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으아악!”
마운드 위에 있던 투수 에이츠는 느닷없이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가 이렇게 고함을 지른 것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마운드에 오르기 직전까지, 아니 1회 초 대호를 볼넷으로 내보낼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자신의 생각대로 될 것 같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에이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솔직히 오클랜드 슬랙스의 1번 타자인 대호는 이미 증명된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이며 괴물이었기에 볼넷으로 피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다른 타자들은 충분히 상대 가능하다 판단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데뷔 1년 차 신인에게 얻어맞았다.
물론 잠깐 방심을 하긴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메이저리그 구단의 제2선발인 자신이 겨우 1년 차 뉴비에게 얻어맞은 것은 충격이었다.
1루로 내보낸 정대호가 도루를 하려고 자신을 흔들어 1루에 조금 더 신경 쓴 것도 있지만, 켈리 달튼의 타격은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 1회 초 2점을 내주고 긴장했다.
다행이라면 애틀랜타 히어로스의 타선도 오클랜드 슬랙스의 선발 레프리 그로스를 공략해 2점을 뽑아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스코어는 2:2로 균형이 맞았다.
하지만 2회 초가 되면서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맞아 주자를 내보냈다.
두 번째로 타석에 들어선 9번 타자를 잡긴 했지만, 그 사이 주자는 3루에 진루를 하였다.
1사 주자 3루 상황, 오클랜드 슬랙스의 타순이 일순하며 1번 타자인 정대호가 타석에 들어섰다.
오늘 정대호는 그냥 거르기로 하였기에 작전대로 볼넷으로 내보냈다.
여기까진 그럭저럭 경기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경기를 치르다 보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것이니까.
모든 것이 작전대로 되진 않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2번 타자인 켈리 달튼이 문제였다.
1회에도 그러더니 이번 2회 초 타석에서도 켈리 달튼은 자신이 정규 시즌에서 왜 그렇게 좋은 성적을 냈는지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1, 3루에 있는 주자 모두 홈으로 불러들이는 3루타를 친 것이다.
원래라면 켈리 달튼이 3루까지 뛰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그의 발이 오클랜드 슬랙스에서 대호 다음으로 빠르다 하지만, 육상 선수의 수준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럼에도 달튼이 3루까지 진루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애틀랜타 히어로스의 욕심 때문이었다.
1루 주자였던 대호가 홈으로 뛰는 것을 보며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우익수가 홈으로 송구를 한 것이다.
만약 홈으로 송구를 하지 않고 주자를 2루에서 승부를 하거나, 아니면 3루로 던져 진루를 막았다면 되었을 것인데, 그만 욕심을 부렸다.
그리고 욕심을 부린 것은 비단 우익수만이 아니었다.
애틀랜타 히어로스의 포수 에디 머피 또한 홈으로 들어오는 대호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해 무리하게 길목을 막는 수비를 벌였다.
공을 잡기는 했지만 미처 태그를 하지 못하고 대호와 부딪혀 뒤로 날아가 심각하게 떨어지며 부상을 당했다.
그 사이 켈리 달튼은 2루를 지나 3루에 안착할 수 있었다.
투수가 방심하지 않고 또 우익수가 정상적인 수비를 하였더라면, 혹은 포수인 에디 머피가 무리하게 주자의 길목을 막는 위험한 플레이를 하지 않고 3루로 뛰는 켈리 달튼을 상대했다면 점수는 주어도 타자 주자는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그렇게 되었더라면 부상도 입지 않았을 것인데, 무리하게 욕심을 부리다 부상을 당해 포수 마스크를 벗어야 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에이츠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야수들의 정상적이지 않은 플레이 등이 복잡하게 얽혀 울화가 치밀어 고함을 지른 것이다.
한편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대호는 오늘 경기도 편해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무너지는군.’
마운드 위에서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지르는 에이츠를 보면서 대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오늘 선발로 나온 레프리 그로스가 보였다.
‘문제는 레프리인데…….’
상대편 투수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안도를 했다.
그런데 상대편뿐만이 아니라, 우리 편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함정이었다.
작년 데드 암으로 전반기를 모두 날렸던 레프리 그로스였는데, 상태가 좋아 후반기에 팀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경과도 좋아 부상에서 돌아온 것이 무색하게 좋은 성적을 거뒀다.
