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세기 배달민족사-70화 (77/83)

(16) 통일의 꽃

2007년 4월 7일 베이징발 지안행 CA20

94편 기내북경에서 지안까지는 80분 정도 걸리는 시간이다. 이제 겨우

비행기가 비행궤도를 잡고 안정된 자세를 취했나 보다. 머리 위의 등에서 안

전벨트 사인이 꺼졌다. 세연은 깊이 심호흡을 한 번 했다. 몇 달 전부터 자

신을 따라다니던 불쾌하고 음습한 느낌이 오늘 비행기를 탄 이후 최고조에

올라 있었다. 마치 식도와 위 사이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갑갑했고, 뭔가 끈

적이는 것이 목덜미 아래에 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옆에 앉아 있는

준영을 보자 조금은 기분이 풀렸다. 얼마 전부터 세연에게 작업을 걸고 있는

사학과 후배이다. 자세히 보면 귀여운 데도 있었다. 준영에게 뭔가 말을 건

내려다가 세연은 그만둔다. 준영이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시계를 보고 있었

기 때문이다. 그렇게 심각한 얼굴의 준영은 처음 보는 세연이었다. 그 때 갑

자기 준영이 벌떡 일어나려다 안전벨트에 걸렸다.

그런 준영을 보면서 세연은 피식 웃고는 얘가 왜 이러나하는 표정을 지었다

. 그러나 그 순간 세연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등에 붙어 있는 소름 비슷한 불

안감이 치솟아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뱃속입니다."

갑자기 준영이 뭐라고 말했다. 세연이 준영을 돌아봤다.

"뭐? 뭐라고 했어?"

"뱃속에 있을 것이라고요."

세연은 준영의 표정에서 준영이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을 깨닫는다. 준영의 눈동자가 오른 쪽 위로 몰렸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거

나 어딘가에 귀를 기울이는 중이다. 세연이 준영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있을 때, 뒤쪽 좌석에 앉아있던 건장한 사내가 통로를 따라 앞으

로 가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통로에서 남자와 마주치자 밝게 웃으며 비켜

가기 위해 몸을 조금 옮겼다. 그 순간 남자의 손에서 뭔가가 번쩍했다. 칼과

비슷하게 생긴 것이 스튜어디스의 배를 가르며 푹 들어갔다. 피가 터져 나

왔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세연이 벌떡 일어났다. 일어난 세연의 손을 준영이 잡았다. "괜찮아, 세연

선배. 앉아 있어."

비행기 안에 몇몇의 사내가 자리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 자리에

다들 움직이지 마시고 앉아 계십시오. 우리는 여러분들을 해칠 생각이 없습

니다." 사내들은 중국어와 영어로 말을 했다. 준영이 일행들에게 한국어로

말했다. "그냥 다들 자리에 앉아 있도록 해요. 아무 일도 아니니깐."

하지만 세연이 보기에 아무 일도 아닌 게 아니었다. 스튜어디스 한 명이 피

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고, 한 사내가 그녀의 뱃속에 손을 넣은 채로 휘젓고

있었다. 배에서는 피가 아닌 묽은 액체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세연은 멀

미를 느꼈다. 다른 승객들 중에는 실제로 토하는 사람이 나왔다. "빨리 찾

으세요."

세연 옆에 서있던 준영이 그들에게 외쳤다. 세연은 너무 놀라 준영을 돌아봤

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지만 준영은 너무나 무표정하고 담담한 얼굴

이었다. "찾았습니다."

스튜어디스의 배에서 사내가 손을 꺼냈다. 사내는 손을 들어 손가락 사이로

쥔 작은 알약을 준영에게 보여줬다. "이제 응급처치를 서둘러주세요."

사내가 가방에서 무슨 볼펜형태의 녹색막대를 꺼내 스튜어디스에게 향하더니

막대의 한 부분을 눌렀다. 막대에서 슈욱 하는 짧은 소리가 났다. 그리고

비상구 쪽으로 향했다. "모두 안전벨트를 매시오."

사내가 비상구의 해치를 열었다. 비행기 안의 공기가 밖으로 빠져나가며 강

한 바람이 일어났다. 비행기가 잠시동안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듯 했다.

