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캘리포니아 주 LA 시내 한 식당.
대호와 한나 포커스는 오붓한 저녁 식사를 하였다.
“그런데 자기, LA까진 어쩐 일이야?”
한나는 오클랜드에 있어야 할 대호가 LA에 나타난 것에 놀라 물었다.
방송국 현관에서 만난 직후 바로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당시에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애인이지만, 대호와 함께 있을 때 한나는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런 만큼 대호가 화를 내면 도저히 막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또 그대로 두었다가는 정말 큰 사고가 터질 듯해서 우선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잡아끈 것이었다.
대호는 한나의 질문에 순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을 하다 대답하였다.
“음… 그냥 자기가 보고 싶어서.”
하지만 대답을 하다 보니 뭔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어머!”
대답을 들은 한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소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하지 않는 대호였는데, 느닷없이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런 말을 들으니 당연했다.
“자기, 한 번만 더 다시 말해 주지 않을래?”
한나의 눈이 커지고 반짝이며 부탁했다.
그러자 대호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 헛기침을 하고는 조금 전 했던 낯간지러운 말을 다시 들려주었다.
“자기가 보고 싶어서 왔어.”
드르륵!
자신이 부탁을 했지만, 그것을 아무런 말없이 다시 들려주는 대호의 모습에 한나는 그만 머릿속이 번쩍 폭죽이 터지는 듯한 감동을 느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에서 상체를 쭉 빼며 대호의 입술에 키스를 하였다.
“자기 너무 고마워! 정말이지 그 말, 너무 듣고 싶었어.”
대호의 말에 감동한 한나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는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사실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지금 대호와 결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잘하는 것인지 갈등하던 그녀였다.
더욱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그러했다.
자신은 LA와 샌프란시스코, 라스베이거스 등 서부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으며, 남자 친구인 대호도 메이저리거로서 연고지인 오클랜드뿐만 아니라 여러 지역에 원정 경기를 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올해 메이저리그 시즌이 끝나면 결혼을 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만나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결혼에 대한 많은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또 혼란을 겪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나 본인도 그럴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이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호와 많은 시간을 가지고 대화를 가졌다면 덜했을 것이지만 직업 특성상 그러지 못했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몇 시간 전 그런 사고를 겪게 된 것이다.
“내가 자주 표현을 해 줬어야 했는데, 너무 무뚝뚝했나 보네. 미안해!”
자신에게 키스를 하고 눈물이 글썽한 한나의 모습에 대호는 다시 한번 사과를 하였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연인에게 사랑한다고 표현을 자주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그녀의 심정을 몰라 준 것을 느끼고 반성했다.
“참! 그런데 아까 그 사람 누구야?”
반성을 하던 중 문득 아까 전 상황이 떠올라 물었다.
“응, 그 사람? 앤더슨 실버라고 회사 아나운서 중 한 명이야!”
“아나운서?”
“응, 내가 애인이 있다고 하는데도 자꾸 저녁 같이 먹자고 .. 어휴!”
앤더슨 실버가 그녀에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고는 차갑게 식어버린 표정으로 중얼거리고는 진저리를 쳤다.
마치 송충이나 무슨 징그러운 것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런 한나의 모습에 대호는 자신이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많나 보군!’
진저리 치는 한나의 모습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나는 그 동안 자신이 방송국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가 리포터다 보니 .. 그 사람을 비롯해 남자들에게 .. 힘들어!”
일주일 만에 만난 연인과 맛있게 저녁을 먹던 중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생각나 떠들기 시작한 한나의 투정은 한 동안 계속 되었다.
그런 한나의 투정을 대호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 동안 자신에게 맞춰주기만 했던 한나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가 쌓였으며 이럴까? 하는 생각에 오늘만이라도 그녀의 스트레스가 풀릴 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하였다.
어차피 내일 시합 때문에 저녁을 먹고 헤어져야 했기에 그때까지만 이라도 그러기로 했다.
그런 대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나는 계속해서 직장에서의 일을 요모조모 생각나는 것을 떠들었다.
