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통일의 꽃 [미래역사소설] 21世紀 地球史 (16) 통
일의 꽃 ⑩"이거 상당히 성가시군."
라파엘은 붉은 페인트가 잔뜩 묻은 붓을 들어 벽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글은 처음 써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섬세한 손놀림은 메모에 적혀있는
한글을 완벽하게 똑같이 모방할 수 있었다. 처음 메모를 쓴 사람의 필체마
저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글을 다 쓴 라파엘은 붓과 페인트통을 바닥
에 내려놓고 잠시 서있었다. 그는 그대로 북극성이 지상과 34도의 각도를 이
룰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렸다. 교대근무자들의 주의가 가장 흐트러지는 시
간이다. 라파엘의 능력이면 굳이 시각을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으나 마스터는 이 시간을 지정했다. 단 한사람이라도 라파엘을 보
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라파엘이 가진 밝은 색 금발은 어두운 밤이라
도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머리카락을 물들이거나 깍지
않는 것은 천사들의 남다른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었다. 라파엘은 꼼짝않고
서서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결코 앉지도 않았고, 지루해하는 법
도 없었다. 그냥 나무가 서 있듯이 서있던 그가 이윽고 들어왔던 곳으로 조
용히 나갔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지도자를 깨우러 온 주석궁의 직원이
대답이 없는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가 피가 범벅이 된 침대를 보고 소스라
쳐 동료들에게 달려갔다. 침대 뒤의 벽에는 침대를 물들이고 있는 것과 똑같
은 색깔의 글씨로 "구국 동지 만세"라고 쓰여 있었다. 거의 그 시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석궁의 호위를 맞겠다고 새벽에 주석궁 인근에 진을
친 109사단의 2개 대대 병력이 주석궁으로 진입했다. 주석궁을 장악한 김성
규는 즉각 주석궁 경호부대를 경호실책을 이유로 전원 사살했다. 그와 동시
에 경기도와 황해도에 주둔하고 있던 사단들 중 총 8개 사단이 평양을 향해
부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평상시 김성규와 각별하게 지내던 사단장들이
있는 곳이었다. 김성규는 부속실에 명령해서 김정일 위원장의 명으로 전 정
책위원들을 주석궁으로 호출했다. 동시에 김정일의 사망사실을 철저하게 비
밀에 붙일 것을 지시했다. 2008년 2월 1일 "피의 금요일" 오전 10시 평
양 개선문광장 주변 "모란봉은 어디 가고 대동강이 서있나?"
석정후 중장은 강기욱 중장이 전 군의 진압작전을 통괄하고 있자 무선으로
물었다. 김성규 중장이 강기욱과 군관학교 동기이기는 하나 1년 일찍 중장을
달았고 이번 진압작전에도 가장 선임으로 총 사령관을 맡고 있는 상황이었
다. 그런데 오늘 병력 배치는 뭔가 이상했다. 전체 지휘를 강기욱 중장이 맡
고 있는 것도 그랬고, 109사단이 맡는 범위도 너무 적었다. 약 두 개 대대가
놀아도 될 만큼이었다. "여기는 대동강, 모란봉은 태평양의 호위를 위해
오늘 아침 봉우리 두 개를 챙겨 이동했다."
태평양은 김정일 또는 김정일이 있는 주석궁을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인가
?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다."
"태평양의 긴급 명령으로 결정되었다. 모래가 태평양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정보가 있었다."
시위대가 주석궁을 공격할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제 밤에는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석정후는 군 내의 정보의 흐름과 어던 결정이 자신을 따돌
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석정후는 중장으로 진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임자이긴 하지만 편제상 김성규나 강기욱과 같은 직급이었다. 석정후는 기
분이 상했다. "어쨌든 이번 작전은 대동강이 지휘하게 되었다."
