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진짜 돈이 입금됐다.
원래 내가 살던 세계의 돈이 아니라 지금 세계의 돈이.
‘8천만 원?’
원래 건하의 통장에 돈이 얼마 있었지.
10만 원 정도 있었던 거 같은데.
갑자기 8천만 원이라는 돈이 입금되었다.
처음엔 사기인가 싶었다.
그런데 사업가 윤건하도 아니고,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연습생한테 사기를 쳐서 뭐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설마.’
나는 돈이 입금된 시간을 확인했다.
전부 밤 12시 이후에 입금이 되었다.
‘내가 가챠를 시작한 시간이 밤 12시였으니까….’
10연차 가챠를 마쳤을 때와, 돈이 들어온 시간대가 딱딱 맞았다.
스킬 뽑기로 꽝을 뽑더라도 이런 식으로 돈으로 지급된다, 이건가.
8천만 원이 많아 보이지만, 사실 원래 세계의 돈 중 4억에 가까운 돈을 태워서 만든 돈이다.
교환비가 썩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쁘진 않다.
뽑기를 실패한 보상으로 얻은 것치고는 상당히 괜찮지.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돈을 얻을 줄은 몰랐다.
스킬도 얻었겠다.
‘이걸 어디에다가 쓰지?’
* * *
정민은 여전히 잠에 들지 못했다.
계속해서 아까 느꼈던 무대의 감동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진짜 데뷔한 선배들의 무대와 비교하면 한참 부족한 규모였다.
많은 팬은 아니었지만.
분명 그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며 고개를 까딱거리며 즐기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을 New Taste를.
정민은 자신의 노래에 확신이 없었다.
사실 잘한다는 이야기만 들었지만, 항상 스스로 20%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이 노래 괜찮은데?’
‘테스트 무대, 정민이 노래로 가자.’
자신보다 자신의 노래에 더 확신을 가진 사람이 생겼다.
건하.
무대에 올려도 된다는 확신을 누구보다 먼저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웃기지?
작곡자 본인보다 훨씬 더 확신을 가지는 멤버라니.
그리고 건하의 말 그대로 이뤄졌다.
무대에서 보여준 우리의 노래는 통했고,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공연을 함께 즐겼다.
마지막에 가서는 후렴구를 흥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얼마나 원했던가.
내 노래로 사람들이 함께 즐겨주는 모습을.
거기다가 신인상, 사실상 1등이나 다름없는 성과까지 얻었다.
눈을 감을 때면 아직도 그 장면이 떠올랐다.
무대 위에서 멤버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에 들 수 없었다.
‘대단하네.’
만약 건하 말을 듣지 않고 댄스곡으로 갔다면 골든트랙의 춤에 밀리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이 정도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으리라.
부스럭 부스럭.
잠에 들지 못한 정민은 옆 침대에서 누워 있던 호진을 불렀다.
“호진아, 자?”
“아직 안 자.”
얘도 깨어 있었구나.
“오늘 대단했지?”
“응. 대단했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우리가 신인상을 탈 줄은 몰랐어.”
“나도 그래.”
골든트랙이 있으니까.
묘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대 기획사에서 준비한 아이돌 연습생.
성공이 보장된 아이들.
반면 우리는?
조금 작은 기획사.
그런 그들에게 건하가 왔다.
자신들이 패배감을 느끼던 그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이.
“건하가 정말 대단하지 않아?”
대답이 없다.
잠시 조용해진 방.
“…응. 대단하더라.”
호진이 두 박자 늦게 대답했다.
“긴장도 안 하고, 대선배 앞에서도 꿀리지 않고, 심지어 자기가 진성 선배보다 먼저 그래미 상을 탄다고 얘기했잖아. 누가 상상이나 할까? 아직 데뷔도 못 한 연습생이 한국에 있는 음방 1등도 아니고, 그래미 상을 타겠다고 말하다니 말이야.”
모처럼 호진의 말이 많아졌다.
그만큼 건하가 호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거다.
정민이는 생각했다.
‘호진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 같네.’
정민이 자신의 곡에 대해 자신을 가진 건하에게 놀랐던 것처럼, 호진도 진성에게 대담한 포부를 밝히는 모습에 놀란 거다.
