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우연이었지만 방금 전 볼 판정은 정말이지 대호에게… 아니, 대한민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에게는 귀중한 정보였다.
휘익!
3B 2S 상황에서 미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 선발투수인 에릭 헤밀턴이 던진 공은, 조금 낮기는 했지만 대호가 설정한 배팅 존 안에 들어왔다.
따아아악!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은 아니었지만, 본인이 설정한 존 안이었기에 대호는 그대로 밀어 쳤다.
“어어!”
바깥쪽 낮은 공이었기에 가볍게 툭 밀어 쳤는데, 너무도 정확하게 히팅 포인트에 맞은 것인지 맑은 소리를 내며 우익수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다다다다!
치는 순간 대호는 자신이 때린 타구가 홈런이 될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 심판의 홈런 콜이 나오지 않았기에 전속력을 다해 1루로 뛰었다.
그리고 막 2루를 향해 뛸 때, 큰 소리로 심판의 홈런 콜이 들려왔다.
“홈런!”
“와아아아아!”
비록 자국의 팀이 아닌 상대 팀이었지만, 방금 전 홈런을 친 타자가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핫한 선수였기에 야구 구경을 온 야구팬들은 대호의 홈런에 환호했다.
타타타타!
자신이 친 타구가 홈런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대호는 달리던 속도를 줄이며 가볍게 뛰어 그라운드를 돌았다.
짝!
대호는 막 3루를 돌고 있던 중 선상에 나와 있던 주루 코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홈으로 들어왔다.
짝!
“오늘도 홈런으로 시작하는구나!”
2번 타자인 이중호는 축하 인사를 건네며 하이파이브를 하였다.
“형!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이 좌우로 폭이 넓어요. 위아래로는 공 반 개씩 줄어들고, 바깥쪽으로는 공 하나, 안쪽으로는 반 개 정도 넓어져요.”
“그래? 고맙다.”
이중호는 대호가 들려준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듣고는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이러한 정보는 무척이나 중요한데, 멍하니 볼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삼진을 당할 수도 있고, 또 이에 항의를 하다 경고나 퇴장을 당할 수도 있었다.
더 나아가면 팀에 누를 끼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래서 선두 타자가 중요한 거지.’
이중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보는 대기 타석으로 나오고 있던 3번 타자이자 지명타자인 최태경에게도 전달되었다.
따악!
KBO에서도 타격 기술이 뛰어난 교타자로 알려진 이중호라 그런지 대호가 전달해 준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떠올리며 투수를 상대하니, 손쉽게 안타를 쳐 낼 수 있었다.
상대는 아직 마이너리거라 구속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만약 이중호가 경험이 적은 선수이거나 빠른 볼에 약한 선수였다면, 강속구에 현혹되어 배트를 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더블A 정도의 수준이라고 폄하당하는 KBO라고 하지만, 그곳에서 프로 5년 차에 이른 베테랑 선수는 달랐다.
더군다나 심판이 어떤 판정을 내리는지도 파악하고 있는 상황, 그저 공만 빠르고 제구력이 떨어지는 투수의 공에 현혹되는 일은 없었다.
따악!
그 결과, 이중호는 미국의 선발 에릭 헤밀턴의 2구를 그대로 당겨 쳐 우중간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고 2루에 진출하였다.
“잘한다, 이중호!”
더그아웃 펜스에 기댄 대호가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최태경! 한 방이다!”
“그래, 광주 타이거스의 역대급 기대주 실력을 보여 줘!”
대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선수들이 이중호가 올린 기세를 더욱 이어 가길 원하며 응원하였다.
“태경아, 우리가 한 번 상대했던 투수야. 쫄지 마!”
대호는 상대 투수가 자신들이 WBSC U―18에서 상대했던 투수였음을 떠들었다.
물론 당시 최태경은 일본전에서 부상당해 직접적으로 상대한 일은 없었지만, 이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최태경이 미국 투수에 당황하지 않고 제 스윙을 가져가길 원했기에 그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런 대호의 응원이 통했을까.
최태경은 상대 투수가 던진 초구를 그대로 받아 쳤다.
따아악!
잘 맞은 타구가 유격수 키를 넘기며 외야로 날아갔다.
