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0.01초 소드마스터 181화
카릴디움의 브레스에 의해 무너져 내린 테고 성.
라일라칸은 잿더미가 된 그 땅을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광신도들이로군요.”
“하지만······. 테고 성이 광신도들에게 넘어갈 정도로 나약한 곳이었습니까?”
“아무리 광신도들이라고 해도 이렇게나 순식간에 성을 장악할 정도라니. 필시 배후에 누군가가 있는 겁니다.”
라일라칸과 마찬가지로 잔해 위를 걷고 있던 기사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말대로 이 성이 이리도 쉽게 장악될 줄은 몰랐다.
그렇다는 건 다른 성들도 이런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건데······.
“음?”
라일라칸은 저 먼발치에서 무언가가 일렁 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다가가는 순간.
[라일라칸.]
음성이 들려왔다.
어둡고 우중충한 목소리였다.
[힘을 원하지 않는가?]
“······뭐?”
[네가 갈망하는 것을 알고 있다. 더 강한 힘을 원하지 않나. 내가 너에게 그걸 줄 수 있다.]
그곳에서 피어 오르는 힘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라일라칸에게 닿는 순간, 그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심겨 있던 욕망들이 분출되고 있었다.
[거부하지 마라. 너도 강해지고 싶지 않나? 저 아슬란을 꺾을 수 있을만큼 말이다.]
라일라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닿는 곳에 아슬란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흐트러진 자세를 보인 적이 없는 저 고고한 모습. 언제부터인가 라일라칸은 아슬란을 선망했었다.
그처럼 강한 사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선망이었을까, 아니면 열등감이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콰직-!!
라일라칸은 자신을 유혹하는 그 어두운 기운에 손을 뻗다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강한 전류가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그 기운을 소멸시켜 버렸다.
[쯧쯧. 강한 힘을 갖고자 한다면 영혼까지 바칠 수 있는 의지가 있어야 하거늘.]
하지만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 그런 놈에게 가시던가. 네가 힘을 준다고 해서 아슬란 폐하를 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분은 너나 나의 힘으로 어찌하지 못할 분이다.”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이기 때문에.
[후후. 그래도 결국 넌 내 손을 잡게 되어 있다. 그러니 기다려 주지. 힘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나를 불러라. 항상 너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
그것을 끝으로 목소리는 사라졌다.
라일라칸은 기감을 펼쳐 방금 전 목소리를 보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아무리 넓게 펼쳐 봐도 아군 말고는 걸리는 것이 없었다.
‘대체 어떤 놈이······.’
그때였다.
“라일라칸.”
아슬란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괜찮은 것이냐? 뭔가 소란이 있었던 거 같은데.”
“······괜찮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그래?”
무겁게 내려앉는 아슬란의 눈동자에 라일라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됐다.”
아슬란이 지나가고 나서야 라일라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왜 아무 일도 아니라고 얼버 무린 것일까?
설마 그 기이한 목소리에 벌써부터 흔들리기라도 하는 것일까?
* * *
‘성 하나가 순식간에 넘어갔다는 건 레메게톤 때문이겠지?’
익숙한 현상이었다.
내 부하들은 멀쩡한 성이 갑자기 저렇게 악마들 손에 홀라당 넘어간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레메게톤이 부활하지 않았던가.
그건 곧 이 대륙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뜻했다.
광신도들이 저렇게 강력한 마기를 뿌려 성을 장악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레메게톤의 덕이라고 봐야 했다.
즉, 이제 온 대륙에서 악마들이 넘쳐나기 시작할 것이며, 우린 최후의 전쟁을 준비해야만 한다.
‘차라리 문을 빨리 찾는다면 될 텐데.’
문제는 몇 군데를 뒤져 봤지만, 여전히 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신하라는 놈들은 이 급한 와중에도 빨리 황후나 맞이하라고 난리를 치고 있으니 원.’
오늘도 어김없이 명절날 친척 어른들마냥 얼른 혼인부터 하라고 신하들이 잔소리를 퍼붓는 통에 귀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진짜 안 한다니깐. 왜 자꾸 지랄인지 모르겠네.”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폐하. 하리엘 기사단장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하리엘이?
“들라하라.”
“예.”
평소에 항상 갑옷만 입고 다니던 하리엘.
그런데 해가 서쪽에서 뜨려는 것인지, 하리엘은 귀족 영애들이나 입을 법한 드레스와 진한 화장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하리엘?”
“예, 폐하.”
뭔가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애써 단아한 모습을 유지하려는 모습에 나는 그냥 말을 삼켰다.
“무슨 일로 왔지?”
“폐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짐에게? 말해 보거라.”
하리엘은 몇 번이나 거듭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망설이는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하던 와중,
쾅-!
갑자기 하리엘이 탁상을 두 손바닥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애가 갑자기 왜 이래.
“대, 대체 언제까지 저희를 애태우실 작정이십니까!”
“······?”
너무 당황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희는 폐하께서 간택해 주실 날만을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깐. 설마 황후 후보들을 얘기하는 건가?
“폐하. 그리 고민이 되신다면······. 저를 황후로 받아 주십시오. 그리고 나머지 후보들은 전부 후궁으로 맞이하시면 됩니다. 폐하께서는 위대한 분이시니, 감히 저 혼자로는 보필하기 어렵겠지요. 제가 이해하겠습니다.”
“······하리엘.”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하리엘을 불렀다.
