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0.01초 소드마스터
“그 뜨거운 마음으로 황제 폐하의 곁을 지킬 자 누구인가!”
“폐하가 믿고 의지할 수 있으며, 만백성이 우러러볼 수 있는 여인이 누구인가!”
“베라크 제국의 위대한 황후가 되고 싶은 자가 있다면 누구든 도전하라!”
아슬란의 황후가 될 여인을 뽑는다는 공문이 모든 왕국에 전해졌다.
그러자 각 왕국에서는 백성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 자신이 황후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된다면 누구든 도전하라 격려했다.
신분과 직업을 따지지 않으며, 이 제국에 어울리는 성품과 능력을 지닌 여인인지를 판가름하겠다는 것이 호레스의 뜻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수많은 사람이 지원할 거라 생각을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저조할 줄은 몰랐소.”
그러나 막상 후보 명단에 등록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작 200명이라······.”
“설마 이 정도로 신청자가 적을 줄은······.”
모든 왕국에서 신청자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200명밖에 모이지 않았다.
“어찌 보면 이것이야말로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무려 아슬란 폐하의 동행자를 뽑는 일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넣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교황 레헤나 님과 엘프의 여왕, 엘티히 님이지 않습니까?”
“흠. 너무나도 막강한 우승 후보들이 초반부터 나오니, 다들 후보자 명단에 이름을 넣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로군.”
“예. 심지어 아슬란 폐하께서는 그 교단에서도 인정한 라할의 화신이십니다. 즉, 인간이 아닌 신을 남편으로 맞이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선해야 하며 라할의 빛에 어울리는 재목이어야 할 터. 그것이 쉽진 않겠지요.”
아슬란이 라할의 화신이라는 것이 교단을 통해 공식 인정되면서 그의 곁에 서는 건 곧 신의 곁에 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백성들도 알고 있었다.
그의 황후가 된다는 건 곧 신의 아내가 된다는 것.
이에 부담감을 느낀 백성들이 명단에 이름을 넣지 못한 것이었다.
“뭐, 달리 생각하면 이것도 잘된 겁니다. 만약 신청자가 많았다면 그걸 심사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을 게 아닙니까? 결국 그때도 이렇게 200명까지 후보를 추려 놓았겠지요.”
“흠. 그 말이 옳소. 그럼 이 200명은 본인 스스로가 아슬란 폐하의 곁에 서도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겠구려.”
“예. 그럴 겁니다.”
“그럼 심사를 시작해도 되겠군.”
“예?”
호레스는 그리 말하며 밖에 대기 중인 시종들을 불렀다.
그러자 그들이 서류를 산더미로 가져오며 오늘 심사를 위해 모인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
“이, 이게 뭡니까?”
“여기 있는 후보 명단에 있는 200명의 정보들이오. 그들이 평소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추악한 짓을 저질렀으며, 또 어떤 선행을 펼쳤는지. 그리고 누구와 오랫동안 교제를 해왔는지까지. 전부 이곳에 들어있소.”
“!?”
설마 벌써 이 정도로 준비를 철저히 해놓았다는 건가.
호레스의 광기 어린 모습에 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언제부터 이런 방대한 자료를······.”
“샤를렌 가문에서 내주었소. 샤를렌 가주 비올레타가 자신은 후보에 이름을 올릴 만한 인물은 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년들이······. 아니. 다른 여인들이 함부로 이름을 올리는 건 두고 보지 못하겠다더군.”
“······.”
이것이 여인의 독기라는 것인가.
그들은 잠시나마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자. 그럼 한번씩 둘러봅시다. 누가 과연 우리 폐하께 어울리는 여인인지 말이오. 명심하시오. 이건 우리 제국의 미래가 걸린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의기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콰앙-!! 콰아아앙-!!
“크롸라라라라-!!”
천지를 울리는 포효 소리.
그로 인해 땅이 갈라지고 사방이 불바다로 변했지만, 거대한 검은 몸통의 드래곤은 비틀거리며 풀썩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몸은 몸대로 잘 움직여지지 않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머리는 심하게 어지러웠다.
[머리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대체 여기는······.]
그런 드래곤에게 한 무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비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이거야? 혼돈의 드래곤이라는 게?”
“생각보다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는군.”
“오랫동안 봉인이 되어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혼돈의 드래곤, 레락시온.
레메게톤이 창조하여 라할과 이 대륙을 파괴하는 데에 쓰려고 했던 바로 그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봉인이 되어 있던 탓에 레락시온은 예전만큼의 힘을 보여 주지 못했다.
“굳이 이놈을 써야 하는 건가? 그냥 여기서 우리 손으로 죽여서 저 심장을 빼앗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바빌론 중 하나가 그리 말하자 레락시온의 눈빛이 번뜩였다.
[감히 악마 따위가 내게 약함과 강함을 따지는 것이냐?]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흉포한 살기에 순간 방금 그것에게 막말을 쏟아냈던 바빌론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무슨······!”
그러자 레락시온은 한입에 그를 우득 씹어 삼켜 버렸다.
“!?”
“뭐, 뭣!?”
상대가 저항조차 하지 못하게 꼭꼭 씹어서 먹어 버린 레락시온은 이제야 힘이 조금 난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등급이 높은 악마라 그런가. 조금은 먹을 만하군.]
바빌론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레메게톤이 만든 혼돈의 드래곤이라고 해도 설마 바빌론을 한입에 먹어 치울 만큼 강력한 상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놈들도 전부 먹어 치운다면 내 힘이 온전히 돌아오려나?”
