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0.01초 소드마스터 164화
“저놈 대체 뭐야?”
“아주 지 마음대로잖아! 저런 걸 힘들게 우리가 살려 놓은 거였어?”
믿었던 혼돈의 드래곤에게 뒤통수를 맞은 바빌론들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간 혼돈의 드래곤을 쫓아가서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왜냐하면 놈은 바빌론을 한입에 먹어 치울 만큼의 엄청난 존재이니 말이다.
“보면 모르겠나? 혼돈의 드래곤이 겁을 먹은 것이다.”
“뭐?”
“너희도 보지 않았나. 혼돈의 드래곤이 아슬란과 격돌하는 것을. 그리고 놈은 아슬란과 힘 싸움을 벌였지만 보기 좋게 바닥에 처박혔지.”
그건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냥 이대로 가만히 병신처럼 기다리기만 하라는 거야?”
바빌론 중 가장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건 엘비하스였다.
“아니면 달리 생각하는 바가 있나? 엘비하스.”
“적어도 너희들처럼 가만히 있는 건 최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
엘비하스는 감춰 두었던 자신의 검은 날개를 활짝 펼쳤다.
“단독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냐, 엘비하스?”
“그래. 이게 다 우리 레메게톤 님을 위한 일이 아니겠어? 그분께서 너희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저 지하에서 얼마나 분통이 터지실까.”
그러고는 천천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제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엘비하스는 그 말을 남기고 훌쩍 날아올라 그들을 떠나 버렸다.
“저 건방진 년이 또······.”
“일단은 놔두도록 하지. 엘비하스의 실력은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니니.”
겉으로 욕은 해도 바빌론들은 은근 엘비하스의 행동을 호기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과연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내심 궁금했기 때문이다.
* * *
“어서 움직여라!”
“부상병들은 이쪽으로!”
“서두르거라!”
혼돈의 드래곤이 지나간 자리는 성한 것이 하나 없었다.
황궁은 그 날개에 의해 무너졌으며,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만약 아슬란이 나서주지 않았다면 혼돈의 드래곤은 그대로 황궁을 넘어 저 밖에 있는 백성들에게도 피해를 끼쳤을 것이다.
“혼돈의 드래곤이 나타났는데도 이 정도로 끝나다니.”
라일라칸은 그리 중얼거렸다.
혼돈의 드래곤.
그것을 마주하는 건 라일라칸도 처음이었다.
당장 일반 드래곤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굉장히 힘든 일인데, 그것들보다 몇 배는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고대 드래곤이지 않은가?
특히 혼돈의 드래곤은 대륙 전체를 파멸시킬 만한 힘을 가지고 있어 라할이 천상의 드래곤을 만들어 직접 막아내기까지 할 정도였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아론이 옆에서 말했다.
“우리 제국에는 아슬란 폐하께서 계시니까요. 그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진작 이 나라는 멸망했을 겁니다. 이번에도 만백성이 그분에게 보살핌을 받았군요.”
“······언제까지 말이냐?”
“예?”
“언제까지 우린 그분의 보호 안에서 살아야 하냐는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가 스스로를 지켜낸 적이 있더냐?”
“그, 그건······.”
아론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라일라칸의 말처럼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아슬란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아론과 그의 기사단의 힘만으로 무언가를 지킨 적이 없었다.
“그리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나 역시 같은 처지니까.”
“······.”
“먼저 일어나지. 고생하시게.”
라일라칸은 짧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30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세상 그 누구라도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저 라할조차도, 저 레메게톤조차도 자신을 대적하지 못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슬란이란 사내를 만났고, 처음으로 그에게 무력감이라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실은 인간이 아닌, 그것을 아늑하게 초월한 절대자라는 것을 알게 된 뒤에는 조금 안심했다.
어차피 신이라는 존재는 논외이니, 다시 자신이 대륙 최강자가 된 것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던 혼돈의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리고 또 한번 자신의 힘이 얼마나 나약하기 짝이 없는지를 깨달았다.