강기욱은 김성규보다 훨씬 과격하다. 김성규가 훨씬 잔인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울 자리와 앉을 자리를 꼭 살피는 치밀함이 있다. 그러나 강
기욱은 그렇지 못한 편이었다. 그는 앞뒤를 재지 않는다. 이번 시위 진압을
총지휘를 강기욱이 맡는다면 예상보다 훨씬 강경한 진압작전이 실시될지 모
르는 상황이었다. 석정후는 칠성문거리와 경창리에 이르는 도로에 각각
2개 대대씩을 배치하고 있었다. 칠성문거리는 북조선을 찾는 외국의 주요인
사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인민들이 연도에 나와 환영인파를 이루는 곳으로
거리가 깨끗하게 정비된 왕복 12차로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
을 때도 이쪽으로 지나갔다. 석정후는 만여 명이 조금 넘는 시위대를 3개 사
단과 기갑여단이 막는다는 것 자체가 강경 진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
들은 우리 인민들이 아닌가. 시위대는 이미 개선문광장에 집결하여 막 행
사를 시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개선문광장을 중심으로 2개사단 전 병력과
2개 대대, 1개 여단이 작전개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관!"
"예, 사단장님."
"아무래도 안되겠다. 이대로 강장군의 통제를 받을 수는 없다. 그는 십중팔
구 시위대에 총질을 할 것이야."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좋겠는가?"
젊은 부관은 말없이 서있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장군님 저도 '대동강의 눈물'을 봤고 요즘 밤에 라디오
를 듣고 있습네다. 제가 군인이 아니라면 저도 오늘 광장에 있을지 모릅네다
."
"그런가?"
"죄송합니다. 장군님."
"전군을 광장으로 전진 배치시킨다. 그리고 경창리 쪽으로 배치된 병력을 모
두 이쪽에 합류시킨다. 강기욱이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시위대를 해산
시켜야겠다."
같은 시각 개선문광장 개선문광장의 열기는 한참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미 김일성 대학의 학생 지도부에서 김남철이 나와 자신의 주장을 말했다
. 그 다음은 예천군 노농적위대의 청년이 나와서 열변을 토했다. 참가자들은
웅변에 가까운 연사들의 외침에 동조하며 구호를 따라 외쳤다. 광장에 도착
한 시위대가 광장 반대편의 전차들이 도열한 모습을 보고 긴장하긴 했지만
집회가 진행되어 가면서 그런 두려움은 점차 줄었다. 전차들의 별다른 움직
임이 없었고, 시위대의 열정은 드높아져 있었다. 방송에서 선보였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같은 노래가 불리어지기도 했다. 개선문광장은 김일성
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환영군중대회에서 개선연설을 한 것을 기념하여
조성된 곳으로 약 4만평 규모에 연설하는 김일성을 형상화한 대형벽화와 김
일성 친필교시비가 있는 곳이다. 개선문과 김일성경기장, 개선영화관, 서평
양백화점 등으로 이루어진 공공건물과 공원이 조성된 곳이다. 평양을 찾는
지방학생단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고, 평양대학생들의 은근한 데이트 장소이
기도 했다. 시위대의 열기는 석귀홍의 등장으로 극에 달했다. 조금 높이
올린 연단에서 귀홍이 마이크를 잡자 모든 군중들이 단번에 그녀의 목소리
를 알아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기 위한 사람들로 대열이 무너
질 뻔했다. "여러분, 침착하십시오. 오늘 우리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서정연하고 평화롭게 끝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러시면 저는 다시 내려
가겠습니다."
겨우 질서를 유지한 시위대는 석귀홍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래
석귀홍이라고 합네다. 이제 겨우 스물 다섯이야요. 아직 시집도 안 갔습네
다." 연단에 오른 귀홍이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좋아하는
동무가 생겼습네다. 내래 그 사람의 지어미가 되고 싶습네다. 그러나 결혼하
자는 동무의 말에 대답을 못했습네다. 과연 이 땅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은지를 나 자신에게 물어 봤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네다."