타다다다.
2루에 있던 이중호는 투수가 던진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바로 스타트를 끊었다.
그는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다.
최태경 또한 자신이 휘두른 스윙에 투수가 던진 공이 맞는 느낌이 배트를 타고 손에 전달되는 순간, 배트를 던지고 열심히 뛰었다.
한편 타격음이 들리자 미국의 좌익수 도미닉 발로티는 중견수 방향으로 뛰었다.
타구가 그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있을까?’
타구의 각이 높지 않았지만, 속도가 빠르고 아직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잡을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건 마찬가지로 공을 향해 달리던 중견수 오토 디그랑도 같은 마음이었다.
“최태경 선수가 친 타구, 쭉쭉 뻗습니다.”
김승주 아나운서는 1회 초 공격에서 선두 타자인 대호가 솔로 홈런을 치고 2번 타자인 이중호가 2루타, 그리고 3번 타자이자 지명타자인 최태경이 라인드라이브성 타구를 외야 깊숙이 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최태경 선수, 마치 어떤 공이 들어올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기다리지 않고 초구에 그대로 스윙을 가져갔습니다!”
“아마도 선두 타자였던 정대호 선수에게 투수의 구질이나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전해 들은 게 아닌가 합니다.”
“아! 그렇겠군요. 2번 타자 이중호 선수의 타격도 그렇고, 방금 전 최태경 선수의 스윙을 보면…….”
김승주와 하구연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방금 전 최태경이 친 타구에 대해 떠들었다.
“어! 홈런! 홈런입니다. 최태경 선수 투런 홈런을 쳤습니다.”
“허허! 오늘 대표 팀 막내들이 1회 초에 홈런을 주고받는군요.”
하구연 해설 위원은 1번 타자 대호가 솔로 홈런, 그리고 3번 타자 최태경이 2루 주자까지 싹쓸이하는 투런 홈런을 치자 웃으며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되면 4번 타자이자 팀 주장인 김대호 선수의 어깨가 무거워지겠는데요?”
김승주는 마치 개구쟁이와도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냈다.
“막내들이 이렇게 시합에서 재능을 뽐내고 있는데, 김대호 선수도 주장으로서, 그리고 선배의 체면을 걸고서 무언가 보여 주겠죠.”
장난 섞인 김승주의 말과는 다르게 하구연은 국내 최고 강타자인 김대호 선수라면 정말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고 믿었다.
한편, 연속해서 홈런과 안타, 그리고 투런 홈런까지 3연속으로 얻어맞으며 3점을 빼앗긴 에릭 헤밀턴은 완전히 넋이 나가 버렸다.
그런 선발투수의 모습에 포수는 얼른 심판에게 타임을 요청하고 마운드로 뛰어갔다.
‘젠장… 에릭 저 녀석,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하지만 포수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직 경기가 시작 된지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3점이나 빼앗겼다.
설상가상으로 아웃 카운트조차 하나도 잡아내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이 때문에 미국 측 더그아웃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불펜에 급히 연락하여 불펜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넋이 나간 투수의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어야만 했다.
“저기 미국 선발, 정신 줄 놨나 본데요?”
유영진은 감독인 추인수를 돌아보며 이야기를 하였다.
“유 코치가 봐도 그렇지?”
“저라도 저렇게 두들겨 맞으면 정신 못 차리죠.”
유영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이런 식으로 얻어맞게 되면, 에이스 투수라고 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투수라도 말이다.
이제 겨우 마이너리그에서 이름을 조금 알리고 있는 선수들에게는 아직 불가능한 영역의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포수! 그만 돌아와!”
타임을 걸고 마운드에 올랐던 포수가 어떻게든 투수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시간을 끌려 하였지만, 주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에릭! 정신 차리고 내 미트만 보고 던져! 알았지!”
조슈아 밀러는 아직도 눈동자가 풀린 에릭을 보며 그렇게 말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리로 돌아가는 그의 눈은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그가 돌아설 때까지 투수인 에릭의 눈동자는 초점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합니까?’
홈 플레이트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조슈아는 고개를 돌려 더그아웃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석 코치의 시간을 끌라는 사인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더그아웃의 사인을 읽은 조슈아는 미간을 모았다.