사내가 스튜어디스를 안고 비행기 밖으로 뛰어내렸다.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이 나가자 다른 사람들이 해치를 닫았다. 그리고

손에 뭔가를 쥔 채로 비행기 바닥과 시트 등에 튄 피를 청소했다. 마치 새

것처럼 피가 말끔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청소가 끝나자 사내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가 앉기 시작했다. "작업 완료했습니다. 통

신 차단된 지 4분되었습니다. 1분 후 비행기의 통신이 정상화됩니다." 한

사내가 준영에게 와서 마치 보고하듯 말했다. 준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

내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세연이 놀란 표정으로 준영을 보았다.

준영의 얼굴에는 긴장이 사라지고 미소가 있었다. "여러분 여기를 주목

해 주세요."

탕비실 쪽에서 스튜어디스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자 그녀의 손

에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 빛은 너무나 강열해서 머리 속을 샅샅이

뒤져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008년 1월 8일 배달 S지구 의료센

터세연이 잠에서 깨어났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꿈이 아니다

. 마치 조금 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이건?"

"삭제되었던 기억이죠. 작년 4월 세연양이 경험한 기억을 우리가 삭제했죠.

그 삭제된 기억을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말했다. 누구지? 1년 전의 과거로 갔다가 온 세연

이 한참만에 그가 의료센터에 와서 만났던 의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세연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인간의 기억을 삭제한다는 말인가

요?"

"사실은 삭제한 것은 아니죠. 일종의 무의식 범주에 들어있는 것인데, 영구

삭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상태에서 그 기억을 찾는 통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씁니다."

"상당히 안 좋은 기분이군요. 제 기억을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지우고 살리

고 한다니."

"죄송합니다. 그래서 가능한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연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생각을 했다. 이들이 세연의 기억을 조작한 것

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준영과 이들에게 생명을 빚졌다. 이들이 비행기를 폭

발로부터 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적어도 23세기에서 왔다면

비행기 하나를 구하는 것보다는 훨씬 중요한 일들이 더 많을 것 같았다. 다

시 김시백 박사를 만났을 때 그것에 관해 물었다. "그 비행기에는 192명

의 승객이 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 비행기가 폭발할 것이라는 걸 몰랐다

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그 비행기에 타고 있는 세연양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제가요?"

"예, 모르겠습니까? 준영군이 처음 대학신문사로 세연양을 찾아갈 때부터 우

리는 세연양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절 아시는 거죠?"

"모를 수가 있습니까? 세연양이 김구선생이나 안중근 의사, 또는 유관순 누

나를 아는 것처럼 우리는 당연히 한세연 대통령을 압니다."

그러나 그건 사실과 조금 달랐다. 노튼이 가져온 자료 속에서 또 하나의 숨

겨진 역사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23세기에 온 배달인들은 한세연 대통령의 존

재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건 세연에게 또 하나의 혼란일 것이라. 하지

만 세연이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준영

에게 세연이 통일한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우리가 23세기에서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대통령인 강민우 대통령

과 세연양 그리고 몇몇 사람들뿐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이 섬 안에 있습니다. 그 중 몇몇은 기밀 누설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섬에

억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저도 억류시키실 건가요?"

"하하,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숨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자신들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

다면 현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미래를 알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리

고 나아가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미래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

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미래의 정보는 수시로 바뀌고 있습니

다. 우리가 여기 왔기 때문이죠. 지금부터의 미래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원래 역사에는 올해 안에 통일의 기본의 체제가 다져지게 되어 있

지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시간대로 온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한 번 가본 길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진창이

있고 어디로 가면 길이 평탄한 지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처음 가는 사람들의 길 안내를 맡기로 한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한국에 꽤

많은 배달사람들을 한국국적을 조작해서 투입시켜 놓았습니다. 그들은 기술

연구소와 학계, 재계와 정계 등 각계에 진출해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

습니다." 세연이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일단 하나의 대전제를 받아들이고 나자 나머지를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게 과거로 온 이유인가요? 강력한 대한민국을 만

들기 위해서?"

"그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닙니다.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현시대의 강력한 국가라면 미

국을 들 수 있겠지만 과연 미국 국민들이 행복할까요? 강력한 국가라는 것은

수단을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종의 탈출

자들입니다. 23세기의 생활상은 세연양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암울한 시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당시 태양계 인구의

1%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보다 행복하고 인간다운 삶이 있는 미래를

원합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강력한 국가를 만든다는 수단을 선택

했을 뿐입니다."

