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올림픽 야구 승자조 결선 대한민국과 미국의 경기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흘러갔다.
8회 말이 끝나고 양 팀의 스코어는 17:10으로 대한민국이 미국을 7점 차로 앞서 있는 상황.
다만 미국 팀은 7회부터 대한민국보다 점수를 더 내면서 분위기를 타기 시작했다.
7회에 대한민국이 2점을 낸 것에 반해 미국은 3점을 냈다.
또 8회에는 대한민국에 1점을 빼앗기고 4점을 빼앗으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9회 초, 어쩌면 마지막이 될 대한민국의 공격 기회였다.
“선배님! 7점 차로 이기고 있는데, 일찍 공격 끝내고 승원 선배에게 경기를 맡기죠.”
대호는 타석에 들어서는 주장 김대호를 보며 그렇게 소리쳤다.
비록 미국 팀이 7회부터 자신들 보다 많은 점수를 내며 따라오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7점 차이면 안심해도 될 차이였다.
2~3회 정도 더 공격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 볼 수도 있는 점수 차라 하겠지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9회 말.
“알았다. 적당히 하고 들어오마!”
지루하다는 듯한 대호의 말에 김대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타석에 들어갔다.
한편 타석에 들어서다 말고 김대호가 더그아웃을 보며 펜스에 기대어 있는 대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본 미국의 투수 마이클 스미스는 눈을 반짝였다.
영어가 아니었기에 알아듣진 못했지만, 두 사람이 대화하는 표정을 보면 대충 어떤 내용의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분명 우릴 무시하는 이야기였겠지.’
마이클은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굳게 믿고 투구에 임했다.
‘두고 봐라!’
그는 타석에 들어선 타자가 상대팀의 주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잡고 싶어졌다.
원래 계획은 오늘 타격 폼이 좋은 김대호를 상대로 판정이 후한 바깥쪽으로 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마이클은 의표를 찌르며 정면 승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퍽!
“스트라이크!”
초구는 원래 계획대로 바깥쪽 공을 던졌다.
적을 상대하는데 굳이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없기에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건 중요했다.
팡!
“볼!”
두 번째 공은 안쪽 낮은 볼이었다.
이는 바깥쪽으로 던질 때 승부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속임수였다.
퍽!
“스트라이크!”
다시 세 번째 공은 바깥쪽 스트라이크.
이로써 볼카운트는 투수에게 유리해졌다.
그런데 타자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김대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사실 그는 오늘 주장으로써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4타수 3안타 1홈런을 쳤으니, 이번 타석에서 아웃되더라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었다.
더군다나 팀이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볼카운트가 1B 2S에 몰렸다 해도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었다.
팡!
“볼!”
4구째 공은 2구와 마찬가지로 안쪽 낮은 볼이었다.
‘후우…….’
김대호는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긴장을 풀었다.
가볍게 고개를 돌리며 긴장을 풀었다.
무표정에 가볍게 목을 꺾는 모습은 마치 던질 테면 던져 봐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김대호의 모습에 마이클은 생각했던 대로 의표를 찔러 바로 삼진을 잡아내기로 결심하고 와인드업을 하였다.
천천히 자세를 잡고 리듬을 잡고 투구를 하였다.
쎄에에엑!
지금까지와는 다른 소리를 내며 포수에게 날아가는 공.
‘왔다.’
김대호는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코스의 공을 말이다.
KBO에 등록된 투수들에게 불문율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김대호에게 인코스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타자를 상대로 던지는 인코스 하이 패스트볼은 헛스윙을 잡아내기 위한 공이었지만, 김대호를 상대로는 무조건 홈런이 만들어지는 핫 존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알지 못하는 마이클이다 보니, 가장 자신 있는 코스로 하이 패스트볼을 던진 것이었다.
따아아악!
‘헉!’
타격음을 듣자마자 마이클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설마 상대가 자신이 인코스 하이 패스트볼을 던질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걸 기다리고 있었다고?’
공을 던지고 마이클은 확실하게 보았다.
스윙을 가져가던 타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던 것을 말이다.
아니, 정말 목격한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분명 자신은 마운드에서 그 미소를 봤다.
그리고 어깨가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던진 하이 패스트볼을 배트의 히팅 포인트에 정확하게 가져다 대는 것 역시 똑똑히 보았다.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마치 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것을 느리게 되풀이하는 것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내가 너무 자만했구나.’
마이클 스미스는 올림픽이 끝나면 확장 로스터에 편입되어 메이저리그로 올라갈 예정이었다.
올림픽만 아니었어도 9월 1일에 콜업 되어 메이저리그에 데뷔를 했을 것인데, 국가를 위해 잠시 데뷔를 미뤘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또 보다 화려하게 데뷔하기 위해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을 타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이 너무도 자만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한국의 프로 리그는 더블A와 수준이 비슷하다며?’
자만하다 일격을 맞은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다.
자신이 속한 리그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타자에게 홈런을 맞은 마이클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두근두근!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금방 끝내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생각에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또 다른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는데, 지금 공을 어디로 던질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를 던져도 모두 얻어맞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 *
‘어? 투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펜스에 매달려 마운드 위 투수를 보고 있던 대호는 뛰어난 시력으로 투수의 이상을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포수가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대호는 얼른 타석에 서 있는 이준우를 불렀다.
“준우 형!”
타석에서 물러나 서 있던 이준우는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대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자신을 부른 것이 대호임을 깨달은 이준우는 더그아웃으로 걸어가며 자신을 왜 불렀는지 물었다.
