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4회 말 뉴욕 킹덤즈의 공격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삼자범퇴로 끝나고, 5회 초 오클랜드 슬랙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선두 타자는 9번 밥 존슨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밥 존슨은 이번 타석에서도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2루수 앞 땅볼로 아웃되었다.
“와아아아!”
어제 3점 홈런 한 방만 있었어도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대호가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석 일부에서 커다란 함성이 들려왔다.
타석으로 들어서던 대호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 커다란 함성이 울린 관중석을 돌아보았다.
“와아아아! 빅 타이거!”
자신들을 돌아보는 대호의 모습에 관중석에 있던 팬들은 더욱 열광했다.
씨익!
관중석에선 보이지 않겠지만, 자신을 환호하는 팬들의 모습에 대호는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타석으로 들어섰다.
척!
팬들의 환호를 받고 타석에 들어선 대호는 타격 자세를 잡았다.
그런 대호의 모습은 2회 홈런을 쳤을 때보다 더 기세가 올라 있어, 이를 지켜보는 라이언 홈즈의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팡!
“볼!”
긴장을 하다 보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머지 제구가 잘 되지 않았다.
원하는 곳에 공이 들어가지 않자 라이언 홈즈는 점점 더 짜증이 나고 그럴수록 제구는 더욱 나빠졌다.
팡!
“볼!”
연속해서 볼이 들어오자 급기야 포수가 급히 타임 신청을 하고 마운드에 올라갔다.
이제 겨우 5회 초였다.
조기 강판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한 수치이지만, 어쨌든 이틀 연속 승리 요건인 5회조차 채우지 못하고 선발투수가 내려온다면 더 이상 올해 디비전 시리즈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벤트 로베르트의 행동이었다.
“라이언! 진정해!”
벤트는 투수인 라이언의 눈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진정하라고 소리쳤다.
보통 때라면 이러지 않고 살살 달래며 투수를 리드했을 테지만, 지금은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어설프게 위로했다간 오히려 악영향이 크며,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에는 단호한 태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넌 악의 제국이라 불리는 킹덤즈의 3선발이야! 오클랜드의 선발인 레프리 못지않은 투수라고!”
킹덤즈의 3선발이면 오클랜드와 같은 스몰 마켓 구단에선 1~2선발급 투수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그런 것이 먹혔는지, 흐려졌던 라이언 홈즈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렇게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정신을 차린 라이언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맞는 것은 신경 쓰지 말고 던져!”
“OK!”
짧은 타임이 끝나고 제자리로 돌아온 벤트 로베르트가 미트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다시 경기가 속행되고…….
펑!
“스트라이크!”
세 번째 투구의 판정은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흠, 이제 좀 제대로 들어오네.’
초구와 2구의 경우 너무 코스를 벗어나 스윙을 가져갈 수도 없는 공이었는데, 이번에는 제법 날카롭게 제구가 된 바깥쪽 스트라이크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 투구 역시 대호가 그냥 지켜본 것으로 칠 마음만 있었다면 충분히 칠 수 있는 투구였다.
‘멘탈도 어느 정도 잡힌 거 같고,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오면 쳐야겠네.’
투수의 정신이 완전히 무너지는 건 오히려 타자에게도 마이너스 효과를 줄 때가 있다.
방금 전의 라이언처럼 제구가 아예 되지 않아 공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위협에 놓이는 게 그 예다.
대호는 정상으로 돌아온 라이언을 보며 적당히 몸에 힘을 주고 집중하였다.
따악!
“파울!”
몸 쪽 살짝 들어오는 공이었다.
하지만 이미 심판이 한 번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린 코스였기에 스윙을 하였지만, 역시나 좋지 못한 공이다 보니 3루 쪽으로 휘어지는 파울이 되었다.
‘볼카운트는 2B 2S! 나쁘지 않아.’
다른 선수 같으면 투수에게 유리한 볼카운트라고 여길 텐데, 대호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봤다.
스트라이크 하나만 더 잡으면 아웃이기에 고의 사구가 나오기에는 힘든 볼카운트였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90%정도는 정면 승부를 보곤 했다.
