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0.01초 소드마스터 194화
만물을 창조하고, 모든 것 위에 있다던 라할이,
이 제국 위에 나타나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그 라할이,
쿠쿵-! 콰콰콱-!
내 검은 검강에 의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으, 으아아!”
“모두 방어 준비!!”
이 드넓은 황궁 전체를 덮은 라할의 형상이 갈라지고 찢어지자, 마탑에 있던 마법사들은 방어벽을 쳤고, 기사들은 방패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설마 이대로 끝이라고?’
내가 가진 찰나의 괴력이 말도 안 되는 위력을 가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라할이다.
사실상 이 게임의 끝판왕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고작 이렇게 쓰러진단 말인가?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
무너져 내리는 형상에서 강한 빛이 새어 나오더니, 그 빛은 모든 걸 집어삼켜 곧 시간을 멈추게 만들었다.
“······.”
모든 것이 그대로 멈춰 버렸다.
나를 호위하기 위해 달려오던 기사들,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라할의 형상을 망연자실하게 쳐다보고 있던 시종들, 그리고 마법을 펼치던 마법사들까지.
모두 제자리에서 행동이 멈추고 말았다.
이곳에서 오직 유일하게 나만 움직일 수가 있었다.
아니.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나 말고 다른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어떤 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였다.
난 그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테르카나?”
틀림없이 테르카나였다.
풍기는 분위기나 헤어스타일이 좀 점잖게 변한 것 빼고는 상대는 테르카나가 분명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놈은 이미 내 손에 죽었을 텐데?
“귀신을 보는 듯한 눈이로군요.”
저 짜증 나는 목소리 톤과 말투 역시 비슷했다.
내가 미간을 좁히며 칼을 휘두르려 하자 테르카나가 손을 들었다.
“아아. 전 당신과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분명 네놈은 짐이 죽였을 터인데.”
“아마 테르카나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저는 테르카나가 아닙니다.”
뭐?
생긴 건 영락 없이 테르카나인데?
“테르카나는 그저 제게서 떨어져나온 영혼의 조각일 뿐.”
“그럼 너는 누구지?”
온몸에 광채를 내뿜고 있던 사내가 내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가 바로 라할입니다.”
라할.
이자가 정말 라할이란 말인가?
심지어 테르카나가 라할에게서 떨어져 나간 영혼의 조각이었다니.
“라할의 이름을 모두 지워 버린다라. 설마 이런 식으로 저를 불러들일 줄은 몰랐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제 예측을 벗어난 방법을 쓰시는군요.”
“처음부터 알아서 나타나 줬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후후. 죄송합니다. 당신이 처음 설정한 난이도 때문에 뭐든 쉽게 할 순 없었습니다.”
난이도?
그걸 이놈도 알고 있다는 건가?
대체 이놈은 뭐야?
“네가 테르카나를 만들었던 것인가?”
“예. 테르카나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요. 제가 그를 세상에 내보낼 때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웠으니까요. 그리고 이 대륙에 혼란을 일으키도록 그의 영혼에 혼돈을 향한 갈망을 심어 두었지요.”
라할은 아주 덤덤하게 얘기를 이어 갔다.
“그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나 결말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지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던 거지?”
“그것이 이 세상을 유지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유지가 되도록 만들어진 세계이기도 하고요.”
라할은 손을 뻗어 수많은 장면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처음 당신이 아슬란의 몸으로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만약 그날 당신이 찰나의 괴력으로 유한을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과연 이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의 선택이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고, 만약 그 선택이 틀렸다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을 겁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 장면들은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결말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어떤 장면에서는 정통 스토리대로 알렉산더가 영웅이 되어 세상을 구했고, 다른 결말에서는 카르만이 끔찍한 살육을 벌이며 대륙을 통일시키는 결말을 맞이했다.
그 다양한 결말 속에서 아슬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전 당신이 얼마 못 가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방법으로 위기를 타파하고 결국 당신은 신을 베어 버릴 만큼의 최강자가 되었지요.”
“넌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군.”
“예. 저는 이 세상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도 그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전 당신이 진짜 아슬란이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그동안 당신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모든 걸 보고 있었다라.
그렇다면 대체 라할은 뭘 하는 놈일까.
단순히 이 게임에 심어져 있는 관리자 같은 것일까?
“줄곧 이 세상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
“이 게임에 떨어진 건 나 혼자인가?”
매일 밤, 잠이 들 때마다 궁금했던 것이다.
과연 나는 혼자 게임에 떨어진 것인가?
라할은 미묘한 미소를 보였다.
“당신은 참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있군요. 하긴. 그러니까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끝내 살아남은 것이겠지요.”
“묻는 말에 답하거라.”
“당신의 추측이 맞습니다. 당신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이 게임 안으로 떨어졌지요. 물론, 각자 다른 세상에 떨어졌기에 서로 만날 일은 없었을 겁니다.”
역시 나 혼자만 게임 속에 빨려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처음 이 게임의 특별판 프로그램을 받아 플레이 한 사람은 모두 게임 안으로 끌려 들어간 것이었다.
