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회차는 명전이다-54화 (54/209)

54화

삐이!

‘이건 뭐지?’

원 아웃 주자 만루 상황.

타석에는 보통 타격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하위 타순, 8번 타자가 들어서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더블A.

마이너리그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프로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타자였다.

즉, 무시하다간 큰 한 방을 얻어맞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해.’

정신을 집중하던 대호의 귓가로 이명이 들려왔고, 또 시야가 갑자기 부옇게 흐려졌다.

아니, 갑자기 저 멀리 타석에 들어서 있는 타자만이 눈가에 들어오고 있었다.

탁탁!

대호는 자신의 뒤통수를 몇 번 때렸다.

그러자 다시 원근감이 돌아오고, 이명도 사라졌다.

‘다시 제대로 보이는군.’

정상으로 돌아온 대호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삐이―!

그런데 이번에도 정신을 집중해서 타석의 타자를 쳐다보자마자 또다시 이명과 함께 주변 풍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중앙의 타자만이 뚜렷했고.

‘설마… 지금 정신을 집중했다고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가?’

대호는 흐려진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타자를 보며 이 현상을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궁리했다.

따악!

순간, 귓가에 평소보다 훨씬 선명한 타격음이 들렸다.

‘뒤다.’

평소와는 달랐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타구의 궤적과 각도 등을 보고 난 이후에야 어디로 떨어질지 가늠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소리만 들었는데도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동물적인 감각과도 달랐다.

지금은… 마치 예언이라도 하는 듯했다.

타다다다!

다른 때보다 반 템포 빠르게 반응한 대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위닝 트랙을 지나 펜스로 달려갔다.

‘만일 내가 틀렸다면…….’

대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말의 불안감을 뒤로한 채, 포구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 나서 곁눈질로 주자들을 살폈는데, 타자가 휘두르는 걸 보자마자 뛰려던 미션스의 주자들이 멈추고 베이스로 돌아가 대기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도 그럴 것이, 잘 맞은 타구가 하필이면 철벽 수비를 자랑하는 대호가 있는 센터 방면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고, 동시에 순식간에 도착한 대호가 펜스 앞에서 대기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타앗!

대호는 살짝 뛰어올라 공을 안정적으로 캐치했다.

텁!

높이 든 글러브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미션스의 8번 타자는 아웃되었지만, 아직 공격이 끝난 건 아니었다.

쉬이익!

포구에 성공하자마자 대호는 곧바로 홈을 향해 빠르게 공을 던졌다.

한편, 8번 타자가 락하운즈의 투수가 던진 공을 받아치는 것을 보며 뛰다 주루 코치의 부름에 다시 3루로 돌아왔던 안토니오는 락하운즈의 중견수인 대호가 포구하는 모습을 보며 숨을 죽였다.

‘괴물이군!’

동료인 티모시 고든이 친 타구는 정말 잘 맞은 안타였다.

평소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적어도 2루타를 따낼 수 있었으리라.

그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하지만 오늘 센터 방면을 수비하고 있는 선수는 더블A에서 괴물 같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락하운즈 통곡의 벽 정대호.

넓은 수비 범위와 빠른 발을 가지고 있으며, 몇 차례나 홈런을 훔쳐 내 타자들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만든 장본인이다.

아니나 다를까.

티모시가 친 타구도 역시나 글러브에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달려!”

타앗!

타구가 수비수의 글러브에 들어가기 무섭게 지켜보던 주루 코치가 소리쳤다.

이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안토니오는 죽을힘을 다해 홈으로 뛰었다.

한참 달리던 그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들어왔다.

락하운즈의 포수 알렉스 맥켄이 포구 자세를 취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 벌써?’

비록 자신이 주력이 빠른 편은 아니지만, 펜스 바로 앞에서 공을 잡았는데 벌써 홈까지 송구되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포수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기만전술을 펼친다고 생각한 안토니오는 포수가 있는 위치를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로질러 가기로 결정을 하고 조금 더 빠르게 발을 굴렸다.

하지만 그러한 안토니오의 판단은 너무도 안일한 생각이었다.

일반적인 선수였다면 센터 방면에서 2루수나 유격수에게 던져 홈으로 중계 플레이를 하였겠지만, 대호는 아니었다.

