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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는 명전이다-152화 (152/209)

152화

배터 박스에서 잠시 물러난 대호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투수를 살폈다.

그런 대호의 모습에 화가 난 앤더슨 타일러의 눈매가 무섭게 찌푸려졌다.

포수의 선택으로 스코어가 자신에게 불리해져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자신을 상대로 예고 홈런을 조장한 상대가 마치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에 더욱 화가 났다.

대호의 두 눈에 투수가 자신을 보며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계획대로군.’

투수를 도발하기 위해 타임을 요청하고 물러나 가볍게 배트를 휘두르며 투수를 쳐다봤었다.

그런데 자신의 예고 홈런과 연계해 이러한 도발에 걸려든 투수의 모습을 보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다면…….’

도발에 걸린 상대를 보았으니 이제는 제대로 할 차례였다.

‘집중!’

홈런을 치겠다고 예고를 했는데, 정작 아웃이나 평범한 안타가 된다면 이것처럼 모양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어제처럼 집중해 컨택에 온 힘을 쏟았다.

‘…된다.’

집중을 하자 주변의 소음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또한 눈에 보이는 풍경이 점점 좁아들며 투수만이 마운드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제대로 능력이 발휘되고 있음을 깨달은 대호는 조금 차분하고 여유롭게 긴장을 풀었다.

‘날아온다.’

집중하고 있는 중 투수가 투구 동작에 들어가는 것이 포착되었다.

‘자, 가자!’

휘익!

따아아악!

마치 커다란 고목이 쪼개지는 듯한 타격음이 뉴슬랙스 볼파크 안을 크게 울렸다.

“와아아아아!”

맑은 타격음이 들리자마자 뉴슬랙스 볼파크 안을 가득 채운 야구팬의 함성이 그라운드를 울렸다.

대호가 친 타구는 볼 것도 없이 홈런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어제처럼 경기장을 넘어가는 장외 홈런은 아니었다.

휙!

스윙을 하고 잠시 자신이 친 타구가 뻗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대호는 1루로 뛰기 전 가볍게 들고 있던 배트를 던졌다.

분명히 그것은 배트 플립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대호의 배트 플립에 항의를 하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개막전에 이어 두 번째 경기에서 또다시 예고 홈런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또 실제도 홈런을 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타타타타!

가벼운 걸음으로 조깅을 하듯 베이스를 돌았다.

“우와아아!”

대호가 그라운드를 돌며 배이스를 밟을 때마다 오클랜드 슬랙스의 팬들은 환호했다.

그중 타석에 들어가기 전 대호와 눈을 마주쳤던 찰리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홈으로 들어온 대호는 타석에 들어서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던 2번 타자 지미 울프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짝짝짝짝!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대호를 향해 동료들이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동료들의 환영을 받은 대호는 복도에 있는 스태프에게 다가갔다.

“베일리, 잠시 부탁 좀 할게요.”

선수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들어주기 위해 있는 스텝이었기에 대호는 그에게 다가가 부탁을 하였다.

“방금 친 홈런 볼을 구할 수 있을까요?”

대호가 친 홈런 볼은 이미 그것을 주운 팬이 가져갔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곳이 있었기에 대가를 치르고라도 구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베일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홈런을 치겠다고 약속한 팬이 있는데…….”

대호는 경기 전 만났던 찰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들려주었다.

“와, 어린 친구가 그런 대견한 일을 하다니. 프런트에 알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인 베일리도 대호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리고 베일리에게서 찰리의 사연을 전해 들은 프런트는 바로 수긍을 하고는 조금 전 대호가 친 홈런 볼을 소유한 팬과 협상을 통해 다시 가져왔다.

연간 야구 관람 티켓과 홈런의 주인공 대호를 직접 만날 수 있게 해 달라는 비교적 가벼운 요구였기에 충분히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 * *

“정대호 선수, 개막전에 이어 오늘도 첫 타석에서 예고 홈런을 쳤는데 하구연 위원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김승주는 상기된 표정으로 조금 전 대호의 홈런에 대해 물었다.

