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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회차는 명전이다-53화 (53/209)
  • 53화

    샌안토니오 미션스의 선발은 공교롭게도 한 달 전 상대했던 시몬 카스트로였고, 포수 또한 대호와 충돌할 뻔한 루이스 마르티네스였다.

    ‘하! 이거 참…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사실 대호는 오늘 경기에서 전력을 다해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열렬한 어린 팬에게서 홈런을 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에 시스템이 반응해 오랜만에 퀘스트가 발생했으니까.

    더군다나 가뭄의 단비와도 같이 스탯을 향상해 주는 보상이니 무조건 클리어해야 했다.

    그런데 그 상대가 미션스의 시몬 카스트로와 루이스 마르티네스 배터리다?

    ‘철저하게 짓밟아 주지.’

    비록 벤치 클리어링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대호의 입장에서 험악한 관계를 완전히 밟아 줄 기회였으니까.

    펑!

    “아웃!”

    대호가 그런 생각을 이어 가는 사이, 1번 타자에 이어 2번 타자인 잭 겔로프도 삼진으로 물러났다.

    대기 타석에서 이를 지켜본 대호는 오늘 미션스의 선발 시몬 카스트로의 컨디션이 좋음을 알 수 있었다.

    저벅저벅.

    천천히 걸어 타석에 들어서던 대호는 오늘 주심을 보고 있는 심판 라울 프랑코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하는 대호가 뜻밖이라는 듯 잠시 그를 돌아보던 주심은 무심히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줬다.

    다른 심판이었다면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는 타자에게 친하지 않더라도 인사말을 건네는데, 라울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경기는 꽤나 어렵겠는데…….’

    자신의 인사에 반응이 신통치 않은 주심을 보며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사실 대호가 이렇게 첫 타석에 들어서며 심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아마추어 야구를 할 때 보였던 습관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날 시합을 주관하는 심판의 성향을 알기 위해서였다.

    대호는 오랜 경험으로 주심들의 심리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몇몇 심판들의 경우 자신의 주관이 뚜렷해 보편적인 판단을 하기 보단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조금 전, 자신의 인사에 무뚝뚝하게 반응하는 라울 프랑코를 보고 나름대로 오늘 경기 진행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런 태도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건지, 아니면 락하운즈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는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플레이!”

    주심인 라울은 아무런 억양의 변화 없이 시작을 알렸다.

    펑!

    “스트라이크!”

    첫 번째 볼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대호가 판단하기에 이번 공은 바깥쪽 라인에서 반개 정도 낮게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공을 주심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렸다.

    아무리 미국 야구의 판정이 바깥쪽으로 후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이번 볼은 메이저리그 주전이 와도 치기 어려운 공이었다.

    ‘하… 벌써부터 시작이냐?’

    자신의 예상대로 불공정한 판정이 내려졌다 판단을 하니 살짝 짜증이 났다.

    ‘설마 이것보다 더 빠진 공까지 잡아 주진 않겠지.’

    대호는 아무리 편파적으로 판정한다고 해도 이 이상은 스트라이크를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세를 다잡았는데, 결과적으로 헛꿈이 되어 버렸다.

    퍽!

    “스트라이크!”

    무려 스트라이크 존에서 하나 정도 빠진 볼에 스트라이크 콜이 들려왔으니까.

    ‘아니, 뭐 이런 놈이…….’

    빠드득!

    대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두 번째 공은 첫 번째와 비슷한 코스였지만, 좀 더 빠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주심은 또다시 스트라이크 판정을 내렸으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호는 고개를 돌려 심판을 보며 물었다.

    “혹시 공이 라인 안쪽으로 들어왔나요?”

    라울 프랑코는 자신을 향해 맹랑하게 물어보는 대호를 바라보았다.

    뛰어난 루키라는 사실을 들었지만, 그래 봤자 고작 올해 프로에 처음 들어온 뉴비.

    그런 건방진 태도에 라울은 표정을 굳히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만 더 내 판정에 불만을 나타낸다면… 바로 퇴장이야!”

    ‘빌어먹을 아시안 주제에…….’

    잔뼈 굵은 대호조차 움찔할 정도로 라울의 반응은 지금껏 만난 그 어떤 심판과도 달랐다.

    ‘아니, 난 왜 심판 운이 없는 것 같냐. 이런 태도는 또 처음이네.’

