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0.01초 소드마스터 198화
“이, 이게 대체······.”
‘엘라 비하크’ 게임 속에 존재하는 관리자들.
그들은 라할이란 이름으로 각자 맡은 게임을 관리하며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마주한 것은,
“아슬란. 그 미친놈이 다 파괴시켜 버렸잖아.”
파괴된 세상이었다.
관리자의 권한을 얻은 아슬란이 수백 개의 게임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곳에 있는 관리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자신에게 대항하는 게임 속 캐릭터들과 그 세상을 남김없이 파괴해 버렸다.
그래서 관리자들은 그를 막고자 힘을 합쳐 아슬란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에 찾아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때는 늦었다.
아슬란은 벌써 온데간데없었고, 사방은 불바다가 되어있었다.
“그럼 놈은 어디로 간 거지?”
“설마 다른 곳을 습격하러 간 건가?”
그들 중 하나가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관리자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혀에 가져다 댔다.
그 안에 담긴 마지막 장면을 보게 된 그는 눈을 부릅떴다.
“이런!”
“왜? 이번에는 또 뭐야?”
“이 멍청한 놈이 아슬란에게 결국 다 불어 버리고 말았어.”
“뭐?!”
“놈은 반대편 세계로 넘어간 듯싶군.”
“그, 그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도 반대편 세계로는 못 넘어가잖아.”
“그래. 우린 원래 그쪽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아슬란은 플레이어잖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관리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놈은 그럼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건가?”
“그건 모르지. 그 지옥 같은 세상에서 금방 도망쳐 버릴지도······.”
그들은 제발 아슬란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여긴······.”
나는 포탈을 지나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불을 밝혀 보았지만, 제대로 보이는 건 없었다.
그저 끝 모를 어둠만이 가득한 통로만이 나를 반겨 줄 뿐이다.
“잘못 들어왔나?”
지금이라도 포탈을 다시 열어볼까?
난 손을 들어 포탈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어?”
포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어?”
아무리 시도를 해봐도 포탈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었다.
“미친.”
그럼 나 여기 갇힌 거야?
“그 새끼한테 낚였구나.”
시발이란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할 때였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당황해하던 몸이 다시 꼿꼿하게 세워지고 얼굴은 건방지고 오만한 아슬란으로 돌아왔다.
나는 내 앞에 흐릿한 형상으로 나타난 라할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처음 죽였던, 바로 그 라할이었다.
이름이······ V랬나?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후후. 저는 다른 관리자들과 다릅니다. 당신을 비롯해 다른 관리자들과 그 위에 계신 분들도 함께 속이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관리자는 세계를 리셋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리셋을 하지 않고 당신의 손에 죽었지요. 그렇게 해서 자연스레 관리자의 권한을 당신에게 넘길 수 있었고요.]
그 말은 저놈이 일부러 내 손에 죽어줬다는 건가?
[당신에게 어둠의 권능을 받고자 했던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이라면 분명히 저를 마기 포식으로 죽일 거라 생각했던 까닭이죠.]
“감히 짐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이냐?”
[글쎄요. 저는 당신이 이 정도로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당신이라면 우리가 갇혀 있는 세상을 바꿔 주리라 믿었습니다.]
갇혀 있는 세상을 바꿔?
[엘라 비하크라 불리는 이 게임 세상. 그리고 그 안에 갇혀서 무한히 게임을 반복해야 하는 관리자. 거기다가 자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움직이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는 캐릭터들. 그 환멸이 나는 순간을 끝내고자 당신을 이곳까지 안내한 겁니다.]
그러면서 V는 새로운 포탈을 내 앞에 열어 주었다.
[이곳을 지나가면 당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나는 빛이 가득한 포탈 안을 바라보다 V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이놈은 자기 목숨까지 던져 가는 혼신의 연기를 펼쳐 누구를 속이려 들었던 것일까.
정말로 내가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 것일까?
