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0.01초 소드마스터 160화
“이제 좀 살겠네.”
나의 임기응변으로 다행히 테르셰와 큰 충돌 없이 해결되었다.
문제는 테르셰와 똑같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고 있는 다른 5명의 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가 관건이었다.
물론 내게 펜던트가 있어서 함부로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놈들은 그래도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아닌가.
하고자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날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모르겠다. 오늘은 그냥 이대로 쉬자.”
그리 중얼거리며 오늘 험난했던 하루를 핑계로 그냥 여기 침소에서 푹 자려고 했다.
그런데,
쿠웅-!!
침소에서도 진동이 울릴 만한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하, 또 뭐야.”
나는 그 소리의 정체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슬란. 아슬란은 어디에 있느냐?”
저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엘티히였다.
“함부로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 있는 곳입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저년은 저거 꼭 잊을 만하면 무작정 황궁으로 찾아오더라.
나는 바깥이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말했다.
“엘티히를 안으로 들여라.”
그러자 실랑이를 벌이던 기사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엘티히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내 침소 안으로 들어왔다.
“엘티히. 짐이 저번에도 말했을 텐데. 모든 것에는 절차가 있는 것이라고. 이렇게 무작정 황궁을 침범했다간······.”
“왜? 죽이기라도 할 것이냐?”
“못할 것도 없지.”
우리 두 사람이 매섭게 눈빛을 교환하고 있을 때였다.
“폐하!”
근처에 있었던 모양인지, 라파엘이 안으로 다급하게 들어왔다.
“아니. 여왕님. 또 이렇게 오시면 어떡해요? 제발 미리 연락을 좀 하시라니까요? 수정구 놔두고 뭐 하시는 거예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나만 보면 잔소리를 해대는구나.”
“이렇게 무작정 찾아오시니까 그렇죠. 아니면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 거예요?”
“······다른 이유?”
“요즘 안 그래도 폐하께서 혼처를 찾고 계신데, 이렇게 찾아오시는 걸 보면 여왕께서도 설마 다른 마음이······.”
“다, 닥쳐라! 무슨 개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게야!”
엘티히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라파엘은 물러서지 않고 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
“아니면 아니라도 말을 하면 되지, 왜 소리를 지르세요? 그런데 얼굴은 왜 빨갛게 변하신 거예요? 설마······.”
“이게 진짜! 너 조용히 안 해?!”
라파엘이 저러니 나도 문득 장난기가 발동했다.
난 진지한 목소리로 엘티히에게 말했다.
“엘티히. 짐과 너의 나이 차이를 생각하거라.”
“진짜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엘티히가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나는 그녀를 진정시켰다.
“농이었다. 뭘 그리 흥분을 하느냐? 그만 힘을 거두거라. 그 두 팔을 잘라 버리기 전에.”
물론 말이 곱게 나가진 않았다.
엘티히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 이내 힘을 거둬들였다.
“그래. 무슨 일로 왔지?”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을 듣고 왔다. 네가 라할의 화신이라는 얘기 말이다.”
“소문이 많이 늦구나.”
“그렇다는 건 네가 정말로······!”
“넌 어떻게 생각하지? 짐이 정말로 라할의 화신인 것 같나?”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엘티히의 통찰력이라면 내가 라할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네가 라할의 화신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지도 모르지.”
뭬야?
“넌 인간이 가질 수 없는 힘들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라일라칸보다 강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 늘 이상했는데, 역시나 넌 인간이 아니었어.”
넌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으니 느낌이 이상하다.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
“워낙 그 일로 대륙 전체가 들썩이니 확인차 온 것이다. 라할의 화신이라······. 대체 무슨 연유로 인간계에 온 것이지?”
“내가 라할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끝까지 존대를 하지 않는군.”
“우리 사이에 그럴 필요가 있느냐? 원한다면 해주마.”
“됐다. 일 없으면 그만 돌아가거라.”
내가 손을 휘휘 젓자 엘티히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아슬란.”
“······?”
“혼돈의 드래곤이 깨어났다. 넌 이미 알고 있겠지.”
엘티히도 혼돈의 드래곤이 깨어났다는 걸 느낀 것인가.
그럼 진짜 큰일 난 건데.
“혼돈의 드래곤을 네가 일부러 깨운 것이냐? 대체 왜?”
내가 미쳤다고 그걸 일부러 깨우겠냐.
“아니지. 어찌 하등한 우리가 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엘티히는 정말로 내가 라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았다.
“혼돈의 드래곤을 어찌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기대가 되는군.”
이제 진짜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엘티히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슬란. 정말 혼인을 할 생각이냐?”
솔직히 혼인할 생각은 없는데, 허구한 날 혼인을 하라고 신하들이 난리법석을 떨고 있긴 하다.
“그게 왜 궁금하지?”
“뭐······ 혹시 꼭 인간이여만 하느냐?”
갑자기 엘티히의 얼굴이 한 번 더 붉어지기 시작했다.
* * *
“자네 그거 들었나? 폐하께서 곧 황후를 들이신다는데?”
“당연히 들었지. 그리고 솔직히 진작 혼인을 하셨어야 했는데, 백성들의 삶을 챙기시느라 그럴 새가 없으셨다면서.”
“이런. 대체 우리가 뭐라고 폐하께서는 항상 우리의 안위만 챙기신단 말인가!”
“이번에도 황궁을 대대적으로 공사해서 새롭게 바꾸자는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셨다더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성벽을 하나라도 더 쌓아 백성들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면서 말일세.”
“흑흑. 어찌 그리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올 수가.”
“제발 폐하께서 우리 걱정은 좀 덜 하시고 스스로를 챙기셨으면 좋겠구먼.”
자신들의 삶보다 황제의 삶을 더 걱정하는 나라.
