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0.01초 소드마스터 121화
“으그극-!”
“크읍-!”
이가 갈리고 몸이 떨리며, 시야는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샤를렌 가문이 엄청난 금액을 들여 만든 백색 기사단.
날고 긴다는 최고 수준의 용병들을 끌어모아 여느 왕국 기사단 부럽지 않은 강한 무력의 부대를 만들었지만, 지금 그들은 말 위에서 떨어져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샤를렌 가문에서 진행하는 경매장에서 딱 한번 아슬란을 마주했을 뿐.
이런 야생에서 그를 마주하는 건 처음인 비올레타는 지금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을 처발라 만든 이 최고의 기사단이 왜 쓰러져 있는 것인지, 왜 아슬란은 이곳에 있는지.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저 혹한처럼 차가운 눈동자에 몸이 시려올 정도였다.
“끄어억-!”
그렇게 기사들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것만 같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
비올레타가 소리쳤다.
“그만! 이제 그만 하세요!”
그녀의 말이 통하기라도 한 것일까.
거짓말처럼 모든 압박이 사라지고 기사들은 그제서야 숨을 쉬며 토악질을 해댔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힘을······!’
일인군단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그것이 딱 저 아슬란에게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닐까.
혼자서 이 많은 이들을 위압만으로 짓눌러 버렸으니 말이다.
“이제 말할 마음이 생겼나?”
잠시나마 자신의 기사단이 그 어떤 왕국보다 뛰어나다 생각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대륙 최고의 상단을 이끄는 샤를렌 가문의 명예가 짓밟히게 놔둘 수는 없는 법.
샤를렌 가문이라고 하면 한 왕국의 왕이라도 일단 숙이고 보는 최고의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그녀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당당하게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
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아슬란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저절로 고개가 내려갔다.
“우리 상단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라져 그것을 조사하려고 나온 거예요.”
“사람들이 사라져?”
“예, 그것도 무려 2,000명에 달하는 인부들이 한꺼번에 사라졌어요. 제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라 여기까지 나온 거였고요.”
아슬란은 잠시 말없이 물끄러미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여기다 반들 나무를 심은 것이 너희들이었군.”
“그건······.”
“반들 나무를 미끼로 뮤즈족을 잡으려고 했나? 아니. 분명 그러려고 했겠지.”
“······.”
다 알고 있구나. 저 남자는.
대체 언제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던 것일까.
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일 터.
“맞아요.”
그렇기에 비올레타는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아슬란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거짓을 말한다면 그가 순식간에 자신과 이곳에 있는 모두의 목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비올레타는 최대한 당당하게 나갔다.
“이곳에다 나무를 심은 건 우리가 맞습니다. 왕께서 알고 계시는 대로 뮤즈족을 붙잡아 팔려고 했던 것도 맞고요. 뮤즈들은 꽤 비싼 가격에 팔 수 있거든요.”
귀족들 사이에서 뮤즈에 대한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산을 다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뮤즈를 애완동물로 사려는 귀족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
그렇기에 샤를렌에서 뮤즈족을 추적해 버들 나무로 그들을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붙잡으려 했던 것이다.
“꽤나 공을 들인 작업이었답니다. 그리고 유종의 미를 거둘 때가 되었을 시기에 갑자기 2,000명이 넘는 인부들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비올레타는 슬쩍 아슬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덤덤한 얼굴.
“그곳으로 안내해라.”
“네?”
“너희 인부들이 사라졌다는 곳 말이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닌가?”
“아, 네.”
의외의 결정이었다.
그냥 알아서 해결하라고 무시할 줄 알았더니.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문제였다.
“그리고······. 뮤즈족을 잡아서 내다 팔겠다는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것이다.”
“예?”
“우리 일라이 왕국과 뮤즈족은 서로 동맹을 맺었거든.”
“······.”
“만일 이를 여길 경우, 샤를렌 가문은 본좌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비올레타는 앞서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감히 그 누구도 샤를렌 가문을 저따위로 협박하는 곳은 없었다.
만약 샤를렌 가문이 마음먹고 돈줄을 끊어 버리면 해당 왕국의 경제가 박살이 나는 건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슬란은 경매장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샤를렌 가문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니. 저 사람은 라할 앞에서도 저럴 위인이지.’