귀홍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귀홍은 북조선 아이들이 태어나서 붉은
전사로 자라고 그 이후에 당원이 되고 산업역군이 되면서 겪어야 하는 여러
부조리와 고난, 속박을 이야기했다. "세상에 눈을 돌리면 알 수 있습니다
. 우리 공화국이 얼마나 못사는 나라인지, 못사는 나라에 태어나 가난한 것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산당의 고위 간부들은 못살지 않습니
다. 그들은 우리 인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있습니다. 북남공동으
로 개성에 만든 공장에서 남조선의 기업들은 우리 인민들에게 1인당 월 480
달러를 지급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우리 인민들에게 돌아오는 돈은 불과
56달러입니다. 나머지는 어디로 갔습니까? 물론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쓴다'는 게 공산주의 경제원칙이지만 그 돈이 다른 인민들을 위해 쓰여
지고 있을까요?"
귀홍의 이야기는 북한에서 수탈당하는 인민들의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하며
이어나갔다. 대부분 이미 라디오로 알려진 얘기였지만 라디오를 통해 숨어
서 조용히 듣던 것과는 그 파괴력이 달랐다. "저는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
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인민들의 힘으로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가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제가 그리고 여러분들이 역사를 바꿀 것
입니다."
광장은 귀홍이 외치는 소리와 시위대의 열띤 함성으로 가득 찼다. 칠성문거
리에서 광장 방향으로 진입하던 석정후는 광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낯익은 음
성에 깜짝 놀랐다. 귀홍이 말하고 있었다. "저 목소리입니다. 장군님."
"뭐?"
"밤마다 라디오에서 구국의 소리를 방송하던 바로 그 목소립니다."
부관이 옆에서 그렇게 말하자 석정후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귀홍이
이들과 마음을 같이 해서 행동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
다. 그러나 부관의 말대로라면 귀홍은 그냥 동조자나 가담자가 아니라 주모
자급이란 얘기가 아닌가? 이미 라디오의 목소리는 일급 반동으로 수배가 내
려진 상태였다. 인민군 105사단의 탱크와 병력이 광장으로 들어오자 사
람들이 동요를 하기 시작했다. 지도부에서 사람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결코 물러나서는 안됩니다. 저들도 감히 인민들
에게 총을 쏘지는 않을 겁니다."
행동부장을 맡고 있는 허한식이 사람들에게 말했지만 스스로도 자신은 없었
다. 이미 이 번 진압에서는 발포가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때 삐이 하는 소리와 함께 확성기 소리가 울려나왔다. 인민군 105사단의 선
두를 이루고 있는 선전차량이었다. "틀렸습네다. 이 번 진압에서는 발포
가 준비되어 있습네다. 지금 즉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민군은 여러분을 향해
총을 쏘게 될 지도 모릅네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오. 지금 당장 해산한다
면 아무도 헤치지 않겠소. 여러분은 지금 완전히 포위되어있습니다. 지금 즉
시 칠성문방향으로 해산을 하시오."
귀홍은 그 목소리가 아버지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귀홍은 순간 당황했
지만 이내 침착해졌다. 수도방위를 담당한 105사단이 진압에 나설 것이라는
예측은 충분히 했던 것이다. "여러분 동요하지 마십시오. 인민군은 인민을
위한 군대입니다. 조국과 인민들을 위한 군대가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 인민군들은 결코 부패한 고위층을 위한 군대가 아니
라 인민들을 위한 군대입니다. 바로 우리 오빠와 아들이 입대해서 세운 우리
인민들의 군대아닙니까?"
귀홍은 마이크를 잡고 외쳤다. 그것은 시위대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게 하는 말이었다. 귀홍은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결코 인민
들에게 총을 쏘지는 않을 것이다. 동시에 아버지가 왜 저런 말을 하는 지도
알 것 같았다. 그것은 시위대가 결코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를 내
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 들으세요. 행동부장"
마이크에서 입을 뗀 귀홍이 행동부장인 허한식에게 말했다. "만약에, 만약
에 말입니다. 인민군에서 발포가 시작되면 사람들을 칠성문쪽으로 대피시켜
야합니다. 아마 그곳만이 안전할 것이요."
