을 감상하던 그녀가 반사적으로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만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도 우리 건하 분위기에 딱 맞는데? 아니, 어쩜 이렇게 잘 어울려? 마스크가 좀 돼서 그런가?”

염색하는 동안 친해진 디자이너 선생님이 내 머리카락을 보며 만족하는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만의 완벽한 도자기를 만든 도공의 얼굴이랄까.

눈을 빛내며 의욕을 불태우는 그녀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런 머리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우리 샵의 샘플로 만들고 싶어서.”

“괜찮습니다.”

안될 게 뭐가 있어.

어차피 이제 곧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서야 하는데, 사진 정도야.

완성된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다양한 각도로 찍는 디자이너였다.

“2주 뒤에 데뷔라고 했죠?”

사진을 전부 다 찍은 디자이너가 내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데뷔 전에 뿌리 염색 한 번 더 해야겠네.”

“한 번 더요?”

이 과정을 한 번 더 해야 한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뿌리 염색은 지금보다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래도 같은 색을 내려면 다섯 시간?”

많지 않음의 기준이 나랑은 확실히 다른 건 분명했다.

“건하 형도 다 끝났….”

나와 마찬가지로 여러 번의 탈색을 마친 우주가 오다가 말았다.

우주는 내 머리를 끔뻑거리며 바라보다가 몇 번이고 감탄했다.

“왜? 말이 없어?”

“형, 머리 진짜 잘 나왔는데? 색 진짜 예쁘게 나왔다. 앨범 분위기랑 너무 잘 어울려.”

“너도 잘 나왔는데?”

마치 외딴 동남아의 바다처럼 푸른 색상으로 염색한 우주는 그간 보여줬던 그의 밝은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렸다.

염색하기 전에는 그냥 친근한 동생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보니 이제야 아이돌 같았다.

확실히 남자는 머리빨이야.

“형이랑 비교하면 너무 부족한데. 선생님, 어떻게 한 거예요? 저랑 같은 약으로 탈색한 거 아니에요? 머리카락에 윤기가 미쳤는데요? 나도 디자이너 쌤한테 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우주가 눈을 빛내며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면서도 나를 담당했던 디자이너의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사회생활이라니.

이게 슈퍼 인싸인가.

“야, 그렇게 뚫어지게 보면 머리카락 닳겠다.”

“와, 진짜 부럽다. 나도 금발로 해달라고 할걸 그랬나? 아, 너무 부러워. 으으, 지금이라도….”

투닥거리던 우리의 모습을 보던 디자이너가 웃으며 말했다.

“건하 씨가 모발이랑 모근이 튼튼해서 색이 더 잘 나온 거예요. 이런 색 내기 쉽지 않거든요. 물론 우주 씨 머리도 되게 잘 나온 편이고요.”

“뒤늦게 위로해 주셔도 제 울적한 마음은 치유되지 않는다고요.”

나는 비죽 내민 우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꼬집었다.

“으으읍!”

“입 집어넣어, 그러다가 튀어 나오겠다.”

“하지만 부러운걸! 얼굴도 잘생기고 머리카락 색도 예쁘면 나는 뭐 먹고 살라고!”

동생의 귀여운 투정에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가 나왔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다들 우리처럼 탈색을 많이 할 필요 없어서 아까 먼저 돌아갔어. 한두 시간이면 기다렸을 텐데, 여섯 시간은 더 걸리니까.”

그만큼 오래 걸리긴 했다.

한나절을 보냈으니.

우주와 대화를 마친 나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에 비친 금발 머리 윤건하.

‘이제 아이돌답다고 해야 할까?’

멀게만 느껴졌던 데뷔가 코앞으로 다가온 게 느껴졌다.

“잘 나왔네.”

이 말은 진심이었다.

*    *    *

숙소로 돌아가자, 먼저 돌아간 멤버들이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채로 우리를 맞이했다.

