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밤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안, 대호는 창밖으로 어두운 야경을 지켜보며 생각에 빠졌다.
오클랜드 슬랙스의 감독인 마이크 케세이의 부름은 역시나 예상대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라는 통보였다.
다만 하나 예상하지 못한 점은 자신이 갈 마이너리그가 A리그가 아닌 A+(하이 싱글A)소속 구단인 랜싱 러그너츠라는 것이었다.
― 대호! 미시간으로 가줘야겠어.
― 미시간이요?
― 랜싱 러그너츠에 가서 잘 성장해 주길 바라네.
자신에게 하이 싱글A인 랜싱 러그너츠로 가라며 눈을 반짝이던 감독의 얼굴은 너무나 진지해서 대호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싱글A인 스톡턴 포츠가 아니라 굳이 하이 싱글A인 랜싱 러그너츠로 보낸 걸까?’
기존의 메이저리그는 재능이 있는 유망주를 AA나 AAA에 잠시 놔두다 재능이 확실하다는 판단이 들면,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콜업 하곤 했다.
물론 재능이 있다고 판단이 내려지더라도, 적응하는 건 다른 얘기였다.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재능을 타고 났더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메이저리그 콜업은 실패하는 경우도 많았으니까.
그러다 보니 비싼 계약금을 치르고 데려왔던 유망주들이 이른 콜업, 게다가 무지막지한 메이저리그의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고 조기에 재능이 꺾이는 일이 자주 야기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이나 선수협, 그리고 가장 메이저리그를 응원하는 팬들이 무리한 콜업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유망주를 보호하자는 운동이 일면서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선수협, 그리고 구단 간의 합의를 거쳐 유망주가 미국 프로 무대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적어도 한 시즌은 마이너리그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게 되었다.
‘솔직히 내 스탯이 메이저 평균에 도달하긴 했지만, 적응 문제를 배제할 수는 없어. 물론 3회차 경력이 있긴 하지만, 지금 시기에 온 건 또 처음이니까.’
다만 예외 조항으로 40인 로스터 확장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기존과 같았다.
이러다 보니 선수협과 구단, 그리고 메이저리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사무국 또한 모두 만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호는 그런 상황을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솔직히 예전이랑 별 차이는 없지. 애초에 계약하자마자 다음 해에 곧바로 메이저리그에 올라올 만한 재능의 소유자가 얼마나 있겠어? 작년의 히데오나 나정도 재능을 가진 선수가 매년 나오지는 않을 테니까…….”
물론 대호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땜빵이 생기거나, 혹은 무리하게 콜업 하여 시즌 도중에 망가지는 사례가 많이 사라지기는 했으니, 훌륭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은 규칙 시행 이후 입단한 유망주는 무조건 루키 리그, 아니면 A리그에서 먼저 시작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클랜드에서 이런 규칙이 깨졌다.
물론 오클랜드도 생각이 없어 이러한 규정을 파괴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싱글A나 하이 싱글A나 수준은 거기서 거기이기에, 모든 메이저리그 구단에서 하이 싱글A 구단을 산하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페이 롤이 작은 스몰 마켓 구단인 오클랜드가 싱글A와 하이 싱글A 구단 모두를 산하에 두고 있는 것이 이상한 편이었다.
하지만 스몰 마켓 구단이면서도 오클랜드는 유망주 양성에 사활을 두고 있는 구단이다 보니, 무리해서 둘 다 운용을 했고, 그 선택은 무척이나 성공적이었기에 지금까지 그대로 운용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싱글A보단 하이 싱글A가 수준이 높으니 조금은 도움이 되겠지.’
대호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는 스프링 캠프가 끝나고 시범 경기가 있을 때까지 남아 있는 것이지만, 기껏해야 처음 스프링 캠프에 초청된 유망주에게 그런 혜택을 주는 구단은 없었다.
그것도 투수도 아니라 야수라면 더더욱.
‘에휴, 복잡한 생각은 일단 랜싱에 도착해서 하자.’
대호는 비행기 안에서 고민을 해 봐야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었기에, 더 이상 혼자 고민하기보단 못 다한 휴식을 취하기로 하고 잠을 잤다.