"하지만 칠성문은 저 부대가 길을 막고 있지 않습네까?"
"그래도 그 쪽으로 가야합네다. 내 말을 믿으세요."
"석장군!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임메? 전원 체포하라는 말 못들었습메?"
석정후는 무선으로 외치는 강기욱의 소리를 무시했다. 다시 한 번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쳤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해산하시라요."
석정후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칠성문거리 방향으로 길을 열었다. 이미 차
량의 운행은 통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구호
를 외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민군의 등장으로 시위대는 오히려 긴
장감과 함께 비장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자 모두들 일어납시다."
한참 생각에 잠겨있던 귀홍이 결국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이 길로 우
리의 주장을 당당히 밝히며 시가를 행진하겠습니다. 진행로는 저 인민군들이
지키고 있는 칠성문거리를 지나 대동강변을 따라 양각도로 향할 것입니다.
그 길에는 우리의 학교들과 외국기자들이 있는 평양호텔, 양각도호텔이 있
는 곳입니다. 계속 행진을 하면서 우리의 주장을 폅시다. 그래서 다시 양각
도경기장 앞에서 집결하도록 하겠습니다."
칠성문거리의 보도에 인민군들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었다.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배짱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른
길이 모두 열려있는데 굳이 인민군들이 지키고 있는 곳으로 가자는 말에 다
들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귀홍이 앞장을 섰다. 귀홍은 평화와
노동을 상징하는 녹색깃발을 들었다.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모두
저를 따르세요."
귀홍을 선두로 지도부와 행동대 인원들이 그 뒤를 따르자 사람들도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2년 정도만에 지휘부대를 옮기는 남한의 사단장과는 달리
북한의 인민군 사단장들은 한 번 사단을 맡으면 짧게는 4년 길면 6년까지
한 사단을 맡게 된다. 평상시 석장군의 휘하에서 4년 이상 훈련을 받던 병사
들은 상부의 명령을 따르는 데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석정후 중
장의 인간적인 면이 병사들에게 감화되어 있었고, 석장군이 가지는 인민들에
대한 생각도 병사들에게 잘 스며들어있었다. 인민군 105사단 병사들은 아무
런 동요 없이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시위대와 눈을 마주친 인민군들 중에
는 간혹 친근한 눈빛을 보내기까지 했다. 시위대의 반 정도가 칠성문거리로
접어 들어갈 때 개선문광장 반대편 월향동 쪽에서 일단의 군 병력이 나타났
다. 첫 번째 총성이 들렸다. 강기욱 중장의 332사단에서 발사한 것이었다
. 그 뒤를 이어 연속적인 총성이 이어졌다. 석정후 장군의 예상치 못한 행동
에 서둘러 광장에 도착한 강기욱이 발포를 명령한 것이었다. 시위대는 뒤쪽
에서부터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총성이 계속되면서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놈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실제로 총알이 날아들자 석정후는 분노에 치를 떨
었다. "전 부대 전투배치, 날래 인민들을 보호하라우."
원래 작전과 거의 정반대의 명령이 석정후의 입에서 나왔지만 105사단의 움
직임은 일사분란했다. 사단전체에 단 네 대밖에 없는 탱크가 광장을 나와 3
32사단과 군중들 사이를 가로 막았다. 그러나 아직 광장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칠성문거리로 질주했다
. 그 와중에 넘어지고 밟히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총소리와 함께 후
방이 무너지자 선두에서 앞장서던 귀홍의 얼굴이 흑빛이 되었다. 콩볶는 듯
한 총소리와 함께 후방대열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날래, 날래 피
하시오. 다들 각자 집으로 해산합네다. 우리가 날래 가야 뒤에서 도망칠 수
있습네다."