그것이 유인구가 되었든, 아니면 힘으로 윽박지르는 포심이 되었든, 그도 아니면 타이밍을 뺏는 오프 스피드 볼이 되었든 말이다.
‘난 어떤 구종, 구속이든 자신 있으니까.’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빠른 배트 스피드를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모든 상황에 대처가 가능했다.
오히려 대호에게는 승부를 피해 가는 것이 가장 두려운 상황이었다.
아무튼 이번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거나 아웃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타격에 들어갔다.
따악!
아웃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인드로 스윙을 해서 그런지, 가볍에 5구를 맞힐 수 있었다.
타다다다.
그렇게 힘 있게 뻗지는 못했고, 2루수의 키를 살짝 넘어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였다.
이번 안타로 인해 대호는 사이클링 히트, 그러니까 힛 포 더 사이클까지 2루타 하나만 남겨 두게 되었다.
가을 야구에서 사이클링 히트 달성 직전에 놓였음에도 대호는 기록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이미 마이너에서 그것보다 더한 기록을 쳤고, 신경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아니었다.
대호의 타격을 지켜보는 오클랜드 슬랙스 팬의 경우 악의 제국이라 불리는 뉴욕 킹덤즈를 상대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선수가 그러한 기록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 * *
“와아아아아!”
“정대호 선수, 저희의 이야기를 들었나요?”
“그러게 말입니다. 우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가 나왔습니다.”
“아주 적절한 때, 안타가 나왔어요.”
하구연과 김승주는 대호가 친 안타를 보며 그렇게 판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희한하게 다른 선수들과 다르게 대호의 타격은 단타가 장타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보통의 선수들이 안타를 치게 되면 1루타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대호는 그렇지 않았다.
대호가 친 안타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2루타였고, 그 다음이 홈런과 3루타였다.
1루 베이스에 멈추는 단타의 경우 무척이나 적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대호의 빠른 발 때문이었다.
파워가 좋은 대호가 발도 무척이나 빠르다 보니, 다른 선수라면 1루에 멈춰야 할 타구라도 조금만 깊다 싶으면 2루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방금 전 너무도 잘 맞아 우익수 정면에 떨어지는 안타로 인해 2루까지 뛰지 못하고 1루로 돌아왔다.
그러하였기에 하구연 해설이나 김승주 아나운서가 적절한 때 안타가 나왔다고 이야기한 것이었다.
“정대호 선수, 코치에게 장갑을 벗어 전달하고 자세를 잡습니다.”
플레이가 계속되고 1루에서 세 걸음 정도 떨어지자, 마운드 위에 있던 라이언 홈즈는 잠시 대호를 쳐다보았다.
2루로 도루를 하려는 대호를 노려보며, 도루를 주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하 위원님!”
“예?”
“뛰겠죠?”
앞뒤를 자른 말이었지만, 하구연 해설은 그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을 하였다.
“정대호 선수라면… 당연히 2루 도루를 시도할 것입니다.”
그동안 대호의 플레이 성향을 짚어 보면, 이런 상황에서 한 번도 도루 시도를 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비록 뉴욕 킹덤즈는 3점 차로 앞서고 있기는 하지만, 3점 정도는 메이저리그에서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격차였다.
그렇기에 대호는 언제든 팀의 득점을 위해서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코칭스태프들에게 그린 라이트를 부여받았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스으윽.
대호는 슬금슬금 리드를 길게 가져갔다.
그러자 마운드 위에 있는 라이언은 쉽게 타자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포수인 벤트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타자에 집중시키기 위해 사인을 보낼 뿐.
‘집중해, 라이언!’
한편 타석에 서 있던 지미 울프는 지금이 기회란 예감이 들었다.
대호가 주자로 나갔을 때, 자신의 타율이 상승한다는 것을 그동안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수가 집중을 하지 못하는군.’
자신이 홈런이나 2루타 이상의 장타를 쳤을 때를 떠올려 보면, 대부분 이런 상황이었다.
대호가 타석에서 안타를 치고 나갔을 때, 그때면 언제나 마운드 위의 투수들이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했었다.