“예, 폐하.”
“혹시 어디 아픈 것이냐?”
“네?”
“갑자기 복장을 그렇게 입고 온 것도 그렇고. 머리라도 다친 것이냐?”
하리엘은 금방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건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면······.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단 것이냐?”
한계에 다다랐는지, 하리엘은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얼굴로 어버버 거리기 시작했다.
“폐하. 아론 대기사단장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음. 들라하라.”
만약 아론이 아니었다면 하리엘은 그대로 주저 앉았을지도 모른다.
“폐하. 각 경계선에서 들어온······. 음?”
아론은 우리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눈치채고는 얼른 다시 말을 정정했다.
“소장이 시간을 잘못 맞춰 온 듯 싶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자 하리엘이 얼른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고는 내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 아, 아무튼 전 뜻을 명확하게 전달했습니다. 폐하께서 시,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네가 짐의 황후가 되고 나머지 후보들은 후궁이 된다는 그 뜻을 말하는 것이냐?”
“헉!”
아론이 설마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는 눈으로 하리엘을 바라보았다.
빨갛게 올라온 얼굴을 가리며 후다닥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리엘 단장이 저토록 적극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 경은 무슨 일로 왔는가.”
“예. 다름이 아니라 각 경계지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번 테고 성 사태 이후 각 왕국과 경계지에 서신을 보내 광신도들을 모조리 잡아내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는데, 지금 사방에서 악마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보고들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중입니다.”
레메게톤이 부활했으니, 악마들의 활동이 무척 왕성해질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악마의 조짐이 보이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군사들을 보내 사전에 싹을 잘라 놓는 것이 중요했다.
“짐이 직접 나서겠다. 군사들을 모아라.”
그러자 아론이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청했다.
“폐하. 이번 일은 소장에게 맡겨 주십시오.”
평소보다 훨씬 더 진중한 표정이었다.
“폐하께서는 그동안 직접 제국을 위해 뛰어다니시며 많은 일을 해내오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폐하의 가장 가까운 대기사단장인 소장은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폐하의 일에 앞장서야 할 이 아론이 말입니다. 그것이 매번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거야 아론.
네 스텟이 믿음직스럽지 못해서······라고 할 뻔했으나 꾹 참았다.
“소장은 폐하의 검이며, 당신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대기사단장입니다. 폐하의 제국이 건재하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 주기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소장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폐하께서 나서시지 않아도 제국의 최강 군사력으로도 악마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걸 모두에게 보여 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
나는 물끄러미 아론을 쳐다보았다.
만약 아론의 스텟이 알렉산더와 같았다면 고민하지 않고 보내줬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 아론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본인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대기사단장이긴 하지만, 당장 옆에 있는 알렉산더만 봐도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을 테니 말이다.
‘솔직히 아론이 어디 가서 꿀릴 놈은 아닌데.’
다만 옆에 있는 놈들이 죄다 괴물이라는 게 문제였다.
대륙 최강이라 불리던 라일라칸.
이 게임의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온갖 사기적인 버프는 다 받고 태어난 알렉산더.
최강 소드마스터 레바노스.
신성 블레이드, 하리엘.
최강 마법사, 라파엘.
그 외 등등.
아론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대륙 최고급 네임드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지 않은가.
마음고생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술상을 가져오너라.”
나는 밖에 있던 시종들을 시켜 술상을 가져오게 한 뒤, 아론에게 잔을 건넸다.
“받거라, 아론.”
“예.”
쪼르륵-
나는 술잔을 가득 채워주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도 아주 오랜만이군. 처음 네가 짐의 기사가 됐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렇습니다, 폐하.”
아론은 내가 따라 주는 잔을 무척 신성하게 여기며 아주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짐이 처음 너를 부하로 거두어 들였을 때의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예.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때 짐이 말했지. 짐은 한번 믿기로 한 사람에게는, 설사 그가 내 뒤통수를 친다고 해도 끝까지 믿겠다고 말이다.”
“예, 폐하.”
“그 마음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짐은 널 믿고 있다, 아론.”
그 말에 아론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니 애써 증명할 필요 없다, 아론. 너의 출중한 능력을 짐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렁그렁 거리는 눈으로 아론은 한번 더 잔을 들이켰다.
왠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그래. 누굴 탓하겠나.
너나 나나 우릴 이렇게 만든 개발자 놈들 때문이지.
솔직히 아론 너는 나보다 스텟도 좋잖아.
“하지만······. 제국의 명예와 폐하를 위해서라도 소장이 꼭 이번 일을 해결해 보고 싶습니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실 아론의 말대로 언제까지 내가 뛰어다닐 순 없는 노릇이니까.
“좋다. 그럼 전권을 너에게 주마.”
“예?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다만, 짐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무, 물론입니다. 폐하!”
아론은 나와 몇 번 술잔을 오고 간 뒤, 아주 신이 난 아이처럼 황궁 밖을 나섰다.
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멈칫거렸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내 부하들에게는 정을 주지 않기로 한 것이 내 결정이었다.
그래야만 이 게임을 떠날 때 망설이지 않고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저들에게 정이라는 것을 준 듯싶었다.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이라고 해도 이렇게 현실적인 게임을 하고 있으면 당연히 친분이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
이건 불가항력적인 것이라서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아론이 알아서 잘하겠지?”
내 곁에 오래 있기도 했고, 통솔 능력이 있는 놈이니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다.
그런데 왠지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