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하아….”
안호진은 사무실 밖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멤버들의 위로에도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센터를 양보하겠다는 건하의 말이 그의 자존심을 완전히 일그러트렸기 때문이었다.
“존나 짜증 나.”
그간 입에 담지 않던 욕이 튀어나왔다.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그를 좀먹었다.
분명 건하도 그를 위해 한 말이었을 거라 생각은 들었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래도 다른 사람 앞이었으면 절대 못 할 말이었겠지만.
“그런 식으로 센터를 받고 싶지 않았다고.”
더블 센터니, 실패하면 센터를 양보하겠다니.
그런 식 말이다.
자신의 실력으로 따내고 싶었고, 실력을 인정받아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미리 얘기라도 해주지. 아니, 그 리스크를 왜 자기만 받으려고 하냐고. 그럼 우린 뭐가 되냔 말이야.”
멋대로 결정하는 건하.
조금이라도 미리 의논했다면, 같이 부담하면 되는 일이었는데.
“모르겠다. 이젠 뭐가 뭔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건하가 황 프로의 테스트에 통과하길 바랄 뿐이었다.
“맞다. 나도 도와줘야 하는데.”
동료들의 위로를 받고 혼자 분을 삭이고 있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 가깝게 시간이 흘렀다.
이제 들어갈 시간이다.
지금쯤 건하와 채남영 쌤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도와줘야지.
함께 하겠다고 했으면서 빠지는 건 도의가 아니었다.
아무리 건하가 멋대로 행동했다고 해도, 결국 팀이었다.
계속 함께해야 하는 멤버였다.
그가 싫어서 화를 냈던 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이 하필이면 센터를 노리는 호진의 자긍심을 건드렸을 뿐.
만약 건하가 앞서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해줬다면, 이렇게까지 화를 내지도 않았을 거다.
‘하긴,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었지.’
모든 게 급작스럽게 이뤄졌으니까.
황이서가 누굴 센터로 올리겠다는 말도.
어떻게 뽑겠느냐는 이야기도.
건하가 황이서 프로듀서에게 덤벼든 것도.
모두 한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무언가 미리 짜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건하가 아니었다면, 우리끼리 누굴 센터로 올려야 하는지 싸웠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건하의 선택이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말이 심했다고 하면 될 거야. 응, 그럴 거야.”
계속 이렇게 절망감에 사로잡힐 수는 없다.
시간이 없었다.
무대 구성과 안무도 짜야 하고, 그걸 다 짜면 녹음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터덜터덜 댄스 연습실로 돌아가는 호진의 귀에 연습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삐빅! 삑!
미끄러운 바닥과 신발의 마찰음.
벌써 춤을 다 짰다고?
건하와 채남영이 있을 연습실에서 데뷔곡 ‘Angel’의 가이드 버전과 바닥의 마찰음 소리가 들렸다.
“흠, 여기는 조금 별로네요. 브릿지로 넘어가기 전에 댄스가 확 돋보였으면 하는데.”
“일단 건하 네가 이쪽으로 움직이면서….”
건하와 채남영 쌤이 곡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하며 안무를 짜 맞추고 있었다.
호진은 보았다.
춤을 구성하는 건하의 눈이 불처럼 타오르고 있는걸.
그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번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쌤, 여기서 턴을 조금 넣는 건 어떤가요?”
건하의 모습을 본 호진은 부끄러워졌다.
그도 마음이 가볍지 않을 텐데, 쉬지 않고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 * *
채남영과 함께 디테일을 정하기 시작한 지 한 시간.
호진이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왔어?”
“…….”
연습실 안으로 들어온 호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고는 싶은데,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미안.”
“왜 네가 미안해해?”
“내가 말이 심했던 거 같아서. 조금 전에 그, 녹음실에서 말이야.”
“아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건가.
한 시간 동안 밖에서 많은 생각을 했는지, 호진은 우물쭈물하며 입을 오물거렸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사과까지 하냐. 됐어. 내가 경솔했어. 네 의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정한 건 나니까.”
호진이 말한 것도 일리가 있었다.
상의를 하지 못한 내 잘못도 있었다.
나는 지금 당장 확실히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 그랬던 거고, 호진은 멤버끼리 의견을 나눴으면 좋겠다는 거고.
그냥 방향성이 달랐던 거다.
누구 하나 나쁜 사람은 없는 이야기였다.
