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숙소에 짐을 푼 대호는 몇 시간 뒤면 출근해야 하기에 굳이 잠을 자기보다는, 한 시간 정도 독서나 휴식을 하다 새벽 운동을 나가기로 정했다.
차라리 그러는 것이 서부인 애리조나 주 메사에서 동부 미주리 주 랜싱으로 이동을 하면서 다시 시차 적응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짧은 휴식과 아침 운동을 한 뒤 랜싱 러그너츠로 출근을 했다.
* * *
“안녕하십니까? 한국에서 온 정대호라고 합니다.”
대호는 출근하자마자 사무직원인 필 잭슨의 안내를 받아 랜싱 러그너츠의 감독인 필립 폴의 앞으로 안내되었고, 그를 보며 인사를 하였다.
“환영한다, 오클랜드의 기대주.”
자신을 환영한다는 필립 폴 감독의 말을 들었지만 대호는 그의 말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영한다고 말하는 그의 눈에는 뭔가 아니꼬움이 깊이 침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호에게는 참 이상한 일이라 느껴졌다.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데, 그런 감정을 표출한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인종차별주의잔가?’
시대가 바뀌어도 이곳 미국의 고질적인 인종차별은 나아지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내가 여기서 천년만년 있을 것도 아니고, 최대한 빨리 상위 리그로 올라간다.’
랜싱 러그너츠의 감독인 필립 폴의 태도에 다시 한번 각오를 다진 대호는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대호가 의외라고 여긴 것은, 인종차별주의자 같으면서도 정작 랜싱의 사무실 직원으로 흑인인 필 존슨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대호, 필립 감독이 좀 그렇지?”
주어가 빠지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한 대호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오해는 하지 말고, 감독님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야!”
“그래요?”
필립 감독의 태도를 보면 인종차별주의자가 맞는 것 같은데, 흑인인 필 존슨이 아니라고 하니 조금 헷갈렸다.
“그저 아시안에 대한 편견이 좀 있어 그런 거야.”
‘…그게 그거 아닌가?’
변명 아닌 변명을 듣게 된 대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흑인이 아니라 아시안을 차별해도 인종차별주의자는 맞으니까.
그런 대호의 표정을 읽은 것인지 필 존슨은 계속해서 감독에 대한 변호를 하였다.
“필립 감독님이 우리 랜싱의 감독이 되면서 몇 차례 지구 우승을 할 기회가 있었거든…….”
필 존슨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자신이 감독이어도 그런 편견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가 맡았던 그 동양인이 아니다.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고 선수를 대한다는 것 자체가 지도자로서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
비록 성적이 중요한 마이너리그가 아니라곤 하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구단이 성적을 내야 메이저리그 구단과 재계약에 유리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그것을 선수의 잘못으로 전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이 되었다.
그런 선수라도 적절하게 로테이션을 돌려 사용하는 것이 감독의 역량이 아니겠는가?
이래저래 서로 간에 편견이 생길 수밖에 없는 만남이었다.
* * *
동부에 속하지만 미시간 호수를 낀 북부 지역에 위치하였기에 랜싱의 기후는 3월로 들어가는 시기였음에도 여전히 야외에서 운동을 하기에 그리 좋지 못했다.
아니, 자칫 잘못하다가는 부상당할 위험까지 있을 정도로 추웠다.
하지만 이런 랜싱도 메이저리그가 시작되는 4월 1일에 개막에 맞춰 리그가 시작되기에, 아직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훈련을 해야만 했다.
날씨의 영향으로 랜싱 러그너츠의 훈련은 거의 대부분 실내에서 실시되었다.
기온이 오르는 오후나 되어야 운동장에 나가 한 시간 정도 훈련을 할 뿐, 대호는 메사와는 다른 환경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따악! 따악!
‘그래도 내가 할 일은 변하지 않지만.’
배팅 게이지 안에 들어간 대호는 피칭 머신이 던져 주는 공을 가볍게 쳤다.
부드러운 스윙에도 불구하고 타구는 모두 정확히 히팅 포인트에 맞춰 장타가 되는 탄도각을 이루며 날아갔다.
“우와!”
