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0.01초 소드마스터 142화
엘티히는 제 손을 내려다보며 몸을 떨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 강렬하게 모여들던 마력이 지금은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 방대한 마력이 어찌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녀와 마찬가지로 라일라칸 역시 자신의 몸에 넘치도록 흐르던 마력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대체 어떻게······ 어떻게 한 것이냐? 무슨 수를 썼기에 그 많은 마력을······!”
라일라칸은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대륙 최강으로 올려 주었던 이 파괴적인 마력이 손가락 한번 튕기는 것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바로 저 아슬란의 손끝에 의해 말이다.
“라일라칸.”
그의 묵직한 음성이 라일라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저번에 리베리엄 화산에서 네가 그랬지. 최강자의 삶을 말이다.”
“······.”
“그때도 본좌가 말했듯, 넌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무료하고 시시한 삶을 말이다. 최강이라 불리며, 칭송을 받는 자의 힘을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없앨 수 있는 본좌의 이 지루함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
“!?”
라일라칸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슬란이 전보다 훨씬 더 거대해 보였다.
그래도, 그 역시 인간이기에 약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만날 아슬란을 꺾기 위해서.
하지만 힘을 키우면 키울수록 깨닫게 된다.
아슬란은 감히 자신이 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츠츠츠-.
그러나 밑바닥까지 긁으며 끌어 모으던 마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한으로 마력을 생성하는 것이 라일라칸의 축복이자 저주이지 않던가.
라일라칸은 다시 마력이 차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슬란······.”
여기서 조금만 더 시간을 끈 다음, 손을 뻗으면 수많은 검강을 생성해 아슬란에게 쏘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구나. 본좌에게 아직도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남았느냐?”
“······!”
아슬란은 천천히 다가와 쓰러져 있는 라일라칸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후회 없이 날려야 할 것이다. 방금 전처럼 또 다시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영원히 마력을 쓰지 못 하게 만들어 주마.”
어설프게?
방금 그 공격은 라일라칸이 자신의 모든 힘을 담아서 날린 것이었다.
능히 이 대륙을 반으로 쪼갤 만한 힘이었거늘, 그걸 고작 어설픈 공격이라 치부하는 것인가?
‘지금 또 공격을 날렸다가는······!’
라일라칸은 망설여졌다.
이미 마력을 다 소진하고 다시 모으는터라 방금 전과 같이 위력적인 공격은 날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그랬다가는 아슬란에게 목이 잘릴 테니까.
그럼 남은 거라고는 비록 비참하게 보여도 몸부림을 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 마음을 먹고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려던 찰나.
“본좌가 기회를 주겠다.”
“······뭐?”
“네 마음을 본좌는 알고 있다. 처량하게나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넌 비참하게 본좌의 손에 죽는 것이다.”
“······.”
아슬란 이미 자신의 속내까지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본좌가 네 목숨을 빼앗아 무엇에 쓰겠느냐. 다만, 실추한 네 명예를 복구하고 네가 죽인 이들에게 사죄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남이 있다.”
그런 방법이 남아 있다고?
라일라칸은 축 쳐져 있던 고개를 들어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라일라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본좌에게 복종해라.”
“······?”
“그렇다면 본좌가 네게 직위를 내리고 이 대륙을 구하는 데에 너를 크게 쓸 것이다.”
라일라칸은 헛웃음을 지었다.
“나더러 네 밑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냐?”
“그게 싫다면······ 여기서 죽어라. 본좌는 네 이름을 이 땅에서 지워,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 하게 만들 것이다.”
“!?”
라일라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을 죽이는 것에 모자라 앞으로 누구 하나 그를 기억하지 못 하게 기록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건가?
“본좌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라. 그리고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거라. 그럼 떨어진 네 명예가 다시 살아날 것이며, 후손들도 영원히 네 이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라일라칸은 자신에게 손을 뻗는 아슬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단 한점의 두려움도, 이 세상에 거칠 것도 없어 보이는 군왕의 눈동자에 라일라칸의 몸이 잘게 떨려왔다.
* * *
‘이판사판이다.’
라일라칸 이 괴물 새끼는 정화로 마력이 다 날아갔는데도 금방 복구를 하고 있었다.
엘티히는 아직도 마력이 모이지 않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가 완전히 힘을 차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에 나는 도박수를 걸었다.
‘라일라칸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긴다.’
자신의 이름이 대대손손 남기를 바라는 놈이지 않던가.
명예욕이 바로 라일라칸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런 놈이 왜 학살을 저질렀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마 악마만 다 처리하고 나면 알아서 사람들이 그의 끔찍한 행실을 다 잊고 칭송할 거라 여겼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놈은 자신의 이름이 대륙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아슬란······.”
라일라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린 적이 없던, 심지어 왕 앞에서도 꼿꼿하게 허리를 세웠던 놈이기에 그의 에고가 충돌하고 있는 것이리라.
‘제발 잡아라.’
만약 여기서 내 도박이 실패한다면, 난 그날로 라일라칸에게 몸이 난도질을 당할 게 뻔했다.
또한 여기 있는 모두 라일라칸 손에 죽을 것이다.
그나마 그에게 대항할 수 있는 엘티히마저 힘을 잃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속으로 빌고 있던 때였다.
“아슬란. 나는······!”
라일라칸이 서슬퍼런 마력을 뿜어내며 내게 지독한 살기를 드러냈다.
‘이런 씹-!’
틀린 건가.
하긴. 라일라칸을 내 밑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미친 짓이긴 했다.
