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세인트 조나단 병원.
오클랜드 슬랙스와 계약된 병원으로 선수들의 건강과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매년 수십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 후 이용 중인 곳이었다.
“아무런 이상 없습니다.”
“그럼 검사지를 뽑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호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담당의의 대답을 듣고 검사 결과지를 뽑아 줄 것을 부탁했다.
코칭스태프들이 원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렉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감독이나 다른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상이란 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한 부분이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예, 안녕히 가십시오.”
덜컹!
의사와 상담을 마치고 나온 대호가 상담실을 나오니, 오클랜드 슬랙스 직원이 대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는 모두 끝났습니까?”
“예, 아무런 이상 없답니다.”
검사 결과를 물어 오는 직원을 향해 대호는 담담하게 의사가 한 말을 들려주었다.
“검사 결과지는 접수처에서 내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 먼저 호텔로 가 보겠습니다.”
오늘 대호의 스케줄은 이제 없었기에, 호텔로 가 보겠다고 말을 남겼다.
“그렇게 하십시오.”
“예, 검사 결과지는 감독님께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호텔로 돌아온 대호는 자신의 방이 아닌 스카이라운지로 갔다.
이곳으로 온 것은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쪽!
대호는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보자, 살금살금 그녀에게 다가가 껴안고 볼에 뽀뽀를 하였다.
한나 포커스는 창밖을 보던 중 느닷없이 누군가 자신을 뒤에서 포옹하고 또 볼에 뽀뽀를 하자 깜짝 놀랐는데, 곧 그 주인이 대호란 것을 알자 한 손을 돌려 그의 머리를 감싸고 버드 키스를 하며 환영의 인사를 하였다.
“어! 언제 왔어요.”
이제 두 사람이 사귀게 된 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는데, 한나는 여전히 대호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잘 알아 갈수록 풍기는 분위기라든가 여러 가지 매력이 더해져 두 사람은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하, 네. 방금 왔어요. 한나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대호는 몇 달 만에 보는 연인을 보며 안부를 물었다.
작년 시즌이 끝난 뒤 며칠 정도 함께 보내다 그녀 역시 일이 있기에 헤어진 이후, 대호는 한국으로 잠시 귀국해 훈련을 했다.
미국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스프링캠프네 뭐네 하며 바빴고.
그렇기에 두 사람은 몇 달 만에 보는 것이었다.
사실 오늘도 시범 경기 일정 때문에 보지 못할 수도 있었는데, 대호가 경기 초반 교체되며 빠진 덕분에 잠시 시간을 내서 만날 수 있었다.
“대호, 그동안 못 봐서 좀 외로웠는데, 오랜만에 만나니까 너무 좋아요.”
20대 후반인 한나는 자신보다 7살이나 어린 대호에게 어리광을 부리며 달라붙었다.
하지만 대호는 이를 보며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이미 한나보다 수십 년은 더 산 대호가 어른스러운 매력을 자연스레 뽐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가끔 너무 나이와 맞지 않는 행동을 해 엉뚱한 상황이 일어날 때도 있었지만, 천재들의 특이함 정도로 취급되어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일은 좀 어때요? 이직하고 나서 힘들지 않아요?”
보지 못한 기간 동안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진 대호가 물어보았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 힘들어도 참아야죠.”
사람들에게는 많은 직업들이 있지만 자신이 하는 일이 가장 힘든 법이다.
어떤 이는 그런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를 하고, 또 어떤 이는 힘든 와중에도 그것을 참고 극복하여 결국에는 원했던 직위를 누린다.
한나 포커스 또한 작년에 이직을 한 뒤 잠깐 힘든 시기를 겪었지만, 현재 직장에서 상사의 눈에 잘 보여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사실 원래라면 몇 년은 더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야 했는데, 운이 좋게도 메이저리거인 남자친구를 둔 것이 알려지면서 승진 심사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이런 사실을 대호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근황을 떠들었다.
‘내년에는 굳이 한국에 들어가지 말고 여기서 시즌을 준비해야겠다.’
작년 시즌이 끝난 뒤 연인인 한나와 오랜 시간을 떨어져 있던 것 때문에 미안해진 대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대호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2031시즌이 끝나고 며칠 같이 있지도 못하고 한국으로 떠났던 대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 한나가 질문을 하였다.
“저야 시즌 끝나고 한국에서 간단하게 스케줄을 소화하고 나서는… 그냥 계속 2032 시즌 준비 때문에 운동만 했죠.”
“그게 뭐예요.”
짧은 방송 출연과 광고 촬영만 끝내고 훈련을 했다는 대호의 대답에 한나는 야유를 하였다.
그래도 자기는 자신의 근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는데, 대호는 고작 한 문장으로 그동안 못 본 몇 달을 요약하니 불만을 터뜨린 것이었다.
하지만 대호는 정말로 잠깐의 휴식을 제외하면 그러한 일과를 보냈기에 억울함만 느꼈다.
“정말이에요! 어디 놀러 가지도 못하고 정말 이번 시즌 준비만 했다니까요?”
거듭된 대호의 호소에 한나는 속으로 눈빛을 반짝이며 안도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보기에 대호는 너무도 완벽한 남자였다.
비록 자신보다 많이 연하였지만, 그런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안정감과 남자다운 모습에 반해 버렸다.
하지만 다른 여자들이라고 대호에게 끌리지 않을까?