“정말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섭습니다.”

“네? 무섭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개막전에 이어 오늘 두 번째 예고 홈런을 친 대호를 칭찬하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인데, 뜬금없이 무섭다는 대답을 하는 하구연 해설을 보며 김승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런 김승주의 질문에 하구연 해설이 대답을 하였다.

“예고 홈런이란 행위는 분명히 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이 느껴지는 일입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베이브 루스 이후 쇼맨십이 있는 선수라면 누구나 꿈꿔 볼 만한 이벤트 아니겠습니까?”

김승주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생각한 바를 떠들었다.

“네. 그런데… 만약 방금 전 정대호 선수가 홈런을 치겠다고 예고를 한 뒤 홈런을 치지 못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네?”

하구연 해설이 홈런을 예고하고 홈런을 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며 질문을 하자 김승주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리되자 그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창피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당연히 창피했을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란 점이 무서운 겁니다. 바로 전국적인 거짓말쟁이, 혹은 허풍쟁이가 되는 거지요.”

“…거짓말쟁이요?”

“네. 당연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특히나 미국인들은 거짓말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음…….”

거짓말을 싫어 한다는 하구연 해설의 말에 김승주는 순간 당황해 신음을 흘렸다.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할 수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지점이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신뢰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였다.

그러한 나라에서 신뢰가 무너진다면 총기 소지가 합법인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또 다른 말로 미국은 소송의 나라라고도 불리며, 또한 변호사의 천국이었다.

거짓이나 부정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으면 대통령의 탄핵 사유에 거짓말이 있겠는가.

물론 대호가 야구 선수에서 쫓겨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만, 홈런을 치겠다고 예고했는데 실패한다면 동료들 사이에서도 비웃음거리가 되고, 팬들에게는 거짓말쟁이라는 낙인이 찍힐 게 뻔했다.

또한 대호의 인기가 타올랐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식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이벌 구단에게는 자신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루저로 평가가 되어 얕잡아 보이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래저래 리스크가 많은 것이 예고 홈런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처럼 큰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지요.”

하구연은 그런 말을 덧붙였다.

그냥 홈런을 치나 예고 홈런을 하고 홈런을 치나 점수는 같았다.

팬들 앞에서 쇼맨십을 보이며 조금 더 시선을 끄는 정도 외에는 말이다.

그럼에도 선수들이 종종 이런 이벤트를 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타격에 자신감이 있음을 상대에게 보여 주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 *

“부탁하신 것, 여기 있습니다.”

언제 왔는지 자리에 앉아 있는 대호를 찾아온 베일리가 대호에게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베일리!”

“아닙니다. 이게 제 일입니다. 또 부탁할 것이 있으면, 언제든 이야기 하십시오. 아, 참!”

그는 대호에게 부탁한 홈런 볼을 넘겨주며 뭔가 생각난 듯 탄성을 질렀다.

“경기가 끝난 뒤에 팬 한 분을 모시고 찾아갈 것이니 잘 좀 부탁드립니다.”

“네?”

“홈런 볼의 주인에게서 공을 넘겨받는 대신 대호 선수의 다른 사인 볼을 증정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협상을 했거든요.”

“아! 알겠습니다.”

베일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해를 한 대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하였다.

그 정도 서비스는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대호를 향해 켈리와 브렛이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인데 스탭이 찾아온 거야?”

“응. 아까 첫 타석에서 친 홈런 볼을 찾아 달라고 했거든.”

“아, 그런 거야? 그런데 그 홈런 볼에 무슨 의미라도 있는 거야? 스태프에게 다로 부탁을 할 정도로?”

브렛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한 시즌에 몇 십 개의 홈런을 치는 대호였기에 이번 예고 홈런을 친 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은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까…….”

대호는 브렛에게 사연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홈런 볼을 주려고.”

