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두 명의 비주얼 센터, 특히 외모 등급과 춤 등급이 모두 A인 호진이라면 분명 좋은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황이서만 잘만 설득해서 더블 센터를 구성할 수 있다면, 퀘스트 성공 보상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더 좋은 무대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호진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급작스럽게 변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호진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저, 저도 건하랑 같은 생각입니다. 센터 자리 하나 때문에 팀원끼리 경쟁하는 것보다 당장은 함께 올라가는 게….”
말끝을 흐리는 게 호진이다웠다.
“둘 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거지. 흐음, 그럼 나를 설득시켜 봐. 나는 지금 ‘Angel’의 무대가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거든. 너나 호진이 중에 한 명이 센터를 서고, 그러지 못한 한 명과 정민이가 보조하는 느낌으로. 아주 괜찮게 짜였다고 생각해.”
황 프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던 구성이라면 충분히 성공할 것이라고.
천사, 악마 그리고 양쪽 모두이자 어느 쪽도 아닌 루시퍼.
이 구도가 확실히 어필이 될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둘이서 나한테 증명해 봐. 더블 센터를 세워도 될 만큼 괜찮은 무대 구성을 가지고 오면, 둘이 센터를 서게 해줄게.”
황 프로가 나와 호진을 번갈아 보았다.
“채남영 트레이너랑 같이 무대 구성을 짜 봐.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
“예.”
못할 게 뭐가 있어.
<마이 아이돌>에서 수없이 해본 게 무대 구성인데.
물론 게임 시스템의 도움을 받았지만.
단지 더블 센터를 해본 게 처음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좋아. 그럼 대신, 만약 마음에 드는 무대를 구성하지 못할 경우엔 어떡할래?”
나왔다, 선택지 분기점.
원래 게임에서는 이런 식의 말이 끝나고 두 개의 선택지가 눈앞에 떴다.
시간이 정지되고 두 개의 선택지를 고를 때까지 화면 속 캐릭터들이 멍하니 유저를 쳐다보았다.
게임이었다면 그랬을 거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선택지는 뜨지 않았다.
이곳이 완전히 게임 속 세상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원래라면 나왔어야 할, 두 개의 선택지.
[프로듀서님 말을 그대로 따를게요.]
[휴식 시간을 줄이고, 연습 시간을 늘릴게요.]
1번 선택지는 황이서의 말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선택지였다.
그렇게 되면 세 번의 분기점 동안 황의서의 의견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 페널티를 먹게 된다. 랜덤 진행이 되는 거니, 그리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2번 선택지는 연습 시간을 늘리겠다는 선택지였다.
쉬는 시간을 더 줄이고, 연습에 매진해서 데뷔에 대한 의욕을 불태우는 선택지. 데뷔까지 연습 시간이 올라 능력치 상승이 되지만, 컨디션과 스테미나 조절이 어려워지는 단점이 있었다.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후자, 연습 시간을 늘리는 걸 선택했을 거다.
선택지 랜덤 적용은 유저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페널티니까.
하지만 이건 게임이 아니고, 선택지가 뜨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리스크를 키워도 되지 않을까.
나는 황이서 프로듀서를 보며 말했다.
“센터를 바꿔주십쇼. 호진이로요.”
“흐음?”
“그게 무슨…?”
호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말이 많지 않은 그가 이렇게 놀랄 정도로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스스로 센터 자리를 내려놓다니.
호진이 입장에선 이해가 안 되겠지.
방금까지 내가 센터에 가장 적합하다며, 나를 뽑았으니 말이다.
다 이유가 있다.
호진의 연습량 문제 때 나왔던 선택지 요소를 경험하면서 느꼈다.
누구도 고르지 않을 선택지를 고를 때, 예상보다 큰 보상이 주어진다는 걸.
그리고 그게 바로 센터를 내려놓는 거라 생각했다.
우우웅!
핸드폰이 울리며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선택지에 없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서브 퀘스트 ‘센터 포지션엔 누구?’가 ‘황이서를 설득하기’로 변경되었습니다.]
[보상이 변경됩니다.]
[성공 시: 안호진과 더블 센터, 안호진의 호감도 상승, 5 오픈 마일리지, 랜덤 보너스 스탯 +1]
[실패 시: 황이서 호감도 하락, 안호진 호감도 대폭 하락, 센터 ‘안호진’으로 변경, 랜덤 스탯 -1]
끔찍하네.