한나로서는 대호의 능숙한 매너와 여자를 다루는 기술에 약간 불안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대호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번 2032시즌을 위해서 그런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겨우내 훈련에 임했다고 하자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믿어 줄게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대답을 한 한나는 슬쩍 테이블 위에 있는 대호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신호를 보냈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이 고작 이렇게 카페에서만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쉬웠으니까.
* * *
2032년 4월 15일.
드디어 메이저리그 2032시즌이 개막되었다.
물론 시범 경기가 치러지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메이저리그를 기다린 야구팬의 갈증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아니, 목마른 사람에게 한 방울의 물을 떨어뜨린 것처럼 시범 경기 때문에 오히려 야구팬들의 갈증은 더욱 진해져 버렸다.
“안녕하십니까, 메이저리그를 기다린 야구팬 여러분! 드디어 여러분들이 기다리던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LA데블스와 오클랜드 슬랙스의 개막전이 치러지는 데블스 스타디움의 홈 라디오 해설 리차드 코헨의 목소리가 데블스 스타디움 안을 울렸다.
오늘 개막전은 LA데블스 홈에서 치러지는 경기였기에, 데블스 스타디움을 찾은 관람객은 대부분 LA데블스의 팬들이었다.
개막전부터 같은 리그, 같은 지구 라이벌끼리 경기를 치르는 것이니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또 시범 경기의 마지막도 두 팀이 치렀기에 오늘 경기는 그 날의 연장이라 할 수도 있어 두 팀의 팬들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기도 했다.
“얼마 전이었죠? 마지막 시범 경기에서 오클랜드 슬랙스와 만났는데… 그날은 정말 피와 살이 튀는 줄 알았습니다.”
리차드 코헨은 그날 두 명의 부상자가 나온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
타구에 맞아 교체가 된 잭 크루거와 토드 필을 언급하는데, 리차드 코헨의 억양은 마치 대호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두 사람에게 악의적으로 그러한 타구를 날린 것처럼 들렸다.
이 때문에 라디오를 듣고 있는 LA데블스 팬들은 당연히 대호에 대한 성토를 늘어놓았다.
그와는 반대로 오클랜드 슬랙스 라디오 부스에서는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언급했음에도, 당시 LA데블스 배터리의 비신사적인 행위에 대해 떠들었다.
이렇게 자신의 팀에 대해 편파적인 진행을 함으로써 팬들로 하여금 더욱 야구 경기에 빠지게 만들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원정팀 로커에는 오클랜드 슬랙스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경기 전 마지막 점검을 위해 각오를 다지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거지 같은 데블스 로커로군!”
케세이 감독은 로커 안을 둘러보며 지저분하고 악의적인 낙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지 같은 놈들이 오늘도 시범 경기 때처럼 비열하게 덤비겠지.”
웅성웅성.
마이크 감독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선수들의 집중력은 점점 고조되었다.
선수단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라이벌에 대한 성토를 하는 감독의 말은 이를 듣고 있는 선수들로 하여금 심장을 뜨겁게 뛰도록 만들었다.
“작년 초반엔 출발이 좋지 못했지만, 우리는 후반기에 전반기의 실책을 뒤집고 와일드카드로 포스트 시즌에 갔다.”
“하하하하!”
“하지만 이번 시즌은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나?”
오클랜드 슬랙스의 선수들은 모두 두 눈을 부릅뜨며 감독의 물음에 큰 소리로 답하였다.
“당연합니다! 우린 더욱 강해졌습니다!”
“올해의 전력은 작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족한 전력을 보충하고, 새로운 피를 수혈 받았습니다.”
“그렇다. 전력도 보강되었고, 새로운 피가 수혈됐지. 그러니 이런 너희의 힘을 저 악마들에게 보여 주어라!”
마치 선동가와 같은 연설로 오클랜드의 선수들의 의욕을 북돋은 마이크 감독은 괴성을 지르는 선수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가라!”
“우와! 가자!”
“GO! GO! GO!”
* * *
“2032시즌, 첫 번째 경기가 시작됩니다. 선두 타자는 오클랜드 슬랙스의 기대주인 정대호 선수입니다. 정대호 선수는 작년…….”
LA데블스와 오클랜드 슬랙스의 메이저리그 개막전은 오클랜드 슬랙스의 1회 초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클랜드의 선두 타자는 작년 후반기부터 3번 타자로 활약을 했던 대호였다.
대호가 1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자, 오클랜드 슬랙스의 팬은 물론이고 LA데블스의 더그아웃에서도 난리가 났다.
강력한 장타자인 대호가 3번이 아닌 1번 타자로 나온 것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휙! 휙!
타석에 들어선 대호는 배트를 가볍게 휘두르며 타격 루틴을 가져갔다.
― 대호! 타격 순서가 바뀌었는데 괜찮겠나?
어젯밤, 느닷없이 자신을 부른 마이크 감독이 한 말이 떠올랐다.
당시 대호는 그런 감독의 말에 아무런 상관없다고 대답했었다.
그러자 감독은 개막전에서 자신을 1번 선두 타자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솔직히 대호는 루틴에 대해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타입이었기에 어떤 타선에 들어가더라도 상관이 없었지만, 감독의 입장은 분명 다를 터였다.
마이크 케세이 감독이 얼마나 고심했는지, 자신에게 말을 걸 때도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다 보일 정도였다.
‘감독님의 작전이 잘 들어맞아야 할 텐데.’
“플레이 볼!”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심의 경기 시작 선언이 들렸다.
‘이런, 딴 생각은 이제 금지!’
경기는 시작되고, 대호는 신중하게 투수를 노려보았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