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0.01초 소드마스터 176화
새로운 생명이 피어 오르고, 황무지는 아마존 정글을 연상시키듯, 숲이 우거졌다.
내 옆에 있던 엘티히와 미에르, 그리고 내 부하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그 광경을 목도했다.
‘뭐, 뭐야. 이거.’
나 역시 놀라기에는 마찬가지였다.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아. 라할이시여.”
그때 미에르가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감히 제가 당신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
“처음에는 라할께서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 믿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인간의 몸으로 올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을 꽃피우고, 그것을 다스리는 건 오직 라할, 당신만이 가능한 일. 이제서야 이 종이 당신을 뵙게 됩니다.”
그러자 내 부하들도 하나둘 경외를 표하며 몸을 숙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아슬란이 라할이라고 말이다.”
“엘티히 여왕님! 라할께 그 무슨 무례입니까!”
“뭐, 뭣?”
“저분은 라할이십니다. 당신의 창조주란 말입니다. 말을 높이십시오.”
“······.”
어이가 없다는 듯 엘티히는 미에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한 일로 호들갑 떨 필요 없다. 짐이 이렇게 숲을 다시 돌려놓았으니, 그 생명의 힘은 넓게 퍼져나갈 것이다. 다시는 악마의 힘 따위에 숲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해라, 미에르.”
“저희 종족은 언제나 당신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목숨을 걸고 숲을 지키겠나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생명의 힘이 다른 것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면, 거대한 조각상 같은 것에도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 * *
털썩-!
“모, 모데루스. 네놈이······.”
모데루스는 짙게 숨을 내쉬었다.
격렬한 전투였다.
당연하다.
바빌론과의 목숨을 건 싸움이었으니.
심지어 이놈은 별도의 군단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끈질기구나. 내가 레메게톤 님을 위한 일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닥쳐라! 넌 그냥 미친놈일 뿐이야. 존재하지도 않는 레메게톤을 위해 우리 바빌론을 사냥하고 다니는 건 네놈이지 않나? 오히려 네가 우리를 죽여서 레메게톤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고?”
모데루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의 얼굴을 발로 후려쳐 버렸다.
“똑똑히 보거라. 저기 레메게톤께서 널 기다리고 계신다.”
“······!”
레메게톤이 봉인되어 있는 관을 바라보자 거기서 검은 줄기 같은 것이 솟아 나와 바빌론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이제는 익숙한 그 광경에 모데루스는 퍼석하게 말라비틀어진 바빌론의 시체를 발로 짓누르며 몸을 돌렸다.
“이것으로 모든 바빌론을 레메게톤 님의 제물로 바쳐졌다.”
“예.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레메게톤께서 부활을 하시는 것이냐?”
“음- 아직은 안 됩니다.”
“뭐야?”
모데루스는 언성을 높였다.
“바빌론들을 전부 붙잡아 오면 레메게톤께서 부활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예. 맞습니다.”
“그런데 왜······!”
“방금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바빌론들을 ‘전부’ 레메게톤께 바쳐야 합니다.”
“그게 무슨······.”
모데루스는 하던 말을 멈추고 테르카나를 바라보았다.
모데루스도 바빌론의 일원이지 않은가.
즉, 전부라는 뜻은 모데루스 역시 포함이었다.
“나, 나를 제물로 바치라고?”
“예. 당신이 그토록 원하는 레메게톤 님의 부활을 위하여 스스로의 몸을 바치는 겁니다.”
모데루스는 테르카나의 목을 붙잡아 위로 올렸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느냐? 나를 죽이려고?”
“저는 그저 레메게톤 님을 부활시킬 방법을 알려 드린 것뿐입니다. 전 한 번도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레메게톤 님을 부활시키려면 당신도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이놈이-!”
테르카나는 모데루스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크흐흐. 동료들을 제물로 바칠 땐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고, 온갖 충성심은 다 보이더니. 스스로 몸을 던지려니까 아쉬운 모양입니다?”
“이놈-!!”
콰앙-!!
모데루스는 테르카나를 땅에 처박고 놈의 머리를 발로 짓눌러 한 번에 터트려 버렸다.
“후우- 후우-”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테르카나는 감히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숨을 몰아 쉬며 머리가 터져 버린 테르카나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리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뒤에서 테르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방금 자기 손으로 죽였는데도 말이다.
“너······.”
“후후. 언젠가 당신이 저를 죽일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 당신이 그리 쉽게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테르카나.”
“이것으로 당신의 뜻은 확실하게 레메게톤 님에게 전달이 되었군요. 당신은 처음부터 레메게톤 님을 위해 희생할 생각 따윈 없었던 거야.”
“!?”
모데루스는 주먹을 꽉 쥐며 다시 한번 테르카나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촤아악-!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붙잡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몸을 칭칭 휘감기 시작했다.
다른 바빌론들에게 그리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이건!”
“레메게톤 님의 마지막 제물이 되어 주십시오, 모데루스 님.”
“내가 고작 이딴 것에 당할 거라 생각하느냐!”
모데루스는 악을 쓰며 줄기들을 끊어냈다.
그러나 계속해서 새로운 줄기들이 나타나 그를 휘감았고, 그는 끝끝내 온몸을 움직일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당신이 아까 잡아온 바빌론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레메게톤 님께서도 알고 계시고요.”
“뭐, 뭐야?”
“원래의 당신 힘이었다면 이 줄기들을 쳐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힘들어 보이는군요.”
“테, 테르카나! 다, 당장 이걸 풀어라! 내가 죽으면 레메게톤 님의 대업을 달성할 수 없다!”
“후후. 죄송합니다. 전 레메게톤 님의 힘에 감히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너무 자만하신 것 아닙니까? 레메게톤 님이 부활하신다면 당신 같은 바빌론은 새로 창조하면 그만입니다.”