    사실 라울 프랑코 주심은 아시안 혐오증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삐뚤어진 야구관을 가진 이였다.

    21세기, 그것도 2031년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야구관은 20세기 초반에 갇혀 있었으니까.

    ‘야구는 아시안 따위가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야!’

    그는 최고의 스포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종은 백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흑인과 라틴 등 다른 인종까지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납득 가능한 영역이지만, 아시안 만큼은 예외라고 느끼는 이였다.

    기껏해야 야구의 흥행을 위해 돈을 뿌리는 호구정도지, 야구의 발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자신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는 대호를 보면서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였고, 또 판정도 불리하게 콜을 한 것이다.

    ‘흐음.’

    대호가 심판의 말에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이를 들은 미션스 포수 루이스는 눈을 반짝였다.

    ‘역시 라울이야!’

    미션스의 경기에 자주 심판을 보는 라울 프랑코였기에 루이스도 그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는데, 오늘은 경기 시작부터 그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보며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시몬, 봤지? 오늘 주심은 라울이다. 안심하고 던져!’

    그는 주심 라울을 살짝 가리키며 사인을 보냈다.

    이를 전해들은 시몬 카스트로는 더블A를 맹폭하고 있는 대호를 상대로 자신감 있게 삼구를 던졌다.

    휘잉!

    시몬은 후한… 아니, 편파적인 판정에 힘입어 또다시 같은 코스로 공을 던졌다.

    너무 힘이 들어갔는지 방금 전보다 더 빠진 공이었지만, 지켜보던 대호는 이를 악물고 배트를 휘둘렀다.

    만일 그대로 뒀다간 주심이 스트라이크 콜을 부를 가능성이 훨씬 높았으니까.

    딱!

    아무리 대호라고 하더라도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은 코스, 무너진 자세로는 정타를 만들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대호는 우선은 걷어 내는 데에 만족하기로 마음먹었다.

    “우우우우~”

    락하운즈의 팬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미션스의 팬들이 지르는 함성에 묻혀 버렸다.

    대호가 친 공은 1루 더그아웃 뒤쪽의 그물을 맞추는 파울이 되었다.

    딱!

    연속해서 바깥쪽으로 날아오는 공에 맞서, 대호는 가볍게 배트를 휘둘러 모두 파울로 만들어 냈다.

    무리하지도 않았다.

    힘들게 안타 한 번 만들어 내려다가 기습적으로 안쪽으로 던지는 공에 대처가 늦어진다면 곧바로 아웃될 테니까.

    더욱이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지금 주심이 왠지 자신을 싫어하고 있으니, 분명 예측대로 흘러갈 것이라 생각했다.

    펑!

    “볼!”

    5구째, 기존과 다르게 인코스 깊은 곳에 공이 들어왔지만, 아무리 삐뚤어진 야구관을 가진 라울조차도 스트라이크를 내릴 수는 없었다.

    타자가 엉덩이를 뒤로 쭉 뺄 정도로 깊게 빠진 공에 스트라이크를 내렸다간 오심 논란에 휘말릴 테니까.

    휙휙.

    ‘굳이 무리하게 안쪽으로 던지지 않아도 돼!’

    루이스는 실투를 한 시몬에게 무리하게 힘을 줄 필요 없다는 사인을 보냈다.

    이에 그 사인을 읽은 시몬은 잠시 한차례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투구를 하였다.

    휘잉!

    6구째 던진 볼은 초구와 비슷한 코스로 날아왔다.

    제구가 잘 된 것인지 바깥쪽 꽉 찬 낮은 패스트볼이었다.

    94마일의 평범한 패스트볼이었지만, 컨트롤이 잘된 볼이었기에 이를 지켜보던 루이스는 더블A의 괴물 타자인 대호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 판단이 너무 성급했음을 알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휘익!

    따아아악!

    ‘아니!’

    분명 이번 공은 초구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던 공보다 훨씬 좋은 공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타격음만 듣고도 이번 타구가 어떤 결과를 나타낼지 경기장에 있던 이들은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와아아아! 빅 타이거!”

    대호가 친 타구를 보며 3루 쪽 락하운즈의 응원석에서 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도 그럴 것이, 대호가 친 타구는 쭉쭉 뻗어 나가며 우익수 방면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홈런이 되었기 때문이다.

