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배달민족사-83화 (57/83)

[email protected])=+=                  (17) 고구려 고토 회복 전

쟁 [미래역사소설] 21世紀 地球史 (17) 고구려 고토 회복 전쟁 ⑨2

008년 2월 12일 신의주 삼미륵동 미륵소학교남한의 적십자와 각 단체에

서 보내온 구호물자가 한 쪽에 쌓여있었고, 다른 쪽에서 사람들이 질서정연

하게 구호물자를 받아가고 있었다. 배달에서도 의료지원팀과 건설팀이 급파

되어 수몰된 곳을 복구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인민군 403사단 장병들의

손길도 바빴다. 수풍댐이 무너진 것은 이틀 전 오전의 일이다. 다행히 사

람들이 모두 깨어있는 때이고 수풍댐이 무너지기 전에 이미 구국의 소리 방

송에서 예고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대피할 시간이 충분해서 인명피해는 거

의 없었다. 그러나 순식간에 불어난 물로 곳곳에 수재민이 발생했고, 물살에

무너진 가옥들이 많았다. 삼미륵동은 신의주 남서쪽 지역으로 신의주에서

비교적 지대가 높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곳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만주와

기차길을 잇는 신의주철교 쪽에 밀집한 상가와 이제 막 새로운 변화를 일으

키던 공단들도 대부분 침수되었다. 원래 의주지역은 예부터 장마 때마다 범

람하던 곳이어서 농사가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는데 수풍댐의 건설로 홍수

피해가 줄어들자 최근까지 각종 곡식과 채소를 키우던 논밭이 들어서 있었

다. 그나마 지금은 농사를 짓지 않는 겨울철이라 농작물 피해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지금 신의주 공단의 경우 수위가 약 97cm 정

도로 아직 침수상태가 심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빠른 속도로 물이 빠지고 있

고, 펌프로 물을 퍼올리고 있어 내일 정오경이면 본격적인 복구가 가능할 것

으로 보입니다."

남한에서 파견된 재해 복구지원팀의 강병수가 지도를 펼쳐놓고 말했다. "

그럼 우린 내일 오전부터 복구에 동원할 병력들을 준비 시키겠습네다. 돈이

안 들이고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부대에서 다 맡겠습네다."

신의주 인민위원회 소속의 적위대장 유기상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남

한과 배달에서 오는 각종 구호물자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라 주눅이 좀 들

었지만 북한의 가난에 대해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비굴하지는 않았다. "무

슨 말씀을요. 우리도 같이 땀을 흘리겠습니다. 우리도 힘이라면 좀 씁니다.

"

강병수가 웃으며 말했다. "새참 먹고 하십시오!"

그 때 남한의 자원봉사단에서 나온 사람들이 새참으로 라면을 준비해서 사람

들에게 배급을 시작했다. 구슬땀을 흘리며 복구작업을 하던 403사단 장병들

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자원봉사단 중에 세연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녀가

'대동강의 눈물'을 만든 제작자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2008년

2월 16일 평양 모란봉 청년수련회 평양비상위수사령부석정후는 아침 일

찍 손님을 맞았다. 대한민국의 경제부총리와 외교통상부 장관, 동력자원부

장관, 육군참모총장 등 남한의 주요인사와 배달의 외교부장관과 준영이었다

. 남한 정부는 공식적으로 석정후를 남북 협력의 파크너로 인정하고 앞으로

의 일에 대한 논의를 위해 주요 인사들을 평양에 파견했다. 북한의 군부

는 석정후 장군이 완전히 장악했다. 한국정부가 석정후를 새로운 남북관계의

파트너로 인정하자, 미국이 고심 끝에 석정후의 정권을 인정했고, 그 뒤를

이어 일본과 EU에서 북한의 새 정권을 인정했다. 대한민국의 경우 헌법상으

로 북한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로서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남북관계

의 해결을 위한 협상대상'이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석정후는 명실상부한 북한

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석정후와 녹색군대의 간부들이 평양 모란봉 청년수련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

다가 차에서 내린 한국과 배달의 장관 일행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제

가 석정후입네다."

석정후의 인사는 북한의 실권을 틀어쥔 국가원수답지 않게 예의를 갖추었지

만 타고난 위엄이 숨겨지지는 않았다. "아이구, 친히 이렇게 나와서 기다

리십니까? 감사합니다."

배달의 정학재 장관이 다소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했다. 사단 군악대가 경쾌

한 환영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남한의 장관들이 차에서 내리며 석정후와 반

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배달의 통령 비서실장으로 있

는 서준영입니다."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는 준영이 다가오는 모습을 반갑게 웃으며 보고 있던

석정후가 준영이 처음 뵙는다는 인사를 하자 움찔하며 말했다.

"아, 예. 어서 오십시오."

준영은 압록강의 군사작전을 외부적으로 녹색군대의 활약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석정후가 만났었고, 그보다 훨씬 전 세연이 '대동강을 눈물'을 제작할

당시에 평양에 온 준영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서로 많은 대화가 있었기 때문

에 두 사람은 아주 친근한 사이가 되었지만 여기서는 처음 만나는 사이가 되

어 있었다. 잠시 뒤 사람들은 청년수련회의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회

의에 앞서 한국과 배달의 참석자들은 석정후 장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승리를 축하합니다. 석정후 장군님."

"감사합니다. 우리 인민들 모두의 승리라고 믿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딸아

이를 잃었지만 제 딸도 인민들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을 것입니다."

약간 목이 잠긴 듯한 석정후의 말에 준영이 갑자기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이제 우리 민족을 위해 하실 일이 많으셔서 장군님 어깨가 많이 무거우시겠

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제부총리인 최은석 장관이 '인민'이나 '북한주민'이라는 단어

대신 '우리 민족'이라는 말을 사용하자 참석자들이 왜인지 갑자기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그렇지요. 우리 민족의 꿈이 이제 눈앞에 다가온 것 같

습네다."

석정후 장군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만남의 공식적인 명칭은 남

북경제협력장관회의였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통일에 대한 준비를 위한 모임이

라는 걸 모든 참석자가 알고 있었다. 회의는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 회의가 진행되면서 참석자들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놀

라고 있었다. 남한의 참석자들은 북한의 참석자들이 가진 민족에 대한 사랑

이 전혀 가식없고 진실됨에 놀랐고, 북한은 남한의 계획을 진행하는 데 보여

주는 추진력에 대해서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남북한 공히 배달의 의견에 놀

라고 있었는데, 남한이나 북한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분

석을 통한 시나리오에 놀라고 있었다. 배달의 분석은 아주 세밀한 곳까지 다

루고 있었다. 각 준비되는 법안과 제도, 정책에서 파생되는 부작용을 미리

예견하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는 전율이 일어날 정도

였다. 기자들이 안에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가는 지 궁금해했지만 회담은 비

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2008년 2월 15일 중국 베이징 국가중앙군사

위원회 "이젠 전면전 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리앙 구앙리에(梁光烈) 선양군구 사령원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 서

기인 후진타오(胡錦濤)가 그를 쳐다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중국은 엄연

히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국가중앙군사위원회의 두 위원회가 공동으로 군

을 통솔한다. 군사적인 중요한 결정은 두 위원회의 결정을 취합하여 내리게

된다. 그러나 두 위원회는 법적으로는 엄연히 다른 조직이지만 그 구성원이

사실상 동일한 인물들이기 때문에 하나의 기구라고 봐도 무방했다. "전

쟁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소?"

당 서기로서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인 동시에 국가중앙군사위원회장

인 후진타오는 원칙적으로는 전쟁을 원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후진타오는

상하이에서 차(茶)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20

살이 넘을 때까지 상하이에서 자랐다. 상하이는 무역과 산업의 발달로 중국

의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가진 곳이다. 중국의 100대 부자들의

90%가 상하이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상하이에서 성장한 후진타오는 경제를

통해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우고 싶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2002

년에 중국 공산당 당 대회에서 당 서기에 오른 후진타오는 시장경제 활성화

와 중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힘섰다. 그 결과 21세기 초 중국의 엄청난 경제

잠재력을 가진 국가로 등장했다. 인구 10억이 넘는 시장과 값싼 노동력과

광활한 영토를 무기로 한 중국의 경제력은 세계 시장에서 엄청난 경쟁력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중국이 가진 시장개방이나 개혁경제의 기조

는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마오쩌둥 집권시기부터 정

립된 사회주의식 시장경제였다. 그래서 중국의 경제제도는 아무리 개방을 한

다고 해도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계획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즉 국가

모든 경제정책에 관여하여 국가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방식은 외국

자본과 대항하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강점을 가질 수 있었다. 국가가 모

든 결정을 신속하게 하고 경쟁력이 있는 부분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그러는 와중에 일반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는 중국의 인민들이 있었다

. 예를 들면 시장 개방이 되었지만 아무나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었다. 국가에서 농업을 하라고 하면 그냥 농업에 종사해야 했다. 국가에서

공장에서 일하도록 지정한다면 공장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며 일을 해야했다.

물론 그러한 결정이 무작위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당 산하 인력관리위원

회에서 개개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공정하게' 분배되고 개인의 희망을 고

려해 주기도 하지만 최종 결정을 당이 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

면 외환거래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딜러가 있는데 이 사람은 이제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작은 가게를 차려 편안하게 노후생활을 보내고 싶다고 하

자. 그러나 그 사람이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노후를 보내는 것보다는 계속

외환거래를 하는 것이 국가경제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당은 결코 그

가 은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부동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국가가 모든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건설에 국가가

관여했다. 개인은 땅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로부터 땅을 빌린 상태이

다. 따라서 중국 내에서의 부동산 거래는 땅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땅의

임대권을 사고 파는 것이다. 40평의 대지에 있는 건평 30평의 집을 샀다고

한다면 30평의 집은 사는 것이고 40평의 토지를 국가로부터 빌리는 권리를

사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임대지만 사실상 부동산 거래나 토지 이용에 있어

서 매매와 차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차이가 없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이 차이

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국가는 토지의 주인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도로

나 공공건물 등의 건설부지를 결정할 수 있다. 즉 임대한 땅에 국가가 도로

를 건설해야 한다면 임대료를 돌려받고 고스란히 땅을 빼앗겨야 했다. 만약

그 땅위에 수십 억의 가치가 있는 건물이 있더라도 소용이 없다. 어쨌

든 중국 경제는 그러한 많은 인민들의 희생 위에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확

보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점에서 중국의 집권층이 군사적인 확장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중국의 수뇌부들은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동등

한 또는 미국보다 우월한 지위를 얻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기술력, 군사력이 모두 앞서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중국은 그 어느

것도 앞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 북한의

소요를 통해 영토적인 확장을 꾀하다 처참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북한은

수풍댐을 무너뜨리면서 그들 자신도 피해를 많이 입었지만 중국이 입은 피해

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우선 전사자만 수천명에 수몰된 단둥지역에서 발

생한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는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소 전

쟁에 반대해 오던 후진타오지만 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초

에 출병을 요청한 것은 북한의 국방위원장 직무대리였소. 그렇게 출병을 요

청하여 평화롭게 진군중인 우리 군을 수장시킨 것은 우리 중국에 대한 선전

포고나 다름없는 일이오."

선양군구 사령원 리앙 구앙리에가 흥분해서 말했다. 구앙리에는 계급이나 직

책상으로는 이 중앙군사위에서 새까만 말직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뒤에는

총참모장 리쉬광의 후광이 있었다. 구앙리에는 중국이 애초에 북한에 진입한

이유를 덮어 둔 채 북한이 먼저 군사원조를 협조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북한

에게 책임을 지게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국제적인 망신이요."

그 때, 조용히 앉아있던 슝핑(宋平)이 입을 열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

다. 일찍이 주은래의 비서를 지내며 당 지도위원과 감숙성의 서기를 역임하

고 지금은 전면에서 물러나와 당의 지도고문으로 조용히 지내고 있던 원로였

다. 원래 이 자리의 참석대상은 아니었지만 회의가 시작되기 전 나타나서는

자리를 할 수 있겠냐고 정중히 물어와 원로의 예우를 받고 자리를 얻었다.

슝핑의 갑작스런 말에 모두 조용해졌다. 원로에 대한 일종의 예의이기도

했지만 슝핑은 여전히 당내에 막대한 정신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슝

핑의 얼굴은 쭈글쭈글해지고 머리는 물론 얼굴의 눈썹까지 하얗게 백발이 되

었지만, 흰 눈썹아래 그의 눈빛은 그 옛날 한반도를 진격해서 유엔군과 한국

군을 남쪽으로 밀어 부쳐버린 1950년 1월 무섭게 몰아치던 흰눈보라 밑에서

빛나던 그 눈빛과 한 치의 차이가 없었다. "대중국군이 압록강도 못 넘고

패퇴하다니... 구앙리에 사령원은 평화롭게 진군했다고 하지만 이미 군사작

전 중에 평화로운 진군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당시 참모장이나 지휘관들,

작전에 참여했던 모든 장성들은 모두 군법회의감이야. 항상 예측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점검했어야지."

구앙리에는 하늘같은 원로에게 직접 문책을 듣자 얼굴이 벌게졌다. 원래 이

자리에 참석할 대상이 아닌 원로가 일부러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더니, 급

기야 자신을 비난하자 속이 상했다. "하지만 우리 군은 명백히 조선공화

국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파견했습...."

"닥쳐!"

슝핑이 그 노구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호통을 쳤다.

"구앙리에 네놈이 어떤 짓을 꾸몄는지 다 안다. 내가 집안에만 박혀 산다

고 세상에 문을 닫고 있는 줄 아느냐? 작년에 베이징에서 중조군사협력회의

(中朝軍事協力會議)가 열리고 난 후 김성규를 은밀히 집으로 초청해서 무슨

말을 했나?"

"그...그것은...."

"설마 자네가 김성규를 꼬드겨서 쿠데타를 부추긴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구앙리에가 식은 땀을 흘렸다.

"그리고 리쉬광 상장동지!"

슝광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려지자 리쉬광은 움찔하면서도 당당하게 그 시선

을 받았다.

"말씀하십시오. 동지"

"요즘 동지가 미국 방문이 잦은 것 같소. 미국에 친한 친구라도 사귀었소?"

슝핑의 눈은 마치 리쉬광의 머릿속을 환히 보는 듯이 날카로웠다.

"예, 미국인과 결혼해서 사는 조카딸 되는 친척이 있습니다."

"이상하군, 그 조카딸이 우쉬(無石)에 살 때는 한 번도 찾아보지 않더니 미

국으로 시집가고 나서는 왜 그렇게 자주 찾는 것이요?"

리쉬광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조용히 낙향해서 살려고 하는 이 노인이

왜 이 자리까지 나왔겠소?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중국이 많이 득을 보게

될 것이외다. 그러나 미국은 훨씬 많은 득을 볼 것이오. 특히 중국이 한반

도에 들어가서 전쟁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국이 바라는 바가 아니겠소? 전

쟁에서 득을 보려면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오. 요즘 간혹 미국의 이

익에 부합되는 정책이 추진되는 일이 간간이 생기고 있는 모양을 보니 도저

히 그냥 있을 수가 없어 초청도 받지 않은 자리에 예의도 없이 이렇게 나오

게 됐소. 총서기동지께 죄스런 마음 금할 길 없으니 우리 동지들이 피를 바

쳐 세운 이 중화인민공화국의 미래가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고 있소이다

."