퀘스트 내용이 바뀌면서 실패했을 때 페널티가 생겼다.
랜덤 스탯 -1이라.
페널티가 너무 빡빡했다.
상당히 투자를 한 외모가 걸리면, 손해가 얼마인가?
그래도 성공했을 시, 주어지는 마일리지 포인트가 상당했다.
보너스 스탯도 하나 준다고까지 적혀 있었다.
페널티가 빡빡한 대신 보상 역시 올라갔다.
이미 저지른 거, 한번 달려보자고.
“흠, 알았다. 기간은 얼마나 필요하나?”
“내일 안에 짜 오겠습니다. 저희가 시간이 많지 않잖아요.”
“그런 각오 좋다. 그럼 채남영 트레이너랑 하루 동안 잘 만들어서 가지고 와 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치려는데.
“이, 인정할 수 없어요!”
“뭐가?”
“저, 저도 더블 센터가 괜찮다고 말했는데 건하만 센터를 내려놓다뇨.”
입을 오물거리며 주저하던 호진이 말을 이었다.
“이번 곡이 마음에 안 들면, 저도 센터를 하지 않겠어요!”
센터를 내려놓는다고?
누가 봐도 센터를 기대했던 표정으로 자리에 임했던 호진이었다.
그런 그가 센터를 내려놓겠다고 말한 것이다.
얌마, 너까지 그러면 어떡하냐.
“…너희 둘이 지금 짜고 치는 거냐?”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하아, 센터감 둘이 센터를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쩌라고 이래.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퍽 내쉰 황이서가 눈을 부라렸다.
“호진아, 네 요청은 기각이야. 너까지 센터 안 보면 무대가 망가져.”
“하, 하지만….”
“원래 먼저 맞겠다는 놈이 아프게 맞는 게 맞는 거야. 단독 센터를 올리자는 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면, 건하랑 같이 필사적으로 무대 준비해. 누가 양보해서 얻었다는 식으로 센터를 차지했다는 말은 듣기 싫잖아?”
호진의 의사는 인정하되, 그의 투쟁심을 적당히 불붙이는 말이었다.
‘확실히 애들 다루는 데 익숙하네.’
“그래도 멤버 혼자 무거운 짐을 들게 하지 않으려는 각오는 제대로 느꼈다.”
나와 호진을 보며 기특하다는 눈빛을 빛내던 황이서가 멤버들을 향해 외쳤다.
“건하랑 호진은 채남영 트레이너랑 무대 구성을 짜고, 나머지는 녹음 준비해. 자, 그럼 해산하자. 오늘도 파이팅하는 거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녹음실을 나갔다.
녹음이라.
하긴, 무대 구성이 바뀌어도 곡을 바꾸진 않을 테니까.
채남영을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건하! 야, 윤건하!”
호진이 화를 내며 나를 불렀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센터를 넘기겠다니! 지금 나를 놀리는 거야? 이렇게 센터 차지하면 내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주시했다.
당장이라도 내 얼굴이 뚫릴 것 같은 맹렬한 기세였다.
처음으로 얻는 자리가 다른 누군가가 포기해서 얻는 자리라니.
내내 센터를 기대했던 호진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을 거다.
그렇기에 호진이답지 않게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겠지.
그가 화낼 거라고 생각은 했다.
말수는 적지만, 자존심이 강한 아이였으니까.
게임에서도 몇 번 자존심이 강한 모습을 종종 보여줬다.
안호진 호감도 대폭 하락도 바로 이 때문이리라.
알고 있었지만, 강행했다.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일일이 모든 관계를 다 생각하면서 공략할 수는 없어.’
멤버들의 호감도를 올리는 것이 우선이나, 필요할 때는 저울질을 할 필요가 있었다.
호감도와 관계에만 너무 매몰되면, 공략은 불가능하니.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왜 그런 건데?”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호진이 대답을 재촉했다.
“내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해?”
“뭐?”
“너한테 센터를 넘기는 건, 내가 황 프로님을 설득시키지 못했을 때야. 황 프로님을 설득하면 너랑 나랑 같이 센터에 서는 거고.”
“…….”
“나는 실패할 생각 없어.”
자신이 있었다.
황이서를 설득할 자신이.
실패했을 때 호진에게 센터를 주겠다고 말한 건, 더 많은 보상과 더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
누구를 동정해서 내뱉은 말이 전혀 아니었다.
