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 오클랜드 슬랙스와 뉴욕 킹덤즈의 1차전은 어느새 7회 초로 접어들었다.
현 스코어는 8:1.
사실상 오클랜드의 승리가 유력한 상황에서 킹덤즈 스타디움에 있는 팬들의 관심사는 승패가 아니라, 오클랜드 슬랙스의 1번 타자 정대호가 3점 홈런을 쳐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로 홈런 사이클을 달성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부였다.
지난 5회에는 루상에 주자가 없었기에 아예 달성할 찬스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7회 초인 현재 1, 3루에 주자가 나가 있어 대호에게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상황은 팬들의 바람과 다르게 전개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뉴욕 킹덤즈의 지도부는 물론이고 중간 계투로 나온 투수까지 메이저리그 역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의 희생자가 되어 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팡!
“볼!”
팡!
“볼!”
투수의 선택은 고의사구였다.
베이스 하나가 비어 있는 상황이니 굳이 무서운 타자를, 그것도 대기록을 도전하는 타자를 상대할 이유가 없었다.
메이저리그의 많은 불문율 중, 대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타자나 투수를 고의로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불문율이라는 단어 그대로 무조건 따라야 하는 규칙은 아니었다.
비록 팬들과 그 당사자에게 비난을 듣더라도, 굳이 대기록의 희생자가 되어 야구 역사에 평생 보존된 채 조리 돌림을 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간혹 그런 것에 반발해 정면 승부를 하는 이도 있기는 하지만, 승부에서 패배한 이들의 말로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야구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나이를 먹고 은퇴한 뒤에도 영원히 따라다니며 후회를 낳았으니까.
그리고 마운드 위에 있는 뉴욕 킹덤즈의 투수 역시 그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더그아웃의 지시를 100% 수행 중이었다.
어차피 자신에겐 더그아웃의 지시라는 면죄부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혹시라도 보더 라인 가까이에 공을 붙이지 않도록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던졌다.
또한 혹시나 비슷한 코스에 연속해서 던지면 괴물 타자인 대호가 궤적을 읽고 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이 들어가는 코스도 변경해서 던지고 있었다.
팡!
“Walk!”
“우우우우!”
누가 봐도 고의 사구라는 것이 보이게 볼넷을 준 투수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으로 나왔다.
아무리 이곳이 뉴욕 킹덤즈의 홈구장이라 하지만, 킹덤즈의 팬들도 이번만큼은 야유를 막지 못했다.
아니, 일부 킹덤즈 팬 사이에서도 야유가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이 누군가.
타 구단 팬들에게 악의 제국이란 이명까지 가지고 있는 킹덤즈가 아닌가?
그런 구단의 일원이 적에게 대기록을 헌납하기 싫다고 고의 사구를 던졌으니 당연히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물론 만에 하나라도 대기록을 주게 된다면 그 또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이란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은 사실이다.
“아! 매트 크록스가…….”
김승주는 고의 사구로 1루에 걸어 나가는 대호의 모습을 보면서 뉴욕 킹덤즈의 투수 매트 크록스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홈런 사이클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안타깝게도 뉴욕 킹덤즈 투수의 고의 사구로 인해 기회가 무산되었으니 말이다.
9회에 마지막 기회가 있을 수도 있지만, 상황을 보면 결코 쉽지 않을 듯했다.
“그래도 프로 선수인데 어떻게…….”
그렇기에 김승주는 마치 저주라도 뱉어낼 것처럼 작게 으르렁거렸다.
잠시 방송인이란 본분을 잊고 대호의 기록 도전 실패에 감정이 격해지고 만 것이었다.
“안타깝기는 해도 이 또한 야구이지 않습니까? 정대호 선수가 감정을 잘 추슬러 남은 기회에 다시 도전을 하기 바랍니다.”
하구연 해설 위원은 그나마 노련하게 감정을 숨기며 자신의 바람을 카메라를 보고 이야기하였다.
툭툭!
1루에 도착하자 코치가 대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위로를 하였다.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응? 저 괜찮습니다.”
자신을 위로하는 코치의 말에 대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오늘 홈런 세 개를 친 것만으로도 대호는 그렇게 아쉬움이 없었다.
비록 메이저리그에서 홈런 사이클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고의 사구로 달성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라도 비슷한 상항이 닥치면 정면 승부를 하기 보단 고의 사구로 보내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투수가 아닌 게 다행이지.’