슝핑의 쩌렁쩌렁한 말에 장내의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리신리앙(李新良)

북경군구 사령관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러면 동지께서는 전쟁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슝핑이 고개를 홱 돌려 리신리앙을 바라봤다. 슝핑이 부릅뜬 눈을 크게 뜬

채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이윽고 말을 꺼냈다. "이제는 그만둘 수 없소,

그만두어서도 안되오."

그리고는 군사위원회에 참석한 장성들과 고위 관리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 "그리고 꼭 이겨야하오. 그것도 아주 무자비하게 짓밟아줘야 합니다. 미

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에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지지만 미국은 비난을 감수

하고라도 이라크를 침공했소. 비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국제적 비난은

힘없는 국가들의 한풀이일 뿐이요. 미국이 그 때문에 얻는 이익이 엄청납니

다. 왜냐하면 모든 나라가 미국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오. 중국은 모든 나라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국가는 비난을 받더라

도 우리 국민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것이오."

슝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자 장성들이 저도 모르게 따라 일어

났다. "세계 모든 나라에게 중국은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려야하오. 그리고 그를 통해 우리 중국이 외국에 대해 다소 억지를 쓰더라도

, 예를 들어 한반도 북부가 중국 땅이라고 억지를 쓰더라도 아무도 웃어넘길

수 없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가 철저해야 합

니다. 한 두 인간의 농간에 국가 전체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가벼운 나라가

되어서는 안되오."

이 말을 마치고 슝핑은 회의장을 나갔다. 슝핑이 나가는 동안 장성들은 자리

에 부동자세로 선 채 예의를 다했다. 회의장을 나가며 슝핑은 후진타오와 잠

시 눈이 마주쳤다. 후진타오가 고개를 숙였다. 슝핑이 굳게 다문 입으로 크

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회의장을 나갔다. 슝핑은 후진타오에게도 각별

한 선배였다. 자신을 정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사람이 바로 슝

핑이었다. 장성들이 자리에 앉자 후진타오의 말이 이어졌다. 슝핑의 말을 들

으면서 후진타오는 자신이 아니 중국이 왜 전쟁을 해야하는 지 분명한 이유

를 찾게 되었다. "한반도 전역에 대한 공격은 올림픽이 끝난 후 그 다음

달인 10월에 개시할 것이오. 한반도와의 전쟁 때문에 올림픽 유치를 포기할

수는 없소. 그 동안 군은 철저히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오. 구체적인 작전

계획과 군비확보 등의 문제는...."

리쉬광과 후진타오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 슝핑의 말대로라면 총참모장은

믿을만한 사람이 못된다. "총참모장이 철저히 준비를 하시오."

"알겠습니다."

후진타오가 말하자 리쉬광이 대답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후진타오는 속으로 리쉬광을 대신할 사람이 누군지를 열심히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나 리쉬광은 총참모장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중요하게 여기

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물러난다고, 중국군부에 대한 시온의 영향력이 줄어

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온이 지시하는

다음 임무를 기다리면 될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슝핑의 완전한 은퇴가 될

것이라고 리쉬광은 나름대로 예측하고 있었는 데 그것은 정확한 예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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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람들 이름 짓는 게 어려워 실제 중국의 인명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대략적인 경력이나 현직 등을 많이 차용했지만 성격이나 성향 등은 당연히

완전히 가공입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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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공지 [공지]

글이 올라온 것으로 알고 들어오신 분께 죄송하게도 글이 아니라 공고입니다

. [21세기 지구사]는 몇 달 전에 '마루출판사'와 출판 계약을 했습니다

. 출판사와의 계약에 따라 출판 2개월 전인 8월말을 기해 연재분을 삭제

합니다. 삭제는 다음까페에 올린 글들은 지금부터 삭제를 시작할 예정이

고 유조아에 올린 글은 8월 31일 오후부터 삭제작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

전에 연재분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은 유조아(ujoa.com)에서 8월 30일까지

읽으실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인터넷 세군데에서 연재하던 [21세기 지구

사]의 연재도 모두 중단함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저는 전체적인 수정과 보완

과 함께 좀더 빠른 속도로 글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책으로 나올 [21세기 지구사]에는 앞 부분이 좀더 보충된 내용으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계속 다음 내용을 기다리는 독자분들의 요구에 맞춰서 빨리빨리

스토리를 전개하면서 빠트렸던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23세기의 생활상을

좀더 자세히 파고들 생각이고 배달 일행의 23세기 탈출부분을 좀더 박진감있

게 풀어볼 생각입니다. 더불어 연재를 하면서 발생한 앞 뒤 부분의 상호모

순부분도 정비할 예정입니다. 이 책을 모두 완결한 후에는 또 새로운 이

야기로 유조아와 다음까페에서 만나겠습니다. 21세기 지구사와 더불어 오

래전부터 구상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건강하시고 책이 나오

면 책도 많이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

=+=+=+=+=+=+=+=+=+=+=+=+=+=+NovelExtra([email protected])=+=\제

13장 통일한국의 탄생2008년 3월 16일 청와대강민우 대통령은 기

자회견실로 들어오면서 회견실에 운집한 기자들의 수에 놀라고 있었다. 대통

령에 취임한 이래 많은 기자회견을 했지만 오늘처럼 많은 기자들을 상대한

적은 없었다. 아마 거의 전 나라에서 특파원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회견실로 들어오자 CNN의 로빈 애너스트 기자가 열광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 회견실에 들어오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박수는 한국에서는 상당히 낯선 풍

경이었지만 로빈이 먼저 큰소리로 손뼉을 치자 다른 기자들도 모두 박수와

함께 회견실로 들어오는 대통령을 맞았다.  기자회견실의 정면중앙에 놓인

탁자 앞에 선 대통령은 자신이 가져온 원고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잠시 심

호흡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떨리는 순간이었다. 몇 년 전 대통령

선거를 보면서 막판에 근소한 차이로 역전했을 때 이후로 이렇게 긴장되기

는 처음이었다. 대통령이 긴장하고 있는 이유는 기자들이 어느 때보다 많이

모여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는 대통령 담화문의 내용

때문이었다. “친애하는 한민족 여러분!”대통령의 첫 마디가 떨어

지자 기자들의 손이 바빠졌다. 기자들은 대통령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아닌 ‘한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우

리 민족은 이제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도약할 시기에 놓여있습니다. 남북

한의 행정부를 비롯해 군부, 재계, 학계 등 각계 전문가로 구성된 통일위원

회가 발족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남북한이 통일을 위한 기본 전제에 합

일하고도 그 방법과 진행시기에 대한 이견이 많았지만 오랜 연구와 토론 끝

에 그 성과물을 민족 앞에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

니다.”대통령은 잠시 말을 끊고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

았다.  대한민국은 북한의 김정일의 사망과 쿠데타, 민중봉기 등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대한민국 전역에 발효한 계엄령이 아직 해제되지 않고 있는 상

황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상황이 진정되면서 계엄령은 해제되지 않았지만 국

가 전반의 분위기는 상당히 많이 부드러워 졌다. 그러다 지난 2월 16일을 기

해 통일위원회가 발족하자 북한의 소요사태 중에 기승을 부렸던 생필품과 석

유의 사재기도 자취를 감추었고, 그동안 이런 저런 핑계로 해외로 빠져나갔

던 부유층 사람들과 지도층 인사들도 다시 속속 귀국을 했었다. 그에 따라

공항에서는 귀국하고 있는 지도층 인사들을 성토하는 집회가 매일 열렸고,

네티즌들은 정부 당국에게 이 기간동안 한국을 떠나있던 사람들의 명단을 공

개하라며 아우성을 치고, 해외 재산 은닉이 의심되는 사람들의 재산공개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만나면 통일을 이야기했다. 간혹 통일 후의 사회혼란에 대해 우

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남북한이 동시에 힘들어 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고 오랫동안 다른 문화에서 살던 사람들이 같이 합침으로써 파

생될 문화적 충격을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다. 통일위원회가 고민하는 것도

이러한 것이었다. 특히 북한측의 통일위원회 사람들은 이전의 독일의 통일에

서 보듯이 북한 주민들이 일시에 빈민으로 전락하는 일이 닥칠 것을 가장 많

이 걱정했다. 어느 정도의 과도기적 피해는 모두가 감수해야 할 것이지만 남

한의 자본이 일방적으로 주도해나가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통

일위원회 위원들의 한결같은 주장이었다. 거기에 민중봉기를 주도했던 노

동자 계급들은 이미 대규모 정치단체로 발전해서 북한에서 가장 입김이 강한

세력이 되어있었는데 이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석정후 정권의 입

장이었고, 북한과 협상을 진행하는 남한 정책입안자들로서도 중요 고려대상

이 되었다. 이러 상황에서 배달의 서준영 외교부 차관은 협상 당사자가

아닌 지원자로서 조심스럽게 통일위원회에 게스트로 참가했다. 양측의 통일

을 위해 사심 없이 지원하겠다는 기본 입장을 피력하고 강민우 대통령과 석

정후 장군의 지원에 따라 자연스럽게 통일위원회에 참가한 서준영은 연일 정

확한 예측과 기발한 아이디어로 양측참가자들을 조율시키는 역할을 맡게 되

었다. 양측의 입장이 차이가 나 갈등이 빚어질 때도 준영은 중재자로서의 역

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당초 3개월 이상의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한달 만에 합의점을 도출해서 구체적인 시행방안까지 나오게 된 것은

준영의 그러한 역할이 컸다. 이미 남북한의 통일과정에 대한 역사 정보를 이

미 파악하고 있던 준영에게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강민우 대통령은

다시 탁자 위에 놓인 원고에 눈을 돌려 또박또박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반

적으로 담화문의 경우 대통령이 발표를 시작하면서 기자들에게 원고가 배부

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강민우 대통령은 한 번도 기자들에게 사전 원고를 배

부한 적이 없었다. 원고를 미리 배부하면 언론사로서는 여러 가지 방송제작

이나 기사작성에 도움이 많이 되겠지만 기자들이 대통령이 읽기도 전에 담화

문을 빠른 속도로 읽어가면서 담화에 집중하지 않곤 했다. 강민우 대통령은

기자들에게 사전 원고를 배부하지 않고 담화문이 끝나면 그 때 따로 원고를

배부했다. 그러다 보니 기자들은 자연히 대통령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

고, 인쇄문에 적힌 문구만으로는 다소 모호한 뉘앙스를 가진 문장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통일위원회는 우리 민족이 궁극적으로 통일이 되어

야 한다는 전제 하에 그를 위한 단계별로 정책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오는

4월 30일 남북한 동시에 국민투표를 실시합니다. 국민투표의 주제는 ‘과연

우리는 통일을 원하는가’입니다. 남한 국민 과반수와 북한주민 과반수 이

상의 국민들이 모두 통일에 찬성하는 경우 통일위원회는 그 국민합의의 힘을

무기로 계속 통일정책을 펼쳐나갈 것입니다. 만약 이번 국민투표에서 남북

양측의 어느 한 군데라도 과반수를 넘는 찬성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3년

후 다시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이게 될 것입니다.”기자회견실이 술

렁이기 시작했다. 통일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이는 것은 의외였다. 남북한의

통일에 있어서는 굳이 국민투표가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누가 통일을 반대

할 것인가? 비록 반대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나서서 반대의견을

낼 것인가? 누가 통일을 위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시비를 걸 것인가

? 기자들의 그런 분위기를 알았는지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이 번

국민투표에는 비단 통일에 대한 가부결정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통일 방법에

대한 국민적합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남한 주민들에게는 통일로 인해

발생하는 비용을 부담하기 위한 세금증가의 부담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통

일세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의 혈세를 빨아들일 흡혈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

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북한 지역의 개발을 위해 남한 지역의 여러

가지 개발계획이 지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한주민들은 투표를 하면서

이러한 부담을 수용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입

니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질서에 적응하고 ‘조선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의

인민이라는 자존심을 버리고 통일된 ‘대한연방’의 국민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자회견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것은 남한과 북한의 통일 방식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남북한에서는 통일을 위해서는 양 체제가

공존하는 과도기를 거쳐서 단일민족국가로 나아가는 길을 밟는 방안으로서

연방제와 국가연합이라는 두 가지 방안이 주로 논의되어 왔다. 물론 이

두 방안은 사용하는 사람이나 혹은 집단에 따라서 거의 차별성을 보이지 않

을 정도로 구별되지 않는 측면도 있으나 이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연방과 연

합은 명백히 서로 대조되는 모형이며, 정치적으로도 남북이 현격히 대조를

보이며 대립해온 쟁점사항이다.

2000년 이전까지 북한이 주장해온 연방제는 군대와 외교 등을 통합하여 중앙

정부를 구성하되, 지역정부가 자치를 하자는 것이다. 즉 1민족 1국가 2체제

의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남한은 남북연합이라고 명명한 연합제를 제안해왔는데, 이는 현재

의 적대적인 대결상태를 고려하여 상호주권을 인정하고, 국방권과 외교권을

따로 보유하는 “사실상 두 개의 주권국가를 인정하는 연합체를 구성하자”

는 것이다.

연방제와 연합제의 차이는 ‘미연방’과 ‘유럽 연합’을 예로 든다면 그 차

이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미연방은 미국 내 각 주를 하나의 나라(state)

를 인정하여 법률과 의회 행정부를 독립시켜 놓았지만 외교권이나 국방권은

연방정부에서 가지고 동시에 연방정부를 대표하는 한 명의 대통령을 가진다

. 반면 유럽 연합의 각 국가들은 외교권이나 국방권을 따로 가지고 있고 각

나라마다 대통령이나 수상을 따로 두고 있다. 남과 북은 그동안 이렇게

다른 연합과 연방을 주장하며 서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은 채 팽팽히 맞서

왔다. 사실 그동안 남북한은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대가 받아

들일 수 없는 통일방안을 경쟁적으로 내놓은 측면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6월 평양에서 있었던 정상회담에서 남북은 사상 처음으로 양측이 가

지고 있는 통일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

향시켜'나간다는 식으로 문제를 신중하게 시간을 두고 장기적으로 풀어가기

로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남북이 공통성을 인정한 방안은 남측의 “남북연합제”와 북

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였다. 즉 남측의 주장은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것

이 없는데 비해 북측은 연방제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남북의 통일방안에 대한 공통성 인정은 북한이 자신의 연방제

안을 수정함으로써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측은

남측에 연방제 통일을 제안하였다. 이에 김대중 대통령은 남측의 남북연합

제를 설명하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현재와 같은 적대적 대결상태에서

연방제에서 말하는 중앙정부를 구성해서 어떻게 군대를 통합할 것이며, 무

슨 도리로 외교권을 합치겠는가”라고 반문했으며, 이에 대해 김정일 위원장

은 “우리가 말하는 연방도 그런 뜻이 아니며 남측에서 말하는 바와 공통성

이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2008년 북한의 정권이 붕괴

된 시점에 이르러서는 연방제와 연합제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과거에 연방제와 연합제를 가지는 것의 차이는 결국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에 대한 문제였지만 지금은 어떤 방식의 통일이든 결국 주도권은

남한이 가지게 된다는 것은 거의 분명해졌다. 그것은 사실상의 흡수통일인

셈이었다. 통일된 독일의 정식명칭도 독일연방공화국으로 연방제로 통일한

셈이지만 사실상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일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같은 원

리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방제가 연합제와 비교할 때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연방정부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연방제로 통일된다면

연방 전체를 대표하는 ‘한 명의’ 대통령을 선출해야 하는 것이다. 대

통령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5년 동안 우리 민족은 진정한 하나의 조

국을 위한 준비를 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통일된 조국의 이름에

대해 무척 고심했습니다. ‘고려(高麗)’라는 이름도 거론되었고, ‘단국(檀

國)’이나 ‘환국(桓國)’도 거론되었습니다만 결국 북한측 위원들이 우리측

의 설득을 받아들여 통일된 조국의 이름은 우리에게는 변함 없이 ‘대한민국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통일위원회의 북한측 구성원들도 국

제사회에서 우리 민족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라는 통일된

국호를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데 동의했습니다.”기자들 사이

에서 탄성이 나왔다. 북한으로서는 양보하기 어려운 부분을 양보했다는 의미

가 되는 것이었다. “그럼 통일한국의 대통령은 누가 되는 것인가요?”