사람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홍은 반대편으로 달렸다. 눈물이 마
구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게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탓이
다. 그들이 총에 맞는 것이 자신의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사람들
에게 쓸데없는 희망을 주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 일을 계속하지 않았다면 무
고한 사람들이 저렇게 쓰러지지 않았을 텐 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이
일을 시작하면서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리순천 감독이 사
형선고를 받고 난 이후 자신도 언제든지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만들 자
격이 있는 것인지 귀홍은 미친 듯이 달렸다. 다른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뛰고 있는 귀홍을 누군가가 붙들었다. 김만석이었다. "어디가시는 거요.
귀홍 동무"
"뒤에 사람들을 구해야되요."
"귀홍동무가 어떻게 구한단 말이요?"
귀홍이 김만석의 눈을 쳐다봤다. "나도 몰라요."
"어서 몸을 피하고 다음을 기약합시다."
"다음이라뇨? 우리에게 다음이 어디 있습네까? 오늘 죽는 인민들에게 다음이
어디 있습네까?" 귀홍이 절규했다. 김민석의 손을 뿌리치고 귀홍은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김만석은 달려가는 귀홍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볼
뿐이었다. 바닥에 귀홍의 머리에서 벗어진 모자가 나뒹굴고 있었다. 김민
석은 귀홍의 모자를 주워 들었다. 인파의 끝까지 나온 귀홍은 사람들을
뚫고 광장 한가운데로 내달았다. 갑작스런 귀홍의 등장으로 사격이 멈췄다
.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발포를 멈춘 것이다. 한 손에 녹색 깃발을 든
귀홍의 모습은 마치 바다 밑에서 파도를 뚫고 솟아 나온 여신과 같았다. 두
눈에 가득한 눈물이 흘러 넘쳤다. 이미 주변에는 총을 맞고 쓰러진 사망자
들과 부상자들로 가득했다. 귀홍은 두 팔을 벌려 인민군들 앞을 막아섰다
. 머리 속에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들을 막아서서 어떻게 하겠다
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총을 겨누는 인민군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미 아무런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멈췄던 총성이 개선문광장에 다시 울렸다. 귀홍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귀홍
이 쓰러지자 다시 총성은 잠시 멈췄다. 그러나 총을 맞고 쓰러졌던 귀홍이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다시 여러 발의 총성이 들렸다. 귀홍은 서있던
자리에서 몇 발짝이나 뒤로 밀려나며 넘어졌다. 왼쪽 팔에 맞은 총상으로
팔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은 괜찮았다. 다시 일어난
귀홍은 우뚝 서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인민군들과 그들의 탱크에 맞섰다.
귀홍은 자신이 총을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인민군들의 주의를 자신에게 돌리면 다른 사람들이 보다 안전할 것
이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광장 앞쪽으로 기관총 포대가 전진 배치되었다
. 기관총이 귀홍을 향해, 또 도망치는 인파를 향해 난사되었다. 귀홍이 다시
쓰러졌다. 그러나 이 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귀홍이 마지막으로 총을 맞
고 쓰러지는 장면이 막 광장으로 진입한 석정후의 눈에 들어왔다. "전원
공격!"
일방적으로 109사단의 공격에 방어태세만을 취하던 105사단의 반격이 시작되
었다. 이로써 개성문광장의 사태는 인민군 사단 간의 시가전으로 발전했다.
개선문광장 맞은 편 한 곳을 차지하고 있던 기갑여단은 갑작스런 인민군끼
리의 총격전에 당황해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석정후는 자신의 지프에
서 뛰어내려 귀홍에게 달려갔다. 귀홍은 왼쪽 눈에 총탄을 맞은 채로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귀홍은 하나 뿐인 눈으로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이 아버
지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귀홍
은 아버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얘야, 아무 말 말아라. 말을 아껴라. 절대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
뭔가 말을 하려고 애쓰는 딸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던 아버지가 귀홍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 말에 귀홍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아버지의 얼굴 뒤
편으로 눈부시게 맑은 겨울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귓전을 때리던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홍은 아버지의 품에서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감기는 걸
느꼈다. 졸린 듯 편안한 느낌이었다.
=+=+=+=+=+=+=+=+=+=+=+=+=+=+=+=+=+=+=+=+=+=+NovelExtra(n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