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라스베이거스 에비에이터스와 솔트레이크 비스의 경기는 시작 전 솔트레이크 비스의 우세가 점쳐졌지만, 예상과는 전혀 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양 팀 모두 점수를 내지 못하고 투수전으로 흘러가는 듯했지만, 3회 말에 경기의 향방이 결정되었다.
라스베이거스 에비에이터스의 8번 타자 릭 알렌이 안타를 친 뒤, 9번 정대호가 홈런을 치면서 타선이 폭발했다.
게다가 대호의 도움으로 인해 라스베이거스는 솔트레이크의 선발 아드리안 펠릭스의 투구 습관을 알아냈는데, 바로 패스트볼과 변화구를 던질 때 디딤 발의 방향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그러고 나서 타자가 일순할 동안 3회 말이 끝나지 않았고, 결국 아드리안 펠릭스는 3회를 마치지 못하고 강판되었다.
그 사이에 같은 회에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선 대호와 아드리안이 HBP로 부상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그는 마운드를 넘기게 되었다.
결과는 만루 홈런.
이로 인해 솔트레이크 비스의 선발로 나왔던 아드리안 펠릭스는 자책점 11점을 기록하고 말았다.
* * *
“라스베이거스 에비에이터스에 정말 엄청난 선수가 들어왔습니다.”
장내 아나운서는 흥분을 금치 못하며 마이크를 잡고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불과 일주일 전 더블A에서 샌안토니오 미션스를 상대로 야구 역사상 단 두 번밖에 이뤄내지 못했던 홈런 사이클을 달성하면서 기록을 세 번으로 늘리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희한하게도 그 기록은 전 세계적으로 오직 더블A에서만 나온 기록이죠.”
아나운서와 해설은 만담을 주고받듯 대호가 더블A에서 기록한 홈런 사이클을 언급했다.
“정대호 선수. 그런 역사적 기록을 이곳 라스베이거스 볼파크에서 다시 한번 도전하고 있습니다.”
장내 아나운서 아담 스미스는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와아아아!”
그랬다.
현재 대호는 이곳 라스베이거스 볼파크에서 역사적인 기록인 홈런 사이클을 또다시 세우기 일보 직전이었다.
기록까지 남은 것은 오직 솔로 홈런 하나.
3회 말 첫 타석에서 투런 홈런을 치고, 돌아온 두 번째 타석에서 만루 홈런을 쳤다.
5회 말 세 번째 타석에서 쓰리런 홈런을 쳤고, 6회에 기회가 있었지만 이때는 안타깝게도 상대편에서 고의사구를 선택해 버렸다.
그리고 8회 말, 대기록을 달성할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
* * *
타석에 들어선 대호는 조용한 포수를 보며 물었다.
“말이 없어졌네?”
3회 말 투런 홈런을 맞은 뒤, 대호를 상대로 트래시 토크를 구사하던 솔트레이크 비스의 포수 애런 지브럴이었지만, 너무도 큰 점수 차 때문인지 이제는 조용했다.
대호는 그런 애런을 보며 살짝 비웃듯이 물어보았지만, 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괜히 반응했다가는 역사적 기록 하나를 헌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인지, 솔트레이크 비스의 더그아웃에선 대호를 상대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온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야, 기세등등하더니 꼬리를 만 거야?”
대호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애런을 보며 한 번 더 찔러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반응은 없었다.
‘…이거 힘들겠는데?’
손뼉도 마주해야 소리가 난다고, 이렇게 자신을 피하려는 상대로 홈런을 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홈런 사이클까지 이제 솔로 홈런 하나만 남겨 둔 상태.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대호는 이제 겨우 미국으로 건너온 첫 해를 보내고 있었지만, 이런 기록은 아무 때나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기회가 있을 때 달성하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대호가 홈런 사이클을 집요하게 노리는 이유도 따로 있었다.
바로 더블A에서 홈런 사이클을 달성한 직후 얻은 시스템 보너스 때문이다.
그날 첫 타석에서 어린 팬의 염원이란 퀘스트를 성공한 이후, 대호는 전 스탯이 메이저리그 평균인 60점을 넘기게 되었다.