그렇게 대호는 코치와 짧은 대화를 마치고 장갑을 바꿔 꼈다.
척!
원아웃에 만루, 오클랜드 슬랙스는 3회에 8점을 내고 그동안 점수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만루의 찬스가 주어졌다.
더 많은 점수로 달아날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비록 자신이 안타나 홈런을 치진 못했지만, 다음 타자로 기회가 연결되었기에 팀의 일원으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한편, 오늘 가장 핫한 타격감을 자랑하는 대호를 고의 사구로 내보냈다고 하지만, 투수인 매트 크록스의 상황은 여전히 그리 좋지 못했다.
타석에는 오늘 대호만큼이나 뜨거운 지미 울프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의 성적은 4타석 3안타, 거기에 장타인 2루타가 두 개 있었다.
즉, 여기서 지미 울프가 중전 안타 하나만 쳐도 발이 빠른 대호라면 충분히 3루까지 뛰는 것은 물론이고, 조금만 외야 깊숙이 날아가면 홈까지 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아악!
아니나 다를까, 전 타석에서 투수에 속아 더블플레이를 친 지미 울프는 이를 만회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각오를 다진 그의 스윙은 날카롭게 돌아 매트 크록스의 투구를 타격했고, 우익수와 중견수의 중간에 떨어졌다.
다다다다!
2루와 3루에 있던 주자는 물론이고, 1루에 있던 대호 역시 지미 울프의 날카로운 스윙을 보자마자 바로 2루로 뛰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3루, 또 3루 선상에 있는 주루 코치의 신호를 보고 곧바로 홈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때 우중간으로 떨어진 공을 잡은 우익수는 힘차게 포수를 향해 공을 던졌다.
하지만 급한 나머지 정확한 송구를 하지 못하고 공이 좌타석 쪽으로 쏠렸다.
그러다 보니 당연한 결과로 홈에 들어오는 대호를 저지하기에는 늦어 버렸다.
이 때문에 홈 플레이트에 슬라이딩을 하는 대호의 발이 먼저 닿고, 블로킹을 하던 포수는 닭 쫓던 개 꼴이 되었다.
“세이프!”
“와아아아!”
지미 울프의 싹쓸이 안타가 나왔다.
대호가 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무리한 송구를 하는 바람에 지미 울프는 그사이 2루까지 진출을 하였다.
조금 무리를 했다면 3루까지 갈 수도 있었지만, 경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체력이 떨어져 3루까지 뛰지 않았다.
물론 현재 점수 차도 크게 나다 보니 무리하게 진루를 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8:1 만루 상황에서 주자 싹쓸이 2루타가 나오면서 스코어는 11:1 10점차로 더 벌어졌다.
뉴욕 킹덤즈에게 8회와 9회 말 두 번의 공격 기회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재 오클랜드의 기세를 보아선 역전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 * *
따악!
투아웃에 주자는 1, 2루 상황, 뉴욕 킹덤즈의 6번 타자가 친 타구가 센터 방면으로 날아갔다.
타다닥!
대호는 자신의 정면으로 날아오는 타구를 보며 빠른 걸음으로 낙구 지점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글러브를 낀 왼손을 머리 위로 들어 포구를 하였다.
퍽!
“아웃!”
잘 맞은 타구이긴 했지만, 대호의 넓은 수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잡혀 버렸다.
타자가 친 공이 대호에게 잡히면서 오클랜드 슬랙스와 뉴욕 킹덤즈의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은 원정팀인 오클랜드 슬랙스의 승리로 끝났다.
타다다다!
원정 첫 경기를 승리로 가져왔다.
내일 있을 2차전도 승리를 하면 홈으로 돌아가 편안한 기분으로 3차전을 치를 것이고, 아니면 1승 1패를 하고 홈으로 돌아가 경기를 치르게 될 것이다.
대호는 이왕이면 원정 경기 모두 스윕을 하고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더그아웃으로 뛰어갔다.
경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려던 때, 마이크 케세이 감독이 대호에게 말을 걸었다.
“대호!”
“예!”
“POTM(Player of the Match) 인터뷰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3점 홈런 하나가 모자라 아쉽게 홈런 사이클을 기록하지 못한 대호를 경기 수훈 선수로 뽑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대호는 POTM 인터뷰가 남았다는 감독의 지시에 알겠다는 대답을 하고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 남아 리포터를 기다렸다.