흔들림이 없고 꺾이지 않는 신념으로 무장한 아슬란이기에, 지금까지 들어온 보고를 들어만 봐도 그는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또한 샤를렌 가문이 여기서 정말 아슬란의 말을 어기게 된다면······.
‘진짜 죽을 수도 있겠지?’
방금 전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기사단을 전투 불능으로 빠지게 만든 아슬란이지 않은가. 그가 샤를렌 가문을 멸문시키기 위해 강림한다면 누구도 그를 막지 못 하리라.
상상만 해도 끔찍한 그 광경을 잠시 떠올린 비올레타는 고개를 흔들며 아슬란의 뒤를 얼른 따라갔다.
“아슬란 님~”
전보다 훨씬 더 코에 힘을 주고 목소리를 높였다.
꺾이지 않는 인물이라면, 차라리 그를 샤를렌 가문의 우산으로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남자라면.’
자신의 미래를 맡겨도 후회하지 않을 남자라고 여겼다.
* * *
‘에라이. 욕심은 드럽게 많아 가지고.’
나는 내 옆에 달라붙기 시작한 비올레타를 힐끔 쳐다보았다.
왠지 이런 숲에 반들 나무가 저렇게 많이 심겨 있는 게 이상했다.
그래서 이런 무식한 규모라면 샤를렌 가문이 끼어 있는 게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과연 비올레타가 이번 일의 범인이었다.
‘저 귀여운 뮤즈들을 내다 팔려고 하다니.’
라고 비난을 하기에는 나도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몇 번 샤를렌 가문을 통해 뮤즈를 구입한 다음 펫처럼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엄히 경고했으니 샤를렌 가문도 쉽게 뮤즈들을 건드리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뮤즈들을 납치해 팔려고 한다면······.
‘어쩌긴 뭘 어째.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어야지.’
샤를렌 가문이 쥐고 흔드는 자금력에 일라이 왕국이 휘청이고 싶지 않다면 가급적 저들과 싸우지 않는 게 좋았다.
그래서 저들이 대놓고 뮤즈들을 잡아가도 솔직히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혹시라도 블랙 마켓에 뜨면······.’
그때 나도 몰래 하나 사보기나 할까.
“이곳입니다.”
나름 철저히 구상을 해놓았던 것인지, 비올레타는 뮤즈족이나 다른 종족에 들키지 않게 몰래 진지를 건설해 놓았다.
2,000명이 넘는 인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따로 보급로를 만들었을 정도로 얼마나 이번 일에 공을 들였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하긴.
뮤즈의 가치는 시장에서도 엄청난 평가를 받고 있으니, 이 정도는 아깝지도 않았겠지.
“보시다시피 진지가 무너지고 곳곳에 전투한 흔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시체 하나, 그 핏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비올레타 말대로 그 점이 이상했다.
진지가 처참하게 박살이 나 있는데도 시체 하나 찾아볼 수가 없고, 그 흔한 핏자국도 없다니.
인부들이 자기들끼리 진지를 부순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그리고 전문가가 아닌 내가 봐도 이건 인부들이 의도적으로 부순 게 아니라, 어떤 무리가 공격해 망가진 것처럼 보였다.
“······라파엘.”
나는 라파엘을 불렀다.
“예, 왕이시여.”
“엘프에게는 잔상 마법 능력이 뛰어나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터.”
“네?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각 종족마다 비밀스러운 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당연히 엘프도 숨기고 있는 능력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잔상 마법이었다. 이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잔상처럼 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언어가 통할 수 있게 마법을 부리는 것도 그 기원이 바로 엘프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지만, 지금은 구태여 꺼내지 않았다.
“본좌가 언제 모르는 것이 있더냐? 어서 마법을 펼쳐 보거라.”
“아, 네!”
라파엘은 내 명령에 따라 마력을 펼쳤다.
그러자 그 아래에 생성된 마법진이 퍼져나가면서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잔상처럼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곳에 인부들이 있었고······. 그러다 누군가가 침입했습니다.”
침입을 한 자들은 다름 아닌,
‘드워프?’
잔상 속에서는 키가 작은 드워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뒤로 테키나 족속으로 보이는 악마들이 괴성을 지르며 달려와 인부들을 덮쳤다.