한 기자가 성급한 질문을 했다. 기자회견실의 분위기는 일순 싸늘해졌다

. 현 대통령 앞에서 그러한 질문은 상당히 격에 맞지 않는 질문으로 들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대통령이 싱긋이 웃었다.

“기자께서 한 번 출마해 보시겠소?”대통령의 말에 기자들이 웃었다

. 기자들은 웃었지만 대통령의 그 말에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대통령이 다음 말을 이었다. “남북한의 통일은 궁극적으로 연방제로 갈

것이며 그 이전에 5년간 국가연합의 과도기적 형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이 단순히 정치적 구조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공감했습니다. 통일을 위해서는 정치조직보다는 경제와 문화

의 통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에 합의를 했고 그를 위해 몇 가지 단계를

나누었습니다.”대통령이 설명하는 통일의 단계는 아래와 같았다.

2008년 4월 30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통일이 민족적 합의를 이루어내

면 2008년 5월 1일 대 내외에 한민족이 하나로 통합되었음을 알리고 대한

연합이라는 국호로 국가연합의 형태를 취한다. 이때부터 화폐가 통합되어 남

북한은 동일한 화폐를 사용하게 되는 등 사회전반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

게 된다. 북한은 이미 3월 1일을 기해 지금까지 고수해온 공산주의 경제정책

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그에 따라 남한의 기업들이 북한에 공장

이나 기업을 설립할 경우 북한 당국의 각종 지원이 뒤따를 것이며, 북한의

주민들 중 원하는 사람들에게 남한에서 기술을 배울 기회가 제공될 것이다.

남한에서 방송되는 모든 TV방송과 영화, 공연, 서적들을 북한에서도 자유

롭게 접할 수 있게 되며 당연히 그 반대로 남한주민들에게도 그동안 북한에

서 제작되었던 각종 문화제작물 등이 제공된다. 군은 매년 남북한의 육

해공군이 같이 참여하는 합동훈련이 실시되며, 북한의 사법제도와 의회제도

, 교육제도 등은 남한의 그것과 동일한 제도로 개편하고 2009년 3월부터 한

반도 내의 모든 학교에서는 ‘한민족교과서검증위원회’에서 검증된 교과서

를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를 통해 진정한 하나의 국가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2013년 9월 2일에는 통일의회를 구성할 국회의원과 대한민

주연방을 대표하는 통일대통령을 뽑는다. 그리고 드디어 개천절인 2013년 1

0월 3일 외교, 군사, 의회를 통합하는 연방정부를 수립하고 3개 연방 즉 북

한을 지칭하는 고려국, 남한을 지칭하는 한국, 배달을 지칭하는 배달국을 구

성원으로 하는 대한민주연방을 건국한다.

“배달은 자발적으로 우리 연방의 구성원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우리 민족

이며 또한 연방의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전 국민의 서명

을 이미 전달받은 상태이며 그에 따라 연방 편입을 허용하기로 했습니다. 물

론 이 문제도 국민투표의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이러한 계획을 듣

는 기자들의 가슴속에는 말못할 설렘과 벅찬 감동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기

자들 중에는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외국인인 로빈도 대통령의 말

을 들으면서 뭔가 뭉클해졌다. 작년에 배달과 일본의 전쟁을 취재하면서 공

부를 시작한 한국어 실력으로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동시통역의 도움을 적게

받고 대통령의 말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친애하는 한민족 여러분, 한민족의 통일로 우리 민

족은 옛날 우리의 조상인 고구려가 이루었던 대웅비를 위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통일은 그렇게 원만하고 순탄하기만 하지

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로 가는 길에서 가시밭을 만나게 될 것이며

새로운 도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의 힘을 믿습니다.

우리 민족의 영광을 위해 다같이 힘을 모읍시다.”대통령은 말을 마치

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왔다. 대

통령의 눈물은 기자들에게 좋은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자회견실에 있는 기자들은 지금 대통령이 어떤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 모르고 있었다. 대통령은 통일에 대한 감격

보다는 앞으로 치러야할 크나큰 희생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기자회견실에

있는 사람 누구도, 대통령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전쟁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

람은 없었다. 대한연방 화폐개혁안 한국과 고려국은 화폐의 통합

을 위해 아래와 같이 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한다.

한국의 경우 기존 1,000원을 1마루로 정하고 보조화폐(동전)로 조각을 사용

한다. 1마루는 100조각이다. 고려국의 경우 기존 50원을 1마루로 정하고 보

조화폐로 조각을 사용한다. 역시 1환은 100전이다. 신화폐의 종류는 100마루

,50마루,20마루,10마루,5마루,1마루의 6종류이고 동전은 50조각 10조각 5조

각 1조각의 4종류였다. 화폐의 모델은 다음과 같다. 100환 - 단군/백두산

50환 - 광개토대왕/광개토대왕비20환 - 세종대왕/성균관10환 - 이순신

/거북선5환 - 신사임당/오죽헌1환 - 안중근/독립기념관50전 - 노동자

10전 - 농민5전 - 무궁화1전 - 진달래구화폐의 사용 및 교환 허가

기간은 2013년까지이며, 2013년까지 '마루'와 '원'을 동시에 사용한다. 공공

기간과 각 사업장의 각종 세무회계 및 금액은 2008년 12월까지 마루와 원 중

각 사업장이 편리한 단위를 사용하여 작성하되 2009년부터의 공식문서의 단

위는 '마루'로 통일한다. 정부는 현대 경제가 대부분 전산화 되어있는 관

계로 1조 5천억의 예산을 증권거래소를 비롯해 은행 온라인망과 각 기업체의

전산화 프로그램 교체작업에 투입하기로 했다. 2008년 5월 1일 현재 환율은

1달러에 0.96마루이었다. 일본 엔화의 경우 일본의 패전 이후 경제불황과

고물가 등에 시달리던 엔화의 가치가 많이 하락해 1마루은 138엔정도였다.

2008년 5월 12일 DMZ권중길 하사는 아침 일찍 휴전선 철책선 앞에서 북

쪽을 바라다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권중길 하사가 서있는 곳은 어제

까지 철책이 있던 곳이었다.  어제까지 휴전선 일대의 철책과 철조망을 제

거하는 작업이 끝나고 오늘부터는 DMZ 내의 지뢰 및 폭발물을 처리하는 작업

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어제까지 진행된 철책제거작업은 아주 순조롭게 끝났

다. 순조로울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즐거웠다. 처음 철책을 제거하는 날은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 국의 언론들이 모두 취재를 했다. 남쪽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철조망 제거에 임하는 뜻깊은 순간을 기

렸다. 북쪽에서도 비슷한 행사가 있었다. 이 작업에는 남한쪽의 철책은 남

한쪽의 군부대에서 북한쪽은 북한쪽에서 그 제거작업을 담당했는데 더 이상

철책근무를 설 필요가 없어진 남북한 군인들은 모두 동원되어 이루어졌다.

철책제거 작업은 철조망을 뜯어내고 철책을 세우는 데 사용한 기둥을 뽑아

내고 그 자리를 다시 평탄하게 다듬는 작업들이었다. 결코 손쉬운 작업이 아

니었지만 철책을 직접 철거하는 데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한 몫 거

는 느낌이 들었다. 뽑혀진 철조망들은 재활용을 위해 트럭으로 실려나갔다.

군인들은 울면서 또 동시에 웃으면서 이 작업에 임했고, 각 사회단체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지원되었고, 재계와 정계에서 제거를 하는 데 드는 소요경비

들이 후워금 형식으로 전달되었다. 그런 식으로 휴전선의 철책제거작업은 예

정보다 훨씬 빨리 일주일만에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DMZ상

의 지뢰와 각종 폭발물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를 위해 육군

산하의 공병대와 민간업체, 경찰기동대 폭발물처리반 등의 인원이 투입되었

다. 그런데 배달에서도 자원봉사자 형식으로 폭발물 제거처리반이 이 작업에

동참한 것이었다. 권중길 하사는 감개무량함을 가슴 가득 느끼며 오늘

의 작업을 위한 마음가짐을 가다듬고 있었다. 지뢰제거는 상당히 위험한 일

이다. 동시에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번 일에서 지뢰나 폭발물을

제거하는 일 자체보다 더욱 어려운 것은 바로 찾아내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그리고 그 이후에 남북한 관계가 긴장에 빠질 때 DMZ에 뿌려지고 설치

된 수많은 지뢰들은 당시 설치된 장소를 보여주는 지도도 남아있지 않은 것

이 태반이고 설령 그런 지도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동안 비바람에 떠

밀려 원래의 위치에서 많이 이동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기 위

해 지뢰제거반 임시 막사로 돌아오는 권하사의 눈에 뭔가 복잡한 장비를 설

치하고 있는 배달의 폭발물제거반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건 뭡니

까?”다가가서 인사를 하고는 대뜸 궁금한 것을 물었다. 배달 소속 제거

반은 컴퓨터 모니터와 키보드를 이상하게 생긴 상자에 연결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쟁반처럼 생긴 납작한 물체와 안에 냉장고가 들어있음직한 상자가

있었다. “그건 일종의 폭발물 탐지기인데 기존에 사용하던 금속탐지기

와는 조금 다릅니다. 땅속으로 약 100m이상 묻혀있는 폭발물도 발견할 수 있

습니다.”배달에서 온 작업반원 중 자신을 최영수라고 밝힌 이가 권하사

의 말에 대답했다. “허! 100m이상요?”“예, 이 지역의 지뢰들은 워

낙 오래전에 설치된 거라 그동안 비바람에 떠다니고 뒤집어지고 하면서 땅

속 깊이 들어가 있는 것도 있을 것으로 예상되거든요.”“글쎄요? 100m나

되는 깊이로 들어가 있는 폭탄을 발견한다고 해도 무슨 수로 제거합니까?

그리고 그렇게 깊이 박혀있는 놈이 무슨 위험이 있을까요?”최영수가 권

중길 하사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무슨 소리십니까? 100m 밑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언젠가는 나올 수도 있는

겁니다. 그게 향후 몇 년 안에는 안나온다고 해도 몇 십 년 후에는 나올 가

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위험도 미리 막아야죠.”“아, 예. 그렇군요.”

그러나 권하사는 과연 DMZ 위의 폭발물을 모두 제거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최영수가 마

우스를 클릭하자 쟁반처럼 생긴 물체가 전방을 향해 날아갔다. 마치 비행접

시 같았다. “허!”권하사가 그것을 보고 감탄을 했다.

“저게 탐색원반입니다. 반경 200m 안의 지하를 살펴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

니다. 지하의 모습은 이렇게 모니터로 잡힙니다. 보고 싶은 깊이는 이렇게

마우스로 드래그하면 지정이 되죠.”권하사는 모니터를 보고 놀랄 수밖

에 없었다. 모니터에는 원반이 떠 있는 지하의 모습이 모두 보여지고 있었다

. 땅 밑에 있는 나무뿌리를 비롯해서 서로 색깔이 다른 흙의 모습 빈 병과

같은 쓰레기까지 모두 모니터 되고 있었다.  “일단 이 근방에는 폭발물

이 없군요.”최영수는 마우스를 움직여 원반을 보다 먼 곳으로 이동시켰

다. 지뢰가 매설된 적인 있는 지역으로서 현재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된 곳

이었다. 원반이 그 지역 가운데로 들어가자 모니터로 확인하기 전에 경보음

부터 울렸다. “현재 폭발물로 추정되는 물체 발견! 검색지역 내 총 17

개 존재!”권하사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날부터 배달의 지뢰탐지장비

는 DMZ 전역에서 폭넓게 작업을 진행시켰다. 배달에서 가져온 장비는 땅

속 깊이 파묻혀 있는 지뢰의 위치와 종류를 빠짐없이 찾아내고 있었다. 애초

에 예상했던 작업기간을 약 10분의 1로 줄이고 있었다. 아니 기간보다는 과

연 모든 지뢰를 다 찾았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는 부분이 더 중요한 것인데

배달의 장비는 땅속에 레이더 같은 것을 넣어 모조리 화면으로 보여주었다.

기존의 금속탐지기와는 그 개념 자체가 틀렸다. 지뢰를 찾으면 또 다른 무

인장비가 지뢰가 있는 곳을 찾아가 땅을 파고 지뢰를 꺼내어서 기술 좋게 분

해한다. 휴전선 지역은 2005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곳이었다. 한국과 고려국도 휴전선의 자연생태계와 식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어떻게 보호할 것 인지의 방법론에 대해 의

견이 분분한 것은 남한이었다. 북한은 이 문제에 대해 남한측에 그 결정권을

일임한 상태였는데, 정작 남한에서는 여당과 야당의 의견이 달랐고, 환경단

체와 경제단체의 의견이 달랐다. 환경주의자들은 지금의 DMZ에 인간의 손

을 최소화시킨 상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하는 주장을 펴는

반면 DMZ를 개발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생태공원으로 조성하여 관광

상품화하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정부측 입장에서는 남북 간의

오랜 단절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개의 도로와 철도 등의 건설이 필요하게 됨

에 따라 불가피하게 DMZ의 훼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에

환경단체는 이 도로의 건설에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생태계의 보전을 위해 남

북한간의 도로와 철도는 기존의 판문점과 경의선으로 한정하자는 주장을 제

기했다. 환경단체들의 이러한 반발은 남북교류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

당국을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통일의 길목에서 정부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시설의 건립에 차질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때 배달국에서

내놓은 안은 남북간을 연결하는 모든 도로를 지하도로로 만드는 것이었다.

