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낭중지추.
아무리 주머니 속에 감춰져 있다고 해도 송곳의 날카로움은 언젠가 주머니를 뚫고 밖으로 나온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대호 역시 오클랜드 슬랙스의 스프링 캠프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물론 스프링 캠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아무리 시스템의 도움으로 또래보다 뛰어난 스탯을 가지고 있고, 또 다양한 재능을 보유 중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25인 메이저리거나 40인 확장 로스터에 속하는 일명 AAAA라 불리는 이들을 능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대호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타격과 수비, 양 방면에서 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보여 주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정말로 현역 메이저리거와도 비견되는 재능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대호의 힘(파워)과 민첩성이었다.
팀 내 자체 청백전에서 대호는 오클랜드의 선발과 불펜 투수들을 상대로 안타를 뽑아냈다.
그중 영양가 없는 타구는 하나도 없었다.
또 가끔 제대로 맞은 타구는 상당한 비거리를 가진 홈런을 치기도 하여 이를 지켜보는 코칭스태프들을 흥분시키기도 했다.
오클랜드가 작년 국제 유망주 계약에서 무려 700만 달러 +a로 계약한 유망주가 처음으로 초청된 스프링 캠프에서 이러한 활약을 하고 있으니 당연한 태도였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뉴비가 뛰어난 야구 실력은 물론이고 워크에식까지 훌륭하니,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갈 날이 없었다.
게다가 누구보다 일찍 훈련장에 나와 몸을 푼 뒤 훈련 준비를 마치는 것은 물론이고, 무엇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코치들을 붙잡고 질문을 하기까지 하니…….
대체 그 누가 이런 유망주를 예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따아악!
“와우!”
“나이스!”
AAA 리그에서 3선발을 하는 피터 존스가 던진 공을 두 발을 바닥에 고정한 채, 허리와 배트 스윙만 써서 홈런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이크 케세이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패스트볼, 95마일. 살짝 가운데로 몰린 코스. 그걸 그대로 받아 쳐 홈런이라…….’
분명 배트의 히팅 포인트에 정확히 맞췄기 때문에 밀어 쳤음에도 홈런을 만들어 낸 것이리라.
아무리 애리조나 메사가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더라도, 이 시기에 95마일의 공을 던진 피터 존스의 능력은 과연 트리플 A에서 3선발을 할 만 했다.
‘피터 존스가 쓸 만하다면, 그놈의 공을 밀어치기로 홈런을 만든 저 녀석은 어떤 거지? 당장 메이저리그에 데려다 놔도 2할 후반 대는 치겠군.’
짝짝짝!
“아주 좋아!”
홈런을 치고 그라운드를 돌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대호를 보며 감독은 박수를 치며 격려의 말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그라운드를 돌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던 대호는 느닷없는 감독의 칭찬에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역시 감사의 답례를 하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코칭스태프과 선수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코칭스태프야 그렇다고 쳐도, 선수들까지 미소를 짓고 있는 상황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스프링 캠프에 참가한 모든 선수는 서로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마이크 케세이 감독은 그 장면을 보며 씩 웃었다.
‘정대호, 그동안 한결 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지. 다른 선수들마저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대호는 남들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훈련했다.
또한 오클랜드 슬랙스에서 역대급 계약금을 받은 국제 유망주인 만큼 자존심이 셀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고, 티를 내지도 않은 모습이 지금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대호! 역시…….”
피터 존스의 앞서 마운드에 올랐다 교체가 된 젠슨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대호를 맞았다.
“고마워, 젠슨!”
자신을 환하게 맞아 주는 젠슨을 보며 대호도 이에 화답을 하였다.
젠슨의 축하를 받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은 대호는 조금 전 타격에 대해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95마일 정도에 불과한 볼인데… 너무 조급했어.’
배트 중심에 정확하게 가져다 대긴 했지만, 조금만 더 침착하게 공에 집중을 했다면 더 나았으리라.
‘컨택 능력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미국에서 하는 실전은 조금 다르네.’
조금만 더 빠르게 공을 판별했다면, 좀 더 좋은 코스로 공을 쳐 낼 수 있었으리라는 반성을 했다.
다행히 아직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오지 않은 선수들이라 펜스를 넘기는 홈런이 되었지만, 이게 실제 경기였고, 5~6월처럼 한창 폼이 오른 시기라면 뜬공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그러하리라.