아직 대기하고 있던 랜싱 러그너츠의 선수들은 이런 대호의 타구를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중 가장 어린 나이인 대호가 가장 질 좋은 타구를 선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호리호리한 몸을 가지고도 타구가 쭉쭉 뻗네…….”
선수 하나가 대호의 늘씬한 몸매를 보며 감탄 섞인 말을 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덩치만 좋다고 장타가 나오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을 이야기 했나?”
언제 다가왔는지 랜싱 러그너츠의 타격 코치 제비어 고다드가 다가와 훈계를 하였다.
“그래도 장타를 치려면 저 정도 무게가 딱 아니겠습니까?”
대호의 몸매를 언급했던 그는 타격 코치인 제비어의 지적에도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팔뚝을 들어 보이며 과시했다.
브렛 해리스.
그는 이곳 랜싱 러그너츠에서 3번 타자를 맡고 있으며 1루수 포지션을 가진 주전 선수다.
올해로 나이 25살이며, 현재 계속해서 야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할지의 기로에 선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대학을 다니던 중 드래프트 5라운드, 서른 번째로 지명이 되었다.
5라운드라면 너무 낮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20라운드까지 존재하는 미국 드래프트에서 5라운드 픽이면 결코 낮은 지명은 아니다.
‘문제는 3라운드 이후로 지명을 받은 선수가 메이저리거로 성공하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거지…….’
코치의 핀잔에도 근육을 보이며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인 브렛이었지만, 내심 대호의 타격을 보며 자신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집이 그다지 부유하지 않아 큰 지원을 받지도 못하였고,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갑자기 각성해서 실력이 엄청나게 올라갈 것 같지도 않았다.
‘야구를 계속 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해외 리그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거기서 성공해서 다시 메이저리그로 유턴한 사람들도 가끔 있으니까.’
그의 상념을 제비어 코치가 깼다.
“네 나이도 벌써 25살이다. 곧 한계 시점이 올 텐데, 언제까지 여기 있을래?”
제비어 코치는 3년째 이곳 랜싱 러그너츠에 남아 있는 브렛의 상황을 환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브렛의 표정이 굳었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 계속해서 드는 고민이 바로 언제까지 야구를 계속할 것인가 였다.
후우.
굳어 있는 브렛의 표정을 보고 제비어 코치가 대호를 가리켰다.
“저기, 배팅 게이지에 있는 대호를 잘 봐!”
“네?”
“저 자세가 바로 배팅의 정석이다.”
“음…….”
제비어 코치의 말에 브렛을 비롯한 주변에 있던 선수들은 앓는 신음을 터뜨렸다.
언뜻 보기에 키는 자신과 비슷한 6피트 2인치에서 6피트 5인치 사이로 보이는 대호.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하드웨어는 유격수처럼 슬림한 편이라, 장타를 치는 선수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타석에서 배팅을 하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따아악!
타격음만 들어도 볼 것 없이 홈런인 타구였다.
스포츠에서 다루는 탄도학에서는 45°가 가장 비거리가 멀다고 말하지만, 실제 야구에서 가장 많은 홈런이 나오는 각도는 25°~35°였다.
물론 그보다 낮은 18°에서도 홈런이 나오고, 최대각인 35°를 넘어선 50°에서도 홈런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런 플루크성 타구는 날로 향상되고 있는 수비수들의 기량 향상에 아웃이 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에 반해 이상적인 각인 25°~35°에선 이를 훔치는 수비가 나오지 못했다.
이는 인간의 수비 범위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금 전 대호가 친 타구는 바로 그 이상적인 각도인 25°~35°안에 들어갔다.
따아악!
또한 어쩌다 한번 잘 맞아서 나오는 홈런도 아닌 게, 방금도 완벽한 타구였다.
그 말은 지금 게이지 안에 들어선 대호는 완전히 의도적으로 공을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칠 수 있는 거지?’
브렛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과 비해 봤을 때 대호가 자신보다 나은 점은, 배팅 시 배팅 스피드가 빠르다는 것 이외에는 딱히 눈에 띄는 점이 없었다.
하지만 타격 결과를 놓고 보면 자신보다 대호가 훨씬 좋았다.
자신이 컨디션이 가장 좋을 때나 잠깐 비벼 볼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비교 불가의 타격 능력이었다.
덜컹!