세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는 것에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럼 제가 할 일이 뭔가요? 제가 대통령이 된다면 뭘 해야 되나요? 배달이

모든 일을 하면 저는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요?"

"대한민국을 위한 것 이상을 해야 합니다. 인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생

각하십시오. 우리는 강력한 국가라는 도구를 만들어서 대한민국에게 선물할

것입니다.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하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달

렸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준영군과 세연양과 같은 젊은이들에게 달려있다고

봐야죠."

김시백이 세연을 따사로운 눈길로 보면서 말했다.

"세연양,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소?"

세연은 김시백 통령의 얼굴을 보면서 이번에 만들려고 했던 배달에 관한 프

로그램은 제작을 취소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1월

9일 수요일 새벽 1시, 평양시 모란봉"정말 한다면 하는 군, 역시 독재

정치라는 게 아주 결정이나 집행이 빠르군."

준영이 대동강 너머에 도로를 중심으로 일부만 불이 켜진 어두운 평양시내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북한당국은 오늘 새벽 '대동강의 눈물'이 재방송될 것

이라는 소문이 돌자 신속하게 정전을 결정했다. 아마 평양뿐 아니라 전국의

주요 도시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게 말예요, 남한 같으면 꿈도 못

꿀 일 아닙니까? 독재는 반대여론을 무시하니 의사결정도 빠르고 집행하는

데도 효율적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런 이론은 독재자가 항상 정의롭고 명석하고 공명정대하고 모든

것에 완벽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을 때만 성립되는 이론 아니겠어?"

"플라톤의 철인정치처럼요?"

"그렇겠지."

준영이 야산에 펼쳐진 콘솔을 만지작거리는 태훈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민

주주의도 결함이 많은 정치이다. 22세기 중반에 한 때 컴퓨터 정치를 도입한

적이 있었다. 독재와 전제정치는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라면 민주주의 다

수에 의한 소수의 지배였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비용과 의사결정시간이 긴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투표나 선거에 드는 비

용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나가긴 했지만 무책임한 다수가 순간적으로 결

정하는 정책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낳았다. 그래서 도입된 것이 컴퓨터 정치

였다. 국가의 중요정책을 컴퓨터가 처리하여 가장 최선의 방책을 안으로 제

시하면 국민들 중 그 때 그 때 사안에 따라 무작위로 선정된 1200명의 배심

원들이 그것에 대해 승인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부작용은

금방 드러났다. 컴퓨터는 법안에 사용하는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간혹 심각한 오류를 범하곤 했다. "준영형, 준비 다

됐습니다."

태훈이 기계장비를 두드리며 준영에게 말했다. 23세기에 파동공학을 전공한

대학 2년생이다. 23세기에서 넘어온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21세기에서 더 이

상 학교공부가 진행되지 않고 23세기에서 가져온 C-메모리에 담긴 정보로 독

학을 하는 상황이었지만 태훈의 경우 최석록 박사가 있기 때문에 계속 교수

님과 함께 전공공부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생들 중 하나였다. "정

각 한 시까지 얼마나 남았지?"

"1분 18초 전입니다."

"정확히 1분전에 스위치를 켜 줘"

"예, 스탠바이."

"10초전"

"5초전, 4, 3, 2, 1..파워!"

순간 까맣게 어둠이 내려져 있던 평양시내가 대동강을 중심으로 불이 들어오

기 시작했다. 파동력을 응용한 발전기가 무선으로 전력을 송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각 가정에 있는 TV가 리모콘으로 조정이 가능한 TV라면 자동으로 전

원이 켜져 방송을 하게 될 것이다. 순식간에 평양시내는 초저녁과 같은 야경

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준영은 평양시내를 내려다보면서 VCR 플레이어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태훈이 조종하는 기계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각 TV 송

신탑에 직접 TV전파를 발신하기 시작했다. 아마 평양가정의 사람들은 자다가

갑자기 밝아진 불빛과 시끄러운 TV소리에 잠이 깰 것이다. 준영은 전력송출

기의 용량이 적어 전국적인 방송이 불가능하고 평양시내 지역만 방송할 수

있는 상황이 조금은 아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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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지연 공고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제대로 말하면

지금 바로) 출장을 갑니다.

연재는 7월 14일 수요일에 계속됩니다. ㅠ.ㅠ죄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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