시스템은 경기가 끝나고 대호의 홈런 사이클 달성에 대한 보상도 주었는데, 무려 올 스탯 3포인트 UP이라는 엄청난 것이었다.
60점 미만일 때 3포인트와 이후의 3포인트는 완전히 다른 수치였다.
현재 대호의 스탯 중 가장 높은 것은 힘으로, 무려 69나 되었다.
‘이 정도면 메이저리그에서도 TOP 20에 들어갈 수준은 되겠지.’
결코 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호는 힘만 강한 것이 아니다.
민첩도 63포인트가 되었고, 가장 스탯이 낮았던 지능도 이제는 60포인트를 넘겼다.
그러니 대호가 트리플A에 콜업 되어 또 다시 레벨 업이 아닌 방법으로 올 스탯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그걸 노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대호는 절대로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자신과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면, 상대하게끔 만들면 되니까.
펑!
“볼!”
또다시 볼이 선언되었다.
투수가 연속해서 볼을 던지자 이제는 기다리지 않고 배트를 휘둘렀다.
휘익!
펑!
공이 날아오기도 전에 배트를 고의로 휘둘러 헛스윙을 한 것이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공을 받은 포수는 목각 인형이 고개를 돌리듯 뻣뻣한 목을 돌려 타석에 있는 대호를 쳐다보았다.
공이 날아오기도 전에 빈 스윙을 가져가는 대호를 보며 그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건 솔트레이크 비스의 감독, 코치들은 물론이고 이를 지켜본 선수들 모두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자신들이 기록을 주지 않기 위해 고의사구를 던지는 것을 알고 일부러 헛스윙을 하는 것임을 느꼈지만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그런 부정은 다시 대호가 공이 오기도 전에 헛스윙을 하자 곧바로 깨져 나갔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피할래?’
말로 하진 않았지만, 대호의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이래도 피한다면 너희는 야구할 자격이 없는 루저야!’
…라고 말이다.
현재 스코어는 2B 2S, 전적으로 투수에게 유리한 카운트였다.
대호는 고의사구로 내보내려는 투수를 상대로 허공에 대고 배트를 휘둘러 일부러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말이다.
그 결과 이젠 투 스트라이크였기에 한 번만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삼진 아웃이 된다.
‘저 자식… 지금 시위하는 건가?’
솔트레이크의 투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상대 타자는 지금 시위 겸 도발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온몸을 휘감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건 비단 자신만이 느끼는 게 아니리라.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던 솔트레이크 비스의 감독 역시 얼굴을 굳혔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기록을 주기 싫어서 피한다면 자신은 감독을 할 자격도 없는 좀생이로 낙인찍힐 게 뻔했다.
물론 아무리 빅 볼을 추구하는 미국이라고 해도, 역사에 남을 기록을 넘겨주려는 구단이나 선수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하는 것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기록을 선사한다? 그러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자신들을 응원하는 팬들, 그리고 선수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 대호의 노림수가 있었다.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을 피하는 팀이나 선수는 팬들로부터 외면 받기 마련이지.’
마초적인 문화가 깔려 있는 야구팬의 특성상 이미 승패가 결정된 상태에서 승자의 기록 도전을 방해했다간 환호가 아닌 야유를 받기 십상이었다.
솔트레이크 입장에서야 기록 달성을 주지 않았다고 안도할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손해에 가까운 수였다.
이 지점을 대호가 찔러 넣은 것이었다.
선수와 감독의 자존심, 그리고 팬들의 분위기.
대호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인해 솔트레이크 비스의 투수는 좀처럼 공을 던지지 못했다.
‘젠장!’
투수는 저도 모르게 3루 더그아웃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독이라고 지금 상황을 타파할 획기적인 방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믿을 구석은 저기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포수도 마찬가지였다.
더그아웃의 사인을 받아 투수에게 전달을 해야 하기에, 코칭스태프들의 의견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간절한 두 사람과는 달리, 더그아웃에서는 아무런 사인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타, 타임!”
더그아웃에서 아무런 사인이 나오지 않자, 애런은 하는 수 없이 주심을 보며 타임을 요청했다.