또한 이번 2033시즌에는 코칭스태프도 부상 이력이 있는 그를 잘 관리하여 17승 6패를 거두며 2선발치곤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충분히 제 역할을 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 마운드 위에 선 그의 투구는 여느 때와 달랐다.
부담감 때문인지, 아니면 부상이 재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제구가 흔들렸다.
그 때문에 1회 말 수비에서 2점을 내줬다.
1회 초 공격에서 타자들이 벌어 두었던 2점을 그대로 헌납한 것이다.
투수 코치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듯 보였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얼굴이 심각한 표정이야?”
오늘은 8번 타자로 타순에 이름을 올린 브렛이 다가와 물었다.
“응. 오늘 선발로 나선 레프리의 컨디션이 좋지 못한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린 대호의 이야기에 이를 듣고 있던 브렛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오늘 선발투수인 레프리 그로스의 투구는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이는 브렛이 2루수로서 가까이에서 지켜본 결과, 평소 투구 폼과 어딘가 미묘하게 달랐다.
그렇기에 대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그래도 애틀랜타 투수에게서 점수를 이렇게 뽑아내고 있는데, 설마 지기야 하겠어?”
비록 1회 2점을 선취하고 다시 2점을 내주며 2:2 동점이 되기는 했었다.
하지만 공수 교대가 되어 2회 초 공격을 하면서 원아웃에 다시 2점을 뽑아냈다.
또 조금 뒤에 한 점을 더 득점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따아악!
잘 맞은 타구가 높이 솟았다.
“와아!”
잘 맞은 타격음이 들리자 대화를 나누던 대호와 브렛이 얼른 더그아웃 펜스 앞으로 얼굴을 내밀며 타구를 쫓았다.
‘아!’
분명 잘 맞은 타구였지만, 안타깝게도 방향이 좋지 못했다.
센터 방면 정면으로 날아간 타구는 워닝 트랙을 지나 펜스 앞에서 잡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3루에 있던 달튼이 홈으로 들어오다 주루 코치의 말을 듣고 다시 3루로 돌아와 공이 잡히는 순간, 언더 베이스를 하여 홈으로 들어와 득점을 했다는 것이다.
잘 맞은 타구에 홈으로 뛰던 달튼을 재빨리 불러들인 주루 코치의 판단 덕분에 한 점을 더 가져갔다.
펑!
“스트라이크!”
그라운드에 주자가 없어서 그런가, 마운드 위 투수의 투구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세로 포수의 미트에 꽂혔다.
펑!
“스트라이크 아웃!”
4번 타자 홈런 브레드는 두 번째 타석에 들어와 삼진을 당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타를 맞으며 흔들리던 애틀랜타 히어로스의 2선발 에이츠는 마치 그동안 얻어맞은 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 와일드한 투구 폼으로 빠른 패스트볼과 변화구를 적절히 섞어 홈런 브레드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우와아아!”
연타를 얻어맞으며 점수를 내주는 것에 잠잠하던 애틀랜타 히어로스 팬들이 자신들의 투수가 상대인 오클랜드 슬랙스의 프랜차이즈 스타이며 주장인 홈런 브레드를 삼진으로 잡아내자 오랜만에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러한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는 에이츠의 모습은 비장감마저 들었다.
한편, 홈런 브레드의 아웃으로 공수 교대를 하는 오클랜드 슬랙스의 더그아웃은 조금 소란이 일었다.
수비를 하기 위해 나가던 레프리 그로스가 급히 더그아웃을 나오다 계단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문제는 넘어지면서 왼손을 땅에 짚으면서 발생했다.
“악!”
그렇지 않아도 컨디션이 좋지 못했던 그는 넘어지면서 손으로 땅을 짚다 팔이 비틀리며 통증을 느꼈다.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투수 교체를 하게 되었다.
문제는 레프리 그로스가 최소 4회까진 던질 것으로 예상하고 아직 불펜 가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타임!”
공수 교대를 하던 중 나온 사고로 마이크 케세이 감독은 급히 주심에게 타임 요청을 하였다.
때 아닌 악재로 인해 어렵게 끝낸 1회 말처럼 2회에 위기를 맞은 오클랜드 슬랙스의 선수들 표정이 굳어졌다.
