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0.01초 소드마스터 175화
츠츠츠츠-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지금은 허세도, 심취도 전부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이 초록빛이 날 집어삼키려 들 때 난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딱히 내게 위해를 가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그 빛이 온전히 내게 흡수됐다.
“······괜히 쫄았네.”
나는 무안하게 헛기침을 뱉으며 방금 전 흡수된 힘을 확인해 보았다.
[생명의 힘]
-생명을 꽃피우는 창조의 힘입니다.
-생명의 힘은 시전자의 힘과 비례합니다.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 순 있으나,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순 없습니다.
이 게임을 참 오랫동안 해왔지만, 이런 스킬이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다.
“아까 테르카나 그놈이 오직 라할만 이 힘을 취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 힘을 흡수할 수 있었던 거지?
“그놈이 또 괜한 헛소리를 한 것일 수도 있고.”
나는 시범삼아 옆에 줄줄이 나 있는 나무줄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생명의 힘이 발현되면서 그 위로 작게 꽃이 하나 피어올랐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힘, 이것이 바로 새로운 내 능력이었다.
“하등 쓸모없는 능력이군.”
하지만 딱히 감명 받을 힘도 아니었다.
그냥 꽃을 새로 피우거나, 다 시들어진 것을 살리는 용도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와서 조경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평소에도 꽃을 보러 다니지도 않으니, 더더욱 쓸모없는 능력이었다.
“문이나 열어, 인마.”
나는 닫힌 입구를 툭툭 발로 찼다.
그러자 막혀 있던 입구가 촤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바깥에서는 부하들이 깜짝 놀라며 내게 달려왔다.
“폐하께서 빨려 들어가신 곳을 저희가 부숴 봤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참이었습니다.”
그래?
뒤를 돌아보니, 부하들이 완전히 짓이겨 놓은 나무 줄기들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포탈 안으로 빨려 들어갔었다는 뜻이다.
‘근데 저렇게 짓이겨 놓을 정도면······.’
내가 안에 있었으면 저놈들 칼에 죽었을 것 같았다.
“더는 이곳에 볼 것이 없다. 돌아간다.”
“예!”
결국 이곳에서도 문을 찾지 못했다.
그럼 대체 이놈의 문은 어디에 있다는 거야?
* * *
“하찮은 신이라.”
다른 신도 아니고 무려 레메게톤을 그리 취급한단 말인가.
어이없는 자신감에 테르카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 그에게는 하찮아 보일 수도.”
블랙 메테오라는 그 끔찍하게 강력한 스킬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지금까지 수많은 적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아슬란이다.
그런 업적이 가능했던 건, 그가 인간이 아닌 라할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거기다 지금 그는 자신이 이 대륙에 뿌려 놓았던 힘들을 하나씩 거둬 가고 있었다.
엄청난 마기를 쏟아 부어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생명의 힘을 직접 가져가기 위해 오지 않았던가.
라할은 자신의 힘을 모두 되찾아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만약 레메게톤이 부활하기도 전에 라할이 모든 힘을 되찾는다면······!
“거기서 뭐 하고 있지?”
그때 자신을 부르는 모데루스의 목소리에 테르카나는 심각해진 얼굴을 풀고 웃으며 말했다.
“앞날을 대비해 몇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예. 하루라도 더 빨리 레메게톤 님을 부활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아슬란의 힘이 생각 이상으로 강해지고 있어서 말이지요.”
“······거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자는?”
“상대는 평범한 어떤 종족이 아닌, 무려 신입니다. 그것도 이 세상을 창조한 라할이지 않습니까.”
모데루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레메게톤 님의 부활을 위해 얼른 다른 바빌론을 잡아 오라고 압박하는 것 같군.”
“제가 너무 티를 낸 모양이군요. 하지만 모데루스 님이 아니면 바빌론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쉽지 않다. 내가 바빌론 2명을 붙잡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바빌론들은 벌써 숨어 버렸다. 그놈들부터 찾아야겠지.”