“어라? 건하랑 우주는 어디 가고 이런 천사님이.”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눈을 마주친 정민이 화들짝 놀라며 어설픈 연기를 했다.

일부러 놀리려는 듯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의 말에 우주가 두 손을 모으며 되뇌었다.

“두 사람은 천사가 돼서 하늘 위로 올라갔어요.”

“아아, 천사님.”

“야, 천사 다 죽었냐? 천사는 무슨.”

나는 코믹 활극을 보이는 정민과 우주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얏! 잘 어울려서 장난 좀 쳤는데, 너무 세게 친 거 아니야?”

“맞아!”

“살살 친 거야. 아프지 말라고.”

“우우! 폭력 센터 물러가라!”

“물러가라!”

당장이라도 머리에 빨간 띠를 두를 거 같은 두 사람을 뒤로하고 호진을 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검게 염색한 그의 머리카락 탓일까?

입을 다문 채로 표정으로 놀라는 호진의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더 몽환적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건하도 우주도 고생한 보람이 있네.”

“형도 어울리네.”

성훈의 차가운 이미지 때문에 밝은색은 잘 안 어울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나는 멤버들을 보았다.

이전 연습생 시절과 달리 다양한 색으로 염색한 모습이, 본격적인 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런데 다들 거실에서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서로 이미지가 확 달라진 게 신기해서 사진 좀 찍고 있었지.”

정민이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번 봐 봐.”

정민이 지금까지 거실에서 찍은 사진들을 가리켰다.

셀카봉으로 찍은 셀카들, 정민과 호진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찍은 사진들, 연극이라도 하듯 컨셉을 맞춰 찍은 사진까지.

“우리 없는 동안 재밌게 놀았네.”

“이런 날도 있어야지.”

웃으며 사진을 보여주던 정민이 다음 장을 넘겼다.

“이거 봐. 성훈이 형은 이 와중에도 무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니까?”

“크크크, 저거 분명히 웃음 참고 있는 거야.”

“성훈이 형, 엄청 안 웃더라….”

멤버들이 가리킨 사진에는 어떻게든 웃겨보려고 애를 쓰는 정민과 호진, 그리고 그 와중에도 무표정을 유지하는 성훈이 보였다.

“알고 보면 가장 캐릭터 확실하다니까.”

우주가 사진의 감상을 말하듯 내뱉었다.

“캐릭터가 확실한 게 아니라, 재미가 없어서 안 웃었던 거다.”

우주의 말에 성훈이 끼어들었다.

“재밌었으면 웃었겠지. 나도 사람인데.”

“성훈이 형 로봇 아니었어?”

“위잉, 치킨, 위잉, 치킨. 나는 유성훈. 웃음이라는 걸. 모르지.”

우주가 우스꽝스럽게 로봇을 흉내 내며 로봇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호진이 말없이 따라 하는 게 웃겼다.

심지어 더 잘 췄다.

“풉!”

그 수줍은 호진이 우주를 따라 하는 모습이 웃겨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틀었다.

“봐, 건하 형도 재밌다잖아!”

“나는 재미없다.”

“와, 진짜 로봇인가. 이걸 보고 안 웃다니….”

그러나 나는 보았다.

어떻게든 웃겨 보겠다고 코믹 활극을 벌이던 우주의 춤사위에 성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는 걸.

“우리 단체 셀카 찍자. 이런 사진이 나중에 추억이 된다니까?”

이제는 성훈을 웃기는 걸 포기한 듯 정민이 셀카봉을 들고 V를 그렸다.

이게 스무 살의 풋풋한 모습이지.

정민의 말처럼 결국 남는 건 사진이다.

언젠가 다시 돌아봤을 때, 이런 사진도 찍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이전 세계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네.’

돈을 번다고 추억을 만들 시간을 전부 포기했으니까.

그랬기에 사진이 추억이 된다는 정민의 말을 뼈저리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추억할만한 사진이 없었으니까.

