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0.01초 소드마스터 189화
“흠······.”
엘티히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수정구를 만지작 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갈까······말까······.”
최근 들어 아슬란에게 너무 많은 일이 벌어졌다.
악마들에 의해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이 살해당하고 찢겨 죽었으니,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터.
누군가는 그의 옆에 남아 위로를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지?”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엘티히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아슬란 앞에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편하게 봤던 거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아슬란을 똑바로 마주 보는 것이 힘들었다.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 같고, 그런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는 것도 익숙하지가 않았다.
“여왕님. 그냥 가시지요.”
“······응?”
그때 뒤에서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시종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며칠 전부터 계속 혼자 고민만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네가 어떻게 안다고?”
“저를 포함해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여왕님께서 베라크 제국으로 가고 싶어 하시는 것을요. 황제 아슬란을 만나는 것을 고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엘티히는 당황한 눈빛으로 시종들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티가 났느냐?”
“예. 아주 많이 났습니다.”
“후. 그럼 더더욱 아슬란을 만나서는 안 되겠구나. 내 이런 모습을 아슬란 그놈이 본다면 전부 다 알아차릴 것이 아니냐?”
“이미 충분히 알아차렸을 겁니다. 아슬란 폐하는 라할의 화신이지 않습니까? 그분이 이 세상에서 모르는 일이 있겠습니까?”
“다, 다 알고 있다고?”
“예. 여왕님께서 그리 마음을 드러내 보이시는데 누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할 말이 없었는지 엘티히는 입맛을 다셨다.
“여왕님. 이럴수록 마음을 굳건하게 드셔야 합니다.”
“예. 그러니 여기서 그만 고민하시고 과감하게 부딪히십시오.”
“여왕님만큼 아름답고 또 아슬란 폐하에게 어울리는 황후 감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 하지만 나는 너희들의 여왕이다. 함부로 혼인을 할 수는······.”
“에잇!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베라크 제국의 황후가 된다고 해서 저희 엘프가 멸망하는 것도 아닌데요.”
“맞습니다. 그런 생각은 접으시고 제발 여왕님의 인생을 위해 사세요!”
평소와 다른 시종들의 모습에 엘티히는 눈을 껌뻑거렸다.
정말 이들의 말대로 자기도 새로운 인생을 위해 도전을 해봐야 하는 것일까.
“······!”
바로 그때였다.
엘티히는 당황함에 풀어진 눈동자가 다시 날카롭게 변했다.
“침입자다.”
“예?”
“강력한 마기로군. 대체 누구이기에 이 정도의 힘을······.”
그녀는 손가락을 튕겨 마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 여왕님······.”
“크윽!”
검은 촉수에 붙잡혀 모든 생기와 마력을 흡수 당하고 있는 엘프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핏줄이 곤두서는 엘티히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마력이 엘프들에게 달라붙어 있는 촉수들을 찢어 버릴 정도였다. 그만큼 엘티히가 진노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보다 빨리 왔군, 엘티히.”
“너는······.”
엘티히는 엘프들을 먹어 치우고 있는 상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라일라칸······. 아니. 그 멍청한 놈의 몸을 강탈해 갔다던 테르카나였나?”
“이름을 기억해 주다니. 영광이로구나.”
“감히 내 백성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서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갈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아아. 걱정하지 마라. 이처럼 먹잇감이 넘쳐나는 곳을 그냥 외면할 순 없지. 너를 비롯해 여기 있는 모든 엘프를 먹어 치워 내 힘을 무한하게 키울 것이다.”
“그전에 내가 먼저 널 죽여 주마.”
엘티히는 두 손에 정령의 힘을 가득 실으며 테르카나를 향해 날렸다.
콰아아앙-!!
하지만 날아오는 공격을 피하지도 않고 테르카나는 정면으로 뚫으며 엘티히에게 달려들었다.
콰악-!!
그녀의 두 팔을 붙잡은 테르카나의 몸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도마뱀처럼 긴 검은 꼬리가 생겨나고 얼굴 역시 괴수처럼 변해 갔다.