‘제길, 투수가 저 모양인데 어떻게 시간을 끌라는 거야!’
조슈아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는 수 없지.’
그는 이번 타자는 어쩔 수 없이 고의 사구로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런 상태에서 스트라이크를 잡겠다고 투수를 리드했다가는 그야말로 대형 사고가 터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여기, 바깥으로 던져!’
조슈아는 바깥쪽으로 던지도록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멘탈이 붕괴되어 버린 에릭이 폭투를 할까 싶어 몸도 바깥쪽으로 빠져 앉았다.
팡!
“볼!”
‘빌어먹을!’
바깥쪽으로 공이 날아오긴 했지만, 하마터면 뒤로 빠질 뻔했다.
만약 그가 혹시나 하고 옆으로 위치를 옮기지 않았다면 분명 뒤로 흘렀으리라.
물론 지금 루상에 주자가 없기에 뒤로 빠져도 큰 이상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이런 모습이 계속되는 것은 좋지 못했다.
“에릭! 진정해, 진정하라고!”
넋이 나간 듯한 에릭 헤밀턴의 투구에 조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투수를 향해 진정하라고 손짓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투수를 위한 것도 있지만, 사실 시간을 좀 더 끌어보기 위함이 컸다.
‘제길, 불펜이 빨리 정상화되어야 할 텐데…….’
조슈아는 연속 홈런과 안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에릭을 대신해 투수 교체가 이뤄지길 바라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제 겨우 가동되는 불펜이 정상화될 리는 없었다.
팡!
“볼!”
두 번째 투구도 볼 판정이 되었다.
그리고 조슈아는 또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투수에게 공을 던져 주며 시간을 끌었다.
“좋아, 에릭!”
팡! 팡!
자신의 미트를 두어 번 두드리며 투수를 달랜 조슈아는 자리에 앉으며 천천히 사인을 보냈다.
그런데 왠지 느낌이 좋지 못했다.
뭔가 사고가 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어! 안돼!’
투수인 에릭이 던진 공이 자신이 원한 바깥쪽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한가운데에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따아아악!
가운데로 몰린 포심 패스트볼이 타자가 휘두른 배트에 정확하게 맞아 날아갔다.
실투에 가까운 포심 패스트볼.
그것도 대기 타석에 보던 힘찬 패스트볼이 아닌, 어딘가 밋밋한 작대기 직구가 치기 좋은 코스로 날아왔으니 이걸 놓칠 리가 없었다.
김대호는 고의 사구로 자신을 거를 것처럼 투구하던 상대 팀 배터리가 갑자기 한가운데 직구를 던지니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이 공을 흘려보내진 않았다.
능수능란한 타격 기술을 사용하는 건 베테랑 타자 김대호에겐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와아아아아!”
최태경의 싹쓸이 투런 홈런에 이어 백투백 홈런이 나왔다.
“역시나 한국의 4번 타자 김대호 선수, 최태경 선수의 투런 홈런에 이어 백투백 홈런을 칩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김대호 선수가 선배로서의 모습을 보여 줄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김대호 선수, 최강 미국 올림픽 야구 대표 팀을 맞아 백투백 홈런을 쳤습니다!”
그라운드에 백투백 홈런을 친 김대호가 천천히 베이스를 밟으며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이 보였다.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우리의 올림픽 야구 대표 팀이 최강 미국을 맞아 1회 초 공격에서 노아웃 4점을 뽑아내며 앞서 나갑니다.”
김승주는 뭐가 그리 감격스러운 것인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마이크에 대고 소리쳤다.
김대호의 백투백 홈런이 터지자, 다시 한번 미국에서 타임 요청이 들어왔다.
한 회 두 번째 타임이라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투수를 교체해야만 했다.
아직 불펜이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시간을 벌어 줘야 할 에릭이 이미 완전히 맛이 가 버렸다.
고의 사구로 김대호를 1루로 보냈어야 하는데, 한가운데 패스트볼을 던져 홈런을 맞아 버림으로써 계획이 완전히 뒤틀려 버렸다.
더그아웃에 있던 미국 팀 코칭스태프들은 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