그것이 바로 베라크 제국이다.
아슬란이 왕일 때에도, 지금 황제가 된 이후에도 백성들은 여전히 그를 걱정해 주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왕국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보통 제국이 세워지고 각 왕국의 왕들이 권한을 받아 맡은 땅을 다스릴 때마다 권력을 잡은 자들에 대한 불만이 백성들 사이에서 터지는 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을 욕할지언정 결코 황제 아슬란을 욕하는 일은 없었다.
아슬란을 욕하는 건 하늘을 욕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는 관념도 있지만, 이들 대부분이 아슬란을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태평성대가 아니겠는가?”
호레스는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황제를 신뢰하고, 그의 사소한 행동까지 관심을 가지며, 모두가 그의 행보에 미쳐 날뛰는, 베라크 제국은 굉장히 이상적인 곳이 되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고, 그들을 하나로 모아 둘 수 있는 건 지도자 밖에 없지. 그리고 그 지도자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제국은 강건해지고 더욱더 굳세지는 법일세.”
“예. 그래서 벌써 걱정이 됩니다. 하루 빨리 폐하께서 혼인을 하시어 대를 이을 분을 낳으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다만 설사 황자께서 태어나신다고 해도 그분처럼 강대하신 분이 되리라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어허. 무려 아슬란 폐하의 핏줄이시네. 어찌 그 강인함과 위대함을 배우지 못하겠는가? 그 피는 결코 속일 수가 없을 걸세.”
그리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저기······.”
“아. 하리엘 단장. 무슨 일이시오?”
하리엘이 쭈뼛쭈뼛 걸어와 단상에 앉아 있는 호레스에게 물었다.
“여기서 폐하의 황후 후보를 등록한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소. 신분을 따지지 않고 성품이 올바르며, 이 제국의 황후가 될 그릇이 된다면 그분에게 강력히 추천할 생각이오.”
“폐하께서 정말 후보를 뽑으라고 하신 건가요?”
“뭐······. 우리가 한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시위를 하니 허락하시더군. 허허허.”
그러자 호레스 옆에 있던 아론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일을 꾸미지 마십시오. 그때 총리께서 갑자기 쓰러지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십니까?”
“폐하께서 혼인을 하지 않으신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네. 그런데······. 하리엘 단장은 무슨 일로 오셨소?”
“그······. 아닙니다.”
그런 하리엘에게 아론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 하리엘 단장도 후보로 등록하고자 온 것이 아니오?”
“그러고 보니 나도 소문을 듣긴 했소. 황제 폐하와 하리엘 단장 사이에 연분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오.”
“여, 연분이라니요. 그, 그런 적 없습니다!”
“그렇소? 그럼 잘 알겠소. 이만 돌아가시오.”
“······.”
그렇게 하리엘은 어깨에 힘이 축 빠진 채 그만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어머, 하리엘. 여기 있었구나.”
황궁 안으로 교황 레헤나가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교황님? 여기는 어쩐 일로······.”
“어쩐 일이긴.”
교황은 호레스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보였다.
“총리님. 이렇게 또 뵙네요.”
“허허. 어서 오십시오. 교황님.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근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그야 후보 등록을 하려고 왔죠.”
“······네?”
호레스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후, 후보 등록이라면······. 폐하의 황후가 되시려는 겁니까?”
“안 될 거라도 있나요?”
“그게······. 교황이란 직책은 결혼을 못 하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런 법은 없어요. 단지, 지금까지 교황으로 선택된 사람들이 스스로의 신성력을 감당하지 못해서 결혼을 피한 것뿐. 하지만 아슬란 폐하께서는 다르시잖아요. 무려 라할의 화신이시니까요. 그리고 저는 라할을 평생 동안 섬겨왔던 사람이고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이곳 명단에 서명을 해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근데 결과는 언제 나올까요?”
“그건 따로 통보를 해드리겠습니다. 폐하의 혼사가 걸린 일이니, 굉장히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심사를 볼 예정입니다.”
호레스라면 믿을 만하다는 고갯짓으로 레헤나는 서명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하리엘. 설마 너도 후보 등록을 하려고?”
“아······. 저는 안 했습니다.”
“그래. 너는 그분을 지키는 기사잖아. 내가 그분의 황후가 되어 외롭지 않으시게 지킬 테니, 넌 너무 걱정하지 말렴.”
“······.”
하리엘은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레헤나가 지나간 뒤,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여기가 황후 후보 뽑는 곳 맞죠?”
“아- 그쪽은 설마 과거 폐하의 약혼녀였다는······.”
“네, 레베카라고 해요. 저도 명단에 넣어 주세요.”
그 이후에도 깜짝 손님이 하나 더 들어왔다.
“이곳이구나. 아슬란의 황후를 뽑는다는 곳이.”
“에, 엘티히 여왕님. 여기는 어인 일이십니까?”
“흠- 과연 누가 아슬란의 황후가 되려고 하는지 구경하러 왔느니라.”
그러면서 엘티히는 손가락을 가볍게 놀렸다.
그러자 명단에 엘티히의 이름이 올라갔다.
“이, 이게 무슨······.”
“착각하지 말거라. 난 정말 아슬란의 황후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보다 못한 것들이 놈의 황후가 되려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나를 넘지 못한다면 누구도 그의 황후가 될 수 없다.”
“······.”
엘티히는 그렇게 줄을 서고 있던 여인들을 힐끗 노려본 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설마 엘티히까지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릴 줄은 몰랐던 터라 호레스와 아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후보 명단을 받은 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예. 그러는 게 낫겠습니다.”
이제 그만 그 둘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자, 잠깐만요!”
하리엘이 헐레벌떡 뛰어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 저도 명단에 넣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