배달국은 남북한간을 통하는 총 8개의 도로를 지하도로로 건설하면서 애초

에 정부가 예상했던 예산의 절반가격으로 견적을 제시했고, 환경단체가 이

안을 수용함에 따라 이 안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길이 최소 4km에서 최대

6km의 남북한 연결도로가 배달국의 명진건설이 주도해서 건설하게 되었다.

또한 애초에 왕복 4차선으로 계획되었던 도로는 도로 폭을 16차선이 가능한

넓이를 확보한 후에 양쪽 끝에서부터 2차선씩 왕복 4차선이 되는 도로로 만

들어지고 있었다. 완성된 후 차량통행량이 늘어나면 터널을 추가로 더 넓힐

필요 없이 기존차선의 안쪽 즉, 중앙선쪽으로 차선을 하나씩 더 만들면 되

도록 하는 설계를 가졌다. 이 건설의 시공은 명진건설에서 맡았으나, 명진건

설은 기술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실제적인 건설은 한국의 건설회사와 고려국

의 건설회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배달의 건설기

술은 한국과 고려국의 건설업계로 자연스럽게 이전되고 있었다.   20

08년 6월 3일 (주) 평양통신기기 평양 제1공장“그러니까, 그냥 아무 눈

치 볼 것 없이 자신의 생각이랑 감상을 그대로 말하라니까요? 내말을 못알아

듣슴메?”“아니 그래도 뭔가 주제나 요점을 제시해줘야 되는 것 아니겠습

메? 당체 이거 당황스럽습네다.”리순천 PD는 공장의 한 노동자를 붙잡

고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었다. 리순천은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에 정권

이 바뀌면서 석방되었다. 사면과 복권이 아닌 선고취소와 기소취소라는 특별

조치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공영방송의 형태로 문을 연 평양중앙방송의 PD

로 일하고 있었다. 석방된 후 지금은 고려국의 실질적인 국가원수가 된 석정

후 장군과 만나 그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순천은

세연을 만나고 싶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통화는 여러 차례 할 수

있었다. 세연도 남한의 방송국에서 PD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리순천은 방송국내 직책은 부장으로 승진되었

지만 일선에서 일하고자하는 그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작년

에 보위국에 체포된 이후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던 그의 마

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리순천은 <역동! 일어서는 고려국>이라는 프로그

램을 맡고 있었다. 오늘은 그 프로그램의 시리즈 중 4번째편으로 평양의 한

공장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다소 계몽적이고 표현방식은 스스로도 조금 유

치하게 생각되기는 했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2

주후부터는 이 프로그램이 남한에도 판매되어 방송될 예정이었다. 이 프로그

램을 세연이 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프로그램을 더욱 잘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 리순천이었다. 그래서 리순천은 공장의 근로자에게 인터뷰

를 하면서도 보다 자연스런 얘기를 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

아니 박주임님, 혁명 전에는 어디서 일을 했시오?”“내래 평양 제 8지구

34공장에서 일했습메. 이래봬도 그 때도 평양시민이었다오.”“예, 좋습

니다. 그럼 그때랑 지금이랑 어느 때가 더 좋습네까?” “아 당연히 지금

이 좋지요.”“어떤 점이요?”“아 일단 보수가 좋고, 일도 뭔가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작업하믄서 그 뭐라고 할까 그렇지 그 전투, 전투가

없어서 좋습메.”“전투는 뭘 말하는 겁네까?”그러면서 리순천은 카

메라를 맨 직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어깨에 맸다.

“이거 찍는 것입메?”“예 찍을라구요.”“아 그럼 잠깐만……이 전투

라는 것은 일을 할 때나 학습을 할 때나 전투에 임하는 자세를 견지하기 위

한 것으로 위대한 혁명의 완수를 위해…….”“그만!”리순천이 근로

자의 딱딱해진 자세와 가다듬은 목소리에 질려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주)평양통신기기는 평양에 세워진 회사로 남한의 자본과 북한의 공적자본이

합작으로 들어가 주식회사의 형태로 지워진 회사인데 이러한 형태는 최근에

고려국에 세워진 대부분의 회사가 가지는 일반적인 형태였다. 특히 고려국

에 세워지는 회사에 남한자본이 들어오는 경우 반드시 북한의 자본과 연합하

여 설립하도록 하고 전체자본금의 60%를 넘지 못하도록하였다. 그 자본의 1

0% 이상을 근로자에게 스톡옵션으로 지급되도록 법률화시켰다. 이는 북한의

자원과 저렴한 노동력이 남한의 자본에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근로자들에게 일정량의 주식을 배분하는 제도였다. 즉 (주)평양통신기기에

다니는 임직원은 모두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주주이기도 했다. (주)평양통

신기기는 서울에 본사를 둔 SG텔레콤이 만든 자회사로서 핸드폰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회사로 설립되었다. 이를 통해 SG텔레콤은 저렴한 공장부지

를 확보하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금으로 부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동

시에 각종 세제혜택도 받았다.  자본금은 SG텔레콤이 60%를 투자하고 30%

는 이전에 평양 노동적위대 소속 근로자들이 만든 법인인 평양봉화청년재단

에서 투자하고 나머지 10%는 회사에 채용된 임직원들의 스톡옵션으로 채워졌

다. 그러나 봉화청년재단이나 근로자들이 회사에 투자할 돈이 없는 것은 당

연한 일, 그래서 SG텔레콤은 봉화재단과 근로자들에게 주식을 살 돈을 저렴

한 금리로 빌려주어야 했다. 그 금리는 은행이자를 넘어서서는 안 되도록 했

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SG텔레콤이 전액을 투자했지만 그를 통한 대자본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주식의 60%라면 대표이사 선

임과 정관개정, 수익배분율 결정, 투자결정 등 대부분을 마음대로 할 수 있

는 비율이지만 회사의 폐업, 합병, 업종변경 등 근로자들의 생존권이 걸린

결정을 하기 위한 비율인 66.6%에는 이르지 못하는 범위였다. 동시에 스톡

옵션을 실시하면서 이를 통해 북한 근로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경제원리에 대한 간접적인 체험과 교육을 할 수 있는 효과도 노릴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가진 주식의 가치가 오르는 것을 본 근로자들이 더욱 적극

적으로 회사경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전에 북한 땅이던 고려

국에 새로 사업자등록을 한 회사는 넉 달만에 7천 개가 넘었다. 그 외에

북한 당국은 북한의 경제를 가장 빠른 시일에 부흥시킬 방안으로 관광사업을

선택했다. 그동안 막혀있는 북한 여행길이 열리면서 남한의 관광객들과 이

산가족, 실향민들을 고객으로 삼아 관광사업을 육성하기로 한 것이다. 금강

산과 백두산뿐만 아니라 평양, 개성, 개마고원까지 관광단지로 개발하도록

단기 계획과 중장기 계획을 설립했다. 우선 호텔과 콘도, 민박 등의 숙박시

설과 북한 지역의 전통 음식을 취급하는 전문 음식점까지 들어서기 시작했고

, 장기적으로는 골프장과 카지노 등 이전의 북한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시설까지 계획에 잡혀 있었다. 카지노의 경우 평양과 신의주, 개마고원 등

총 5군데에 설립을 추진했는데 북한 주민들을 이용할 수 없는 외국인전용카

지노였지만 오히려 목표고객은 남한의 고객들이었다. 이 소식에 남한의 일부

시민단체나 지식인들이 반발했지만 어차피 해마다 해외 카지노로 원정 가는

관광객들이 많은 상황에서 그 고객들을 외국에 뺏길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

도 많았고, 북한에서 결정한 문제에 대해 남한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통일 후 경제계에서는 북한에서 넘어오는 불법 노동자들

을 가장 우려했지만 사태는 예상했던 것만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

려 동남아 등지에서 들어오는 불법체류자에 비해 그 수는 많은 편은 아니었

다. 이는 남한의 많은 기업들이 북한에 공장을 세우고 지사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 북한주민들의 입장에서 굳이 남한까지 내려가 일자리를 얻을 필요가

없는데다 북한이 이전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경제체제로 접어들면서 이왕이

면 자신이 살던 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

기에 남한의 살인적인 물가를 직접, 간접적으로 접한 북한주민들이 남한에

이주하는 데 상당한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격적으로 시행된 사유재산

제도에 대한 충격은 온 북한주민들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물론 부작용도 많

았다. 일시에 터진 자유경제제도는 사회 전반에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주의를

낳게 하는 부작용도 심각했고, 자유경제질서에서 필연적인 경쟁체제에 적응

하지 못해 낙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순식간에 퍼진 남한의 상품들에 눈이

휘둥그레진 북한 주민들이 무리한 소비로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사례도 심

심찮게 있었다. 남한의 경우도 사회적인 비용이 엄청났다. 일단 남한정부는

고려국에 특혜에 가까운 차관을 빌려줬다. 남한 내에서 계획된 대규모 정부

주도형 건설은 잠시 연기되었다. 통일세가 신설되어 서민들에게는 새로운 부

담으로 등장했다. 전격적으로 실시된 리디노미네이션(화폐개혁)은 혼란을 가

져왔다. 그러나 통일의 효과는 아주 일찍 나타나고 있었다. 남한의 자본

과 기술, 경영전략과 북한의 자원과 저렴한 임금의 결합은 황금율의 경쟁력

을 낳았다. 수출시장에서부터 활기를 띄기 시작한 한국의 경제는 배달로부터

들어오는 저렴한 석유와 배달에서 일찍부터 파급시킨 신기술을 만나 최고의

절정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북한에 대한 투자 붐이 일었는데 투

자의 활성화는 전반적인 경기를 활성화시켰다. 부동산의 경우도 6년 이내에

되파는 경우 양도소득세는 물론 중과세까지 물어야 하는 제재조치에도 불구

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보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통일이 되면 남북한

이 모두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는 게 경제전문

가들의 새로운 분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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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까지가 4권입니다.

11, 12장에서도 많은 지적을 해주신 정호찬님 및 여러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글쓴이가 아닌지라 모든 부분을 반영할 수는 없지만, 작가분과 협의를

거쳐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서점 쪽에서 책이 꾸준히 주문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책을 사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계속 21세기 배달민족

사를 사랑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

P.S쪽지 기능을 쓸 수가 없어 여기에 씁니다.

가장 많은 도움을 주신 정호찬님께 감사의 의미로 배달민족사 책을 보내드리

고 싶습니다.

메일 주소 [email protected] 으로 주소를 알려주시면 현재 발매된 책 1~

3권과 이후 발매될 후속권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21세기 배달민족사 - 제 13장 통일한

국의 탄생 (2)  2008년 6월 5일 함경남도 단천군 와포면양태술씨는 창

밖으로 금덕산의 산기슭이 보이자 그 모습이 마치 몇 일 전에 보았던 것처

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어제만 해도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려해도 잘

생각이 나지 않던 고향산천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그 모습을 막상 다시 대하

니 마치 항상 알고 있었던 모습인양 생생하게 머리 속에 그려졌다. “저

기 저기 길모퉁이를 돌면 아마 깎아지른 벼랑 밑에 조그만 강이 하나 흐르고

있을거야. 이제 다 기억이 나누만.”양태술씨는 고령이 잔뜩 묻어나는

소리로 말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사장님. 오랫동안 차를 타셨는

데.”운전석에 앉은 젊은이가 말했다. “내래 하나도 피곤하지 않슴

메.”노인의 눈은 차창 밖을 스치는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말했다.

전에 피난을 나선 길은 이렇게 포장이 되지 않은 산길이었다. 얼마나 험하고

추웠던가? 그 시절 자신의 어머니는 여기 있다가는 곧 어느 쪽으로 징집되

든 징집될 거라며 피난 보따리를 싸주셨다. 아마 이 고개 어느 곳에서 양태

술씨는 어머니가 싸준 주먹밥을 아껴가며 조금씩 먹었던 것 같다. 몇 달이

걸린 피난길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양태술씨는 결국 부산까지 내려가게 되

었고, 그곳 국제시장에서 막일로 일을 시작했다. 워낙 성실하고 장사수완이

좋아 돈은 많이 모았지만 항상 고향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

머니의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남북 간에 자유로운 왕복이 가능해진 후 남북이산가족찾기 사업은 새로운

형태로 바뀌었다. 남국 상호간에 신청을 하고 이산가족을 찾아 서로 확인이

되면 정해진 장소에서 한시적으로 만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 기존의 방식

이었다면 이제는 적십자의 활동도 주로 이산가족들의 행방을 찾아주는 선으

로 업무가 축소되었고, 그 방문도 일종의 고향방문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었

는데 주로 여행사가 버스를 대절해 신청자를 모으는 형식으로 민간화되었다

. 게 중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직접 자신의 차를 끌고 고향까지 가는 방법

도 있었는데, 이 경우는 아직 차량을 가지고 내국경선을 통과하는 것은 통관

이나 허가 절차가 조금 복잡했다. 내국경선(內國境線)은 한국과 고려국 사

이에 있는 일종의 출입국사무소를 말하는 신조어인데 아직 완전히 통일이 되

지 않은 상태에서 출입국심사나 세관통관절차 등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사무

소 형식으로 실제로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북한 주민이 왕래하기 위해서

는 사전에 비자나 허가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권이 필요하고 오천마

루(이전 한화 약 5백만원)이상의 현금을 소지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신고가

필요하고, 또한 남북의 정부가 각각 정한 반입 금지된 품목의 물건 등이 정

해져 있었다. 이윽고 차가 고개길을 빠져 나오자 제법 큰 마을을 이룬

와포면이 나타났다. 와포면은 옛날 양태술씨가 고향을 떠날 때 보았던 산골

마을은 아니었다. 철광석을 채취하는 금덕광산 아래 공산당이 지은 광산건물

과 노동자 숙소, 그리고 강제수용소로 사용하던 건물이 있었다. 정치범들의

숙청장소로 잘 알려진 아오지 탄광은 함북의 은덕군에 있는 은덕광산을 말

하는 것이었지만 금덕광산도 그에 뒤지지 않는 악명 높은 탄광이었다. 아오

지로 잘 알려진 은덕군의 탄광은 주로 무연탄을 생산하는 곳이었지만 금덕광

산은 주로 마그네사이트와 주석 등이 생산되었다. 북한에서 아오지로 간다는

말이 일종의 숙청당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면 금덕광산도 아오

지와 함께 적지않은 정치범들이 숙청을 당하던 곳이었다. 공산당 시절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금덕광산은 인민혁명이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양태술씨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이 광산을 다시 살려 고향사람들과

북한주민들을 위한 장소로 꾸미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 세계 마그네

사이트 매장량의 50%가 이곳 함경북도와 함경남도에 있었다. 양태술씨는 이

곳의 마그네사이트를 외국에 수출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북한은

고려국이라는 새 이름을 정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북조선 또는 북한이라

부르고 있었다. 북한의 실권을 얻은 석정후 장군은 ‘국가재건위원회(국재위

)’를 만들어 빠르게 국가의 틀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공산당은 해체

되었지만 공산당이 만든 조직의 틀은 그대로 유지했다. 기존의 조직이 전국

적인 망을 형성해 중앙집권적인 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정후는

일단 평양과 개성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기존의

공산당 간부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노동자 대표와 농민대표들로 대치되었

다. 물론 그렇게 선정된 새 지도부도 오랫동안 공산당이 주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들이기 때문에 조직의 활성화나 생산성 유지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조직의 운영방식도 구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석정후 정권은 대부분 국가기업으로 운영되고 있던 각종 공장과 사업장 농장

등을 민간에 이양하고 선진적인 행정조직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다. 그러한 노력은 북한 전역에서 서서히 그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었

다. 특히 공산당이 운영하던 지방의 여러 사업장은 남한의 자본가 중 그 지

역 출신의 실향민에게 이양하는 획기적인 안을 내놓았다. 그 법안의 시행에

따라 양태술씨는 고향에 있는 금덕광산을 인수하기로 하고 그에 따른 협의

도 하고 그리운 고향도 방문할 겸 이번 행차를 결행한 것이었다. 금덕광산

에 도착한 양태술씨는 먼저 어머님을 찾았지만 예상대로 어머니는 물론 어렸

을 때 헤어진 동생도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한참동안 통곡을

하며 울었다. 어머니 산소는 벌써 중년이 된 조카가 안내를 해줘 찾아뵐 수

있었지만 동생은 이전의 공산당의 정책으로 화장을 해서 무덤조차 없었다.