나는 렌즈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양손으로 V를 만들었다.

*    *    *

사진을 얼마나 찍었을까.

“와, 호진이 형이랑 건하 형은 얼굴 몰아주기 안 해도 카메라에서 빛난다.”

“그런 말 마, 우주야. 우리 같이 소외된 사람들은 정말 슬프잖아.”

다들 들뜬 얼굴로 화면에 찍힌 우리들의 사진을 보았다.

“하아, 진짜 재밌게 즐겼다.”

우리는 서로의 웃긴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며 한참 동안 낄낄 웃었다.

재밌었다.

진심으로.

*    *    *

바로 다음 날.

우리는 MV를 찍기 위해 황이서와 함께 스튜디오를 찾았다.

“방향성은 조금 바뀌긴 했지만, 기본 틀은 같으니 그 부분을 핵심으로….”

뮤비 감독이 황이서의 건너편에서 MV의 전체적인 그림을 잡는 동안.

“진짜 우리 올리오스 멤버들 꾸미는 맛이 확실히 있네!”

우리는 스타일리스트 김예리의 주도하에 메이크업을 받는 중이었다.

촬영 현장에 스타일리스트 분들이 계셔서 한 번에 두 명씩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예리 누나, 오늘 촬영은 얼마나 걸린대요?”

“글세, 대부분 실내 촬영이라고 듣긴 했는데, 여기저기서 찍는 거 생각하면 꼬박 하루는 걸릴 거야. 그러니까 메이크업 확실히 받아야지.”

“으으, 진짜 피곤하겠다.”

만 하루 만에 김예리와 친해진 우주 덕분에 분장실에서 심심할 겨를은 없었다.

“성훈이 형, 아까 뮤직 비디오 감독님 봤어? 덩치가 엄청 크시던데? 인사하면서 엄청 무서워서 속으로 덜덜 떨었다니까.”

나보다 먼저 메이크업을 마친 성훈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화장에 눈 밑에 그린 아이라인 덕에 조금 더 날카로운 미남처럼 보이던 성훈은 메이크업을 하는 내내 입을 쉬지 않는 우주에게 말했다.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힘들어하니까 잠시만 조용히 하고 있어.”

“넵.”

한 방에 제압당했다.

성훈이 간과한 게 있는데, 김예리가 그야말로 여자 최우주였다는 거다.

“위잉, 치킨. 위잉, 치킨. 나는 유성훈, 로봇이지. 내가 좋아하는 건. 침묵. 조용한 게. 좋다.”

그녀가 어제 우주가 췄던 로봇 춤을 어설프게 따라 췄다.

“크크큭, 누나도 재밌었죠?”

“완전 똑같지 않았어? 호호호.”

성훈은 짜증이 난 듯 미간을 구기면서도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내리느라 애쓰는 중이었다.

‘저건 제대로 통했다.’

하지 않을 거 같은 사람이 내보이는 기습 공격은 참기 힘들지.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의 수다에 성훈도 포기하고 입을 닫았다.

메이크업을 하는 내내 귀가 아팠다.

귓가가 왠지 촉촉한 거 같은데, 피가 흐르는 게 아닐까.

*    *    *

메이크업을 마친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본판이 잘생겨서일까?

오뚝한 코는 조금 더 또렷해졌고, 짙은 아이라인 덕에 눈이 기존보다 훨씬 더 커진 느낌까지 들었다. 화사하고 뽀얀 피부와 그에 대조되는 붉은 기가 가득한 입술.

보면 볼수록 묘하게 계속 빨려 들어가는 매력이 있었다.

“진짜 잘생겼네.”

나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성훈이 형, 방금 건하 형이 한 말 들었어?”

“확실히 건하가 왕자병 기질이 좀 있네.”

“그래도 건하보단 호진이가 더 잘생긴 거 같은데….”

아.

이건 좀 부끄럽네.

많이.

얼굴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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