어깨가 강한 대호는 공을 잡자마자 바로 홈으로 다이렉트 송구를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구의 정확도가 얼마나 좋은지 공은 홈 플레이트 왼쪽으로 살짝 치우쳐 날아갔다.

그것은 대기를 하는 포수가 홈으로 들어오는 3루 주자를 조금 더 가까이 맞이할 수 있는 위치였다.

퍽!

‘어?’

홈에서 두 발자국 정도 3루 쪽으로 치우친 상태로 자세를 잡고 있던 알렉스는 자신이 있는 곳으로 정확하게 날아온 공을 잡아 홈으로 들어오는 안토니오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놀란 안토니오는 달리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턱!

“아웃!”

너무도 어이없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이를 지켜본 미션스 팬이나 더그아웃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도 엄청난 슈퍼 플레이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이는 적아를 떠나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이라면 응당 축하의 박수를 보내야 할 장면이었다.

그렇기에 어처구니없는 판단을 내린 안토니오를 비난하지 않았다.

“와아아아!”

반면, 다시 한번 대호가 자신이 괴물임을 입증한 장면을 목격한 락하운즈의 원정 팬들은 1회 초 대호가 솔로 홈런을 쳤을 때보다 더 큰 환호성을 질렀다.

자칫하면 이번 회에 대량 실점이 나올 수도 있었는데, 1사 만루 상황에서 그림과도 같은 보살을 만들어 내며 팀의 위기를 지워 버렸으니까.

* * *

수비를 마친 대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달려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그런 대호를 보면서 선수들은 물론이고, 락하운즈의 감독과 코칭스태프들까지 그의 등과 어깨 등을 두드리며 환영을 해 주었다.

선수들과 코치들의 축하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대호를 맞이한 것은 비단 동료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어머, 대호. 엄청난 슈퍼 플레이였어요!”

관찰 카메라를 찍고 있던 미들랜드 트래뷴의 한나 포커스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대호를 맞아주었다.

꽈악.

‘어?’

얼마나 흥분한 것인지, 한나 포커스는 더그아웃에 있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대호를 꽉 끌어안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비록 나이 차이는 좀 나지만, 미모의 아나운서가 이렇게 환영해 주는 게 싫지 않은 대호였다.

“한나, 축하는 고마운데… 나 대기 타석으로 나가야 해요.”

아직까지 안고 있던 팔을 풀지 않는 한나에게 작게 속삭이며, 대호는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2회 초 락하운즈의 공격이 1번 타자인 아론에게서 끝났기에, 오늘 3번 타자로 나온 대호는 대기 타석으로 나가야 했다.

“어머!”

대호의 엄청난 플레이에 흥분해 그를 끌어안았다는 것을 깨달은 한나는 작게 새된 비명을 질렀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는데, 혹시나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이를 어째.’

사실 한나는 처음 대호와 만나 MVP 인터뷰를 한 이후부터 조금씩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약물 의혹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겠다는 태도, 관찰 카메라로 촬영한 성실함과 뛰어난 야구 실력 등등…….

얼굴에 홍조가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한나는 얼굴이 화끈해져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락하운즈의 더그아웃을 벗어나지 않았다.

‘어차피 관찰 카메라를 찍어야 하니까! …그것 때문이야.’

마음속으로 변명을 남기면서 말이다.

한편, 만루의 위기를 넘기고 대기 타석에 서서 준비를 하던 대호는 조금 전 수비를 하던 때 일어났던 이상 현상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집중을 하니 오감이 향상되는 느낌이었지.’

처음에는 그것이 수비를 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했지만, 막상 미션스의 8번 타자가 안타성 타구를 치자 곧바로 그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수비에 방해되기는커녕, 도리어 엄청난 효과를 보여주어 대호를 놀라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효과가 있는 것 같네.’

그랬다.

대호가 지금까지 세 번 회귀를 하는 동안, 이런 현상을 겪은 건 처음이었다.

‘대체 무슨 차이일까? 스탯의 수치? 그렇다면 2회차 말기나 3회차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할 때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어야해.’

지금까지 정신 스탯은 말 그대로 멘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생각했다.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 쉽게 동요하지 않는 굳건한 정신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정신력에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는 듯했다.