이건 단순히 인간이라는 육신에 갇혀 있기에 그런 것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라일라칸은 믿고 있다.
인간은 그 어떤 종족들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아슬란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힘을 가졌다고.
그렇다면 지금의 한계를 뛰어넘을 힘이 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까부터 뭐라고 혼자 씨불이는 거야.”
레드 드래곤 플레임이 인상을 찡그린 채 아이의 몸으로 앉아있었다.
아까 전 있었던 전투 때문에 꽤나 지쳐 보였다.
“뭘 봐.”
그러나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저 표독스럽고 지독한 살기는 여전히 눈동자에 살아 있었다.
“싸우자.”
“······뭐?”
“나와 싸우자고 말했다.”
이놈이 드디어 맛이 갔나.
플레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쳤냐? 아까 한 대 세게 맞아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다.”
그제서야 플레임은 라일라칸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됐다.
“뜬금없이 갑자기 싸우자고?”
“진짜 서로 죽일 듯이 싸우자는 뜻이 아니다. 내 훈련 상대가 되어 달라는 거지.”
“내가 무슨 네 허수아비인 줄 아나. 어딜 감히 하늘의 제왕 드래곤을 연습 상대로 쓰려고.”
“대신 칼라 왕국에서 가장 맛있다는 렌 고기 요리를 원하는 만큼 가져다주지.”
“지금 당장 싸울까? 어디서 붙을래?”
플레임 이놈은 드래곤 주제에 참 가벼운 놈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저 도도한 골드 드래곤과는 달리 다가가기가 참 쉬운 놈이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서 우리 둘이 싸우게 되면 안 그래도 초토화가 된 황궁이 가루가 되어 버릴 테니, 성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싸우지.”
“좋아. 대신 약속 지켜야 한다. 감히 날 속였다가는······.”
“내가 그렇게 쪼잔한 놈으로 보이나?”
“뭐, 그럼 따라와라.”
둘은 황궁을 나가 성과 멀찍이 떨어진 평야로 나갔다.
“여기면 적당할 것 같은데. 바로 여기서 싸우면 되는 건······.”
플레임은 자신의 몸을 움찔거리게 만드는 섬뜩한 기운에 하던 말을 멈췄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니, 라일라칸의 몸에서 엄청난 투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안에 섞인 진득한 살기는 이것이 단순한 연습 대련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었다.
“뭐야. 훈련이라며. 진짜 죽일 셈이냐?”
“훈련은 실전처럼 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 그리고 넌 드래곤이지 않느냐?”
“아니. 대체 왜 싸우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거야?”
라일라칸의 행동을 플레임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 혼돈의 드래곤과 신나게 치고받고 싸웠던 라일라칸이지 않던가?
그게 한참 부족하기라도 했나?
“혼돈의 드래곤을 상대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하지만 동시에 결국 한계에 머무르는 것도, 그것을 넘는 것도 바로 나라는 것도 같이 깨달았다.”
더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
그것이 라일라칸의 마음을 강하게 불태우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점점 더 커지는 라일라칸의 투지에 플레임은 이러다 자칫 잘못하면 큰코다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바로 그때.
“원한다면 내가 상대해 줄 수도 있는데.”
뒤에서 들리는 끈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매혹적인 날개를 펄럭이며 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는 악마가 있었다.
플레임은 상대가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아차렸다.
이 정도의 마기라면 악마 중에서 제일 등급이 높다는 바빌론일 것이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지, 라일라칸. 300년 전에도 우리가 만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알고 있다. 엘비하스.”
라일라칸이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플레임이 붙잡았다.
“누가 봐도 함정이잖아. 이걸 가려고?”
그런 플레임에게 라일라칸이 말했다.
“플레임. 연습 상대가 바뀌었다.”
“뭐?”