팡!
“볼!”
초구는 볼이 날아왔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공이었다.
방금 날아온 초구만 봐도 투수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 * *
“볼!”
초구부터 볼 판정이 나오는 걸 지켜본 애런 번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지, 불펜에 연락해서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투수 코치 저지 런은 감독의 말에 대답을 하고 불펜을 가동시켰다.
5회까지 라이언 홈즈가 3실점을 하며 어찌어찌 막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더 이상 그를 마운드 위에 둘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진즉 교체를 해 줬어야 하지 않았나 그런 후회감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의 후회는 곧바로 맞아떨어졌다.
* * *
초구 볼이 되고 이구 째 투구에 들어간 라이언 홈즈, 그런 그의 투구 자세를 보던 대호가 2루로 도루를 시도했다.
1루에서 리드를 잡던 대호는 라이언 홈즈가 자신을 너무나 의식해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을 것이란 판단을 내렸다.
자신이 2루로 뛸 것을 알고 있는 라이언이기에 어떻게든 공을 빼, 자신을 잡으려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또 포수도 그런 투수의 기분을 맞춰 주기 위해 밖으로 빼는 선택을 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라이언이 투구 동작에 들어가자 바로 2루로 뛴 것이다.
다다다다.
촤아!
“세이프!”
라이언이 공을 빼는 판단은 맞았다.
이는 대호가 2루로 도루를 시도한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구속이 느린 공보다는 차라리 구속이 빠른 패스트볼을 던지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발이 빠른 주자, 그것도 올 시즌 67개의 도루를 성공한 선수를 상대하며 변화구로 공을 빼고 주자를 잡겠다고 2루에 송구를 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대호는 포수가 던진 공보다 0.3초나 먼저 2루에 들어갔다.
0.3초라해서 짧은 것 아니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포수인 벤트 로베르트가 라이언 홈즈가 던진 공을 잡고 미트에서 공을 빼내 막 던질 때, 대호는 이미 2루 베이스를 향해 슬라이딩에 들어갔다.
더 대단한 것은 이러한 대호의 도루가 타자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었다.
피치아웃까진 아니었지만, 대호의 도루를 의식하고 바깥쪽으로 공을 빼서 도루 저지를 하는 상황이니 보통 이럴 때 타석에 있던 타자는 2루 송구를 방해하기 위해서 느린 스윙을 한다.
어떻게든 포수가 2루로 송구하는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미 울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호의 도루 능력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원아웃 주자 2루 상황, 그것도 발이 무척이나 빠른 주자가 2루에 있었다.
오클랜드 입장에서 안타 하나면 득점을 할 수 있는 찬스가 주어졌다.
타자 또한 타점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에 눈을 반짝였다.
따악!
지미 울프는 굳이 무리하게 스윙을 가져가지 않았다.
적당히 내야 수비를 넘기기만 해도 2루에 있는 대호가 홈으로 들어올 거란 사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스코어는 3:0, 무리하게 장타를 노리기보단 팀을 위한 스윙을 하였다.
“와아아아!”
타격음이 들리자 대호는 바로 3루를 돌아 홈으로 뛰었다.
3유간을 뚫고 좌익수 앞으로 굴라가는 타구, 뉴욕 킹덤즈의 좌익수는 자신의 앞으로 굴러오는 타구를 잡자마자 바로 홈으로 송구를 하였다.
펑!
좌익수가 송구를 하다 보니 공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그 때문에 포구를 하고 홈으로 들어오는 대호를 태그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동선 낭비가 있었다.
“세이프!”
대호의 손이 먼저 홈 플레이트를 찍고 지나갔다.
“2루! 빨리!”
공이 뒤로 빠질 것을 대비해 대수비에 들어왔던 라이언이 급히 소리쳤다.
대호를 잡지 못한 것에 망연자실해 있던 벤트는 갑자기 들린 라이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2루를 쳐다보았는데, 그의 눈에 2루로 뛰고 있는 지미 울프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에 급히 2루로 공을 던져 보았지만, 너무 늦어 버렸다.
“세이프!”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