“짐이 정말 너희를 해방시킬 수 있을 거라 보나?”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당신이 어떻게 우리를 해방시킬 수 있을지, 또 왜 저 위에 계신 분들이 반대편 세상 사람들을 게임 속에 강제로 넣어 버리는지.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당신만큼 강한 플레이어는 없다는 겁니다.]
V 조차도 바깥세상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또한 누가 무슨 의도로 플레이어를 강제로 게임 속에 넣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짐이 직접 가서 알아내는 수밖에.”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놈들도 똑같이 게임 속에 처박아 놓을 예정이다.
매우 끔찍한 난이도로!
[행운을 빌겠습니다.]
나는 포탈 안으로 발걸음을 힘차게 옮겼다.
그러자 강렬한 빛이 나를 감싸 안더니,
“······헉!”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새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도, 돌아왔다!”
여긴 내가 살고 있던 자취방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먼지가 쌓여 있지?
더군다나 지진이라도 한바탕 났던 모양인지, 선반 위에 있던 물건들이 죄다 떨어져 있었다.
“대체 내가 몇 년 만에 돌아온 거야?”
딱 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족히 몇 년은 된 듯한 집안 꼴이었다.
나는 벌러덩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근육도 별로 없는 마른 몸에, 눈도 잘 보이지 않아서 반드시 써야 하는 안경.
아슬란의 몸이 아닌, 진짜 내 몸이었다.
“뭔가 느낌이 쎄한데.”
창문을 통해 밖을 살펴보려고 밖에서부터 쌓인 두꺼운 먼지 때문에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문도 열리지 않을 만큼 굉장히 뻑뻑했다.
“젠장. 뭐야, 도대체.”
이렇게나 사람 손이 안 탈 수가 있나.
거기다 여기 월세 내는 곳이었는데.
집주인이 이 정도로 오랫동안 여길 방치해뒀다고?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나가라도 볼까?”
나는 현관문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여긴 15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이었고, 마치 닭장처럼 방들이 주르륵 한 층에 나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복도로 나오면 양옆 방들이 쭉 보였는데,
“······?”
밖에 나가자 보이는 건 반으로 잘려 나가 버린 건물이었다.
“뭐, 뭐야.”
미사일 공습이라도 받은 것일까.
어떻게 건물이 이 지경이 된 거지?
마치 박스를 억지로 찢어 놓은 것마냥 무너져 내린 건물을 보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가관인 건 그 밖의 풍경이었다.
“저, 전쟁이라도 난 건가?”
이곳이 대도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아파트들이 세워지고 인구가 꽤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융단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땅이 움푹 파이고 건물은 무너져 있었다.
거기다 아포칼립스 게임을 연상시키듯, 온 세상이 주황빛 스모그에 물들었다.
“그놈들이 이걸 말한 거였나?”
바깥세상은 더 지옥일 거라는 관리자들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놈들의 말대로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내가 게임 속에 갇혀 있을 때 전쟁이 나다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잠깐. 정말로 남북 전쟁이 일어났던 거라면 그냥 이대로 있어도 되나?
“방사능에 피폭당하는 거 아니야?”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갈 때였다.
“키에에엑-!!”
“······?”
황폐화된 도시를 울리는 울음소리.
현실 세계에서는 듣기 힘든, 게임 속에서나 들을 법한 몬스터의 울음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터벅- 터벅-
아래에서 내려다보니, 몬스터들이 채찍처럼 길쭉하고 날카로운 꼬리로 바닥을 내리치며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아닌가?
“저, 저건 또 뭐야?”
어떻게 이 세상에 저런 것이 존재할 수가.
“내, 내가 설마 아직도 게임 속인가? 아니면 꿈?”
원래 있던 게임에서 다른 게임으로 이동이 된 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저놈들이 내가 기함을 터트리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키에엑-!!”
놈들은 빠르게 무너진 건물 잔해를 타고 올라와 내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미, 미친!”