자신이 아무리 사인을 보내도 투수가 계속해서 거부를 하고 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타임을 요청하고 투수에게 걸어갔다.
“아그리브, 왜 공을 던지지 않는 거야?”
애런은 투수인 아그리브 메킨더에게 물었다.
솔직히 그러면서도 투수의 생각이 어떤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애런, 넌 화가 나지 않아?”
애런의 예상대로 아그리브의 목소리는 그르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은 승부를 하지 말라고 했잖아.”
정확히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리는 애런을 보며 아그리브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이미 승부는 결정됐어. 그런데 기록 때문에 승부를 피한다고?”
뭐가 그리 두렵냐는 듯 아그리브는 애런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네게는 이 소리가 안 들려? 안 들리냐고!”
“우우우우!”
마운드에서 대화가 길어질수록 관중석에서는 팬들의 야유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그만!”
대화가 길어지자 주심도 더 이상 경기장 분위기를 무시할 수 없었고, 포수를 불렀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애런의 걸음은 결코 가볍지 못했다.
투수와의 대화를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투수인 아그리브 또한 마찬가지였다.
답답함이 밀려왔다.
‘젠장!’
굳은 표정으로 제자리로 돌아온 애런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본 대호는 속으로 어느 정도 자신의 작전이 통한 듯 보여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로 승부를 보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에, 조용히 타석에서 들어가 자세를 잡았다.
쌔앵!
바깥으로 빠지는 볼이었다.
“볼!”
또다시 바깥으로 벗어난 공이 날아와 볼카운트는 3B 2S, 매치 포인트가 되었다.
휘이익!
탁!
“파울!”
이번에도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나는 낮은 볼이었지만, 대호는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파울을 만들었다.
결코 자신이 볼넷으로 걸어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탁!
“파울!”
더그아웃에서 Walk로 내보내란 사인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기에, 포수인 애런도 어쩔 수 없이 아그리브에게 볼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타자인 대호가 계속해서 커트하는 바람에 애꿎은 투구 수만 늘어나고 있었다.
7구, 8구…….
자신이 던지는 공이 파울이 되자, 지켜보던 아그리브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냥 대놓고 거를까? 하지만 그랬다가는…….’
아그리브의 표정을 본 애런 역시 완전히 굳어 있었고, 그건 솔트레이크 비스의 더그아웃도 마찬가지였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 승부를 보라고 할 걸.’
리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소리쳤다.
대기록을 주지 않기 위해 승부를 피하란 지시를 내렸다.
그는 내년에 상위 구단인 LA 데블스와의 계약 연장이 있는데, 혹시나 이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메이저리그 구단과 마이너리그 구단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계약 관계에 있다.
즉, 메이저리그 구단을 대신해 이들이 계약한 선수를 위탁 교육을 해 주는 위탁 기관인 셈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탁 기관에서 선수 양성을 할 때, 승부를 피하는 교육을 한다?
아무리 좋게 봐도 메이저리그 구단의 입장에선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그와 트리플A에서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홈런 사이클을 처음으로 헌납했다는 감독으로 남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보니,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했다.
그리고 그의 불안감은 안타깝게도 적중하고 말았다.
따아아악!
공이 배트의 히팅 포인트에 맞는 아주 맑은 소리가 들렸다.
다만 타구의 탄도각이 이상적인 홈런 각보다는 훨씬 높았다.
몸 쪽 낮게 떨어지는 커브볼이 날아오자, 대호는 원래 가져가던 스윙 템포를 반 박자 줄였다.
그러고 나서 팔꿈치를 옆구리에 바짝 붙인 뒤, 배트 끝에 힘을 줘 떨어지는 볼에 정확하게 배트 중심을 가져다 댔다.
“중견수! 중견수 뒤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납니다.”
탄도각이 높기에 중견수는 타구를 보며 조금씩 뒤로 걸어가며 포구를 시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움직임은 무의미한 게 되고 말았다.
턱.
어느 순간 등 뒤에는 펜스가 진로를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아!’
아직 공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솔트레이크 비스의 중견수는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와아아!”
트리플A에 역사적인 기록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