그도 그럴 것이, 서부인 에리조나 주 메사에서 동부 미시간 주 랜싱까지 가려면 아직 비행기로도 여섯 시간은 날아가야 했으니까.
* * *
“으으… 춥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따뜻한 기후인 애리조나 주 메사에 있다가 북동부라 할 수 있는 미시간 주로 오다 보니 기온차가 무척이나 심했다.
“에이전트에게 전화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
대호는 출발 전 에이전트인 제리&맥콰이어에 연락을 했다.
당연히 자신이 가야 할 랜싱 러그너츠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듣게 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가 가야할 랜싱 러그너츠는 지금까지 스프링 캠프를 치르던 애리조나 주 메사와는 정 반대로 무척이나 춥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부랴부랴 겨울옷 준비하느라 고생 좀 했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호텔 내에 옷가게가 입점한 상태라 돌아다니는 고생을 하지는 않았고, 가격 때문에 눈알이 튀어나올 뻔한 것이었다.
“도착하면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다고 했는데?”
이른 새벽에 도착을 했다 보니, 아직 밖은 깜깜했다.
물론 대호는 치안이 좋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지금 시간대에 홀로 밖을 돌아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공항 밖으로 나가 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헤이!”
그때, 두꺼운 점퍼를 두르고 키가 190㎝는 넘어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흑인이 말을 걸었다.
“네?”
키는 비슷하지만 살집이 대호보다 훨씬 많다 보니 마치 한 마리의 흑곰을 보는 듯한 인상을 가진 사내의 부름에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대답을 했다.
“오클랜드에서 온 미스터 정?”
“아… 네. 오클랜드 슬랙스에서 왔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이었지만, 분명 구단에서 동양인 선수가 왔다는 말 정도는 알려 줬을 거란 생각에 대호는 긍정했다.
“하하하, 맞게 찾았네! 여긴 좀 춥지? 방금까지 애리조나 메사에서 따뜻하게 스프링 캠프를 보냈을 테니까 더 그렇겠군.”
자신의 대답에 웃으며 말을 거는 사내의 말에 대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좀 그렇네요. 확실히 미국은 주마다 차이가 크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러고 나서 대호는 곧바로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습니다. 제가 정대호입니다.”
인사를 하고 나서 흑인 남자를 조용히 쳐다보자, 그 역시 씩 웃으며 이름을 밝혔다.
“만나서 반가워. 난 랜싱 레그너츠에서 행정을 보고 있는 필 잭슨이라고 해.”
간단한 통성명을 한 뒤 필 잭슨이 물었다.
“짐은 그것뿐인가?”
“예. 급히 통보 받은 것이라 짐은 이것뿐입니다.”
“그래? 쉬는 날 겨울옷을 좀 더 사야할 거야!”
필 잭슨은 공항에서 대호를 픽업한 뒤, 차에 오르며 이런 저런 조언을 해 주었다.
그런 필 잭슨의 모습에 처음 그를 보았을 때 가졌던 선입견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덩치만 봤을 땐 완전 갱스터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친절한 사람이네.’
대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모른 채 필 잭슨은 피곤한 대호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심지어 운전을 하면서도 말이다.
‘…이 사람 투머치토커였어?’
첫 이미지는 갱스터였다.
그 다음은 친절한 사람, 그리고 지금은 덩치에 맞지 않은 수다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 *
공항을 출발해 30분 정도 달리니 날이 조금씩 밝아 왔다.
“이제 보이는군.”
운전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떠들던 필 잭슨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에 시선을 돌리던 대호의 눈에 저 멀리 커다란 야구장이 보였다.
원래 이름은 쿨리 로스쿨 스타디움이었지만, 2020년 9월부터 네이밍 스폰서 계약을 통해 구장 명명권을 판매하고 있다 보니, 이제는 다른 명칭이었다.
“우리 랜싱 러그너츠의 홈인 잭슨 필드라네. 내 이름이 들어갔지? 하하!”
필 잭슨으로부터 홈구장의 네이밍을 듣게 되었지만, 대호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비행기 안에서 했던 다짐의 여운이 피어오르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군.’
이곳이 비록 하이 싱글A라 하지만, 대호는 이곳에서 그리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무리 이곳 랜싱 러그너츠가 하이 싱글A라곤 하지만, 대호의 기본 스탯은 마이너리그 평균을 훌쩍 넘었으니까.