호진을 설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내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면, 오해가 쌓일 것 같아서.
그래서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는 건 전적으로 호진의 몫이었다.
“무조건 성공할 거야. 센터 두 명 세울 거고, 괜히 팀 내 분열을 일으키거나, 평가를 받기 위해서 시간을 허송세월 보낼 생각도 없어.”
내 말을 들은 호진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실패에 대한 페널티를 왜 네가 혼자 안아?”
“뭐?”
“우리는 한 팀 아니야? 팀은 힘들 때 같이 힘들고 좋을 때도 함께 좋아야 하는 거 아니야? 설사 네가 성공할 거라 자신한다고 해도…. 적어도 같이 후보로 나간 내게 말 한마디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었어?”
나를 보는 호진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너, 설마 우는 거냐.
“나는 지금까지 건하 너랑 팀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는 아니었나 보네.”
말을 마친 호진이 한숨을 푹 쉬며 나갔다.
“호, 호진이 형.”
우주가 호진을 조심스럽게 따라 나갔다.
“건하야, 방금 호진이 말에 나도 동의해. 한 팀이면 리스크도 같이 안아야 된다고 생각하거든. 건하 네 생각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하아, 일단 호진이 좀 달래고 올게.”
정민이도 자리에서 일어나 호진에게 향했다.
“…나는 팀원들을 위해 희생한 네 선택이 맞았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애들에게 설명을 해줬다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성훈이 내 등을 두드렸다.
“형은 호진이 달래러 안 가?”
“이미 두 명이 갔잖아. 한 명은 우리 강한 척하는 건하를 달래줘야지.”
성훈이 평소에는 날카롭게 뜬 눈으로 미소 지었다.
이런 웃음도 지을 수 있었냐.
“하아, 됐어. 호진이나 달래줘. 나는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런데 정말 혼자서 괜찮겠어?”
“안무 짜는 거?”
“그래.”
“채남영 선생님이랑 같이 하면 될 거야. 계획도 다 짜놨고.”
“그런가.”
“그러니까 호진이 달래줘. 마음 약한 애잖아.”
“…알았다.”
성훈도 자리에서 일어나 호진에게 갔다.
“팀이라….”
기쁜 것도 힘든 것도 같이 나눠야 한다는 호진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감당할 수 있다면, 혼자서 감당하는 것도 맞지 않나?’
모르겠다.
모르겠어.
* * *
“크하하하하!! 너 진짜 물건이구나? 거기서 황이서 프로듀서를 들이받을 생각을 하냐?”
“들이받은 거 아니에요.”
“맞지. 프로듀서가 하자는 거 그대로 반박한 거니까.”
“그런가요?”
“회사원으로 따지면, 사원이 이사급 계획에 들이받은 거지.”
“흠.”
채남영은 내 자초지종을 듣고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나 잘릴 뻔했구나.
“그런데 계획은 있는 거야? 내가 도와주긴 한다만, 근원적인 계획은 네 머리에서 나와야 해.”
“알고 있어요. 이미 생각해둔 게 있고요.”
‘Angel’이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떠오른 게 있었다.
정확히는 더블 센터로 말이지.
떠오르는 건 이것 뿐이지만, 디테일한 부분은 채남영이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호진이 있다면 더 빠르게 마칠 수 있겠지만.
‘지금은 마음을 추스를 필요가 있을 테니까.’
조금 먼저 시작해도 되겠지.
“우선 컨셉부터 시작할까요?”
“호진이 안 기다려?”
“오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 우리끼리 틀을 먼저 잡고 있죠.”
밖으로 나가기 전에 했던 호진의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괜찮을 거다.
“천사와 악마, 그리고 루시퍼가 지금 컨셉이죠?”
“그렇지. 그러니까 결국 루시퍼가 센터로 서는 느낌이지.”
“저는 무대의 주인공을 천사와 악마로 잡을 생각이에요. 한 인간의 최후를 결정하는 심판자 느낌으로요.”
“호오? 큰 틀은 유지한 채로 센터만 더블 센터로 바꾸자는 거지?”
“네. 그러니 댄스 틀도 조금 바꿔야 하는데.”
내 계획을 들은 채남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들이받은 거냐?”
“그런 셈이죠.”
“이 새끼, 진짜 물건이네.”
그 물건이라는 단어는 처음과는 의미가 달랐다.
“그럼 이제 디테일인데….”
나와 채남영은 머리를 맞대고 무대 구성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