“대체 왜? 누가 그런 짓을 벌인 거지?”
“글쎄요. 누가 그랬을까요. 그 비밀을 알고 싶습니까?”
라할은 내게 손을 뻗었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왔군요.”
선택의 시간?
“제게 어둠의 권능을 넘기십시오.”
시스템 창이 내게 미리 알려줬던 것처럼, 놈은 내게 어둠의 권능을 요구했다.
그럼 희생당했던 모두를 되살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뭔가 찝찝했다.
이놈은 내게 말하지 않았던가.
선택의 시간이라고.
대체 무엇을?
“선택하십시오. 원래 당신의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이곳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모두 살려낼지.”
“······그게 무슨 소리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죽은 자들을 모두 되살리는 대신 이곳에 영원히 남을 것이냐.”
“!?”
나는 라할에게 건네던 손을 멈췄다.
바로 그때였다.
아슬란의 모습은 사라지고 원래의 내 모습, 이 게임 속에 들어가기 전 내 진짜 모습으로 돌아왔다.
“헉!”
더 이상 그 지랄 맞던 허세도, 심취도, 군왕의 근엄도 내 몸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평범했던 내 모습만 있을 뿐.
당연히 목소리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뭐야 이건.”
“당신의 본래 모습을 되돌려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제 선택을 하십시오. 이곳을 떠나시겠습니까?”
“······.”
나는 멍하니 라할을 바라보다 물었다.
“제가 떠나면 여기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당연한 말씀을. 게임이 끝났으면 모두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겠지요. 여긴 진짜 세상이 아닌, 가짜이니까요.”
이것이 시스템 창에서 나왔던 아포칼립스란 말인가.
내가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면 이 세상은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이곳에 남는 것을 택하게 된다면······.
“뭘 그리 고민을 하십니까? 당신은 지금까지 당신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지 않았나요? 간단한 문제입니다. 당신도 이곳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짜들에게 정을 줄 필요도, 연민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라할의 말이 사실이다.
이들은 그저 게임 속에서 존재하는 데이터 쪼가리.
진짜가 아닌 가짜들이다.
가짜들!
그것이 내 머릿속을 울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얼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 가짜들의 얼굴이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나는······.”
난 어둠의 권능을 라할에게 건네주었다.
마지막 선택을 하기 위해
* * *
콰르르릉-!!
하늘에 붉은 뇌격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음?”
“어?”
멈춰 있던 시간이 풀리고 정신을 차린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주변부터 살폈다.
밝았던 하늘이 검게 변하고, 태양 역시 검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모든 빛이 사라지고 오직 어둠 만이 대륙을 덮는 광경.
후두두둑-.
그에 이어 소낙비처럼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
“이건 대체······.”
“드디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는가?”
지상 위에 남아 있는 자들 모두가 그 광경을 목도했다.
검은 태양이 뜨고 대륙이 검게 물들어 그 심연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말이다.
모두가 직감했을 것이다.
그들의 찬란했던 세상이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막아라!!”
“모든 마법을 동원해라!!”
베라크 제국에서도 어둠이 세상을 뒤엎는 것을 보고 그에 대비하고자 방어막을 펼치며 온갖 마법을 동원했다.
“모두 신성력을 최대로 올리세요!”
신전 역시 모든 제사장이 한자리에 모여 교황 레헤나와 함께 어둠을 극복하고자 빛을 발했다.
하지만,
“아아······.”
검은 심연은 점점 더 커져 하늘을 집어삼켰고, 그 아래에 있던 모든 생명을 먹어 치우려 들었다.
그 어떤 무력도, 그 어떤 마법도 저 심연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저 이들은 누구의 심판인지 모를 이 끔찍한 재앙 속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끝났어······.”
“하······. 하하.”
“이렇게 끝이라니.”
“안 돼! 살려 줘!!”
누군가는 비명을 질러댔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으며, 누군가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의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신이시여.”
그렇게 세상은 멸망이란 그 참혹함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콰콱-! 콰콰콱-!!
검은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
어둠이 갈라지고, 검게 물들었던 태양은 다시 붉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을 베어내는 건 오직 한 사람.
“저, 저분은!”
“아슬란 님!?”
“아슬란 폐하이시다!”
바로 대륙의 영웅이자 제국의 황제, 아슬란이었다.
콰콰콰콰콱-!!
그의 검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의심도 섞여 있지 않았다.
모든 칼의 움직임이 명확했으며, 어둠을 가를 만큼 강력했다.
또한 그의 칼에서 나오는 찬란한 빛은 태양보다도 더 뜨겁고 밝게 보일 정도였다.
“폐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다!!”
“폐하를 도와라!!”
“우와아아아-!!”
멸망이 눈앞에 다다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던 그들은 아슬란을 바라보며 함성을 질러댔다.
쓰러져 있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슬란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것일 뿐.
이 대륙에는 수많은 신이 있지만, 이제 그들이 오직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
“아슬란 폐하!”
“아슬란 님!!”
바로 아슬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