“완전히 괴물이 되었구나.”
“크흐흐. 아름답지 않은가? 전능한 힘을 가진 자의 모습이?”
“미친놈.”
콰아아아앙-!!
엘프들의 숲에서 검은 마력과 푸른 마력이 서로 충돌하며 큰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 * *
[전능의 팬던트]
-팬던트에 부여된 모든 효과를 유지하며, 그에 새로운 효과를 더합니다.
[운명의 힘]
-당신은 영웅이 될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모든 스킬의 쿨타임을 없앱니다.
모든 쿨타임을 없앤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매번 나는 찰나의 괴력을 두 번밖에 쓰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제약을 없애 버리고 이제 무한대로 쓸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 팬던트를 착용하기만 하면 말이다.
“······.”
나는 팬던트를 착용한 채 아무도 없는 넓은 평야로 나아갔다.
가급적이면 혼자 가려고 했으나, 요즘 같은 흉흉한 때에 황제를 혼자 밖으로 내보낼 순 없다는 이유로 기사들과 부하들이 죄다 내 뒤를 따라붙었다.
“······그럼 이곳에 있거라. 절대 가까이 다가와서는 안 된다. 휩쓸릴 수도 있으니.”
“예, 폐하.”
나는 기사들을 멀찍이 뒤에 놔두고 평야에 혼자 망토를 펄럭이며 허공 위를 날아올랐다.
“그럼 일단······.”
가볍게 검강부터 시작해 볼까?
촤아아아악-!!
나는 가볍게 칼을 휘둘러 검강을 날렸다.
그리고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댔다.
콰콰콰쾅-!!
그로 인해 땅이 짓이겨지다 못해 사방으로 갈라져 무너져 내렸고, 넓은 평야에 가파른 절벽이 생기고 말았다.
“지, 진짜잖아?”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찰나의 괴력을 쓴 검강을 아무리 날려도 쿨타임이 생기지 않는다.
“그럼······.”
나는 손을 위로 뻗었다.
그러자 블랙 메테오가 비명을 지르며 생성되었다.
콰아아아앙-!!
그렇게 냅다 던져 버린 블랙 메테오는 저 절벽 아래로 내려가 폭발하며 온 땅을 흔들었다. 나는 한 번 더 메테오를 만들어 보았다.
원래는 하루에 한 번밖에 사용이 불가능한 힘이었지만, 이젠 그런 제약이 완전히 없어졌는지, 또 다른 메테오가 내 손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으하하하!”
거기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나를 옥죄고 있던 사슬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유를 얻은 느낌.
이 해방감!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최고의 절정이었다.
그렇게 미친놈처럼 웃고 있을 때였다.
[감히 누가 나의 잠을 깨우는 것인가.]
묵직한 음성이 저 절벽 아래 심연에서 들려왔다.
이윽고 거대한 손아귀가 뻗어 나오면서 저 아래 파묻혀 있던 고대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라카서스]
몇 번 들어본 이름이다.
그래. 신화 속에 등장한다는 고대 몬스터.
게임에서 한 번도 본적은 없지만, 그것이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파괴적인 존재가 눈을 뜨고 말았다.
하지만,
“짐이 깨웠느니라.”
예전처럼 겁이 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다시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못 본 척 봐주겠다.”
[인간 따위가 건방지구나. 내 숨결 한 번에 먼지가 되어 버릴 하등한······. 커헉!]
일라카서스는 끝내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내가 날린 수십 개의 검강이 놈의 몸을 가르다 못해 완전히 짓이겨 놓았기 때문이다.
“쯧. 한심한지고.”
수백 조각으로 나뉘어 버린 그 육편이 사방에 퍼져나가며 떨어졌다.
나는 염화를 일으켜 순식간에 놈이 떨어뜨린 살 조각을 전부 태워 버렸다.
‘그래. 이게 게임이지.’
이 압도적인 힘!
이 전능함!
난 거기서 깨달았다.
진실로 날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 정도면 할 만하다.’