“무슨 일이 있어도 개입하지 마라.”
“아니. 이건 함정이라니깐?”
라일라칸은 플레임을 뿌리치고 엘비하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힐끗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
“바보 같긴.”
과연 플레임의 말대로 이것은 함정이었다.
라일라칸이 달려들자 엘비하스 앞에 설치되어 있던 결계가 발동되면서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이라고는 환희에 빠진 엘비하스의 웃음 소리뿐.
“뭐야. 어디 갔어?”
플레임은 주변을 돌아보며 그 둘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았다.
* * *
“아~ 힘들다.”
폭풍 같은 하루가 지났다.
내가 설마 혼돈의 드래곤을 상대하고 나서도 이렇게 숨을 쉴 수 있을 줄이야.
죽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인 날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았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혼돈의 드래곤까지 날뛰고 있는 마당에 이놈의 게임 시스템이 어디까지 치달으려고 할지 모르지 않는가.
이 미친 난이도가 게임을 파멸로 이끌고 있는 건 확실했다.
“빠르게 게임을 끝내야 돼.”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이 지긋지긋한 악마들과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끝으로 가는 수밖에.”
그곳의 문을 닫으면 테키나 족속과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완전히 닫을 수 있게 된다.
그럼 더 이상 이 대륙은 악마들에게 위협을 받지 않아도 되고 나 역시 편하게 게임을 마무리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끝이 과연 어디 있느냐가 문제인데.”
후보는 다섯 군데가 있다.
게임을 시작하게 되면 이 다섯 군데 중에 하나가 랜덤으로 결정이 되는데, 그곳으로 찾아가서 라일라칸 몸 안에 있는 열쇠로 그곳을 닫으면 된다.
“문제는 이 장소들이 다 지랄 맞은 곳이라는 거지.”
만약 이곳들을 하나씩 다 찾아가 위치를 확인하려고 한다면 적잖은 노동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혼돈의 드래곤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니까 방비를 더 확실하게 해두고 장소를 찾는다면······.”
그리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아슬란~! 아슬란~!!”
플레임의 다급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플레임 공. 지금 폐하께서 안에 계십니다. 함부로 들어가실 수는······.”
“아잇.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야! 큰일 났다고!!”
진짜 한시도 쉬지 못하게 하는구나.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밖에 있는 플레임을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냐, 플레임?”
“어후. 진짜 내가 그 미친놈이 지랄 떨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플레임. 무슨 일이냐니깐?”
“아니. 그게······.”
플레임은 내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라일라칸이 엘비하스와 사라졌다?”
“응, 난 함정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라일라칸 그놈 눈이 뒤집혀 가지고 없어졌어. 난 진짜 막으려고 했다니깐? 아무튼, 그 이후에 찾아보려고 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겠어.”
나는 잠시 시야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뭐야. 내가 가진 최강 전력 중 하나인 라일라칸이 이대로 사라져?
엘비하스가 작정하고 함정을 파서 라일라칸을 데려간 것이라면, 지금쯤 그는 수많은 악마와 싸우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라일라칸을 찾고자 엘티히와 라파엘을 부르려고 했다.
그 둘의 마법이라면 라일라칸을 추적할 수 있을 테니까.
특히 그에게 걸려 있는 봉인 마법은 엘티히가 걸어 놓은 것이지 않던가.
하지만,
“폐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기사 라일라칸이 폐하를 알현하고자 합니다.”
“······?”
라일라칸이 이미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 침소 앞에 말이다.
“뭐, 뭐야. 진짜 라일라칸이 여기에 왔다고?”
플레임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정말로 라일라칸이었다.
물론, 그 꼴은 말이 아니었다.
마치 지옥을 혼자 뚫고 온 사람처럼 라일라칸은 온몸에 상처와 피를 묻힌 채였다.
그리고 그의 한 손에는,
“으으······.”
부러진 두 날개에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엘비하스의 머리채가 붙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