사실 정민도 들었지만, 믿기지 않았다.
한국 아이돌이 그래미 상이라니.
후보로 오른 적은 있어도, 실제로 상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곳은 그야말로 벽.
영어권, 비영어권 차이를 생각하더라도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아마 오래 걸리겠지.
아무리 건하의 자신감이 대단하다고 한들, 하루 이틀 만에 그래미를 탈 수는 없을 거다.
그런데 어쩐지.
가만히 호진의 말을 듣던 정민이 입을 열었다.
“될 거 같지 않아?”
“그래미?”
“응.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건하도 우리도 아티스트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된다면….”
가능할 거다.
분명 할 수 있을 거다.
“탈 수 있을 거야.”
정민이 바라보는 천장에, 거대한 그래미 시상식이 보이는 듯했다.
아직은 이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무대의 여운으로 잠 못 이루는 두 사람은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 * *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우리는 연습실로 출근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인사했다. 오늘따라 목소리도 우렁차고 힘도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인상!
여러 소속사가 모여 만든 작은 무대일 뿐이지만, 1등을 했다.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진짜 어제 먹은 치킨이 아직도 입에 맴돌아. 양치질을 했는데도 왜 자꾸 남는 거지? 아아, 한 번 더 먹고 싶다….”
“데뷔 전엔 이제 일탈은 안 된다. 그거 때문에 우리 며칠 더 빡세게 운동해야 한다고.”
들뜬 분위기에 성훈이 조금 더 엄격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끌어내렸다.
“우리 조금 더 여운을 즐기면 안 돼? 그래도 첫 성과인데.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즐길 수 있겠어. 건하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성훈이 형 의견에 동의해.”
들뜬 기분을 주체 못 하는 건 이해하지만, 이제는 데뷔곡 녹음도 끝마쳐야 할 시기.
준비된 곡을 완성시켜 앞으로의 데뷔 무대를 준비할 때였다.
바쁘다 바뻐.
허공에 붕 떠 있을 시간이 없다.
그건 데뷔하고 나서, 첫 앨범 활동이 다 끝나고 나서 해도 충분하다.
지금은 정신을 딱 붙잡아야지.
작은 성공으로 헤이해질 때가 아니다.
“어? 우리 신인상 멤버들 아니야?”
그때, 댄스 트레이너 채남영이 우리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쌤!”
채남영을 본 우주가 우다다 달려갔다.
“다들 고생했다. 신인상 탔다는 거 들었다.”
“감사합니다!”
“기사도 떴던데?”
“정말요? 정말요?”
기사가 나왔다고.
채남영의 말에 정민과 우주, 호진이 그에게 우르르 다가갔다.
나와 성훈은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기사까지만 읽게 하자.
그리고 다시 집중시키면 된다.
뭔가, 애들을 키우는 보모가 된 기분인데.
나와 성훈도 채남영의 폰으로 기사를 읽었다.
-올리오스, 풋풋하고 상큼한 컨셉
-올리오스 제2의 ‘몬스터즈’ 되나.
“오, 저희 기사 두 개나 떴네요?”
“현장에 있던 기자들이 바로 써서 올린 거 같더라. 이건 너희 사진들.”
포토 기사도 꽤 많았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우리들의 모습이라던가, 공연 시작 전 관객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모습, 멤버 개개인의 단독샷까지.
물론 같이 무대에 오른 골든트랙과 비교하면 한참 부족한 기사 수였다.
-골든트랙, 스트리브 선배들의 ‘틱택톡을 완벽히 소화
-무대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준 골든트랙
그룹 전체의 기사는 물론이고.
-이진우, 성숙미를 보여주는 ‘무대장인’의 면모를 듬뿍
-신인의 열정을 보여줄게요
멤버들 개인 기사들까지 전부 찍어내고 있었다.
무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건 우리였지만, 막상 화제성은 골든트랙이 가져갔다.
아니, 화제성이라고 할 것도 없다.
신인, 그것도 데뷔하지 않은 연습생들의 무대 기사에 들어간 댓글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하나 이 작은 차이가 계속해서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정신을 차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그래, 게임에서도 이랬지.
GH 엔터에서 잘 해도, 소속사 크기가 달라 따라오는 푸시가 차원이 달랐기 때문에 앨범 성적에서 고전한 적이 꽤나 많았다.