거의 메이저리그 평균에 가까워져 있었다.
규정이라든가 적응 문제 때문에 일단 이곳에서 보내기는 하지만, 하이 싱글A에 큰 기대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방은 303호나 304호 둘 중 하나를 사용하면 돼.”
필 잭슨은 한 건물로 들어가며 그렇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럼 3호로 하겠습니다.”
“3호? 알았어, 잠시만 기다려.”
1층 사무실로 들어간 필 잭슨을 보던 대호가 건물 안을 둘러봤는데, 어쩐지 방들의 문이 이상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데 필 잭슨이 챙겨 나온 커다란 번호표가 붙어 있는 열쇠를 보고 자신의 예감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아니, 무슨 2031년에 아날로그 열쇠라니…….’
금속 열쇠를 보며 대호는 다시 한번 랜싱 러그너츠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잃어버리지 마! 잃어버리면 벌금 10달러야!”
그때, 대호의 귓가로 벌금 10달러라는 얘기가 들려오자 이번에는 조금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필 잭슨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벌금 10달러는 새로 키를 맞춰야 하기에 내는 돈일뿐이니까.”
필 잭슨은 자신이 방금 한 것처럼 벌금 얘기를 꺼내면, 선수들이 하나같이 같은 표정을 짓는 걸 알고 있기에 변명을 늘어놓았다.
“알겠습니다.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죠.”
돈을 떠나 물건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기분이 좋지 못하기에, 대호는 그렇게 조심하겠다는 말을 하였다.
“아 참! 너무 이른 시간에 와서 아직 감독님이 출근을 하지 않았어.”
필 잭슨이 친절하게 감독의 위치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대호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런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하는 직원은 자신을 픽업하기 위해 공항에 나온 필 잭슨 말고 없을 것이란 사실을 말이다.
더욱이 필 잭슨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사무직 직원이다.
그러니 상급 구단인 오클랜드의 연락을 받은 랜싱 러그너츠에서 다른 직원이 아닌 그가 나온 것일 것이다.
감독과 코치는 선수를 관리하는 직책에 있기에 훈련 시간이 되기 전에는 출근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니, 지금 이곳에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대호, 출근 시간은 9시지만 10분 먼저 도착해 있는 게 좋을 거야.”
마치 큰 비밀을 알려 주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는 필 잭슨의 모습에 대호는 어처구니가 없기는 했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가 보지.”
“네. 마중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그 정도를 가지고. 어차피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필 잭슨이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지만, 대호는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동 트기 전에 공항으로 픽업을 나온다고 해서 많은 수당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공항에 일찍 나와서 사람 한 명 데리고 구단 숙소에 데려다준다.
한 문장으로 요약될 일이지만, 애초에 아침 일찍 일을 하러 나온다는 것 자체가 수고로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대호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새벽에 공항으로 나와 준 것 자체가 감사했고, 또 구단 직원 한 명 한 명과 좋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까 들어갈 때는 조심해 주고.”
뭐가 쑥스러운지 필 잭슨은 대호가 꾸벅 인사를 하자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재빨리 떠났다.
그리고 대호는 떠나는 필 잭슨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잠시 지켜보다 숙소 3층으로 향했다.
아직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최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걷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끼이익!
살며시 방문을 열었지만 경첩에 기름칠이 덜 되었는지, 작은 소음이 들렸다.
이른 아침이다 보니, 이런 작은 소리도 크게 울렸다.
‘아무리 마이너리그 구단이라고 하지만… 좀 심하네.’
대호는 삐걱삐걱 소음을 내는 문소리에 고개를 흔들었다.
‘침대가 두 개네?’
안으로 들어간 대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두 개였다.
선수들의 체격 때문인지 슈퍼 싱글 침대가 놓여 있었다.
‘2인 1실인가 보군. 그렇다면 나 말고도 또 누가 온다는 건가?’
지금은 자신 혼자 사용하겠지만, 하부 리그에서 누군가 콜업 되면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대호는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이 자리에 싱글 A에서 올라오는 선수가 생기기 전에, 내가 먼저 콜업 해서 상위 리그로 간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