“지금 투수 맛이 간 것 같아요.”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이준우는 느닷없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마도 자만하다가 대호 선배에게 대형 홈런을 얻어맞고 자신감이 날아간 것처럼 보여요.”
“응? 넌 멀리서 그게 보이냐?”
이야기를 듣던 이준우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런 이준우의 물음에 대호는 조금 전 투수가 공을 던지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떨던 모습을 떠올리며 설명하였다.
설명을 들은 이준우는 잠시 자신이 보았던 투수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음, 자세히 설명을 들어 보니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가 중단되고 자신만의 생각에 잠기는 이준우의 모습을 본 대호는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다시 말을 하였다.
“최대한 느긋하게 지켜보고 공격하세요. 대호 선배의 홈런으로 한 점 더 달아났으니 뒤는 오승원 선배에게 맡기면 끝이에요.”
“알았어.”
이준우도 타석에 들어서기 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이미 7점 차나 벌어져 있는데, 굳이 힘들이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리다 좋은 공이 보이면 한 방 치자… 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먼저 주장이 홈런을 치자 그런 생각도 살짝 날아가 버렸다.
방금 전 홈런으로 경기는 이미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어진 것이다.
그래도 방금 전 대호의 이야기를 듣고 승부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뭔가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팡!
“볼!”
팡!
“볼!”
바깥쪽으로 두 번의 공이 날아왔지만, 모두 볼이 되었다.
아무리 좌우로 스트라이크 폭이 넓은 주심이라지만, 거의 공 두 개 정도 빠지는 볼조차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리진 않았다.
* * *
쉽게 끝날 것 같았던 9회 초 대한민국의 공격은 예상과 다르게 무려 3점이나 점수를 뽑아내고야 끝났다.
그리고 9회 말, 미국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20:10으로 점수는 10점 차로 더 벌어진 상태.
그 때문인지 경기장을 찾았던 많은 미국인 응원단은 더 이상 경기 관람을 포기하고 속속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17:10일 때까지만 해도 자리를 뜨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10점 차가 되자 더 이상 앉아 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어! 야구의 본고장인 이곳 미국의 야구팬들이 9회 말, 미국의 마지막 공격이 남아 있는데도 점점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김승주는 뭔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놀라며 장내 분위기를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그건 옆자리에 앉아 경기를 해설하던 하구연 해설위원도 마찬가지였다.
“9회 말 마지막 공격 기회를 남기고 10점 차는 너무도 크게 느껴지니까요.”
“말씀하시는 중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에서 다시 투수 교체를 하는군요.”
“예. 올라오는 것은 역시나 메이저리그에서도 마무리 보직을 맡고 있는 오승원 선수입니다.”
“오승원 선수를 마무리로 마운드에 올린다는 것은 추인수 감독이 이번 회에 경기를 끝내겠다는 뜻이겠죠.”
김승주는 마운드에 오르는 오승원 투수를 보며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그런 김승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야구팬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번 회에 경기를 끝내려고 하지 않으면 누가 마무리 투수를 마운드에 올리겠는가?
당연한 말이었지만 이를 두고 누구도 김승주에게 뭐라고 하는 이는 없었다.
* * *
한국과 미국의 승자조 결선이 치러지는 타이탄스 스타디움의 관중석 한쪽에 앉아 있던 쿠리야마 일본 올림픽 야구대표팀 감독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경기가 흘러갔기 때문이다.
쿠리야마는 이번 올림픽에서 어떻게든 금메달을 따기 위해 작전을 구상했다.
1라운드에 만나는 아마 야구 강국인 쿠바를 상대로 승리를 하고 승자조로 올라간다고 해도, 그 다음 상대는 예상보다 강력한 한국이었다.
쿠바전에 투수를 허비하고 다음 라운드에 한국을 맞아 또다시 투수력을 소모한다면, 최종적으로 승자조 결선까지 올라갔을 때 팀의 모든 선수들이 지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차라리 쿠바에 패배를 하고 패자조로 내려가 투수진의 전력을 보전해 미국전을 대비하는 것이었다.
예상 이상의 전력을 가지고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은 쿠바를 상대로, 그리고 미국을 상대로 투수 전력을 허비했을 테니 패자조로 떨어졌을 때는 자신들보다 전력이 약화되어 있을 것을 확신하고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한국 팀의 고질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쿠리야마는 자신의 선택을 믿었다.
한국 팀은 자신들 일본과 경기를 할 때면 참으로 이상할 정도로 귀찮은 존재로 돌변하는 경향이 있다.
또 병역면제 조건이 걸린 대회에서 보여 주는 그들의 경기력은 정말이지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메달을 확보한 뒤로는 그러한 경향이 또 확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이런 작전을 꾸몄다.
미국과의 승자조 결선에서 패하고 패자조로 내려올 한국.
그들은 이미 이번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확보한 상태에서 패자조로 내려올 것이니, 아무리 자신들과 경기하게 된다고 해도 열심히 하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2선발인 사사키 준이치를 내보내 쉽게 한국을 꺾고 최종 결선에 진출해 미국 팀을 상대로 메달 색깔을 가르는 경기를 치를 것이다.
한데 미국 팀의 전력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경기장에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패배할 것이라 예상했던 한국이 최강 미국을 10점 차로 이기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난 공격력을 발휘하며 미국에 20점이나 뽑아냈다.
물론 미국에 10점을 내주긴 했지만, 그건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쿠리야마는 한국의 투수력을 이미 오래 전에 파악했다고 여겼다.
그런데 미국을 상대로 20점이나 뽑아낸 강타선은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거 어렵게 되었는데!’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