레락시온이 눈을 번뜩이자 바빌론들은 입술을 꾹 깨물며 자세를 다 잡았다.
그때 테르카나가 그들 사이에 난입하여 말했다.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레락시온은 테르카나를 힐끔 내려보았다.
“악마도, 인간도 아닌 잡종이 감히 입을 열다니.”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서로 싸우는 동안 라할은 더욱 큰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당신의 존재 이유는 라할과 이 대륙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까?”
“라할?”
레락시온의 눈동자가 달라졌다.
그가 이곳에 오랫동안 봉인 당했던 이유는 바로 라할 때문이었으니까.
레락시온은 파괴를 일삼는 혼돈의 드래곤이지만, 그 본능에는 레메게톤이 남긴 것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건 바로 주인 레메게톤에게 충성하고, 더불어 라할과 이 대륙을 파괴하는 것.
그에게는 그것들이 절대적인 것이었다.
“라할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예. 그 때문에 당신을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레메게톤 님의 뜻을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할은 지금 대륙에 인간의 몸으로 내려와 한 번 더 신 놀음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감히 레메게톤 님을 놔두고 말이지요.”
“라할.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그가 발산하는 마기에 땅이 검게 물들고 뿜어져 나오는 불꽃도 검게 변할 정도였다.
“너희도 그분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아까 전의 무례함은 내 용서해 주도록 하지. 그러니 너희도 라할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그의 말에 바빌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데루스가 혼돈의 드래곤 앞에 다가갔다.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레락시온.”
모데루스의 손바닥 위에 검은 구체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게 뭐지?”
“너의 힘을 돌려주는 것이지. 이걸 먹으면 힘이 서서히 돌아오게 될 것이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게 될 것이다.”
“후후. 아주 쓸모가 없는 놈들은 아니었구나.”
모데루스가 건네는 구체를 레락시온은 낼름 받아먹었다.
그러자 그의 안에서부터 용솟음치는 힘에 그가 크게 포효를 터트렸다.
* * *
“······그리하여 수없는 검증과 심사가 이루어져 20명의 후보로 간추려 냈습니다!”
호레스는 아주 즐거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와 그의 패거리가 모여 만든 20명의 황후 후보.
보통 황제나 왕의 비를 고를 때는 여러 가지 정치적 요소가 들어간다.
어떻게든 자신의 가문으로 하여금 황실에 들어와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 왕과 역사의 흔한 레파토리이지 않던가?
‘이번에는 어떤 놈들이 개수작을 부렸을지 한번 볼까?’
나는 황좌에 앉아 앞에 쭉 서 있는 후보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잖아.’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후보들이 올라와 있었다.
엘티히, 하리엘, 레베카, 레헤나, 그리고 라파엘까지.
너희가 거기 왜 있는 거야?
심지어 엘티히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기까지 했다.
대체 왜?!
‘그 외에는 진짜 일절 가문과 상관이 없는 일반인들이잖아?’
귀족 가문이나, 혹은 왕족 가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반들이 후보에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그 대신 미모가 무척 뛰어나고 마법이나 혹은 검술에 능하며 학문에도 무척 뛰어난 깊음을 보이고 있던 자들이었다.
정말 호레스가 가리고 가려서 받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폐하. 이 후보 중에서 마음에 드시는 자가 있다면 얼마든지 선택을 하시면 됩니다. 모두 과거나 현재나 맑은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갑자기 저 말을 듣고 나니 신뢰감이 팍 내려 가는 것만 같았다.
레베카나 엘티히를 봐도 전혀 맑은 성품이라 할 수가 없잖아.
“꼭 골라야 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폐하께서도 이제 후사를 두셔야 하지 않습니까? 무한한 제국의 영광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후사를 두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
미친.
그냥 처음부터 호레스가 죽든 말든 이런 일을 꾸미지 못 하게 막았어야 했거늘.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이놈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가 이 중에서 한 명을 고르지 않으면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짐은······.”
그리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쩌적-! 쩌저적-!!
하늘에서 나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 오더니, 그 속에서 검은 포탈이 크게 열렸다.
그것을 보고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포탈?”
그리고 그곳에서는,
[크롸라라라-!!]
귀를 찢어 발기는 듯한 엄청난 드래곤의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으헉!”
“으아악!”
그 포효 소리만으로도 신하들은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지를 정도였고, 기사들 역시 공포 상태에 빠져 비틀거렸다.
나도 순간 온몸이 굳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포효만으로 이 많은 이들을 공포에 빠뜨리다니.
이 살 떨리는 힘은 설마-
[필멸자들이여. 너희를 심판하기 위해 내가 다시 왔노라.]
사방을 울리는 두렵고도 묵직한 목소리.
나는 천천히 고개를 위로 들어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몸통에 검은 날개를 가진 드래곤이 있었다.
[내가 바로 혼돈의 드래곤, 레락시온이다!]
미친.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혼돈의 드래곤이 나타난다고?
[라할이여. 오늘은 기필코 네놈의 숨통을 내가 끊어 주겠다!]
심지어 저놈은 이곳에 있지도 않은 라할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오너라! 그때처럼 네놈을 절대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라할을 대체 왜 여기서 찾냐고, 이 새대가리야.
그런데,
‘왜, 왜 여길 보는 거야, 인마?’
혼돈의 드래곤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바로 내 쪽이었다.
놈은 입맛을 다시며 내게 소리쳤다.
[거기 있었구나, 라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