타격 훈련을 마친 대호가 배팅 게이지를 나오는 것이 보였다.
브렛은 얼른 대호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대호, 잠시 물어볼 게 있는데, 시간 좀 어때?”
타격 코치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브렛은 방금까지의 타격을 보면 누구나 대호에게 노하우를 물어볼 거라고 생각했다.
한편, 배팅 게이지에서 나온 대호는 조금 전 타격 훈련을 복기하려고 했다.
“어? 브렛, 무슨 일이죠?”
이곳 랜싱에서 3년이나 있는 붙박이 1루수로 자리하고 있다는 브렛이 다가와 말을 걸자, 대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조금 타격에 대해 조언 좀 받고 싶어서.”
“조언이요?”
“응, 요즘 내 타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서 말이지.”
브렛은 이제 막 랜싱 러그너츠에 들어온 대호에게 먼저 말을 건 시점에서 부끄러움을 잠시 내려놓기로 하고 물었다.
그래도 3년차인 자신이 이렇게 나오는 게 맞나 하는 일말의 자존심이 있긴 했지만, 지금 정말로 야구를 계속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수단이기에 약간의 자존심도 꺾었다.
“그런 거라면 타격 코치인 제비어나 크레이그 콩클린에게 물어보는 것이 더 좋지 않나요?”
타격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는 브렛의 말을 들었지만, 대호는 함부로 말했다간 자칫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타격 코치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응, 그렇긴 한데… 조금 전 네가 말한 제비어 코치가 대호, 네 타격 폼을 참고하라고 이야기를 했거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어.”
브렛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대호를 붙잡고 그런 말을 했는지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한참 동안 브렛의 이야기를 들은 대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하였다.
“제비어 코치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니 그럼 잠시 봐 보죠.”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브렛의 부탁을 그냥 무시할 수 없어 잠시 봐주기로 하였다.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운동장 한구석으로 이동해서 브렛의 스윙을 지켜보았다.
위잉!
전형적인 슬러거형 스윙이었다.
“브렛! 잠깐만요.”
브렛은 스윙을 했지만,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대호의 모습에 몇 차례 더 배트를 휘둘러 보았다.
대호는 그런 브렛을 멈추게 하고, 그의 스윙에서 문제점을 이야기하였다.
“스윙을 할 때, 팔꿈치가 약간 들리고 있었어요.”
큰 문제점은 아니지만, 팔꿈치가 들리다 보니 그가 가진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배팅 스피드를 100% 발휘할 수 없었다.
당연히 타구를 치는 힘이 약하니 묵직한 강속구를 맞이하게 되면 구위에 억눌리게 되는 것이고.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스윙할 때마다 팔꿈치가 먼저 열리니, 배트 끝이 흔들려 공이 정확하게 맞지 않기도 했다.
“잠시만 기다려 봐요.”
대호는 그렇게 스윙을 하던 브렛을 잠시 두고, 운동장 한쪽에 쌓아둔 바구니에서 야구공 두 개를 가져왔다.
‘뭘 하려는 거지?’
브렛은 기이한 행동을 하는 대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대호는 브렛에게 야구공을 건네며 말했다.
“이걸 양쪽 겨드랑이에 끼고 스윙을 해 봐요.”
스윙을 할 때 자꾸 팔꿈치가 몸에서 떨어지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 대호는 야구공을 옆구리에 끼고 스윙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 방법은 팔꿈치가 떨어지는 버릇을 가진 선수들에게 교정 차원에서 사용하는 고전적인 방법이다.
스륵!
브렛은 처음 공을 끼고 스윙을 하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배트 몇 번 휘두르는 걸 보고 교정 방법을 생각해 낸 대호의 행동에 조용히 따르기로 했다.
자신이 먼저 부탁한 것이니 만큼 조금 몸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기에는 대호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고, 어차피 처음부터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 부탁이었기에 꾹 참았다.
“턱도 어깨에 붙이고 시선은 배트 끝에 고정하세요.”
자꾸 불편한 동작에 몸이 편한 방법을 찾아 가려는 모습을 보이자, 대호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불편했지만 이를 꾹 참고 스윙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더 이상 겨드랑이 사이의 야구공을 인식하지 않고 스윙을 하게 되었다.
대호는 브렛의 스윙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자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