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0.01초 소드마스터 187화
켈린을 중심으로 마법의 나라로 점차 성장해 나가고 있었던 할라즈 왕국.
잠재력이 많은 왕국이었기에,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됐었다.
하지만 그랬던 곳이 지금은-
화르르르-!
불길에 휩싸인 채 성 전체가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이, 이것이 대체······.”
“여기가 정녕 할라즈 왕국이란 말인가?”
기사들은 망연자실한 눈빛을 띠었다.
나 역시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할라즈 왕국에 말을 잇지 못했다.
“폐, 폐하. 저걸 보십시오.”
그리고 이 화마 가운데에는 기다란 창 같은 것에 찔린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켈린의 시체가 있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도 할라즈 왕국이 왜 이 꼴이 됐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라즈 왕국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면, 이들이 진작 베라크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을 터.”
“예. 허나, 할라즈 왕국에게서 아무런 도움 요청도 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도륙을 당했다는 건가?”
각 왕국에 포탈이 설치 되어 있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무척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러지 못했다라.
“라파엘.”
“네.”
라파엘은 마법 병단과 함께 마법 가루를 뿌렸다.
그러자 그것들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보여 주었다.
“잠깐. 저건 라일라칸이 아닙니까?”
“아니. 라, 라일라칸이 대체 왜!”
실종되어 있던 라일라칸이 할라즈 왕국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알고 있던 라일라칸이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에 검은 전류를 뿌리는 라일라칸.
그는 순식간에 성 안에 있던 마법사들을 죽이고 그 힘을 외부에까지 퍼뜨려 이곳에 있는 백성들까지 숯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몇 분 밖에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라일라칸은 이 왕국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켰다. 그러고는 악마 같은 웃음을 터트리며 성을 무너뜨리기까지 했다.
“레메게톤······.”
“레메게톤? 저 라일라칸이 말입니까?”
“라일라칸이 놈에게 결국 몸이 빼앗긴 모양이군.”
이 정도로 난이도가 치솟을 수 있나.
인간 중의 최강이라는 라일라칸, 그리고 레메게톤의 조합이라니.
라할이 직접 나타나 싸우지 않는 이상, 이건 사실상 클리어가 불가능한 난이도였다.
하지만,
꽈악-
이성적으로는 테르카나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주먹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너무 힘을 준 탓에 피가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폐, 폐하.”
신하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참혹한 학살의 현상으로 변한 할라즈 왕국을 바라보며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테르카나.’
내가 네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난 또 한 번 다짐했다.
‘이 게임을 내가 클리어하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큼은 꼭 내 손으로 죽일 거다.
이 개자식아.
반드시 이 끔찍한 짓을 벌인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 주마.
“켈린의 시체를 잘 수습해 주거라.”
“예!”
“그리고 테르카나에게 몸이 빼앗긴 라일라칸의 행방을 찾아라. 빨리!”
“예, 폐하!”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켈린의 시체를 수습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라일라칸의 몸까지 강탈해 버린 테르카나.
대체 놈을 무슨 수로 막아야······.
그리 고민하고 있던 때였다.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 * *
“오늘도 라할의 이름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악마에 의해 죽어간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신전은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으로 거듭났다.
기존에 있던 라할의 동상들은 전부 아슬란의 동상으로 바뀌었으며, 라할의 초상화 역시 아슬란의 그림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신전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기 시작했다.
아슬란교를 믿고 있는 신도들이 전부 신전으로 모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의 핵심이었던 아론이 죽으면서 더욱 신전에 인원이 쏠리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습니다. 비록 끔찍한 악마가 그들을 모두 죽였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라할께서 그들을 품고 계시다는 것을.”
그러면서 교황이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말했다.
“또한 우리는 라할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죽음을 극복하게 해주시는 분. 희생당한 그들이 라할의 이름 아래 빛이 되어 살아난다는 것을요. 아슬란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고. 그들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아. 믿습니다.”
“라할이시여.”
“아슬란 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경건한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황은 이제 마지막 기도를 올리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라할이 정녕 너희를 구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위에서 울려 퍼지는 음산한 목소리에 모두 고개를 들었다.
[틀렸다. 너희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 바로 나, 테르카나다.]
“테르카나? 네가 라일라칸 님의 몸을 빼앗은 그 악마로구나.”
테르카나는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 잘생기고 아름다웠던 라일라칸의 얼굴이 지금은 검은 핏줄들이 줄줄이 올라와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그 아름다운 영웅의 몸을 함부로 쓰다니.”
“후후. 참으로 웃긴 일이지 않나. 인간 중의 최강이라는 이 라일라칸의 몸뚱이도 결국 내 힘을 온전히 다스리지 못하더군.”
“잘 알았으면 그만 라일라칸 님을 놔드리고 사라지거라.”
“나도 그럴 참이다. 아슬란의 몸을 내 것으로 만들기 전까진 말이야.”
“······뭐?”
테르카나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놀라고 있지? 아슬란은 라할의 영혼을 감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나의 영혼도 감당할 수 있겠지. 그런 완벽한 몸뚱이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레헤나는 화가 났지만, 그녀의 힘으로 테르카나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일단 화를 삭였다.