“역시 MAE네요. 기사 수가….”
내 말에 채남영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MAE 엔터에서 이번에 칼을 갈고 있으니까. 건하는 알고 있지?”
“어떤 거요?”
“이번에 데뷔하는 골든트랙 애들 데리고 데뷔 전에 M-TV에서 예능 찍는다고 했잖아. 너도 찍었었지?”
금시초문이다.
사실 잘 모른다.
내가 이 몸에 빙의한 이후에 하루 만에 MAE 엔터를 나갔으니까.
이전의 윤건하는 진짜 찍었는데 내가 모르던 걸지도 모른다.
“기억이 잘 안 나요.”
이럴 땐 대충 얼버무리는 게 최선이다.
어차피 쫓겨난 사람 입장에서 할 말이 뭐가 더 있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 미안하다.”
화제를 돌리기엔 최적의 행동이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으로 보이게끔 약간의 연기를 더한다면, 누구도 쉽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모르는 주제는 최대한 피하는 게 상책이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지금 이렇게 거대 엔터에서 푸시받는 골든트랙도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 중에 하나라는 거.”
테스트 공연에서 한 번 그들을 이긴 걸로 자만할 생각은 없다.
이겼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리의 무대가 대중들에게 통한다는 것을 확인한 자리였다는 게 몇 배는 더 중요했다.
“그게 맞지! 결국 우리가 잘하는 게 중요하니까.”
짝짝짝!
괜히 어색한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 듯 정민이 박수를 크게 쳤다.
“아, 맞다. 그럼 이제 정민이 자작곡으로 데뷔 무대 올라가겠네?”
“어? 남영 쌤도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지. 회사에서 모르는 사람 없을걸?”
내게 시선을 옮긴 채남영의 눈가가 구부러졌다.
“연습생들의 과감한 도전이라면서 다들 내기까지 했어.”
“내기를 했다고요?”
“뭐, 사무실 직원들이랑 트레이너들이 각자 5만 원씩 걷어서 자체 내기를 했지. 너희가 1등을 하는지 못하는지.”
흥미로운 얘긴데.
“비율은 어땠나요?”
“1등 할 수 있다가 3명, 그래도 골든트랙이라 1등은 어렵다가 13명이었지.”
상당히 압도적인 스코어였다.
너무하네. 그래도 같은 소속사 직원들은 우리를 믿어줄 줄 알았는데.
“쌤은 어디다 거셨는데요?”
얘기를 듣던 우주가 물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거는 건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나는 당연히 너희들이 1등 한다고 걸었지.”
“역시! 믿고 있었어요.”
채남영이 우리의 1등에 걸었다는 말에 안도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진짜 중요한 건, 황이서와 우리와 가장 가까이서 연습을 도와준 트레이너들.
그들이 우리를 제대로 봐주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보컬 트레이너 누나는요?”
“걔도 너희 찍었지. 3명이 나랑 세희, 그리고 황이서 프로듀서야.”
어?
이건 좀 의외였다.
“황 프로님이요?”
내 질문에 채남영이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놀랐지? 크흐흐, 나도 놀랐다니까?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그 인간의 머릿속은 종잡을 수가 없어.”
“역시 믿어 주셨네요.”
어쩐지 무대 아래에서 우리들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절박해 보였던 거 같은데.
돈이 걸려서 그런 거였나.
“그래도 너희를 믿었다는 게 중요하잖냐. 하하하!”
그 말은 맞았다.
결국 믿어줬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 믿음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결속시킬 것이라 믿었다.
“다들 무슨 얘기 해?”
어느새 다가온 황이서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이제 데뷔곡 준비 들어가야지. 녹음도 해야 하고, 뮤직 비디오, 댄스 동선 같은 것도 다 점검해야 하니까 바쁠 거다. 그리고 정민이.”
“예, 프로듀서님.”
“너는 더 바쁠 거다. 자작곡 New Taste, 마지막 작업까지 마쳐야 하니까.”
황이서의 말투는 가벼웠으나, 그 말이 담긴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그가 맺었던 약속.
1등, 신인상을 타면 정민의 노래를 데뷔 무대에 세워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뜻.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정민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