    잘 던졌다고 생각한 공이 홈런을 맞은 것 때문인지, 대호의 홈런 이후 미션스의 선발투수인 시몬의 제구가 흔들렸다.

    딱! 따악!

    연속해서 안타가 나오며 락하운즈는 1회 초 공격에 잔루 2, 3루였지만 2점을 뽑아낼 수 있었다.

    타자들이 경기 초반부터 2점을 냈기 때문인지 락하운즈의 선발 찰스 바튼의 어깨는 피곤한 원정이었지만 여느 때보다 가벼웠다.

    펑!

    “스트라이크 아웃!”

    미션스의 첫 타자를 상대로 삼구 삼진을 만들며 순조로운 출발을 하였다.

    한편, 중견수 자리에서 이를 지켜보던 대호는 속으로 안심했다.

    ‘불리한 판정은 나만 해당되는 것 같군.’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타석에 들어서고 짜증 나는 판정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오늘 시합이 계속 이렇게 흘러간다면 질 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백전노장인 대호조차 그럴 정도로 편파적인 판정이었다.

    하지만 공격을 마치고 수비에 들어와 지켜보니, 심판의 콜이 다시 공정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미국 야구는 심판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니까!’

    3회차에 메이저리그를 경험해본 대호였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당시에도 대호는 이상한 스트라이크 존을 가진 메이저리그 심판들로 인해 억울한 판정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웃코스 낮은 볼과 인코스 높은 볼에 후한 스트라이크 콜을 하는 심판이 많았으며, 개중에는 스트라이크 존이 왔다 갔다 이동하는 심판도 있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특정한 팀에 유리한 판정을 주는 주심은 드물었기에, 심판의 성향을 파악하고 나면 그나마 대처하기가 쉬워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더 악질적인 심판인 듯했다.

    대호 자신이라는 개인에게 불리한 판정을 주고 있었으니까.

    심판과 관련되어 문제가 생긴 것은 이번 회차에서 처음이었기에 조금 짜증 났지만,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진정할 수 있었다.

    퍽!

    “아웃!”

    주심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도 대호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앞으로 날아오는 공에 빠르게 반응을 하여 공을 낚아챘다.

    한편, 잘 맞은 공이 하필 중견수 앞으로 날아가 잡히는 바람에 미션스의 2번 타자는 1루로 달리다 말고 허탈한 표정이 되어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미션스의 1회 말 공격은 그렇게 1번부터 3번 타자까지 별다른 활약 없이 끝났다.

    하지만 락하운즈의 2회 초 공격도 마찬가지로 삼자범퇴로 마무리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락하운즈의 타선은 8번부터 시작되는 하위 타선이었기에 이미 정신을 차린 시몬 카스트로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쉽군.”

    그나마 1회 초 삼진을 당했던 1번 타자 아론은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유격수 정면에 걸려 아웃되어 체면치레를 했다.

    잘 맞은 타구가 앤디 가르시아 주니어에게 잡혔으니까.

    2회 말.

    분명 1회에 잘 던졌던 락하운즈의 선발 찰스의 제구가 갑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휘익!

    “볼!”

    찰스는 그렇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주고 말았다.

    ‘그나마 4번 타자를 거른 거라 다행이군.’

    대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5번 타자에게도 연속으로 볼을 주자, 더그아웃으로 코칭스태프가 올라왔다.

    “으음…….”

    찰스의 손톱을 확인하던 코치는 투수 교체를 결단했다.

    너무 무리하는 바람에 손톱이 깨졌고, 그 때문에 제구가 흔들린 것이다.

    손 끝에 힘을 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을 던지다 보니, 결국 제구가 흔들린 것이었다.

    그러나 원 포인트 릴리프를 급하게 올린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볼!”

    승계 받은 5번 타자에게도 볼넷을 주었고, 6번 타자 에릭 판도나 역시 풀카운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겨우 땅볼로 아웃시켰으니까.

    결국 락하운즈는 한 회 만에 세 번째 롱 릴리프인 덴 프릭스로 교체하였다.

    퍽!

    “볼!”

    주자는 2, 3루 상황.

    계속해서 볼을 주고 있었지만 덴 프릭스와 코칭스태프들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다.

    아직 몸이 덜 풀렸기에 첫 타자는 그냥 몸 푸는 겸 볼넷을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만루로 만든 뒤에 승부를 본다.’

    덴은 그런 마음을 먹으며 공을 던졌다.

    4회차는 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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