“방금 문밖에서 네가 남영 쌤이랑 안무 짜는 거 봤어. 정말 진심으로 보여서….”
“그럼 호진이 너는 진심이 아니야?”
“응?”
“나만 진심인 거 아니잖아. 너도 그만큼 절박했으니 나한테 화낸 거겠지. 그런 걸로 마음 꽁해있지 않아. 내가 시도했던 일이 틀린 길이라면 리스크가 뒤따라오는 행동이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 리스크는 팀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서로 맞춰가는 거 아니겠어.
“미안해. 마음대로 센터를 바꾸겠다고 해서.”
나는 호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화해의 악수, 하는 거 어때?”
“그러자. 응. 화해의 악수.”
우리는 손을 맞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서로 실수한 부분을 바로잡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화해였다.
“그래서 네 의견은 어때?”
“응?”
“밖에서 얘기 듣고 봤다면서, 방금 춤에 대해서 네 생각이 궁금해서. 어땠어?”
“아, 그게 말이지.”
호진이 나와 남영 쌤이 짠 춤에 대해 코멘트를 더했다.
“여기서는 턴보다는 이렇게 교차해서 들어가는 게 좋을 거 같아.”
어떻게 동선을 차야 더 조화로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줬고.
“그럼 여기서 이렇게 가면 되겠네?”
“맞아요, 쌤. 두 사람이 센터라면 같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하니까 약간의 대칭을 주는 식으로….”
채남영 트레이너와 함께 더 좋은 방식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호진이가 춤에 대한 센스가 남달라.’
그가 합류하자마자 마지막 조각이 딱 맞춰진 것처럼 일이 쑥쑥 진행됐다.
심지어 호진은 황이서 프로듀서가 보여줬던 기존 ‘Angel’의 안무를 몇 번이고 재생하며,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도록 노력했다.
“여기 부분을 제대로 살려서 확 반전을 주면, 기본 안무의 틀은 유지된 채로 센터의 그림과 인간 역할을 할 한 명의 안무만 바뀌게 될 거 같아요. 그럼 기존 동선에서 크게 바뀔 필요가 없는 거죠.”
채남영이 퇴근하고 나서도 우리 둘은 연습실에 밤늦게까지 남아서 안무의 마지막 퍼즐을 맞춰갔다.
* * *
“준비됐지?”
댄스 연습실에서 황이서가 나와 호진을 보며 말했다.
특히 나를 더욱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나로 인해 시작된 거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블 센터라. 과연 어떻게 바꿨는지 기대되는데.”
황이서의 눈빛은 날카로웠으나, 기대된다는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나와 호진의 눈가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웠다.
채남영과 함께 잡은 안무를 완벽하게 외우기 위해 잠도 한 시간 정도밖에 못 잤다. 숙소에 가는 건 꿈도 못 꿨다.
그저 연습실 바닥에서 누워 있다 일어났지.
우리는 어제 입은 옷 그대로 ‘Angel’의 가이드 곡을 틀었다.
-♪♩♩♬♪
연습실 중앙에 선 나와 호진은 흐르는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어젯밤 내내 연습해서 머릿속에 그린 안무.
몸으로 움직이며 맞춰본 건 안무를 짜면서가 전부였지만, 몇 날 며칠 호흡을 맞춘 것처럼 움직임이 저절로 맞아떨어졌다.
우리 둘의 춤의 핵심은 대칭이었다.
최대한 비슷한 타이밍에 서로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가까이 붙을 때도 함께.
멀어질 때도 함께.
기존 안무는 최대한 살리면서, 두 명의 센터가 함께 움직이는 파트에 신경을 더 썼다.
사실, 춤 스탯으로는 내가 호진에게 한참 밀렸다.
연습할 때도 호진이 훨씬 더 진도를 빨리 뺐으니까.
보다 일찍 배운 호진이 퇴근한 채남영을 대신해 나를 가르쳐줬다.
‘건하 네가 전체적인 틀을 만들었으니까, 나는 네가 다 외울 수 있도록 도와줘야지.’
그게 팀이잖아.
호진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게 팀이지.’
최대한 두 센터의 균형이 흐트러지지 않게끔 우리는 서로 템포를 조절했다.
사실 이게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안무 동작이었다.
누구 하나 먼저 나서지 않고, 뒤떨어지지 않는 것.
호진이 팔을 뻗으면 나도 함께 뻗었고.