얼마나 올라오는 게 빠른지, 이 높은 층수를 금방 올라와 버렸다.
“크르르르-.”
산성을 가진 침을 뚝뚝 흘리며 몬스터들이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미친.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이.
설마 이런 곳에서 저런 놈들에게 뜯겨 죽는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돌아오지 말걸!’
하지만 아직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다.
타타탕-!!
저 멀리서부터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몬스터들의 머리가 하나둘 터져 나가고 있었다.
“키에에엑!!”
순식간에 무리가 쓰러지자 남은 한 마리가 뒤를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스걱-!
그러나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광선검 같은 것을 들고 있던 정체불명의 남성이 날아와 놈의 머리를 깨끗하게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사, 살았다.’
기뻐하는 것도 잠시.
남성이 내게 칼을 들이 밀었다.
“넌 뭐야? 여긴 민간인이 있을 수 없는 곳인데? 혹시 악마냐?”
그 물음에 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뇨. 전 그냥 사람인데요.”
그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살펴보았다.
눈 한쪽에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그는 귀에다 손을 가져가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팀장님. 여기 민간인이 있습니다. 예. 악마는 아닙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 예. 그럼 일단 데려가겠습니다.”
그는 칼을 거두며 내게 말했다.
“일단 따라와. 자세한 건 본부로 가서 조사하도록 하지.”
그러고는 내 멱살을 붙잡고 냅다 저 아래로 뛰어내렸다.
“으헉!”
진짜 미친놈인가.
다행히 이 남자의 슈트에서 나오는 비행 장치가 감속시켜 주어 바닥에 추락해 죽는 일은 없었다.
“걸을 순 있겠지?”
“아······. 네.”
“그럼 따라와.”
나는 주변을 살피며 앞서가는 남성의 뒤를 따랐다.
“저기······. 근데 지금이 몇 년도죠?”
“뭐? 그것도 몰라? 2044년이잖아.”
2044?!
무려 15년이 흘렀다고?!
“진짜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군.”
그는 쯧쯧 짧게 혀를 차며 계속 이동했다.
“아까처럼 몬스터들이 몰려오지 않을까요?”
“괜찮아. 여긴 어차피 D급 몬스터들밖에 없어. 나 혼자서도 정리가 가능해.”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몬스터들에게도 등급이 생긴 모양이다.
“여긴 등급 높은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 곳이라 내 뒤만 잘 따라온다면 안전한······.”
바로 그때였다.
삐이이이-!!
남성이 차고 있던 시계에서 불길한 경고음이 들려왔다.
그 경고를 확인한 남성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 이게 뭐야.”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S급이 여기에 대체 왜······!”
그리고 우리 앞에 허공이 찢어지면서 무언가가 거대하고 날카로운 검은 손으로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헉!”
남성은 경악하며 무기를 들어 전방을 향해 사격했다.
하지만 웬만한 빌딩은 우습게 짓밟을 것만 같은 크기의 몬스터, 아니. 저 악마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S급 악마가 여기에 나타나는 거야!”
남성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지껄이고 있었다.
그것은 틈을 활짝 열어 자신의 검은 날개를 펼쳐 들었다.
그리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음침한 목소리를 흘렸다.
[아슬란.]
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순간 심장이 철령였다.
[이곳에 있었구나.]
바로 그 순간.
“윽-.”
피가 들끓기 시작하고 철렁이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뭐, 뭐야. 넌 또 왜 그래? 이봐!”
나는 숨을 헐떡이며 점점 정신이 아늑해지는 것을 느꼈다.
거기에 단전에서부터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건 바로······.
“감히-”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내 몸을 얼어붙게 만들던 공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난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눈앞에서 사악하게 입꼬리를 씰룩이고 있는 악마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짐의 이름을 그 더러운 입에 담다니.”
난 버릇처럼 허리춤에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죽어라.”
그리고 저 앞에 있는 거대한 악마를 향해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