그동안 제사장들이 알아서 베라크 제국에 도움을 요청해 아슬란을 이곳으로 불러 줄 것이다.
“여기는 왜 온 것이냐, 악마.”
테르카나는 검은 불길을 손으로 천천히 일으키며 말했다.
“생각을 해보니, 왕국을 하나씩 멸망시키기 전에 너희 역겨운 신전부터 없애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리고 이 아래에는 천상의 드래곤이 잠들어 있지 않나? 놈을 깨우는 것도 꽤나 재밌을 거 같단 말이지.”
“지금 그게 무슨······!”
“교황이여. 빛의 사제가 아닌, 타락한 어둠의 사제가 될 생각은 없는가?”
테르카나는 그대로 손을 뻗어 교황의 몸을 꿰뚫었다.
“!?”
테르카나의 팔에서 퍼져나가는 마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맑고 순수해 보였던 교황의 눈동자는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녀의 몸 역시 지금 라일라칸의 몸처럼 검은 핏줄이 솟아 올라왔다.
“교황님!!”
성기사들이 난입해 테르카나는 막아보려 했으나,
촤아아악-!!
정신과 육신이 마기에 잠식된 교황이 그들을 향해 손을 뻗어 흑마법을 날렸다.
“아아. 교, 교황님마저-”
“교황님마저 이렇게 되시면 우린 대체 어떡하라고!”
“이 쳐 죽일 악마 놈아!!”
테르카나는 미간을 좁히며 저 뒤로 우글우글 달려오는 성기사들을 향해 숨결을 날렸다. 그러자 그들의 갑옷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그들의 몸도 함께 타들어 가면서 앙상한 해골만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헉!”
“저, 저런······!”
그 무지막지한 힘에 잠시 테르카나에게 악담을 퍼붓던 신도들은 입을 꾹 다물게 되었다.
“보았느냐? 이것이 바로 전능한 어둠의 힘이다. 벌레보다 못한 너희의 목숨을 내 손가락 하나면 전부 날려 버릴 수 있지. 어떠냐? 겉만 번지르르한 아슬란을 섬기는 것보다 차라리 나를 섬기는 것이?”
“······.”
그들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테르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렇다면 좀 더 너희가 감명 받을 만한 것을 보여 주지.”
테르카나는 어둠의 힘을 모은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마기를 아래로 흘려 보내자, 저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태동이 느껴졌다.
“아직 거기에 있었구나, 천상의 드래곤.”
그 강렬한 태동은 곧 신전을 울릴 정도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강한 빛과 함께 천상의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천상의 드래곤, 리탈리온. 너의 형제, 리렉시온이 죽었다. 그를 대신하여 나를 섬기거라.”
잠에서 깨어난 리탈리온은 잠시 주변을 살펴보다 테르카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리석은 놈. 먹을 것이 없어 레메게톤의 영혼을 먹다니.]
“그저 어둠의 권능이 주인을 찾았을 뿐이다.”
[라할께서도 레메게톤의 힘을 빼앗지 않았던 건, 오직 레메게톤만이 그 힘을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밝은 빛이라도 어둠이 번지면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느냐?]
“그러니까 라할이 나약하다는 것이다. 왜 자꾸만 빛을 고집하는 거지?”
리탈리온은 테르카나를 살펴보며 말했다.
[이미 그 그릇도 네 힘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군. 얼마 못 가 그 몸도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미 그건 테르카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슬란의 주변을 조금씩 갉아 먹으며 힘을 모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네게 말하지 않느냐. 너의 형제를 대신해 나를 섬기라고!”
테르카나는 강한 마기를 이용해 천상의 드래곤을 그 자리에서 묶어 버렸다.
“역시 약하기 그지없구나, 리탈리온. 네놈이 품고 있는 그 심장을 내가 먹는다면 이 몸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크읍-!]
제아무리 천상의 드래곤이라 할지언정 어둠의 권능 앞에서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상의 드래곤은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
그는 발악하듯 어떻게든 테르카나의 힘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콰콰콱-!!
하지만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구속은 더욱 강해졌고, 설상가상 테르카나에게 잠식당한 레헤나도 주문을 발동해 천상의 드래곤을 괴롭혔다.
[크롸라라라-!!]
천상의 드래곤은 크게 포효했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저 빠르게 어둠이 잠식하여 무너져 내릴 뿐.
“아, 안 돼······.”
“천상의 드래곤마저 저 악마에게······!”
신도들도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테르카나에게 대항하던 성기사들은 다 죽었고, 제사장들 역시 레헤나의 마법에 의해 무력화 되었다.
교황의 신성력마저도 허무하게 잠식되어 버리는 어둠을 이들이 어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라할이시여.”
“부디 저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들은 애타게 라할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테르카나가 크게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실컷 소리쳐 보거라. 너희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는 라할이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은······.”
콰아아앙-!!
바로 그때.
빛의 기둥이 하늘에서 내려와 테르카나가 천상의 드래곤을 향해 보내고 있던 마기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이곳에 있었구나.”
그 빛의 기둥에서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걸어 나오는 아슬란이 보였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분노에 찬 눈빛으로 테르카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