내가 스탭을 밟으면 호진도 함께 밟았다.
곡의 마지막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호흡을 망가트리지 않고 춤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상입니다.”
피날레 동작을 마친 우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주 완벽한 공연은 아니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 오로지 춤만을 보여준 거니까.
하지만 우리가 보여준 춤 하나만큼은 완벽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실패하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다.
“이걸 채남영 트레이너랑 같이 셋이서 하루 동안 짰다고?”
“예.”
“…….”
황이서가 까끌까끌한 수염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엔 못하길 빌었다. 안무 하나 바꾸려면 생각해야 할 것들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런데 너무 잘 소화해 버렸네.”
그렇다는 건.
“더블 센터, 한번 해보자. 그렇게 진심이라면.”
됐다.
“건하야, 성공했어!”
호진이 방방 뛰며 외쳤다.
“하아, 진짜 됐네.”
다리에 힘이 빠졌다.
어제 하루 종일 연습한 부작용이 그대로 몸에 쏟아졌다.
풀썩.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이고, 엉덩이야.
“건하야!”
“별거 아니야. 그냥 힘이 풀려서.”
다리가 벌벌 떨렸다.
내색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많이 긴장한 모양이었다.
‘하긴 실패하면 공략에 큰 차질이 생길 정도로 큰 페널티였으니까.’
하루 만에 해버린다고 장담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너희 쉴 시간 없는 거 알지? 이제 녹음도 바로 들어가야 해.”
“알고 있습니다.”
하아, 그런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갔다.
아 씨.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나를 보던 황이서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무리하니까 그렇게 되지. 차라리 이틀 정도 시간을 달라고 말했으면 이렇게 밤 안 새도 됐잖아.”
“그럼 다음 일정에 차질 생기잖아요.”
“뭐? 인마, 네가 프로듀서라도 되냐? 일정까지 걱정하게?”
내게 뚜벅뚜벅 다가온 황이서 프로듀서가 손을 뻗었다.
“그런 거 나 같은 아저씨한테 맡겨. 너희는 그냥 열심히 연습하고, 자기를 가꿔서 무대 위로 올라갈 준비만 하면 돼.”
나는 황이서의 손을 붙잡았다.
외모만큼이나 거친 손을 붙잡자, 그가 내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너희 둘은 숙소 돌아가서 좀 쉬어. 지금은 좀 자두고 이따 저녁에 녹음하러 나와. 지금 떨리는 다리 진정시킬 때까지 절대 사무실로 오지 마. 알았어?”
툴툴대는 목소리였지만, 정이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으이그, 내가 왜 저런 놈을 팀에 데려와서.”
“대표님이랑 같이 좋다고 데려온 거 아닙니까?”
“그래서 문제지. 남 탓할 수 없으니까.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가 못난 탓이다. 으이그.”
투정부리는 황이서 프로듀서의 광대가 올라갔다.
“건하야, 우리는 그럼 숙소로 가자.”
“그러자. 졸려 죽겠다.”
나와 호진은 숙소로 돌아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은 사소한 이야기였다.
오늘 날씨가 좋냐느니,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느니, 연습이 힘들었다느니, 더블 센터가 되어서 좋다느니.
호진이 이렇게 말수가 많은 아이였나 싶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친해지니까 은근히 말이 많았다.
[서브 퀘스트: 황이서를 설득하기]
[서브 퀘스트를 성공하셨습니다.]
[메인 센터로 데뷔]
[안호진과 더블 센터]
[안호진의 호감도 대폭 상승]
[안호진의 호감도가 중하에서 중상이 됩니다.]
[안호진의 스킬을 볼 수 있습니다.]
[보상: 2 오픈 마일리지]
[보상: 5 오픈 마일리지]
더블 센터로 정해진 게, 황이서 설득 이전의 서브 퀘스트였던 [센터 포지션엔 누구?]의 성공 조건이었던 ‘메인 센터로 데뷔’까지 충족했는지 앞의 보상도 한 번에 달성되었다.
이건 생각 못 했는데, 운이 좋았다.
보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상: 랜덤 보너스 스탯 +1]
[외모 스탯이 1 오릅니다.]
잠깐만.
외모 스탯이 올랐다고?
[외모: 62(A)]
어쩐지 피부가 더 뽀얗고, 눈이 더 커진 느낌이었다.
“턱도 좀 갸름해진 거 같은데?”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잘생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