“!?”
모데루스는 최후까지 저항하며 저 안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자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테르카나가 칼로 이 줄기들을 끊어 주기만 한다면······!
“테, 테르카나. 사, 살려다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
“이런. 끝까지 추한 모습을 보여 주시는군요. 그래도 바빌론들의 리더로서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망입니다.”
“테르카나!!”
“그리고 한 가지 더.”
테르카나는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모데루스 앞에 쭈그려 앉아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어. 난 강력한 힘을 원하거든. 저 건방진 아슬란을 짓밟을 수 있을 만큼의 힘 말이다.”
“······!”
촤아아악!!
“으아아아악!!”
모데루스는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레메게톤의 관 안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말았다.
식사를 마친 레메게톤의 관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곧 거기서 둔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레메게톤이시여.”
[나를 이 더럽고 추악한 곳에서 깨운 것이 너인가?]
“그렇습니다. 어둠의 왕이시여.”
[그대의 공을 인정해주마. 내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온 대륙을 파괴시킨 뒤, 그 위에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다.]
“당신의 뜻이 늘 이루어지기를.”
그 앞에 무릎을 꿇은 테르카나였다.
그의 고개 숙인 얼굴에서는 음흉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때가 다다랐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슬란. 너에게 절망이 무엇인지 알려 줄 터이니.’
* * *
“······.”
“폐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뭔가 오한이 들었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에휴. 이젠 익숙하다.
또 어떤 놈들이 내 뒤에서 날 죽이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는 거겠지.
황궁의 온갖 권력이란 권력은 다 쥐고 있는 저저 능구렁이 호레스처럼 말이다.
“······?”
내가 빤히 쳐다보자 호레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같으니.
“폐하. 예술가의 도시, 아렌티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렌티아는 참 신기한 곳이었다.
자스트라 영역을 따라 흐르는 긴 강줄기가 있는데, 폭이 굉장히 넓은 줄기 가운데에 마치 외딴섬처럼 솟아오른 구간이 있었다.
그곳에 렌 종족이 정착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그들은 예술의 종족이라 불리는데, 그래서인지 훌륭한 미술품들이 이곳에는 넘쳐나고 있다.
이 아렌티아에서 나오는 미술품들이 바깥에서는 상당히 비싼 가격에 팔리곤 한다.
“폐하께서 친히 저희 도시를 방문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 저희가 보내드린 진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가 최고로 자랑하는 미술품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이곳 주변에 확인할 것이 있어서 온 것뿐이다.”
아렌티아는 자스트라 영역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기사단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려면 꽤나 번거로웠다.
그래서 미리 이곳에다 포탈을 박아 놓은 것이었다.
그래야 이동이 무척 자유로울 테니까.
“어떤 것을 찾으시려는 건지······.”
“많은 것을 알고자 하는구나, 브루엔.”
“제, 제가 감히 폐하께 무례를······!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누가 보면 내가 폭군인 줄 알겠네.
“고작 그런 걸로 짐의 백성을 죽이지 않는다.”
“예. 감사 또 감사합니다.”
예술의 나라라서 그런지, 이들의 전투 능력은 형편없었다.
만약 이 폭넓은 강가만 아니었어도 진작 다른 종족에 약탈당해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베라크 제국이 자스트라 영역까지 손을 뻗었을 때 냅다 항복을 청해온 것이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말이다.
“다리를 놓거라. 짐이 기사단과 함께 주변을 정찰할 것이니.”
“예. 당장 다리를 놓으라고 명해 놓겠습니다.”
내가 오늘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문을 찾기 위함이었다.
‘진짜 이놈의 문이 사람 여러 번 똥개 훈련을 시키네.’
그냥 착착 한 번에 나오면 좋을 것을.
이놈의 문이 쉽게 나오질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또 친히 여기까지 나와서 주변을 탐색해야만 했다.
‘으으. 자스트라 영역은 벌레가 너무 많아서 싫은데.’
끔찍하게 생겨 먹은 몬스터들을 많이 잡아왔지만, 벌레가 싫은 건 여전했다.
그렇게 기사단을 데리고 아렌티아 바깥으로 나서려는 때였다.
“음?”
여기 도시 중앙에 있는 거대한 석상에 저절로 눈이 갔다.
그러자 이곳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브루엔이 말했다.
“저희 종족의 자랑거리인 드래곤 조각상입니다. 아스릴타디움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기서는 천공의 제왕, 카릴디움이라고 불립니다.”
[위대한 조각상, 카릴디움.]
-신비의 물질 아스릴타디움으로 만들어진 드래곤 조각상.
-그 웅장하고 위엄 넘치는 석상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체력을 회복하는 효과를 얻습니다.
조각상을 봤다고 이렇게 친절하게 정보창까지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면 체력을 회복하는 효과까지 있다라.
하긴. 가끔 나도 게임에서 보는 위대한 조각상이 버프 효과를 갖고 있긴 하지.
“폐하께서 말씀만 해주신다면, 당신의 그 위대한 업적을 기리며 조각상을 새로 이곳에 짓고자 합니다.”
“그럼 이 드래곤은?”
“다른 곳에 보관을 해도 괜찮겠으나, 마땅치 않으니 이것을 다시 부수고 녹여서 새로이 쓰면 되겠지요. 폐하가 계시는데, 감히 이따위 드래곤 조각상 따위가 도시의 중앙을 차지해서 되겠습니까?”
브루엔은 입에 아부를 달고 살았다.
정말 이걸 부수고 내 조각상을 이 위에 세우려는 것 같았다.
근데 이걸 부수기에는 너무 아까워 보이는데.
‘잠깐. 이거 혹시······.’
순간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조각상이 필요 없다면 짐이 가져갈까?”
“······예?”
브루엔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