‘스프링 캠프에서 95마일이면 실전에서 더 빠른 패스트볼을 던졌을 테니까.’
혹시 운이 작용해서 펜스를 살짝 넘기는 짧은 홈런을 쳤다고 해도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그런 공은 대호 자신도 종종 훔쳐 낸 적이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피터 존스는 진짜 메이저리거도 아니고 트리플 A에서 활동하는 투수란 걸 감안하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듯했다.
‘뭐, 그래도 다행히 홈런 하나 치기는 했지만.’
오늘 연습 경기에서 대호는 두 번의 타석에 들어섰고, 유격수에게 잡힌 라이너성 타구 하나와 방금 전 홈런 한 방을 쳤다.
6회에 중간에 대수비로 들어가게 되며 두 번의 타격 기회가 있었는데, 2타석 1안타(1홈런)를 친 것이다.
고작 두 번 타석에 들어서서 홈런 한 번을 쳤으니 좋은 기록이긴 했지만, 정작 대호는 자신이 뛰어난 모습을 보여 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기뻐할 때는 아니지. 겨우 홈런 하나 친 것도 조금만 힘이 부족했으면 바로 잡혔을 타구고, 라인 드라이브로 유격수한테 잡힌 것도 그랬으면 안 돼. …내 목표를 생각하면 고작 이 정도 성적으로 기뻐해서는 더더욱 안 되고.’
동료들의 환호, 그리고 코칭스태프들의 칭찬에도 흔들려선 안 된다.
대호의 목표는 단순히 메이저리거가 되는 것도 아니고,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 누구보다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입성하는 것. 그것만 바라보자.’
대호는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객관적인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오클랜드의 사람들은 국제 유망주로 비싼 돈을 들여서 데려온 선수가 좋은 성적을 보이니 그냥 기뻐하지만, 솔직히 명예의 전당을 입에 담았다간 순식간에 건방진 선수가 되어 버릴 터.
지금은 자신을 조금 더 갈고 닦아야 할 때였다.
* * *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이 씻기 위해 샤워장으로 향했을 때, 모든 경기를 지켜본 마이크 케세이 감독 이하 코칭스태프들은 지켜본 선수들을 평가하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지켜본 선수들의 능력은 좀 어떤가?”
그는 코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스프링 캠프를 차린 지도 벌써 2주가 지났다.
그 2주 동안, 오클랜드의 스프링 캠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기초 훈련과 개인 훈련을 하는 선수들을 지켜보며 오클랜드의 코칭스태프들은 조용히 이들을 평가했다.
“…….”
처음에는 다들 조용히 있었다.
매년 있는 일이지만, 자신들의 결정으로 메이저리그 25인 등록 선수가 결정된다는 게 조금은 부담되었으리라.
“가만히 있을 건가? 그러라고 구단에서 돈을 준 건 아닐 텐데.”
물론 마이크 케세이 감독 역시 코칭스태프들의 부담을 알고 있었다.
코치진의 판단으로 기준점 미만의 선수들은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분명 선수들 역시 스프링 캠프에 올 때까지만 해도 부푼 꿈을 안고 이곳으로 온다.
하지만 중도 탈락을 하고 원 소속팀에 복귀하게 되면 대부분 눈물을 흘리고 마니까.
감독의 눈길에 타격 코치 미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AA에서 온 아론 헤들러는 더 이상 볼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구엘은 그동안 지켜본 아론 헤들러의 퍼포먼스에 대해 평가를 내렸다.
“아론 헤들러는 아직 타격 자세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머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 내야를 책임지는 키스톤 콤비 중 하나인 2루수임에도 불구하고 타구 판단이 조금 느립니다.”
망설이던 것도 잠시였다.
미구엘 타격 코치는 자신이 지켜본 아론 헤들러에 관해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그렇단 말이지?”
미구엘 코치의 평가를 들은 마이크 감독은 뭔가 생각을 마쳤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바로 조금 전 미구엘 코치가 평가한 것처럼 아론 헤들러가 스프링 캠프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초청된 정대호는 어때?”
이왕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오클랜드 프런트의 기대주인 대호에 대해 물었다.
“정대호야 뭐…….”