* * *
오클랜드 슬랙스와 LA데블스의 라이벌 더비 2차전이 펼쳐졌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뉴슬랙스 볼파크는 팬들로 만원이었다.
웅성웅성!
“빅 타이거! 빅 타이거!”
“인크레더블! 인크레더블!”
“HO! HO! HO!”
연호하는 구호는 달랐지만, 모두 한 사람을 부르는 팬의 별칭이었다.
현재 66개의 홈런을 치고,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에 도전을 하고 있었기에 오클랜드의 팬들은 대호의 이름을 연호했다.
더군다나 이제 위에 올라 있는 이는 불법 약물로 얼룩진 기록.
클린 베이스볼을 이룰 수 있는 선수의 등장에 팬들은 열광하고 있었다.
“한국에 계신 메이저리그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계를 맡은 아나운서 김승주입니다.”
올림픽이 끝나고 메이저리그 중계로 돌아온 김승주는 오늘 벌어지는 오클랜드 슬랙스와 LA데블스의 2차전 경기 시작 멘트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하구연 해설 위원님.”
김승주는 자신의 단짝과도 같은 하구연 해설 위원을 부르며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십니까? 하구연입니다.”
아나운서인 김승주와는 다르게 간단하게 인사말을 하는 하구연이었다.
“어제 우리의 정대호 선수가 또 하나의 홈런을 치지 않았습니까?”
“네. 어제 복귀전을 치렀는데, 3회 두 번째 타자로 나와 투런 홈런을 추가했죠.”
하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호의 홈런 소식을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이로써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과 일곱 개 차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즌 마무리까지 여덟 경기가 남았는데…….”
“예. 오늘 경기까지 합치면 여덟 경기가 남았는데, 해설 위원님 생각에는 기록 경신이 가능하겠습니까?”
김승주는 미간을 모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만약 투수들이 정대호 선수와의 정면 대결을 피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질문을 받은 하구연 해설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오늘을 합쳐서 여덟 경기가 남았지만, 투수가 피하지 않으면 가능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투수라 해도 기록을 내주지 않기 위해 정면 승부를 하진 않을 거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옆에 있는 김승주든, 그리고 이들의 중계를 지켜보고 있는 야구팬이든 말이다.
또 지금 뉴슬랙스 볼파크에 있는 팬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메이저리그 투수들이라도 대호와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어떻게든 기록을 내주지 않으려 할 것이라고 말이다.
이 때문에 몇몇 팬들은 대호가 올림픽 출전으로 빠졌던 10여 일의 시간이 그의 기록을 세우는 것에 발목을 잡은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 * *
1회 초 LA데블스의 공격은 안타가 나오긴 했지만, 잔루 1루로 끝났다.
“와아아아!”
오클랜드 슬랙스의 1회 말 공격이 시작되고, 오클랜드의 1번 타자는 어제 8번 타선에 나왔던 대호였다.
복귀전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해 코칭스태프들은 대호를 8번 타선에 넣어 놨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이 대호는 홈런 하나와 2루타 두 개를 포함해 3타수 3안타 볼넷 하나를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LA데블스와 홈 2차전을 치르는 오늘, 대호의 타순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척!
타석에 들어선 대호는 가볍게 배트를 휘두르며 루틴대로 타격 자세를 취했다.
자세를 잡는 대호를 상대하는 LA데블스의 선발투수는 3선발인 다니엘 가자였다.
‘다니엘 가자의 주무기가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였던가?’
LA데블스의 3선발 다니엘 가자는 97마일의 포심 패스트볼과 90마일의 슬라이더를 주무기로 하는 투 피치 투수다.
종종 커브와 스플리터도 던지기는 하지만, 그 두 구종은 아직 완성도가 높지 못해 투구 동작부터가 티가 많이 났다.
그 때문에 정말 가끔씩 타이밍을 뺏기 위해 던질 뿐, 승부수로 던지진 않았다.
‘커브와 스플리터는 아직도 완성이 덜 되었다고 했지.’
아주 가끔 던진다 해도 정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있기에 대호는 오늘 접했던 다니엘 가자의 투구 구종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일단 커브와 스플리터는 버리는 걸로…….’