“그렇지 않아도 제가 그들의 위치를 찾아 놓았습니다.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모데루스는 테르카나가 열어 준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테르카나는 저기 보이는 레메게톤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레메게톤.
그의 부활이 멀지 않았다.
그럼 자신이 오랫동안 계획해 왔던 것을 드디어 이루게 되리라.
그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낀 테르카나의 진한 미소가 얼굴에 그려졌다.
* * *
생명의 힘이란 능력을 얻었지만, 정작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사실상 버려둔 상태였다.
“폐하. 이번에 진상품으로 올라온 것들입니다.”
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된 이후로 주기적으로 진상품이 올라왔다.
각 왕국에서 보내는 것들도 있었고, 자발적으로 우리 제국에 항복한 다른 종족들이 보낸 것들도 있었다.
“이건 아스릴타디움으로 만든 조각상들이라고 합니다.”
“아스릴타디움?”
“예. 채굴할 수 있는 곳이 이 대륙에는 한 곳밖에 없고. 소재가 무척 단단하며 마법에도 뚫리지 않는 강한 내성을 지닌 귀한 자원입니다. 그것으로 만든 작은 조각품은 아주 비싼 가격에 팔리곤 합니다.”
아스릴타디움은 나도 알고 있는 물질이었다.
굉장히 강한 내구성을 자랑하며, 특히나 마법 저항력이 깃들어 있어 이것으로 만든 방어구는 전설 취급을 받는다.
하지만 자원을 채취하기도 어렵고, 시중에 있는 것들을 끌어모으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의 찾지도, 쓰지도 않는 물질이었다.
나도 예전에 이 게임을 플레이할 때 딱 한 번 이 물질로 갑옷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지금이라도 이걸로 하나 만들어 봐?’
문제는 이 물질을 제대로 가공해서 갑옷을 만들 수 있을 만한 대장장이가 있어야 한다는 건데······.
“렌 종족은 예술의 족속이라 불리는 자들로, 아스릴타디움을 이용해 여러 가지를 조각해 왔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드래곤을 형상으로 만든 거대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만일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신다면 폐하의 업적을 기릴 만한 조각상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일단 여기 놔두고 가거라.”
“예.”
아스릴타디움으로 만들어진 새끼 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조각상들을 내 책상 위에 두었다.
“귀엽네.”
7개의 조각상.
일부러 의도를 한 것인지, 귀여운 몬스터들을 본떠서 만든 조각상 같았다.
이걸 전해 주고 간 기사의 설명에 의하면 축복을 내려 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돈 많은 부자들이 아주 환장을 할 만한 조각상 같았다.
“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작은 조각상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던 중, 갑자기 손끝에서 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초록빛이 감돌았다.
“······?”
그 빛은 곧 조각상 안으로 스며들었다.
나도 모르게 생명의 힘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리고,
“뀨루루루-.”
“으헉!”
조각상이 울음을 터트리며 꿈틀대기 시작했다.
“뀨루루?”
몸통과 얼굴이 똑같은 크기에, 눈은 동글동글하고, 볼은 양옆으로 귀엽게 툭 튀어나왔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캐리커쳐로 그린 귀여운 호랑이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어, 엄청 귀엽잖아. 미친.”
내가 드디어 나이가 들었나.
이런 주체할 수 없는 귀여움이라니.
나는 만질만질한 녀석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계속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뀨루루 울음을 터트리다 갑자기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
뭐야. 왜 그래?
나는 녀석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그런데 처음 봤던 그대로, 그냥 일반 조각상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설마······.”
생명의 힘은 시전자의 힘과 비례한다.
이 터무니 없이 약한 아슬란의 힘으로 불어넣은 생명의 힘이니, 그것을 유지하는 시간도 무척 짧은 것이다.
“그럼 한 번 더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다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생명의 힘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녀석의 몸이 다시 꿈틀대면서 움직였다.
“뀨루루루.”
하지만 역시나 얼마 안 있어 다시 조각상으로 돌아갔다.