상대인 애틀랜타 히어로스의 투수 에이츠는 비록 2회에도 3점을 내주긴 했지만, 마지막에 주장이자 4번 타자인 홈런 브레드를 삼진으로 잡으며 기세가 오른 반면, 오늘 자신들의 선발 투수인 레프리 그로스는 2회 수비를 하러 나가다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해 마운드에서 물러났다.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악재로, 오클랜드 슬랙스 입장에서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어제 25:3으로 대승을 거두면서 마운드에 여유가 있다는 점이다.
* * *
김승주는 오클랜드 슬랙스가 2회 초 공격에서 3점을 뽑아내며 5:2로 앞서 나간 뒤 공격을 끝마치고 공수 교대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조금 전 공격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앗! 이게 뭔가요?”
그런데 막 오클랜드 슬랙스의 2회 초 공격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던 찰나, 1루 원정팀 더그아웃 앞에서 일어나는 소란을 보았다.
“음? 오클랜드 슬랙스 선발 레프리 그로스로 보이는데, 상태가 좋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구연 해설도 오클랜드 슬랙스의 더그아웃에서 소란이 이는 것을 모니터를 통해 확인하고 소리쳤다.
공격에서 3점이나 뽑아내며 경기를 잘 치르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선발투수의 부상에 소란이 이는 오클랜드 슬랙스 더그아웃 모습에 두 사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코칭스태프는 얼른 팔꿈치를 잡고 고통을 호소하는 레프리 그로스를 더그아웃 안으로 데려가고, 다른 한편으론 불펜에 연락을 하여 급히 불펜 투수를 가동했다.
그러한 오클랜드 슬랙스 더그아웃 모습이 카메라를 통해 미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한국 또한 이러한 모습이 TV를 통해 중계되면서 오클랜드 슬랙스를 응원하는 팬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이거… 오클랜드 슬랙스에 악재가 나왔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레프리 그로스 선수,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기는 했지만 그래도 3회까진 던져줄 것이라 예상을 했는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부상으로 마운드에서 물러나게 되었으니 오클랜드 슬랙스 입장에선 좋지 못합니다.”
김승주와 하구연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계를 하였다.
* * *
불펜이 열리고 급히 투수가 뛰어나왔다.
감독이 타임 요청을 하는 동안 급히 불펜을 돌리고 나온 투수는 후지이 신타로였다.
오클랜드 슬랙스의 불펜 투수 중 한 명으로 이처럼 갑작스럽게 투수 교체를 해야 할 때 마운드에 올리는 원 포인트 릴리프였다.
시즌 성적은 원 포인트 릴리프로서 크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이처럼 급할 때 쓸 수 있는 자원이란 것이다.
보통 선수들 보다 빠르게 어깨가 달아올라 연습 투구를 많이 가져가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투구를 하였다.
다만 약점이라면 서른 개 이상 투구 수가 늘어나게 되면 급격히 구속과 구위가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급한 불을 꺼야 하기에 원 포인트 릴리프인 후지이 신타로가 마운드에 올랐다.
팡! 팡! 팡!
급하게 마운드에 오른 후지이 신타로가 가볍게 연습 투구를 하였다.
“플레이 볼!”
경기가 다시 재개되었다.
펑!
“볼!”
바깥쪽 낮은 패스트볼이 들어왔지만, 주심의 판정은 볼이었다.
심판의 성향에 따라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수도 있을 만큼 좋은 공이었지만, 오늘 주심을 보는 브라이언 콜 주심은 이를 볼이라 판정했다.
턱!
포수에게서 공을 돌려받은 후지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잘 제구가 된 공으로 그는 스트라이크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작 심판은 이를 볼이라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펑!
“볼!”
이번에도 같은 코스로 공을 던졌다.
하지만 또다시 판정은 볼이었다.
사실 이번 공은 심판에게 자신의 공이 어떻게 볼이냐는 항의성 짙은 투구였다.
그렇지만 야구에서 심판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건방진 생각으로 같은 코스에 공을 던져 보았지만, 브라이언 콜 주심은 이런 후지이의 투구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바로 볼을 선언했다.
‘뭐 하는 거야! 사인대로 던져!’
페레즈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인을 보냈다.
방금 전 두 번째 공은 그의 사인대로 던진 것이 아닌 투수가 사인을 무시하고 임의로 던진 공이었다.
자칫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페레즈는 화를 냈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