다니엘 가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대호는 자연스러운 자세로 근육에 긴장감을 주고 투구를 기다렸다.
팡!
“볼!”
다니엘 가자의 초구는 볼이었다.
바깥쪽 아래쪽 공 한 개 반은 빠지는 공으로, 예상대로 정면 승부를 하려는 공이 아니었다.
‘확실히 좋은 공을 주진 않네!’
대호는 오늘 경기를 치르기 이전, 타격 코치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말하기를, 분명 모든 투수들이 정면 승부를 피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대호 역시 예상했던 부분이기에 그리 충격 받지는 않았고, 그저 기회가 오면 곧바로 때리겠다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팡!
“볼!”
이번에도 비슷한 코스의 빠지는 볼이었다.
펑!
기습적으로 안쪽 깊은 곳으로 날아오는 공, 하지만 이번에도 판정은 볼이었다.
KBO 심판이었다면 스트라이크 판정을 했을 수도 있는 공 반 개 정도 빠지는 코스였지만, 인코스에 인색한 메이저리그 심판은 이런 공에도 볼을 주었다.
볼카운트는 어느새 3B 노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투수에게는 너무도 불리한 볼카운트.
하지만 마운드에 있는 다니엘 가자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더불어 마지막까지 완전히 존에서 벗어나는 공을 던졌다.
“Walk!”
홈런 기록 때문이라도 빈 스윙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제 겨우 1회였기에 대호는 굳이 투수를 자극하지 않고 그냥 볼넷을 받고 1루로 걸어 나갔다.
어제 승리로 이미 팀은 지구 우승을 결정지었다.
그 때문에 구단에서 자신에게 홈런 기록에 도전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대호는 굳이 무리해서 기록에 도전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자신이 치고 싶다고 한들, 투수가 공을 던지지 않으면 기록을 깰 수 없었다.
대호는 2회차 KBO와 3회차 야구 경험을 통해 이미 겪었던 바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때가 아니라 생각해 무리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깨지 못하면 또 어떤가?
자신은 이제 겨우 스무 살로 메이저리그 2년차였다.
3회차처럼 마흔까지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한다고 가정하면, 앞으로도 20년은 더 경기를 뛸 수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지금 굳이 여기서 무리할 필요가 없지.’
하면 좋고 하지 못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일이기에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척!
1루에 도착한 대호는 왼쪽 다리에 착용한 보호 장구와 타격용 장갑을 벗어 코치에게 넘겼다.
그리고 주루용 장갑으로 교체한 대호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지 뛸 준비를 한 것이다.
현재 대호의 도루 기록은 52개로 도루 부문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으며, 홈런과 더불어 50―50클럽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이는 최초의 기록이었다.
지금까지 50홈런과 50도루라는 기록을 가진 선수는 두 명이 있지만, 이들도 단일 시즌에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호는 50―50클럽이 아니라 지금 60―60클럽에 도전을 하려는 중이었다.
시즌 종료까지 여덟 경기가 남아 있기에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보단 차라리 이 쪽이 더 현실성이 높았다.
그렇기에 대호는 무리해서 홈런을 치려기 보단 이렇게 편하게 진루를 하고 도루 기록을 더 늘리려고 작전을 짰다.
이런 대호의 생각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쉽게 볼넷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뒤이어 타석에 선 것은 2번 타자 지미 울프.
올 시즌 지미 울프의 타율은 0.334로 작년에 비해 0.032가량 높아졌다.
그런데 타율만 높아진 것이 아니라 그 내용 또한 비약적으로 발전을 했는데, 장타율이 0.11 올랐다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대호가 1번 타자로 그라운드에 나가게 되면 투수를 흔들어 대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투구를 하지 못한 탓이 컸다.
그러다 보니 2번 타자인 지미 울프의 타율과 장타율이 올라가게 된 것이다.
‘자, 준비하시고…….’
대호가 베이스에서 떨어져 길게 리드를 가져가자, 마운드에 있던 다니엘의 표정이 구겨지기 시작하였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