조카를 통해 친척들을 만나 옛이야기를 나누면서 첫날밤을 보낸 양태술씨는

다음날 아침 일찍 국재위 소속의 직원과 만났다. “어서오십시오. 고향

에 온 것을 환영합네다.”“반갑소. 양태술이오.”양태술씨는 자신에

게 고개를 숙이는 중년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은 양태술

씨의 옛 기억과 고향의 바뀐 모습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양태

술씨는 마을 곳곳에 아직까지 붙어있는 여러 구호와 수용소 건물의 칙칙한

모습을 못마땅해 했다. 국재위 소속으로 새롭게 단천군 지역의 군수를 맡은

리진기는 노인이 옛날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실로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

다려 주었다.

“아 이거 내 옛날 이야기만 한 것 같구만. 미안하오.”“아닙네다. 어르

신.”고려국에서는 이전까지 항상 써오던 ‘동무’나 ‘동지’라는 호칭

을 사용하는 데 새로운 지침이 내려졌다. 동무나 동지가 원래 나쁜 뜻은 아

니지만 그동안 획일화된 호칭이 다양화되는 사회로의 변화에 걸림돌이 된다

는 판단에서 가급적 사용을 자제하도록 지침이 정해졌다. 물론 일반 주민들

에게 강제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국재위 소속 사람들부터 솔선하여 호칭을 바

꾸기로 한 것이다. 특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호칭에 대

해서는 특별히 교육이 필요할 정도였다. 그래서 리진기도 자연스럽게 ‘어르

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리진기가 계속 말을 했다.

“그동안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군요. 어르신”“벌써 60년이 다되어 가는

구만, 내가 이곳을 떠난 게 열 여섯이었으니.…….” “어르신께서 이곳

의 금덕광산을 인수하시겠다는 말을 듣고 이곳 인민들이 벌써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많은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가 큽니다.”

“내래 고향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뭐.”“아시겠지만 금덕광산은 규모면

에서 여기 함남뿐만 아니라 우리 고려국에서는 아주 큰 광산입니다. 우리 국

재위에서는 이 광산의 가치를 1천4백만마루(140억원)로 평가하고 있습네다.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오셨습니까?”“여기 있소.”사업계획서에는 향

후 광산의 운영계획이 나와 있었다. 운영계획에는 수출판로와 생산방식 등이

언급되어 있었고, 고용인들에 대한 임금 및 복지계획 등의 처우와 지역도서

관, 문화센터,사립학교 설립계획 등 지역사회 지원 계획까지 포함되어 있었

다.

“아주 좋습니다. 이것을 우리 국재위에서 심사해서 연락을 드릴 겁니다. 또

어르신께서 이 지역에 정착하셔서 살아야 된다는 것도 아시죠? 고려국의 국

적을 얻으셔야 한다는 것도요.” “물론이요.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소?

고향에 뼈를 묻을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겠소.”“그럼 새

로 사실 집이 필요하시겠군요. 이전에 당 간부가 살던 저택이 싸게 나왔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아니오. 전에 내가 살던 집이 있던 곳에 새로 짖

고 싶소. 거기에 내 조카와 친척들도 살고 있으니…….”“그러시겠습니까

? 그럼 제가 건설회사를 소개해 드리죠. 단천제일건설이라고 인민혁명 전부

터 건설 일을 하던 동지들이 모여서 만든 회사입니다.”“좋습니다.”

양태술 노인은 비로소 오랜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양태술 노인처럼 돈이 많지 않더라도 나이가 많은 실향민들 중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북한

당국은 고향에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향민이 다시 고

향에 정착하면서 필요한 땅과 집을 팔았다. 실향민이 지급한 돈은 일단은 국

가재건위원회로 들어가긴 했지만 그 돈은 곧바로 해당 지역의 경제를 위해

투자되었다. 고향에 다시 와서 정착할 형편이 못되는 사람들도 언제든지 고

향을 방문할 수 있도록 민박을 대행해 주기도 했다. 2008년 6월 14일

황해도 앞 대륙붕 해상“참 놀랐습네다. 벌써 시추준비가 끝났다니”

“여기에서 석유가 생각대로만 나와준다면 북측이나 남측이나 이만한 경사

가 없을 겁니다.”“그러나 사실 좀 의아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네다.

그동안 남측이나 우리 북측이 한반도 주변의 석유를 찾기 위해 그렇게 애썼

는데도 못 찾은 것을 이렇게 쉽게 찾아내다니요.”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남한의 산업자원부 장관인 유진기와 북한의 국재위 산업자원부 담

당국장 한경철이었다.  “하하, 당연히 이해가 안될 겁니다. 저도 처음

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유진기는 배달의 석유시추기술을

접하고 그에 대해 상당 부분 공부를 해왔다. 그래서 사실상 이 분야에 있어

서는 배달의 기술에 대한 신뢰가 쌓여 있었다. “그래도 이번 시추는 아

주 운이 좋았습니다. 첫 번째 지층탐색지역에서 바로 유전층을 발견했으니까

요.”하지만 유진기 장관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배달이 해상소나와 같

은 원리의 지층소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배달은 이미 2

3세기에 알려져 있는 지구상의 유전분포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 치의

시행착오도 없이 유전을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 매장량이 얼마로 나오고 있습네까?”“138억 배럴 정도입니다.”

엄청난 양이었다. 현재 남한의 석유소비량은 2007년을 기준으로 볼 때 년간

약 9억 배럴 정도이고 북한의 소비량은 현재 약 4천만배럴이지만 북한의 소

비량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향후 10년간 북한의 소비량

이 약 8배정도 증가한다고 보고 138억배럴이면 10년간 내수를 충족할만한 양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년간 13억배럴씩 생산할 때 얘기였다.

“문제는 이곳에서 열심히 생산한다고 해도 년간 2억6천만 배럴정도가 생산

할 수 있는 한계일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배달에서의 석유수입과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만 해도 엄청난 양입네다.”한경철 국

장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이 곳의 석유는 사전계약에 의해 북한이

50% 남한이 40% 배달이 10%의 지분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연간 1억3천만

배럴만 생산한다고 해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내수를 충족하고도 남아도는 양

이었다. 향후 북한 내 석유소비가 얼마나 빨리 증가할 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당분간 남는 물량을 남한에 판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얻게 되

는 수입대체효과와 수출로 인해 북한의 경제사정은 현저히 나아질 것이다.

황해도 유전은 북한의 영해에 속한 만큼 북한이 부동산을 남한이 자본을 부

담하고 배달이 시추공사를 맡아서 서해석유공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2008년 6월 15일 오후 6시 일본 도쿄 신쥬쿠 지하철역 신쥬쿠 역은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퇴근시간이 되면 지하철에서 내려 버

스를 타는 사람과 반대로 버스를 타고 와서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로 북적거

렸다. 후유코는 친구인 사나에와 함께 지하철을 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지

하도를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신쥬쿠에 있는 작은 사무실에서 사무원

으로 일하고 있었다. 배달과의 전쟁 이후 일본의 경기는 상당히 악화되었지

만 최근 들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전쟁 직후 수출경기 악화와 내수침체

로 하향선을 그리던 일본의 경제는 배달과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열도 주변에

유전을 탐사하기 시작하면서 한결 나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게 패배하고 미국의 원조로 경제를 일으킨 것처럼

이번에 배달과의 전쟁에 패한 후 배달과의 경제협력 관계를 구축하면서 태

평양전쟁 때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배달을 새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이 비록 배달과 전쟁을 하기는 했지

만 일본의 민간인들 중에는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없었다. 군인들이 많이 죽

기는 했지만 그 전쟁의 원인도 일본 정부와 군부의 시대착오적인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일본에는 배달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것은 오래 동안 일본에 불고 있던 한류열풍

과 맞물려 순식간에 하나의 유행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극우단체를 중심으

로 ‘복수’를 다짐하는 과격한 목소리는 항상 잔존하고 있었지만 대다수 일

본인들은 일본의 경제부흥을 위해 일본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인정신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경제부흥을

위해 다시 미래를 준비하는 “일어나라 일본”이라는 제목의 캠페인이 진행

되고 있었고,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 “일어나라 일본” 캠페인 시리즈가 보

도되고 기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국민 개개인의 생활은 전쟁 전과 비교

하면 침체된 것이 사실이었다. 후유코와 사나에는 동경 근교의 도치기현에

서 살고 있었고 지하철로 40분을 타고 가서 다시 역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집까지 15분 정도 가야 했다. 매일매일 출퇴근이 힘들긴 하지만 실업률이

높은 요즘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후유코! 이거 너 가

져, 프레젠트야.”사나에가 후유코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요즘 인기 있

는 핸드폰 케이스였다. “우와, 이쁘다. 고마워 근데 이거 왠 거니?”

“이거 사면서 너 줄려고 같이 하나 샀지.”“꺅! 이거 엄청 비싼 건데

무슨 돈으로 산 거야?”   후유코는 사나에가 보여주는 핸드폰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한국제 핸드폰이었다. 한국에서 개발된 파동역학형 핸드폰이

었다. 외관부터 부속까지 금속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첨단형 멀티미디어 핸

드폰이었다. 사나에는 무선 핸즈프리를 귀에 끼우면서 말했다. “새로

사귄 아저씨가 하나 장만해 줬어.”“사나에, 너?”후유코는 눈을 동

그랗게 뜨고 사나에를 불렀다. 사나에는 전에도 몇 번 원조교제를 하기도 하

고 성인잡지의 모델 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우린

그냥 순수하게 만나는 거야. 그리고 오래 만날 생각도 없어.”“뭐 하는

남자야?”“다이오 전자 부장이래.”더 안 들어도 뻔한 일이었다. 그

런 대기업의 부장이 결혼을 안 한 총각일 리는 없으니까. “후유코”

사나에가 후유코를 달래듯이 팔을 잡아끌며 불렀다.

“너도 남자 한 번 만나볼래? 그 아저씨가 자기 친구도 애인이 필요하다고

좀 소개시켜 달라고 하던데.”“난 관심 없어.”“그러지 말고, 후유코

.”“그만!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후유코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 사나에에게 더 말을 하게 하면 스스로가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후

유코라고 순결을 지키면서 조신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 남자와의 데이트가 싫은 것도 아니었고, 데이트한 상대가 마음에 들면 언

제든지 같이 잘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 그러나 돈 때문에 마음에 안드는 남자와 데이트를 하고 섹스를 할 수는 없

다고 생각했다. 후유코는 입을 악다물고 돈 받고 옷을 벗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생각을 하며 지하철 역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

다.  “어머 저 사람 좀 봐.”앞서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후유코를

붙잡고 사나에가 말했다. 사나에가 가르킨 곳에는 한 사내가 푯말을 들고

있었다. “도쿄 시민들은 오는 6월 23일 전까지 모두 다른 지역으로 대

피하시오.

참고로 내일은 오후 2시 20분부터 비가 옵니다.”한 사내가 이렇게 적힌

푯말을 들고 신주쿠의 역 입구에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사내를 쳐다보며 수군거리기도 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사내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무표

정한 얼굴로 푯말을 들고 서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 뭐야? 미친 사람

아냐?”“도 닦는 사람인가?”아니게 아니라 사내의 옷차림은 조금

남루한 편이었다. “야 빨리 가자. 저런 사람들 관심을 보이면 괜히 말

을 걸고 도를 믿으라든지 점을 봐주겠다든지 결국은 돈을 요구할 거야”

사나에가 후유코의 옷을 잡아 끌었다. “얘는 자기가 먼저 나를 세워놓

고는?”그러나 사내는 주변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귀찮게 하지 않았다

. 다만 푯말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푯말을 머리 위로 들고 좌

우로 돌리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고자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묵묵히 푯말을 들고 있던 사내는 오

후 7시가 되자 푯말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다음날 비가 내리는

신주쿠 역에서 후유코는 사내를 다시 만났다. 오후 일곱시가 거의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후유코는 혼자였다. 사나에가 약속이 있다면 다른 길로

갔기 때문이다. 사내는 우산도 안 쓴 채 푯말을 들고 있었다. “도쿄

시민들은 오는 6월 23일 전까지 모두 다른 지역으로 대피하시오. 참고로

오늘 저녁 요미우리와 주니치의 경기는 1점 차이로 주니치가 이깁니다.“

사내는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푯말을 들고 있었다. 내리는 빗발이 그의

얼굴을 때렸지만 사내는 묵묵히 푯말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

와는 달리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 정도 발걸음을 멈추고 푯말을 쳐다보았다

. 일본인들에게 야구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임에 틀림없었다.

특히 전쟁의 패배와 경기 침체로 우울한 일본에서 프로야구는 일본사람들에

게 위안이 되는 것으로 특히 올해 들어 그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

고 있었다. 후유코는 어제 전철을 탄 뒤로는 사내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

다가 다시 사내를 만나자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라

? 진짜 비가 오고 있잖아? 이 비가 언제부터 온 거지?”어제 후유코가

본 푯말에는 오후 2시 20분부터 비가 온다고 적혀 있었다. 후유코는 정확하

게 언제부터 비가 왔었는 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지만 오후에 비가 시작했다

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나왔을 때는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사내가 들고 있는 푯말을 다시 살펴봤다. 6월 23일 전까지 다른 곳

으로 대피하라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후유코는 자신도 모르게 사내에

게 다가갔다. “어이, 아저씨, 아저씨가 무슨 점쟁이라도 되나?”그

러나 후유코보다 먼저 지나가던 사내 세 명이 먼저 사내에게 다가가서 시비

를 걸기 시작했다. “아 뭐. 우리가 요미우리 팬이라서 이러는 것은 아

닌데, 기분 나쁘잖아, 요미우리가 진다니.”그 중 하나가 푯말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런 말 없이 자리를 한 발짝 정도 옮겨

다시 푯말을 들었다. “아니 이게 사람 말이 말 같지 않아? 아님 점쟁

이에 벙어리라도 되나?”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 때 일행 중 하나가 사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후유코가 비명을 질렀다

.