“잠깐. 그럼 이걸 내가 찰나의 괴력과 섞어서 쓰게 되면······.”
이 녀석이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가?
한번 실험삼아 해볼 요량으로 조각상에 손을 가져갈 때였다.
[아아. 아슬란. 아슬란 거기 있느냐?]
엘티히의 목소리였다.
저번 날 엘티히가 선물하고 간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엘티히?”
수정구에 가까이 다가가니,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나다. 지금 이곳으로 와 줄 수 있겠느냐? 아니면 내가 데리러 갈까?]
“······.”
이건 왜 오라 가라야.
“무슨 일이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 너에게 가장 먼저 알려야 할 것 같아서 수정구로 연결을 한 것이다.]
엘티히가 저리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것을 보면, 뭔가 큰일이 난 것 같았다.
“잠깐 기다리거라.”
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알렉산더와 라파엘, 그리고 라일라칸을 동행하여 공간 이동으로 엘티히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왔군.”
엘티히는 내 옆에 있던 라일라칸을 힐끔 쳐다보았다.
“너도 왔군.”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나도 폐하의 명령을 따라 온 것이니.”
“흥. 그러거나 말거나.”
엘티히는 제 옆에 있는 여인을 소개시켜 주었다.
“여긴 하렐 족속의 족장, 미에르라고 한다.”
하렐 족속이라면······. 숲을 지키는 종족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엘프 말고는 다른 종족과 교류가 없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에르라고 합니다.”
과연 나를 바라보는 미에르의 눈빛이 곱진 않았다.
무척 경계하는 느낌이랄까.
“아슬란이다.”
근데 날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대체 뭐지?
그런 내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엘티히가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너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
엘티히는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순식간에 우리는 어느 황무지로 이동이 되었다.
나는 한번 쓰면 쿨타임이 더럽게 긴 공간 이동을 엘티히는 아주 자유자재로 쓰는 것이었다.
“여긴······.”
“하렐 족속의 땅이다.”
여기가 하렐 족속의 땅?
그렇다면 분명 수풀이 무성하고 나무가 길쭉길쭉 서 있어야 할 텐데?
“여긴 원래 생명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라할의 축복으로 이뤄진 곳이었지요. 하지만······. 저번부터 꽃들이 말라 비틀어 죽더니,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미에르는 슬픈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 하렐 족속은 숲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그래서 쫓기듯 터전을 옮기고 있지만, 숲을 사라지게 만드는 검은 힘이 점점 모든 숲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엘티히가 말을 거들었다.
“이런 건 나도 처음 보는구나. 갑자기 숲이 생명력을 잃은 것처럼 사라지고 있다니. 대체 왜 이런 일이······. 혹시 레메게톤의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숲이 경고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 숲을 지탱하는 어떤 힘이 사라진 것은 아닐지······.”
그 말에 순간 나는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내가 생명의 힘을 가져가는 바람에 이 지경이 된 건가?’
그럼 여길 시작으로 모든 숲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겠지?
바로 그때였다.
“······?”
아까 조각상을 만지던 때와 마찬가지로 몸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자꾸만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것을 막지 않고 풀어내자 생명의 힘이 천천히 퍼지면서 내 발밑으로 작은 꽃 하나를 피웠다.
“엇? 아슬란 님 발밑으로 꽃이······!”
그와 동시에 미에르가 소리치자 이번에는 강렬한 허세가 들끓기 시작했다.
“숲이 죽으면 다시 살리면 될 일이 아닌가?”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아느냐? 생명이란 것은 마법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그대의 마법이 부족한 것이겠지.”
“뭐?”
나는 찰나의 괴력을 생명의 힘에 불어넣어 그대로 퍼뜨려 보았다.
그러자 초록빛이 감도는 강한 파동이 넓게 퍼져나가면서,
“!?”
“이, 이건!”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에 꽃과 수풀이 자라나고 그 위로 나무들이 순식간에 뻗어 나오면서 울창한 숲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