그런데,
“라일라칸!”
귀를 찌르는 듯한 엘티히의 앙칼진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던진 마력의 창이 라일라칸과 내 사이에 떨어졌다.
‘아니. 팔 잘려 나갈 뻔했네.’
조금만 창 조준을 잘못했으면 내가 라일라칸에게 뻗은 팔이 뚝 떨어져 나갈 뻔했다.
“엘티히.”
“이제 그만하거라.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셈이냐?”
“······.”
“300년 전의 라일라칸은 누구보다도 정의로웠다. 하지만 지금은 악마보다도 더 사악한 악마가 되었구나.”
라일라칸을 자극하지 않았으면 좋겠건만, 엘티히는 그동안 쌓여 왔던 걸 한꺼번에 풀듯, 라일라칸에게 소리쳤다.
“넌 내게 그랬었지. 악마들을 몰아내 대륙을 지킬 수만 있다면 목숨이 아깝지 않다고. 하지만 보아라. 결국 대륙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바로 너다.”
“······.”
“네가 항상 최강이고 싶다는 마음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끊임 없이 새로운 강자가 나오는 법. 너와 나도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걸 받아 들이지 못 하면 너는 영원히 악몽 속에 살아야 할 터.”
엘티히는 지친 몸을 이끌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라일라칸. 우린 300년 전에 끝내지 못한 전쟁을 이번에는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아슬란, 이자와 함께라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과오를, 우리의 실수를 바로 잡아 이제 이 악몽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300년 전부터 쌓아온 전우애가 있는 것인지, 라일라칸에게 저 말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날이 바짝 서서 올라오던 마력이 차츰 사그라 들었고, 라일라칸은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곧 고민하던 표정을 지우고 내게 물었다.
“아슬란. 너는 정녕 악마들을 뿌리 뽑아 이 대륙에서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있겠느냐? 300년 전 나와 엘티히는 그러지 못했다. 그저 봉인하는 것에만 그쳤을 뿐. 그때의 실패를 너는 성공시킬 수 있겠는가?”
그 물음에 잠잠하던 허세가 치밀어 올랐다.
“질문이 잘못 되었구나.”
“······?”
“정녕 본좌가 고작 악마들을 소탕하는 일에만 연연할 것 같으냐?”
“그럼······.”
“이 모든 상황을 방관하고, 그저 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의 존재를 멸시하는 저 하늘마저도 본좌가 무너뜨릴 것이다.”
“!?”
“악마들을 소멸시키는 건 그저 그들을 향한 경고일 뿐.”
그러자 라일라칸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아슬란. 역시 넌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그렇게 미친놈처럼 한참을 웃던 라일라칸은 금세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래. 내가 졌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널 이길 수 있다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구나.”
그리고 그는 나와 손을 맞잡았다.
“오늘부터 나 라일라칸은, 아슬란 너의 뜻에 따르겠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도는 것만 같았다.
결코 꺾이지 않을 것 같았던 라일라칸이 내게 항복을 하는 것이었다.
만세를 외치며 난리 부르스를 떨고 싶었지만,
“아슬란. 너의 뜻? 말이 짧구나.”
여전히 이놈의 허세는 식을 줄을 몰랐다.
라일라칸은 잠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대답했다.
“······아슬란 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 *
“앞으로 너의 행실을 지켜볼 것이다. 본좌를 배신한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며, 공을 세운다면 그 공에 합당한 상을 내릴 것인즉. 너의 무너진 명예를 다시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예.”
카르만은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했다.
저 라일라칸이, 300년 전 대륙을 구했던 그 최강자가, 지금 아슬란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복종을 맹세했다.
이곳에 모여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저게 정녕 파괴의 화신처럼 대륙 전체를 뒤흔들어 놓던 라일라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다.
“우와아아아-!!”
“아슬란 님 만세!!”
“일라이 왕국 만세!!”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이들의 환호성이 들리지 않는가.
라일라칸이 아슬란에게 항복하면서 모두가 아슬란의 이름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왕이시여. 이, 이게 대체······.”
칼라 왕국 기사들도 이 상황이 잘 받아 들여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그들도 라일라칸이 보여 준 엄청난 힘을 눈 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 힘을 가진 자가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이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일라칸은 결국 아슬란 앞에 꺾이고 말았다.
“라일라칸 님이 아슬란 밑으로 들어가면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카르만도 혼란스러웠다.
이건 자신이 예상했던 일에 없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설마 저 라일라칸이 항복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아슬란. 정녕 너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는 자로다.
천하의 라일라칸마저 무릎을 꿇린다니.
대체 저자의 한계는 어디란 말인가.
고작 손가락 한번 튕겨서 라일라칸과 엘티히를 동시에 무력화 시키는 저런 강자를 대체 어떻게 꺾으라는 것인가!
“······돌아간다.”
“예? 하지만 라일라칸은 우리 왕국의 군대를······!”
“그럼 네가 나서서 아슬란 밑에 들어간 라일라칸의 죄를 묻겠느냐?”
“그, 그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작은 괴물이 큰 괴물에 짓눌려 그 밑으로 들어간 것뿐이다. 약육강식이라는 법칙을 라일라칸도 똑같이 따른 것이겠지.”
카르만은 결국 말머리를 돌렸다.
그가 말한 대로,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물러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슬란, 그리고 라일라칸이라-.’
전혀 하나가 되지 못 할 것만 같은 두 사람이 하나의 둥지에 있게 되었다.
과연 이 대륙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카르만은 도저히 예측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