잠시 후, ESPN의 리포터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카메라맨과 함께 대호를 찾아와 인터뷰가 진행이 되었다.
“빅 타이거!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승리를 축하합니다.”
리포터는 대호란 이름 대신 팬들이 대호를 부르는 별칭 중 가장 많이 부르고 있는 ‘빅 타이거’를 사용해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대호 역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기분은 어떠세요?”
“기분이요? 하하, 뉴욕 킹덤즈를 맞아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을 승리해서 그런지 너무 기쁘네요.”
대호는 너스레를 떨었지만, 인터뷰를 하던 리포터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는지 다시 한번 질문하였다.
“정대호 선수, 이번 경기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죠. 다만… 오늘 역사적인 대기록이 세워질 수도 있었는데, 투수가 승부를 피하는 바람에 실패하셨잖아요? 당연히 아쉬우실 텐데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역시 그걸 물어볼 줄 알았어.’
당장 대호가 볼넷을 얻어 1루로 나갔을 때, 코치들 역시 자신을 격려해 주지 않았는가.
대호는 리포터에게 대답을 하기 전, 마음을 한 번 가다듬고 말을 이어 갔다.
“뭐…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제가 투수라도 그 상황에선 고의 사구로 타자를 내보냈을 테니 굳이 끝난 승부에 연연하진 않겠습니다.”
“…….”
너무도 무덤덤한 반응을 보여 주는 대호에게 당황한 리포터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계속해야 하기에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질문을 하였다.
“그렇다면 매트 크록스 선수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호가 이해한다는 뉘앙스로 말을 해서일까.
리포터는 매트 크록스에게 한마디 할 것을 요구했다.
꽤나 무례한 요구였지만, 대호는 담담하게 답변했다.
“내일 시합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 좋은 승부 부탁드립니다.”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
매끄럽게 인터뷰가 진행되다 보니, 기삿거리로 건질 것이 전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어. 빅 타이거는 항상 이랬다고!’
그러나 리포터 역시 매번 대호의 다른 인터뷰를 지켜봐도 항상 이런 식이었기에 큰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은 살짝 도발을 걸어 보았는데, 혹시라도 문제가 될 만한 요소가 있는 대답은 모두 피해 가는 인터뷰 스킬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 * *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승리를 하고 저녁 시간이 되었다.
마이너리그 중계권만 가지고 있는 울프TV의 리포터인 한나는 대호의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뉴욕까지 따라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있었다.
야구팬들은 이미 두 사람이 한 달 뒤에 결혼을 할 것을 뉴스를 접해 알고 있기에 두 사람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지 않고, 두 사람의 식사가 모두 끝나길 기다렸다.
“자기, 1차전 승리 축하해!”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한나는 대호에게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응, 고마워! 자기가 옆에서 지켜보니 더 힘이 나서 열심히 할 수 있었어.”
대호의 말을 듣자 한나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자신 덕분에 힘이 난다는 말을 듣고 있으니 당연히 기분 좋을 만도 했다.
물론 옆에서 제삼자가 듣는다면 살짝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7회엔 정말 너무나 아깝더라!”
7회, 두 명의 주자가 나가 있는 상태에서 타석에 섰지만, 고의 사구로 걸어 나간 것을 이야기했다.
“뭐, 아깝더라도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니? 자긴 아쉽지 않아?”
한나는 대호의 대답을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역사적인 기록을 세울 수 있는 찬스에서 무산되어 버렸는데, 정작 당사자가 저렇게 담담하니 잘 이해하기 힘들었다.
“인터뷰에서도 말했지만, 누구라도 그 상황에선 정면 승부를 펼치는 것은 두려웠을 거야.”
“그렇긴 하지.”
“게다가 다른 기록과는 달리 홈런 사이클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잖아? 킹덤즈 구단이나 감독은 물론이고, 코칭스태프들과 다른 선수들도 다 비슷한 기분이었을 걸?”
“아…….”
대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나는 저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그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무엇보다 공을 던져야 하는 투수는 어느 누구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았겠지.”
“아!”
계속된 대호의 설명에 한나는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깨달았다.
한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니, 대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사람이구나!’
비록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지만, 그동안 지켜보면서 대호가 나이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큰 사람임을 깨달았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