더 이상 테르카나의 힘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 * *
“하아- 하아-”
“끈질긴 년.”
엘티히는 피를 흘리며 거목에 기댄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엘프들의 시체가 한가득이었다.
그것들을 테르카나가 흡수하며 힘을 보충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엘프들의 힘을 빼앗으면 빼앗을수록 인간의 모습은 사라지고 점점 더 흉측한 괴물이 되어 간다는 점이었다.
“결국······. 스스로의 힘도 통제하지 못하는 놈이 끝없는 갈망에 갇히고 말았구나.”
“그럴지도. 하지만 후회는 없다. 네 힘도 아주 좋은 곳에 써주지.”
푸욱-!
“큭-!”
가슴 정중앙에 꽂힌 테르카나의 손에 엘티히는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반드시······그가 널······심판할 것이다.”
“흐흐. 그러지 못하게 하려고 지금 내가 네 힘을 가져가고 있지 않나?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슬란도 네 곁으로 보내 줄 터이니.”
테르카나를 노려보는 엘티히의 날카로운 눈빛은, 그녀가 숨을 거둔 뒤에도 풀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엘티히의 마력핵.”
마법의 최절정을 달린다는 엘티히의 마력핵이다.
지금까지 흡수했던 그 어떤 힘보다 뛰어난 것이었다.
테르카나는 엘티히의 마력핵을 입에다 넣고 삼켰다.
몸이 터질 것만 같은 강렬한 힘이 핏줄을 타고 흐르며 그의 몸은 완전히 악마화가 되어 버렸다.
“크흐흐흐.”
그 힘에 취한 테르카나가 혼자 웃음을 터트리고 있을 때였다.
“위대하신 지옥의 왕이시여.”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웬 난쟁이들이 있었다.
“맛도 없어 보이는 놈들이구나. 너희는 뭐냐?”
“저희는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은둔하는 자들. 뤼센족입니다.”
“뤼센족이라면······.”
테르카나도 아는 종족이었다.
지혜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미래의 일을 굉장히 잘 예측하는 유목 민족이다.
이들은 몸집이 잡고 존재감도 없어서 뤼센족을 실제로 봐놓고도 기억하지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너희가 내게 무슨 볼 일이지?”
“저희는 시대의 흐름을 잃는 민족. 대륙의 주인이 되실 분을 찾아와 미리 인사를 드리는 것뿐입니다.”
한 마디로 테르카나가 대륙을 장악할 것 같으니, 이들은 미리 살 길을 열고자 함이었다.
“다들 아슬란이 대륙의 지배자라고 떠들어대는데, 너희는 다르구나.”
“당연한 말씀! 아슬란 그자는 사기꾼입니다. 대륙 모두가 그자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그는 라할의 화신이 아니며, 전능한 힘을 가진 자도 아닙니다!”
그 말이 흥미롭게 들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저희는 상대방의 진실을 꿰뚫는 눈동자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아슬란을 몇 번이나 몰래 살펴봤지만, 그에게서 라할은 없었습니다. 또한 그는 전능한 힘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물론, 아주 막강한 스킬을 갖고 있긴 하나, 그것뿐입니다. 그마저도 사용에 제한이 있어 두 번밖에 쓰지 못하더군요.”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 한 정보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테르카나가 아슬란을 쭉 봐왔을 때 가끔씩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분명 상대를 잡을 수 있는 기회인데도 그냥 놓아 주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테르카나가 도망치는 걸 그냥 놔두지 않았던가.
그땐 그게 아슬란의 오만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전부였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테르카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그동안 우리 모두가 아슬란에게 속고 있었다는 것이냐?”
그 말에 뤼센족 난쟁이들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아주 유용한 정보를 테르카나에게 넘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희 말이 사실이라면······. 더는 나도 지체할 이유가 없지.”
테르카나는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검은 마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마기는 난쟁이들의 몸을 속박하고 있었다.
“테, 테르카나 님?”
“너희의 쓸모 없는 몸뚱이를 내가 쓸모 있게 만들어 주마.”
“!?”
난쟁이들의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