“조심해요!”그러나 후유코의 비명은 괜한 걱정이 것 같았다. 사내는

가볍게 주먹을 피했다. 주먹을 피하는 바람에 휘청거린 남자가 겨우 중심

을 잡고 섰다. “어쭈 이것 봐라”다시 남자가 주먹을 휘두르자 이

번엔 그 사내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남자의 멱살을 잡는 것 같더

니 순식간에 남자를 밀쳐냈다. 순식간의 일이었지만 사내는 마치 멱살을 잡

은 채 남자를 들어올려 던지는 것 같았다. 남자는 수 미터 밖까지 떨어져 넘

어졌다. 보고 있던 일행이 같이 덤벼들자 사내는 가볍게 두 사람을 제압해

버렸다. 구경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넘어진 일행이 일어서서 사

내를 보자 사내는 무서운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았다. “야 가자! 미친

놈 상대해봐야 우리만 손해지.”일행이 바닥에 침을 뱉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사내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푯말을 높이 쳐들었다. 주변에 모인 구

경꾼들이 모두 그 푯말을 잘 볼 수 있었다. “야, 주니치가 한 점 차이

로 이긴다는데?”“설마! 저기 전광판 봐라 요미우리가 7대 0으로 이기고

있다.”한 사람이 옆에 있는 친구에게 말하자 그 친구는 옆 빌딩 위에

있는 대형 광고전광판을 가리켰다. 전광판에는 ‘4회초 현재 요미우리 7-0

주니치’라는 글이 보였다. 사람들은 주니치가 한 점 차이로 이긴다는 말

에 흥미를 보이긴 했지만 아무도 푯말의 첫째 줄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후유코는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사내는 후유코를 보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6월 23일에 무슨 일이 있는데요? 왜

대피해야 하죠?”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시계를 보던

사내가 푯말을 내리더니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후유코도 시계를 보았다

. 정각 7시였다. 후유코는 사내를 뒤쫓았다. 그러나 앞서서 한 블록 정도를

걷던 사내는 노견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에 타더니 그냥 가버렸다. 후

유코가 집에 도착해서 씻고 자기 방에 앉은 시간은 9시가 조금 못된 시간이

었다. 후유코는 TV를 켰다. TV에서는 나고야 돔에서 열리고 있는 야구경기를

중계하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네요.”“예, 주니치가 극적인 역전

승을 거두네요. 이로서 주니치가 요미우리와의 승차를 한게임 반으로 벌리면

서 계속 선두를 유지하게 되네요. 요미우리가 오늘 경기에 이기면 선두로 나

서게 되는 건데 요미우리 팬들에게는 무척 아쉬운 경기였겠습니다.”“예

, 초반에 7점 차이로 앞서가던 요미우리가 우위를 지키지 못하고 역전을 당

했습니다. 오늘 경기는 8대7로 주니치 드래곤스가 요미우리를 한 점차로 이

겼다는 소식 전해드리면서 오늘 중계를 마칩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

합니다.”후유코는 TV에 눈을 뗄 수 없었다. 2008년 6월 17일 일본

도쿄 신쥬쿠역푯말을 든 사람의 예언은 정확했다. 두 번의 예언을 정확

하게 한 것이다. 후유코는 저녁 여섯시가 되자 신쥬쿠 역으로 향했다. 사내

의 오늘 예언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신쥬쿠 역에는 어제와 다름없이 사

내가 푯말을 들고 있었는데, 주변의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이미 두 번

의 예언을 맞춘 것을 후유코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알아차린 사람들이 많았

던 것이다. 그들은 사내의 오늘 예언이 궁금해서 사내를 만나기 위해 온 것

이었다. 그러나 사내가 올린 푯말은 사람들의 기대나 흥미를 끌만한 것이 아

니었다. “도쿄 시민들은 오는 6월 23일 전까지 모두 다른 지역으로 대

피하시오. 참고로 오늘 하루 도쿄의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62명입니다.“

“아니 교통사고 사망자수가 뭐가 중요한가?”“그런 거 말고 내일 증권

시세는 모르시오?”“오늘 저녁 프로야구 결과는 알 수 없나요?”“제

가 고민거리가 있는 데 좀 물어봐도 될까요?”사람들은 사내가 들고 있

는 푯말의 내용에 실망하며 자신이 궁금한 것을 물으며 사내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급기야 사람들은 사내의 팔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옷을 붙잡고 소동

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니 6월 23일에 무슨 일이 있는 지 알아야 피하

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야?”사내는 사람들의 소동에 다소 당황한 듯 했

다. 그 와중에 사내는 사람들 속에서 후유코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후유코는 깜작 놀란 듯한 표정을 짓다가 가볍게 목례를 했다. 후

유코를 쳐다보던 사내가 결심한 듯 푯말을 버리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

서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사내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아쉬운 듯 또는 조금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웅성거리다가 흩어졌다. 후유코는 바닥에 버려진 푯

말을 잠시 보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도치기 역에서 내린 후 역에

세워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던 후유코는 집으로 가는 들길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 기겁하듯 놀랬다. 후유코가 다가가자 사내는

엉덩이를 깔고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후유코가 자전거를 세웠다.

“여긴 어떻게…….”“후유코상?”“제 이름은 어떻게 아시죠?”사

내가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제가 후유코상의 이름을 아는 게 이상한가요?”그러고 보면 내일 일을

아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안다고 이상할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목

소리 좋으시네요. 그런데 왜 그동안 한 마디도 안 하셨어요?”후유코가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신쥬쿠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쌓

이다 보니 말을 할 필요가 생겼네요. 사람들이 그렇게 반응할 줄을 몰랐거든

요.”“근데 여긴 무슨 일로……?”“여기에 볼 일이 있는 게 아니라 후

유코씨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저에게요?”“예, 사실은 며

칠 간 제가 했던 일을 후유코씨가 대신 해주었으면 합니다.”“예?”

후유코는 깜짝 놀랐다. “아니 저보고 그 푯말을 들고 역 앞에 서있으라

는 말인가요? 그리고 전 미래를 알지도 못해요.”“미래의 일은 제가 전화

로 알려드리죠. 그러면 후유코상이 그걸 적어서 들고 서 있는 것입니다.”

“아뇨, 전 못해요. 직접 하시지 왜 저보고 하라고 그러시죠?”“이건 도

쿄의 천만 시민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예?”“그리고 꼭 티켓을

들고 서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인터넷을 이용하십시오. 인터넷에 신쥬쿠의

푯말사나이 정도의 제목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세요. 제가 예언은

전화로 불러드리겠습니다. 이미 어느 정도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기 때

문에 인터넷을 이용한다면 금방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그리

고 2일 후에 언론에서 관심을 보일 겁니다. 그때 후유코씨가 방송에 출연을

하십시오.”“방송 출연요?”“예, 제가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조금 곤

란합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으로 여러 가지를 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후유

코씨가 제 말을 듣고 메신저 역할을 할 뿐이라면 사람들도 후유코씨에게 곤

란한 질문은 하지 않겠죠.”그건 맞는 말이다.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자신도 들을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이라면 모른다는 게 이유

가 된다. 하지만 사내가 방송에 출연한다면 모른다고 하는 게 거짓말처럼 들

릴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6월 23일에 무슨 일이 있는 거죠? 그리고 아저씨는……어떻게 그걸

아시는 거죠?”사내는 그 말을 듣자 손가락을 하나 펴서 입에 가져다

대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알면 알수록 힘들어

집니다. 그냥 저를 믿는다면 동경의 시민들을 위해 이 일을 해주었으면 좋

겠소. 그에 대한 보답을 하겠습니다.”“보답이요?”“예, 어떤 보답이

기다리는 지는 차차 알게 되겠죠. 그리고 우선 이거 받으세요.”사내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최첨단 한국산 파동역학 핸드폰이었다.

“이 전화로 제가 전화를 걸겠습니다.”사내는 그 말만 마치고 역 쪽으

로 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저, 저 이름이 어떻게 되죠?”후유코가 사내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냥 케이(K)라고 해두죠.”사내가 대답했다. 2008년 6월 20일

화요일 경남 진해역오후 5시, 석양이 아름답게 보이는 진해역 플랫폼에

서 강민우 대통령과 석정후 국가재건위원회 위원장이 함께 자리했다. 북한의

인민혁명이 일어난 후 벌써 세 번째 남북정상회담이었는데 오늘은 정상회담

의 자리라고 하기보다는 대륙횡단철도의 개통식에 참석하는 의전일정의 성격

이 강했다. 그래도 양 정상이 만나면서 몇 가지 남북간의 경제 협력 원칙에

대한 진정된 발표가 있었다. 기자들을 위한 합의문 발표와 사진촬영을 위한

포즈가 있고 난 후 두 정상은 플랫폼으로 나와 내외 귀빈들과 일일이 인사

를 했다. 플랫폼에는 남한의 각 관계 장관과 북한의 국재위 담당국장들이 함

께 자리를 했고, 러시아, 중국, 독일에서 온 각 국의 철도 관계 부서의 장들

이 자리를 함께 했다. 오늘은 UN ESCAP(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가

주관하는 AE대륙횡단철도의 개통일이었다. AEA대륙횡단철도는 아시아-유럽

을 연결하는 화물열차노선이었고, 그 아시아쪽 종점이 바로 부산신항이 자리

한 진해역이었다. 처음에 이 철도의 종점을 기존의 부산역으로 할 것인지 또

는 기존의 경부선 새마을호 종점으로 이용되고 있는 부전역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역으로 할 것인지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부산신항의 부두와

연계되고 또 화물철도를 승객용인 KTX와 같은 역을 사용할 경우 발생할 혼잡

을 피하기 위해 부산신항 항만에 새로운 역을 신설하여 종점으로 정했다. 이

진해역은 화물차 전용노선으로 이용되고 기존의 부산항과 마산항까지 연결

하는 별도의 철도노선을 건설 중이었다. 이 노선은 현재 화물노선만을 운영

중이었지만 육로로 만주와 러시아를 통해 유럽까지 연결하는 특급여객 열차

계획이 장기적으로 잡혀 있었다. 예전에 운행하던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부활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시간이 여유로운 고급 승객을 위한 최고급 호텔수

준의 객차를 운영할 계획을 장기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AEA대륙횡단철

도는 진해역을 출발하여 기존의 새마을호 노선인 경부선을 통해 서울로 갔다

가 다시 문산 개성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중국의 단둥과 만주를 지나 러시아

의 크로스노예, 페테르스부르크(모스코바),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통해 최종

역인 독일의 베를린까지 가는 노선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한 화물은 다시 유

럽의 철도망을 통해 유럽 여러 국가로 이동이 가능하다.  이미 2000년 초

부터 추진하던 대륙횡단 열차의 노선 건설이 드디어 완결되어 개통식을 마친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운행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역에는 이미 유럽 각 국으

로 갈 화물들이 열차에 실려 첫 번째 운송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존에 해상

을 통해 운송하는 비용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저렴한 운송비와 해상운송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운송방법으로 벌써부터 유럽으로 수출할 회사들이

이 철도의 개통을 기다려 왔다. 특히 일본과 동남아 각 국의 화물은 물론 호

주와 뉴질랜드까지 이 철도를 이용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고 저렴했다. 따라

서 부산신항의 경우 수출을 하기 위한 국내 화물의 취급양은 줄 것이지만 국

제환승화물의 중간기지가 되어 국제화물의 취급량은 지금보다 훨씬 증가하게

되어 인근의 상하이와 홍콩의 선적 물량을 앞지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 애초에 중국은 상하이나 홍콩에서 출발하는 대륙노선을 추진해왔지만 중국

본토의 철도 노후와 중국을 종단하는 경우 부산에 출발하는 노선보다 운행시

간이 거의 하루 가까이 더 걸리는 점이 단점으로 부각되어 결국 부산으로 결

정되었다. 여기에는 배달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북한 내에 노후화된 철도

를 신속하게 보수하고 정비한 공로도 있었다. 그러나 배달은 오늘 개통식에

공식적인 호스트나 관계자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다만 축하사절로서

주한배달국대사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오혜린이 참석했을 뿐이다. 오

혜린은 늘 하던 눈에 띄는 의상대신 차분하고 격식에 맞는 의상을 선택해서

다른 참가자들 대신 자신에게 시선이 돌아오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그렇

지만 그녀의 미모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축하드

립니다. 대통령님. 이로서 우리 한민족이 또 하나의 날개를 달게 되겠군요.

”오혜린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도열하고 있다가 대통령이 차례차례 인

사하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대통령이 내미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예,

감사합니다. 배달에서 애써주신 덕입니다.”대통령이 배달이 철도건설

에 참여한 바를 잊지 않고 감사의 말을 건넸다.

오혜린은 곧이어 석정후 고려국 국가재건위원장과 마주했다. “축하합니

다. 위원장님.”“감사합네다. 대사님, 우리 고려국에서 배달이 여러 분야

에 도움을 많이 주고 있어 감사한 마음뿐입네다.”“그건 당연한 일이 아

니겠습니까? 우리는 한 민족이지 않습니까?”“그렇지요. 우리도 배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식순대로 개회식과 테이프커팅이 있

었고, 각 주요인사들의 격려사와 경과보고 등 요식행사가 있었다. 그리고 드

디어 오후 6시, 대륙횡단철도를 운행할 첫 번째 열차가 씩씩하게 기적을 울

리고 출발했다. 아마 첫 열차는 원래 정해진 운행시간보다 훨씬 오래 걸릴

것이다. 각 국의 각 역마다 대륙횡단 철도의 개통과 첫 열차의 운행을 축하

하는 행사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차가 출발한 진해역 청사에는 참

가자들을 위한 만찬이 준비되었다. 만찬자리에서는 향후 대륙철도가 가져올

경제적 효과와 문화적 가치에 대한 예측들을 이야기하고 그간의 노고를 서

로 축하하는 자리가 되었다. 동시에 철도가 지나는 각 국이 하나의 기구를

만들어 철도의 운영 등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하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출범

과 회의를 한국의 부산에서 올해 중에 열기로 하고 두 번째 회의는 베를린에

서 하기로 합의했다. 첫 번째 다루어질 안건은 각 국가 간에 철도이용료와

화물운송료 등 현재 적용하도록 되어 있는 요금체계에 대한 각 국의 분배문

제에 관한 협정이 될 것인데,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각 국가가 공동으로 출

자하는 다국적기업의 탄생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오혜린은 만

찬에 참석한 사람들과 일일이 만나고 있었다. 오혜린의 남북의 외교부장관

과 외교담당국장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끼어들었다. “어서오

십시오, 대사님.”정상호 외무부 장관이 반갑게 오혜린을 맞았다.