“아! 그런 거라면, 당연히 할 수 있지. 그나저나 그 찰리란 아이도 대단하네.”

브렛은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이제 겨우 일곱 살인 아이가 그런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옆에서 듣고 있던 켈리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서 뭐 해 애송이들?”

대화를 나누고 있던 3인방의 곁에 다가온 홈런 브레드가 이들을 불렀다.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야기 끝났으면 어서 수비 들어가!”

“예, 알겠습니다.”

대호가 복도에서 베일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또 돌아와 브렛, 켈리와 담소를 나누던 중, 오클랜드의 공격이 끝나고 공수 교대를 할 차례가 되었다.

홈런 브레드의 말에 세 사람은 얼른 각자의 글러브를 챙겨 그라운드로 뛰어 나갔다.

* * *

따악!

5회 초 원아웃 상황, 오랜만에 LA데블스에서 안타가 나왔다.

4회 초까지만 해도 오클랜드 슬랙스의 선발 레프리 그로스의 변칙적인 투구에 막혀 변변한 안타 하나 때리지 못하고 삼자범퇴로 이닝을 끝냈는데, 5회 들어 첫 타자부터 안타를 뽑아낸 것이다.

“와아아아!”

LA데블스로써는 이제 첫 안타이다 보니, 뉴슬랙스 볼파크에 원정을 온 데블스 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LA데블스와 오클랜드 슬랙스의 스코어는 0:4로 오클랜드에 4점 차로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첫 안타를 맞은 레프리 그로스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4회까지 통했던 투심 패스트볼이 타순이 한 바퀴 돌고 나니 안타를 맞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 타자는 3B 2S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안타를 맞다 보니 더욱 기분이 좋지 못했다.

‘젠장!’

긴 승부를 하다 보니 투구 수도 갑자기 확 늘어나 버렸다.

4회까지는 투구 수를 잘 조절해 왔는데, 5회 첫 타자와 접전을 벌이니 짜증이 솟구치는 듯했다.

“레프리! 뒤에 걱정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던져요.”

잠시 머뭇거리는 레프리 그로스의 귀에 저 멀리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뭐? 편하게 던지라고?’

느닷없이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진원지를 확인한 레프리 그로스는 조금 전까지 느끼던 짜증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렇지.’

작년 2032시즌 초반 데드 암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날리다시피 하면서 대호와 많은 경기를 함께하진 못했다.

그렇지만 후반기 플레이오프를 확정하고 등판한 경기에서 위기 상황마다 대호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겼다.

‘맞아. 굳이 내가 다 책임질 필요는 없었어.’

좀처럼 야수들의 수비를 믿지 않는 레프리 그로스다.

하지만 대호가 팀에 합류한 뒤로 조금은 그들에게 믿음이 생겼다.

사실 레프리가 2032시즌 부상을 당한 이유도 전적으로 불안한 오클랜드 슬랙스의 수비력 때문이었다.

불안정한 야수들의 수비 때문에 늘어나는 투구 수와 전광판에 불을 지르는 불펜으로 인해 레프리 그로스는 자신의 승리를 지키기 위해 최대한 타자들을 삼진으로 잡으려 하다 보니 무리해 부상을 당한 것이다.

만약 2031시즌 후반기에 대호가 콜업 되지 않았더라면 레프리 그로스의 부상은 더 빠르게 찾아왔을 것이고, 2032시즌 초에 입은 부상보다 더 심각했을 지도 몰랐다.

만약 그렇게 심각한 부상이었다면, 레프리 그로스는 아마도 이번 2033시즌까지 오클랜드 슬랙스의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한 레프리 그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몸을 돌려 투구 자세를 잡았다.

펑!

“볼!”

투구 시간 규정 때문에 급하게 던진 나머지 볼이 선언되었지만, 어느새 여유를 찾은 레프리 그로스의 공은 위력을 다시 찾았다.

4회차는 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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