마이크 감독에게 콕 집어 언급된 대호에 대한 평가를 하려던 미구엘 타격 코치는 잠시 대답을 멈추고 머릿속에 대호에 관해 한번 더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가 되자 다시 평가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주 기대되는 선수입니다.”
“기대?”
“예. 오늘까지 자체 연습 경기에서 8타석에 들어서 여섯 개의 안타를 쳤습니다. 그중 세 개가 2루타고, 홈런도 두 개나 있죠. 또…….”
2주가 지나가는 스프링 캠프 기간 대호는 경기에 교체 선수로 일곱 번 출전을 하여, 여덟 번의 타석을 가졌다.
미구엘 코치는 대호의 스윙과 방금 전 언급되었던 아론 헤들러의 타격을 머릿속으로 비교해 보았다.
솔직히 비교 대상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대호에게 미안한 수준이었다.
잠시 멈칫한 미구엘 코치는 말을 이었다.
“수비 능력도 아주 출중합니다. 실수가 없는 건 물론이고, 범위가 일반 중견수들 보다 훨씬 넓어요.”
“호오?”
마이크 감독은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존 중견수들이 보여 주는 것보다 20%는 더 넓다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 말에는 모두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그게 사실인가?”
사실 마이크 감독을 비롯한 다른 코치들 역시 대호의 훈련을 자주 지켜보았지만, 가장 오랫동안 본 이는 미구엘 타격 코치뿐이었다.
그렇기에 대호의 호수비 등을 기억하던 이들 역시 알지 못하던 정보인 것이었다.
좌중을 긴장하게 만든 미구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수비도 그렇고, 타격 지표도 그렇고 솔직히 당장 메이저에 데려가도 괜찮을 수준의 성적이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지.’
그가 생각하는 대호의 가장 큰 약점은 아직 메이저리그의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한국과 미국의 크기가 다르고, 또한 심판들의 성향도 다르기 때문에 그런 듯했다.
사실 이 부분은 대호 역시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3회차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경험이 있었지만, 은퇴 후 꽤 시간이 흐른 상태에서 회귀를 했고, 또 한국 아마 야구에 적응하며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충분히 해결될 것이기에 미구엘이 굳이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이다.
미구엘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건, 마이크 케세이 감독은 흥분해서 다시 한번 소리쳤다.
“미구엘, 정말 정대호의 수비력이 그 정도인가?”
“네, 분명합니다. 기존 중견수들보다 20% 넓다는 것 역시 메이저리그 기준이고요.”
“흐음…….”
마이크는 중얼거렸다.
“그 정도면 타격 능력이 조금 떨어져도 데려와 볼 만한데…….”
그런데 정대호는 타격 능력마저 뛰어나니, 크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대호가 이 말을 들었으면 아직 자신은 메이저리그 평균보다 조금 떨어진다고 답했으리라.
지금은 스몰 샘플인데다가, 상대하는 투수들 역시 트리플 A, 혹은 더블 A급 투수였기 때문에 좋은 퍼포먼스를 보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이크 감독은 정대호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려야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중견수보다 수비 범위가 넓은 대호가 들어가게 되면, 나머지 좌, 우익수의 부담이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한 명의 공격 능력을 조금 포기하는 대신, 두 명의 체력이 늘어난다.
감독으로서는 긍정적이었다.
만약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정대호가 0.260대의 타율만 기록해도 아주 우수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공, 수, 주 모든 것이 가능한 5툴 플레이어가 등장한 순간이었음에도 그의 마음속은 어지러워졌다.
‘하, 이를 어쩐담?’
아무리 대호의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지금까지의 관례를 모조리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뉴비가 마이너를 거치지 않고 고작 스프링 캠프에서의 성적만으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다면 분명 말이 나오리라.
억지로 올리자면 못 올릴 것도 없었지만, 만약 정대호가 기대 이하의 성적을 낸다면?
자신의 입지가 위험해지고, 지도력에도 큰 타격을 받게 된다.
또한 장기적으로 볼 때는 마이너를 거치는 게 정대호에게도 좋았다.
곧바로 콜업 되어서 좋은 성적을 거둬도 메이저리거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 수도 있고, 무시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결심했어.’
오랜 시간 동안 고심하던 마이크 감독은 그렉 헥슬러 수석 코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렉! 대호를 좀 불러 주겠나?”
“네, 알겠습니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한 그렉 헥슬러는 마이크 감독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짐작하는 듯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4회차는 명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