“이쪽은 국가재건위의 이광현 외무담당국장이오.”“처음 뵙겠습니다. 국

장님.”“반갑습네다. 정말 소문대로 아름답습네다.”“감사합니다. 저

그 말 해주시는 분이 제일 좋더라고요. 호호호.”오혜린이 쾌활하게 웃

었다.

“그런데 대사님”“예?” “평양에도 배달대사관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

습네다. 본격적으로 외교부를 설립해서 구체적으로 여러 가지를 논의했으면

합네다만.”“아 예, 그렇지요. 이미 섬에서 그 문제에 대해 협의중입니

다. 그런데 곧 연방제로 전환되면 대사관이라는 명칭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 협의 중입니다. 지금의 국가연합의 형태라 대사관이라는 존

재가 가능하지만 하나의 국가 사이에 대사관이라는 게 조금 이상해지지 않겠

습니까?”“아참! 그렇군요.”  “조만간 우리 주한 배달대사관도 폐쇄

될 예정인데요. 저는 큰일났어요. 이 만한 자리가 없는데 곧 실직할 예정이

라서요.”그 말을 하면서 오혜린이 웃자 두 사람이 따라서 웃었다.

“실직하면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가요?”정장관이 웃으며 말하자 오혜린

이 고민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은 한국남자나 하나 잡아서

시집을 갈까요? 여기 한국남자랑 결혼하면 한국 국적을 준다면서요?”“

제가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좋죠. 정장관님이 추천하시는 신랑감이라

면 무조건 오케이예요.”“그래요? 그럼 조만간 약속을 잡겠습니다. 진짜

죠?”“그럼요. 정말이예요.”정장관은 미국에서 공부중인 아들을 조

만간 들어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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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케이냐....!(의미불명)  21세기 배달민족사 - 제 13장 통일한

국의 탄생 (3)  2008년 6월 22일 23:00 일본 도치기 현 후유코는 컴퓨

터 앞에 앉아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도쿄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집단메

일을 보냈다. 지난 1주일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사내를 만난 날

집에 오니 이미 컴퓨터가 배달되어 있었다. 집에는 인터넷이 깔려 있지 않

았는데 NTT(일본통신)에서 와서 초고속망을 깔았다. 누군가가 후유코의 집에

인터넷을 신청하고 이미 대금까지 지불한 것이다. 사내의 말대로 언론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인터뷰를 하고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그러나 방송

국에서는 6월 23일의 위기설에 대해 흥밋거리로만 다루려고 할 뿐이었다.

취재기자의 질문에 후유코는 대부분을 대답하지 못했다. 후유코가 할 수

있는 말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신쥬쿠에서 푯말을 들고 있던 사내가 전

화를 걸어오면 그 내용을 인터넷에 올린다는 말뿐이었다. 방송에서는 후유코

를 소개하고 그 때 당시 신쥬쿠에서 사내를 봤다는 목격자들을 찾아 인터뷰

를 했다. 하지만 사내의 정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

다. 하지만 방송에서 후유코가 들은 대로 전한다며 말한 예언은 정확하게 현

실로 나타났고, 후유코가 개설한 홈페이지는 방문하는 사람들로 여러 번 서

버가 다운되었다. 그러자 각 업체에서 서버를 확충시켜 주고 배너에 광고

를 하겠다는 사람들의 문의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후유코

는 벼락부자가 되었다. 후유코는 통장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보

고 놀라긴 했지만 그보다는 사내의 말대로 도쿄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일에

전념했다.

예언은 사흘 전부터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예언은 이시가야 전철역을

중심으로 아래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피하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후유코가 전하는 예언의 놀라운 적중률 때문에 이미 도쿄는 사람들이 피신

을 나가 마치 유령도시처럼 되었다. 대피해야 할 지역은 주택가는 적었지만

상업지구와 공업지구, 그리고 항만지구였다. 문제는 대피를 해야 할 곳에

천황궁이 있다는 것이었는데 천황궁에서는 후유코의 예언을 믿지 않는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지만 나라시에서 열리는 천제를 위해 천황가족들이 나라시로

옮겨가자 동경 사람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적극적으로 대피에 나섰다. 후

유코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대피할 것을 인터넷을 통해 알리

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때아닌 피난 물결이 넘치는 동경 인근의 도로들을 보

도하면서 초유의 사태를 보도하고 있었다. 도쿄의 대 피난은 외신에서도 관

심거리였다. 일부 시민들은 장난 같지도 않은 예언으로 동경을 비울 수 없다

며 계속 버티고 있었다. 자정이 되자 후유코는 초조해졌다. 과연 무슨 일

이 있을 것인가. 후유코의 집은 이미 동경 근교의 도치기 현이라 피난이 필

요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모든 게 불안했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도 걱정이었다. 23일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다면 이 일은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지만 어쩌면 후유코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이런 저

런 걱정으로 TV를 켜 놓고 보고 있던 후유코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어떤 충격에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깬 후유코는 방금 자신을 깨운 것이

무엇인지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주위는 조용했다. 그때 몸으로

전해 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이다.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배워온 지

진 대비요령에 따라 후유코는 가스밸브를 잠그고 책상 밑에 들어가 몸을 낮

게 웅크리고 앉았다.  TV에서는 아직 별다른 반응 없이 심야방송이 진행되

고 있었다. NHK에서는 미리 녹화한 재미없는 토론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 갑자기 방송이 꺼지고 방송신호 없음이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그 와중에도

후유코는 몇 번이나 지진의 진동을 느꼈다. 그 진동은 점점 간격이 줄고 점

점 강해지다가 한동안 길게 이어지더니 잠잠해졌다. 약 5분후 NHK에서 다

시 방송이 흘러나왔다.

“속보입니다. 현재 도쿄만과 도쿄시 지역 일대에 지진으로 피해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지진의 영향으로 NHK본사가 파괴되어 이 방송은 요코하마 NHK방

송에서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도쿄 상공으로 방송헬기를 보냈습니다.

잠시 뒤부터 보다 자세한 상황을 보도 드리겠습니다.”후유코는 마치 꿈

을 꾸는 것 같았다. 도치기 현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면 엄청난 규모의 지

진일 것이다. TV에서 계속 아나운서가 말을 이었다. “현재 측정된 지진

의 규모는 9.7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도쿄만 주변은 현재 제대로 서있는 건

물이 거의 없습니다. 이번 지진은 1995년에 있었던 고베대지진의 규모를 상

회하는 것으로서 도쿄 일대의 피해가 막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명피해는

아직 집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만 20대의 한 젊은 여성이 일주일 전부터 후

유코의 예언이라고 불리는 예언을 해온 것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대피한 것

으로 알려져 인명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천황가족들도

모두 나라시로 대피한 상태라 참변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일본의 언론

에서는 그동안 ‘후유코의 예언’에 대해 흥밋거리로만 다루다가 막상 지진

이 일어나자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 경악하고 있었다. TV를 보고

있던 후유코는 한참 전부터 전화기가 울리고 있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고 전

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수고했습니다. 후유코상.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소.”“저는……저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어느새 후유코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후유코상 이제 많은 사람들

이 후유코상에게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연예인 못지 않은 유명인사가 될 것

이요. 일본에서의 생활이 평탄하지 않을 것 같으면 지금 결심해요. 후유코상

이 좋다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오세요. 지금 데리러 가겠습니다.”후유

코는 잠시 생각했다. 후유코가 지금 없어진다고 해도 슬퍼할 가족은 없었다

. “거긴 어떤 곳이죠? 4차원의 세계 같은 곳인가요?”“하하, 아니오

, 그냥 외국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후유코상”“데리러 와 주세요. 근데

그곳에 가면 돈이 필요하겠죠? 저 돈을 좀 모아놓았는데요…….”“이곳

에서도 일본에 있는 후유코상의 계좌를 이용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필요한 물건만 간단히 챙기세요.”전화를 끊고 나자 후유코의

집으로 많은 전화가 걸려왔다. 거의 대부분 방송사와 언론사들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후유코는 그들의 인터뷰 요청에 거절하다가 전화기의 코드를 빼

버렸다. 짐을 챙긴 후 후유코는 컴퓨터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컴퓨터

를 끄기 전에 친구인 사나에에게 짧은 메일을 남기고 사나에의 계좌에 적지

않은 돈을 이체시켰다. 사나에는 더 이상 돈 많은 아저씨들을 만나러 다니

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도쿄대지진의 첫 지진은 2008년 6월 23일 새벽

03시51분쯤 발생했다. 진원지는 도쿄만 앞 바다 부근 땅속 20㎞ 지점으로

통상적인 지진에 비해 대단히 얕았다. 진동은 약 10분간 6번에 걸쳐 있었고

, 진동 중 가장 긴 것이 2분05초 가량 계속돼 상당히 긴 편이었다. 일본

기상청 분류로는 진도 7이었고 리히터 규모(M)로는 7.2을 기록했다. 멀리 떨

어진 오사카에서도 진도 4의 강한 흔들림이 감지됐다. '진도 7'은 일본 기

상청의 10단계 분류체계에서 가장 센 것으로 사람이 똑바로 서 있기 힘들며

내진 설계가 된 건물도 균열이 간다. 여진은 수백차례 계속돼 날이 밝은 2

3일 오후에도 진도 5강의 지진이 관측됐다. 일본 기상청은 "앞으로 일주일간

은 추가 강진이 발생할 수 있다"며 경계를 당부했다. 도쿄시내는 바다에서

부터 땅 쪽으로 마치 가지 뻗은 것처럼 땅이 갈라져 갈라진 땅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있었다. 주요 간선도로는 지반 침하와 균열로 마비됐다. 천황

궁의 건물도 대부분이 완파되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였다. 도쿄

시민들의 대부분이 대피한 상태였으나 대피하지 않은 사람들 중 대부분이 사

망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지진이 덮친 도쿄의 동남부 지역에서는

아직 생존자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도쿄시민들이 대규모로 대피하지 않

았다면 그 인명 피해는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사실 10여 년 전부터 일본

지진학계는 고베 지진 이후 지각활동 관측결과를 토대로 가까운 장래에 초

대형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경고를 해 왔었다. 일본에선 80~150년

주기로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며 1923년 간토(關東) 지진 이후 주기가 임박

했다는 것이었다. 정부 산하 지진조사위원회는 1995년 이후 30년 안에 도

쿄에서 진도 7의 대지진이 일어날 확률이 70%라고 예상했다. 10년 내 확률은

30%, 50년 내 확률은 90%로 예상했었는데 그 예측대로 지진이 일어났지만

후유코의 예언은 정확한 날짜와 피해지역까지 적중시킨 것이다. 지진 이후

일본의 언론들은 후유코를 찾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후유코를 찾아내지 못했

다. 친구인 사나에가 언론에 공개한 메일에는 이별을 알리는 짧은 내용만이

있어 후유코가 마음먹고 잠적했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었다.

2008년 6월 23일 배달   “그

나마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군. 다행스런 일이야.”김통령이 일본

의 지진관련 보도를 TV로 보면서 말했다. “후유코는 무사히 데려왔는가

?”“예 지금은 숙소로 정해진 제3지구 68번지 주택에서 쉬고 있습니다.”

배달에서는 일찍이 일본의 대지진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책을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은 토의가 있었다. 사실 일본의 지진에 대해 배달이 책임을 가

지는 것은 아니었고, 실제로 모르는 척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일본에게 알

려서 대피를 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배달이 일본에게 지진의 위험을

경고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신비주의였다. 애초에

그런 방법이 먹힐 것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지만 도중에 후유코를 이용하

자는 의견이 나와 그 방향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일본의 많은 생명을 구했

지만 이제 후유코는 일본인에게 있어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후유코는 앞

으로 일본을 상대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당장 일본에서는 사라져

버린 예언가인 후유코의 어린시절부터의 행적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제작되

고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다큐멘터리가 그렇듯이 자그마한 일들은 과장되었

고, 미화되었다. 일본국민들 사이에서는 후유코가 일본 황실과 일본국민을

구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사자로 인식되는 경우도 많았다. 일본에서는

신화와 전설로만 구현되던 예언과 예언가의 일이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극적

인 형태로 현실화되자 집단적인 신비주의 신봉에 빠져들고 있었다. 배달에

서는 일찍부터 일본을 무력이 아닌 정신과 문화로서 굴복시킨다는 계획이 수

립되어 있었고, 그를 위한 준비는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2008년 6월 28일 토요일 평양 양각도 경기장“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

니까? 여기는 평양 양각도 경기장입니다. 잠시 후 6시 30분부터 이곳 평양에

서 평양 FC와 FC 서울의 2008 K-리그 개막전, 그 개막전의 역사적인 현장을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해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차범근 위원님. 참으

로 역사적인 경기가 아니겠습니까?”“예, 그렇습니다. 남북한간의 통일은

아마 축구에서 가장 빨리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평양에 우선 프

로축구팀이 창단해서 되어 바로 올해 2008년 K-리그 정규리그에 포함되었죠

. 아마 평양축구단은 평양뿐만 아니라 북한…… 아! 지금은 고려국이죠. 고

려국의 주민 모두를 팬으로 두고 있는 팀일 것입니다.”“그게 아니라 남

한에서도 이미 평양FC를 응원하는 팬들이 많아졌다고 하던데요?”“예, 실

향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실향민들의 가종 그리고 아무 관계가 없는 일반

팬들도 평양FC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죠? 기존에 북한 국가대표팀이 거의

그대로 평양FC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전력면에서도 상당히 강한 팀이라고

볼 수 있겠죠.”“그렇죠, 독일 월드컵에서는 아깝게 본선 문턱을 넘지

못했지만 인상적인 경기를 보여주었죠. 또 그런 분위기에 최종상 선수도 평

양 FC 입단하게 되어 전력에 큰 도움이 되었겠습니다.”“그렇죠. 최종민

선수가 실향민인 할머니의 바램에 따라 평양FC로 이적하게 된 것이 이 번에

평양 FC에 거는 팬들의 기대를 한층 더하게 했죠?”“예. 그런 막강한 전

력이 있는 평양 FC의 오늘 프로 데뷔전 관심있는 경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 말씀드린 순간 킥오프가 시작됩니다.”심판의 호각 소리에 따라 경

기가 시작하자 평양 양각도 경기장에 모인 관중은 힘찬 함성과 함께 응원을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평양 FC를 응원하는 모습이었다. 최근 K-리그의 관중

감소로 열기가 주춤한 한국프로축구에는 새로운 바람이 아닐 수 없었다.