‘시스템… 역시 아직 탐구할 게 많이 남아 있는 물건이구나.’

사실 대호도 누가 자신을 회귀시켜 주고, 또 상태창을 주며 꿈을 이루게 돕는지 알지 못했다.

언젠가 이 모든 일에 대한 대가를 바랄 수도 있겠지.

또 아니면 배후 따윈 없고, 그저 설명할 수 없는 기적 때문에 벌어진 일일수도 있었다.

이런 고민은 이미 2회차를 거치며 모두 끝낸 줄 알았는데, 4회차에 성장형 타이틀이나 정신 집중 같은 새로운 요소를 발견하며 다시 한번 하게 되었다.

딱!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선두 타자로 나선 2번 타자 잭이 안타를 치고 1루로 진출하였다.

“잭! 잭! 잭!”

선두 타자부터 안타를 치고 나가자, 3루 쪽 원정 응원석이 소란스러워졌다.

“HO! HO! HO!”

짧은 환호성이 끝나고, 바로 타석에 들어서는 대호를 부르는 콜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대호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걸음을 멈추고 잠시 응원석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열띤 응원에 화답하겠다는 듯, 배트를 들어 저 멀리 외야를 가리켰다.

“와아! 슈퍼 보이!”

방금의 제스처가 뜻하는 것은 명백했다.

예고 홈런.

이를 지켜보던 락하운즈 팬들은 자신감 넘치는 퍼포먼스에 다시 한번 크게 환호하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9,200명이나 되는 미션스 팬들로 하여금 야유를 이끌어 내고 말았다.

“우우우우!”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야유였다.

피식!

미션스 팬들의 야유에 대호는 살짝 실소를 하고는 타석에서 자세를 잡았다.

“이런 건방진 자식!”

예고 홈런을 날리겠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타석에 들어서자, 루이스 마르티네스가 대호를 보며 험악하게 소리 질렀다.

“왜, 내가 못 칠 것 같나?”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리는 루이스를 보며 대호는 오른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이는 당연히 자신을 지켜보던 루이스를 통해 상대방의 화를 북돋기 위한 작전이었다.

루이스도 더블A의 베테랑인 만큼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감정을 조절하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버렸다.

‘시몬, 이 새끼에게 본때를 보여 줘!’

루이스는 곧바로 투수인 시몬 카스트로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러면서 조금 전 대호와 나눈 짧은 대화 내용을 전달하기라도 하는 듯 몸 쪽으로 바짝 붙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팡!

“볼!”

몸 쪽으로 상당히 높게 날아온 볼이었다.

빈볼까진 아니었지만, 보통 타자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볼이었다.

하지만 대호는 이러한 미션스 배터리의 위협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미 투수가 던진 공을 보며 그 구질과 코스까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눈 가까운 곳으로 위협구를 던졌지만,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은 대호로 인해 미션스 배터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움직이지 않은 것이 몸이 굳어 그런 것이 아니라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젠장, 저놈은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졌나?’

시몬이 조금만 위협구를 잘못 던졌으면 대형 사고가 될 뻔한 공이었는데, 그저 무심한 태도만을 보이니, 어떻게 기세를 잡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대를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정대호는 타석에 들어서기 전 예고 홈런을 치겠다고 한 건방진 선수 아닌가.

승부를 피하고 고의 사구를 던졌다간 홈팬들에게 외면 받을 게 뻔했다.

그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골치가 아파왔다.

미션스의 배터리와는 반대로, 대호는 느긋하게 투수를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조금 전 다시 한번 경험한 현상을 되짚어 보았다.

‘집중력 강화 현상은 수비뿐만 아니고 공격에도 적용이 되는구나.’

사실 아무리 대호라도 조금 전 투수의 위협구처럼 머리 가까이 날아오는 공이라면 몸을 젖혀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2회 말 수비를 할 때 느낀 것처럼 주변이 부옇게 변하고, 투수의 움직임과 공의 궤적이 평소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느껴지며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걸 느꼈다.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사람의 모습.

그러나 대호는 이 집중 강화를 남용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조금씩 편두통이 생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주 사용할 만한 기술은 아닌 것 같네.’

부작용까지 완전히 파악하게 된 대호는 앞으로 꼭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다시 타격 자세를 다잡았다.

4회차는 명전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