갑작스러운 기습 공격에 당황한 그들은 각자 무기를 들고 저항해 봤지만, 파도처럼 밀려오는 군세에 속절없이 떨어져 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한 남자가 불길해 보이는 검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검은 갑옷에 검은 투구.
그리고 불길한 기운을 퍼뜨리고 있는 대검 하나.
놈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그 안에 있던 악의 힘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인부들을 쓸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땅에 박으니, 온 천지가 흔들렸다.
저 검에 담긴 악한 힘을 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사용하는 듯 보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아니?!”
“저, 저런!”
그 남자가 검을 높이 들자 그것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인부들의 시체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살점들까지 남김없이 빨아들이며 모든 것을 먹어 치웠다.
이곳에 전투 흔적만 있고 왜 시체나 핏자국이 남아 있지 않은 건지 여기서 의문이 풀렸다.
‘마검······?’
저건 틀림없이 마검이다.
누군가의 영혼과 그 육신을 빨아들이는 것만 봐도 마검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근데 갑자기 마검이라니?’
설마 테키나 족속의 짓인가?
그런데 잔상에서 나타난 몬스터들의 생김새가 낯이 익지 않는다.
테키나 족속에서 나온 몬스터들이라면 내가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거기다 드워프들이 초반에 등장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드워프들이 마검을 만든 건가?’
하지만 드워프가 마검을 만들었다는 얘기는 단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드워프가 만든 마검을 본 적도 없었다.
‘일이 엄청 복잡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드워프, 마검,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정체불명의 한 남자.
전혀 예상할 수 없는 흐름으로 스토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 이후로는 흔적을 쫓기가 어렵습니다.”
마력을 엄청나게 잡아먹는 상위 마법이라 그런지, 라파엘은 숨을 몰아쉬며 마법을 거두어들였다.
“왕이시여. 방금 그건······.”
나와 함께 같은 광경을 본 기사들이 말끝을 흐렸다.
“그래. 마검이다.”
“마, 마검이라니!”
“대체 누가 저런 끔찍한 검을-!”
마검이라는 존재를 이야기 속에서만 들어 보았지, 실제로 그것을 마주하게 된 기사들은 충격에 빠진 듯했다.
‘마검을 다룰 정도면 엄청 세겠지?’
마검을 끼고 다니는 그 검은 갑옷의 남성.
닿는 것마다 일단 먹어 치우고 보는 마검을 다룰 정도라면 분명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을 게 뻔했다.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갈까.’
만약 이대로 계속 드워프를 쫓는다면 반드시 놈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았다.
이 수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빨아들인 놈인데, 지금은 또 얼마나 제물을 흡수하고 있을지, 그 힘이 얼마나 강대해지고 있을지 상상이 안 된다.
‘라일라칸이라도 불러야 하나.’
아마 이런 일은 펄쩍 뛰며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드워프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서 그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라도 드워프를 찾긴 해야 했다.
그럼 일단 작전상 후퇴를 했다가 정보를 더 모은 다음에 라일라칸을 데려간다면······.
“모두 두려워하지 말거라.”
바로 그때였다.
아론이 방금 전 광경에 웅성거리고 있는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대체 그깟 마검이 얼마나 두렵다고 이리도 소란을 떠는 것이냐?”
저 정도 마검이면 두려워하는 게 맞지, 인마.
이놈이 또 뭔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이러는 거지?
“우리에게는 위대하니 왕, 아슬란 님이 계신다. 빛의 증표를 받으신 그분은 이 대륙에서 유일하게 어둠과 악에 대항하시는 분이다. 그런 분이 저런 마검을 가만두고 볼 것 같으냐!?”
“······?”
그러자 기사들이 동요한 마음을 잠재우며 소리쳤다.
“옳소!!”
“우리 왕께서 함께하시는 한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저 마검은 아슬란 님의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지!!”
“왕이시여. 당장 저 마검을 파괴해 악을 처단해 주십시오!!”
아론의 말 몇 마디에 갑자기 사기가 하늘을 뚫고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얼른 가서 마검을 없애 버리자고 아우성을 쳐댔고, 나는 이들을 선동한 아론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
그러자 놈은 아주 당당하게, 자신이 정말 큰일을 했다는 것처럼 뿌듯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요즘 들어 아론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