경기장의 밀집한 관중과 함성은 FC 서울팀이 당황스러워 할 정도였다. 최근

K-리그의 경기장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 평양 FC의 창단은 북한주

민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기획되었다. 처음에는 프로야구팀의 창단이 거론되

기도 했으나 북한에서는 야구가 그다지 인기를 얻는 스포츠가 아니었고, 대

부분의 주민들에게 야구는 경기방식도 생소한 처음 보는 종목이었기 때문에

축구팀의 창단이 얘기되었다. 내년에는 개성과 신의주, 후년에는 청진과 나

주에도 추가로 팀이 창설될 예정으로 있었다. “그런데 최종상 선수의

경우 월드컵 출전은 어떻게 됩니까?”“월드컵에 출전한다면 한국팀으로

뛰는 거죠. 지금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은 그 소속이 애매하게 되었네요. 올

해 있을 올림픽에 남북은 단일팀으로 출전하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올림픽은 남북한과 배달까지 포함된 단일팀으로 참가하겠지만, 월드컵

과 다른 국제대회에서는 각각 FIFA에 등록된 대로 고려국, 한국, 배달 이렇

게 각각의 팀으로 참가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영국에서 잉글랜드, 스코트랜

드, 아일랜드가 각각 참가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아하 그렇군요.”

기존에 북한과 남한을 부르는 국제적인 용어도 변경되었다. 남한은 그대로

KOREA 또는 COREA였는데, 2005년이후 모든 국제명칭의 철자를 COREA로 통일

했고, 고려국의 영어명칭은 GORYEO로 정했다.

2008년 K-리그의 개막전로 진행된 오늘 경기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에 힘

입어 평양 FC가 FC서울을 3대1로 이겼다. 승리에 도취한 관중들이 경기장 주

변에서 환성을 지르고 춤을 추며 승리를 기뻐했다. 평양시민들로서는 자유로

운 분위기에서 오랜만에 축제를 즐길 수 있는 밤이었다. 2008년 7월

4일 평택 미군기지세연은 평택의 주한미군 기지를 방문하고 있었다. 평

상시 그 철문을 굳게 닫고 언론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던 미군 측이 미국의

독립기념일 행사를 전후하여 지역주민을 초청하여 체육대회를 열고 언론에도

그 문을 연 것이다. 세연은 미군 측이 벌이는 각종 행사를 취재하고 특히

지역주민들이 같이 참여하는 ‘지역주민 위안의 날’행사를 취재하고 미군이

지역주민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담기 위한, 바꾸어 말하

면 미군 측의 입맛에 맞는 취재목적을 가지고 평택기지를 방문한 것이다. 여

기에 세연의 프로그램팀이 초청된 것에는 이전에 유엔군 폭행 사건과 관련하

여 세연을 심문한 적 있는 미군장교 슬래터의 도움이 있었다. 그러나 세연은

‘주한미군의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제목으로 특집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고, 지난 몇 달 동안 이 부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

어서오십시오. 한 PD님."

“오랫만이군요. 슬래터 대위님.”“쑥스러운 일이지만 저 진급했습니다.

이제 소령이죠.”한국에 오래 살아서 한국식 겸양을 익힌 슬래터가 말

로는 쑥스럽다고 하면서도 전혀 쑥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자랑스럽게 계급장

을 보였다. “그래요? 축하해요.”세연은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

넸다. “오랫만이군요, 거의 일년 만이죠?”“그렇네요.”일년 전

슬래터는 미군 대위였고, 세연은 학생신분으로 미군 민심참모부 장교와 폭

행사건 피의자의 신분으로 만났었다. 그 후 일년만에 민심참모부의 군 홍보

를 맡은 장교와 방송국 PD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슬래터 입장에서는 그전에

피의자로 만났던 사람에게 일종의 안내를 담당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어서

그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고 있었지만 세연이 슬래터를 대하는 모습은 그때

나 지금이나 전혀 차이가 없었다. 피의자일때도 세연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

은 당당한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세연은 모습은 달라진 자신의 지위 때문에

도도하거나 거만한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슬래터는 일념 전의 그 도전적

인 여성이 아주 예의바르고 상냥한 모습으로 변해서 나타난 것에 상당히 당

황하고 있었다. 행사장으로 향하면서 세연은 슬래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

눌 수 있었다. “한국의 통일에 대해 미군은 공식입장은 어떤 것인가요

?”“물론 미국 정부와 우리 미군은 한국의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온다면 한국민이나 미국에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것은 없겠죠.”“정말이예요?”“물론입니다.”세연

이 걸음을 멈추고 슬래터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슬래터는 세연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계면스럽게 웃었다. “거짓말이군요.”

“예?”어느새 세연은 작년의 그 도전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 “대위님은 아니 소령님은 한국 내 환경의 변화가 자신과 주한미군의

입지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아요.”“예?”“미군

이 계속 한국에 주둔할 수 있는지 한국민들이 언제 주한미군에게 나가라고

하지는 않을 것인지, 또 만약 주한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또 어디로 배치되게

될지 걱정이 많은 얼굴이예요.”“그게 그런 것이.”슬래터가 당황스

러워 하자 세연이 하늘을 보고 큰소리로 밝게 웃었다. 슬래터는 한국에 있는

미군치고는 상당히 순진한 면이 있었다. 슬래터는 사실 그 문제로 걱정이

많았다. 이미 2004년에 있었던 병력 재배치 계획에 따라 상당수의 주한미군

들이 이라크로 주둔지를 옮겼다. 또는 이라크로 간 병력들이 있는 자리로 들

어가 배치되었다. 부대에서는 벌써 한국 내 미군의 재배치 계획에 많은 변화

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은 미군인 동시에 유엔

군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은 이미 유엔에 한국에 배치된 유엔주둔군

의 철수를 요청해 놓은 상태였고, 국제여론은 한국 내 유엔군의 주둔 이유가

사라진 이상 그것은 당연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었다. 한국은 통일

준비위원회가 발족하면서 남한에 주둔한 유엔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애초에

미군철수를 요구하는 사회적인 목소리도 높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주

장하는 여론도 비등했다. 한국정부는 미군철수에 대한 부분은 공식적인 언급

을 회피한 채 우선 유엔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이 안건은 유엔총회에 상정되

어 처리 중이었는데 미국의 경우 난색을 표명하기는 했지만 유엔군을 구성하

고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철수를 찬성하고 있었고, 유엔군의 철수를 반대

할 뚜렷한 명분이 없어 국제 여론과 미국 내의 여론의 흐름을 살펴보고 있었

다. 요즘의 한미관계에서 대두된 가장 큰 화두는 미군 철수였다. 남북통

일이 목전에 다다른 시기로 사실상 통일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

에서 미군의 한국 내 주둔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질 않았

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유엔군과는 별도로 미군은 한미동맹의 틀을 유지하고

동북아의 평화유지를 위한 계속적인 주둔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예로 기존

한국과 같은 분단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터키나

영국, 이탈리아 등의 예를 들었다. 한국 내에서도 미군의 철수를 반대하

는 목소리는 찬성하는 목소리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높았다. 미군의 계속

적인 주둔을 주장하는 논리의 가장 큰 맥은 미군이 철수하면 그에 해당하는

국방비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또한 주한미군 철군시 국가신인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경제발전을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2004년 5월 평화네

트워크 공개질의서에 대한 국방부의 답변에서 주한미군 철수 시 한국은 5년

여에 걸쳐 약 160억불의 막대한 투자비와 매년 20억불의 운영·유지비를 추

가적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근 한국국방연구원에서는 주

한미군 철수시 한국의 추가 국방비는 연간 300억 달러로 추산된다고 분석하

였다. 이는 현재 국방비(약 120억 달러, 국방부 발표)의 약 2배가 추가로 소

요되어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주기 때문에 결코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

이다. 주한미군 철수에 따른 경제적인 문제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국방비

의 추가 부담뿐만 아니라 해외 자본 유치의 어려움 및 국가신인도 하락 등

경제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경제발전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정부는 일단은 남북의 통일로 인한 과도시기인 현

재, 국가 안보와 안정을 위해 주한 미군의 주둔은 필요하다고 공식의견을 발

표했고, 정부의 이러한 결정에 이례적으로 야당이 환영하면서 이에 대한 정

치적 논란이 매듭지워졌다. 그러나 국방부 홈페이지에서 국방부는 남북통일

이후의 한반도 정세를 통일과도기-조정기-안정기로 나누어 안정기에 이르면

미군의 철수는 고려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는 의견을 밝히면서 미군 철수는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결국은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게 되었

다. 슬래터 소령은 그 안정기가 예상보다 일찍 찾아올 것이라는 예감을 가

지고 있었고, 그것은 한국에 있는 거의 모든 주한 미군들이 같이 느끼고 있

는 부분이었다. 따라서 미군 부대에서는 인근주민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다각

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오늘 행사도 그에 맞추어 이루어지고 있었다

. 두 사람은 미군 병사들과 인근 주민들간에 벌어지는 축구경기가 열리

는 연병장에 도착했다. 경기는 주민대표팀이 미군대표팀에게 2대0으로 이기

고 있었다. 세연은 카메라맨과 함께 축구경기를 촬영하고 인근주민들과 미군

관계자의 인터뷰를 하고 미군캠프 측에서 지역주민들을 위해 마련한 몇 가지

행사를 계속 촬영했다. 촬영이 끝나고 세연은 미군캠프 내의 한 레스토

랑에서 슬래터와 함께 자리했다. “한 PD님은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해

야 한다고 생각하고 계시겠군요.”“왜 그렇게 생각하세요?”“주한 미

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어요. 그간 주한미군이 한반도에서 해온 긍정적인 역할,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1950년의 한국전쟁이나 그 전에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효과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예요. 분명 미군은 우리 한민족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했

다는 것은 분명하죠. 그러나 동시에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발생한 여러

가지 부작용이나 특히 군 작전권 문제, 불평등한 소파협정 등의 문제가 심

각했던 것도 사실이고요.”“그런 부분은 계속 개선되어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게 계속 개선되어 온 것은 우리나라의 사회단체의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 등 여론의 힘에 밀려서 그렇게

된 것이죠. 미군 당국이나 한국 정부는 한 번도 스스로 나서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적이 없었죠.”“저도 한 말씀 드려도 될까요?”옆에서

조용히 고기를 썰고 있던 카메라맨 정상우가 입을 열었다. 정상우는 입사

5년차로 한세연에게는 방송국 선배가 되는데 이번에 세연과 함께 미군관련

특집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세연이 만든 ‘대동강의 눈물’을 보고 이

번 특집 제작에 자원했다. “미군들은 한국에 50년 넘게 주둔하고 있는

데도 아직 한국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기저에는 어떤 종류

의 우월주의가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이번 행사만 해도 그렇습니다. 말로는

지역주민과 한마음이 되기 위한 행사를 한다고 하지만 축구경기를 제외하면

행사의 진행방식이나 준비 등이 전혀 한국인의 문화에 대한 고려가 없더군

요. 그리고 사실 슬래터 소령님은 한국말을 잘하시는데 다른 미군들은 한국

에 몇 년을 있으면서도 한국말 한 마디 모르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

지 않습니까?”슬래터 소령은 민심업무를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

의 필요에 의해서 한국어를 배웠다. 그러나 사실은 슬래터가 한국어를 본격

적으로 배운 것은 작년에 세연을 만나고 난 이후였다. 미군이 한국어를 굳이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 부서에는 한국어를 통역해 줄 카츄사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카츄사들의 영어 실력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병사들은 영어가 아주 능숙한 사람도 있었지만 기초적인 영어밖에 안

되는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에 서툰 카츄사가 미군과 지역

주민이나 다른 민원인들 사이에서 정확한 통역을 해주지 않아 필요 없는 오

해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고, 문제 해결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 있습니다. 오늘 행사를 준비하면서 지역주민들과 하나가

되겠다고 하면서도 진정으로 하나될 준비는 안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지역

주민이라고 해도 보안을 이유로 초청장이 없으면 못 들어오게 하고 그러다

보니 결국 지역주민이라고 초청된 사람도 정말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지역의 관청관계자들과 평상시 미군에 우호적인 단체의 사람들만 초청된 거

죠. 결국 이런 모습은 언론에 보여주기 위한 행사라는 생각 밖에 안 듭니다

. 또 지역주민들을 즐겁게 하겠다는 의도는 좋은지 모르겠지만 미군들은 지

역주민의 행사를 마치 일을 하듯 하더군요. 그건 진정한 하나 되는 모습은

아니죠. 오늘 지역주민들을 위해 부대를 개방한다고 했지만 연병장과 일부

공원만 개방하고 자신들의 휴식공간에 해당하는 이곳은 개방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미군들은 지역주민들을 위한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업무이고 진

짜 휴식은 이곳에서 즐기죠. 여기 있는 음식점이나 볼링장, 극장, 테니스장

에는 한국인들의 입장을 막고 있더군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처음에

슬래터는 행사에 초청장 없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계획을 세웠지만 고위

급에서 수정되었다. 미군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나 대학생 등의 사람들

이 들어와 미군부대 안에서 플랭카드나 구호라도 외치면 큰일이라고 판단했

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청된 사람들이라도 미군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까지

들어오게 되면 장병들의 휴식시간을 방해받을 것을 우려한 탓이었다. 슬래

터는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을 받자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세연이

웃으며 슬래터를 격려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첫술에 배부르겠어요? 어쨌든 이런 행사가 시도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예요. 차차 나아질 수도 있겠죠. 아닐 수

도 있지만. 하하하”술을 한 잔 들이킨 슬래터가 세연에게 물었다.

“통일 이후 미군의 주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지금 여론

은 분분하죠. 여론은 나가야된다, 있어야된다고 여론은 분분한데, 문제는 그

런 여론들 사이에 미군이 한국에 있을 수도 있다 라든지 나갈 수도 있다 라

든지 그런 여론이 없는 게 문제죠. 그 말은 미군 철수에 대한 국론이 급격하

게 대립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요. 사실은 당장의 전쟁 위험이 없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도 미군은 주둔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 내면을 보면 영국

에 주둔한 미군은 영국의 요구가 필요에 의해서라고 하기보다는 미국의 필요

에 의해서라는 게 더욱 맞는 말이죠. 그래서 영국 내 미군의 주둔 협정은 상

당히 공평하고 평등하게 이루어진 거죠. 지금까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은

사실을 미군의 동북아 정책에 따른 미군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한국인들

에게는 그런 미군이 주둔이 마치 한국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간주되어 온 것

입니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통일이 예상되는 지금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근거가 나온 것이고요. 또 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위협이 가

중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를 막기 위해 미군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 이것은 모두 한국인들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한국인들은 미군

들이 한국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미군은

한국인들을 위해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것입니다.”슬래터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세연이 대뜸 쏘아 붙혔다. “제 생각은 이래

요. 미국이 자신들의 전략목표을 위해 한반도에 미군이 주둔할 필요가 있다

면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동등한 수준으로 소파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고 생각해요. 한국정부도 더 이상 미군을 한반도 방위체제에 필요한 요소라

고 생각하는 의존적인 자세를 버리고 동맹국으로서의 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세연이 이렇게 말하고 맥주 잔을 남김없이 비웠다.

그리고 맥주 잔을 탁 소리나게 테이블에 내려놓더니 말했다.

“두고보세요. 앞으로 몇 년 후가 될 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미군은 한국에

주둔하기 위해 비싼 임대료와 사용료를 지급할 때가 분명히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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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이 끝남으로써 4권도 끝났습니다. 그리고 비축분은 이것으로 또 바이바

이... DTL...

작가분께 얼른 다음 권 분량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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