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0.01초 소드마스터 114화
“······.”
아직 파괴되지 않은 함선 위에서 모두가 바라보고 있었다.
거칠게 파도를 흔들던 폭풍우가 사라지고, 휘날리던 눈보라가 멎는 것을.
그리고 그 가운데-
[이, 이럴 수가. 어, 어떻게······.]
인간이 드래곤을 베고 그것의 머리를 밟은 채 서 있었다.
[가, 감히······. 인간 따위가······.]
하지만 아이스 드래곤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것의 분노를 보여 주듯, 사라졌던 폭풍우가 다시 몰아치려 하고 있으며, 잔잔해졌던 파도 역시 출렁이기 시작했다.
또한 휘날리는 눈보라는 일격에 베여 나간 아이스 드래곤의 배와 다리를 재생시키고 있었다.
[만물의 지배자이며, 하늘을 다스리는 제왕인 나 드래곤을 짓밟다니!]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뼈가 시리고 피부가 썰려 나갈 것만 같은 혹한의 분노가 느껴졌으며, 그것이 사방을 얼려 놓고 있었다.
그 위를 밟고 있는 아슬란의 발과 그 몸도 다 함께 얼음으로 만들려는 찰나.
“건방지구나.”
콰직-!!
[크헉!]
아슬란의 발이 일어나려 하던 아이스 드래곤을 강하게 짓누르며 저 바다 밑바닥에 처박았다. 그로 인해 함선은 반 토막이 나 버렸다.
“누가 허락도 없이 감히 일어나라고 했지?”
아이스 드래곤, 프렐리온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하늘의 제왕이며, 만물 위에서 모든 것을 굽어보는 것이 바로 드래곤이다.
불멸의 인생을 살면서,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감히 자신의 몸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놈은, 이 사내는, 자신의 몸을 칼로 가르고, 그 머리를 발로 짓밟아 버렸다.
이 치욕은 그 어디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 따위가 감히 이 몸을-!!]
그 치욕과 분노가 한 데 아우러져 폭발했다.
프렐리온은 저 바다 밑바닥까지 처박힌 몸을 일으키며 아가리를 벌렸다.
이대로 브레스를 날려 아직 저곳에 있는 건방진 인간의 몸을 얼려 버리고, 그 몸뚱이를 통째로 씹어 버리려고 했다.
그런데,
크롸라라라-!!
“!?”
쭉 뻗어 나가는 프렐리온 옆으로 붉은 불길이 일렁였다.
그리고 우렁찬 포효와 함께 레드 드래곤, 플레임이 나타났다.
콰직-!
플레임은 그대로 프렐리온의 목을 물어 버렸다.
[크아아악!]
몸부림을 쳐봤지만, 플레임은 절대 그를 놔주지 않았다.
이대로 숨통을 끊어 버리겠다는 그 의지가 여실히 전해졌다.
[이, 이놈이!]
프렐리온은 플레임과 함께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요동치는 그의 힘이 사방에 눈보라를 일으켰고, 사람들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볼 수가 없었다.
그저 기괴하게 울려 퍼지는 드래곤의 울음 소리만 들을 수 있을 뿐.
그리고 프렐리온은,
[······.]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초연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슬란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프렐리온은 난생처음 죽음의 공포라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럴 수는······.]
아슬란은 천천히 검을 들었다.
“하늘을 어지럽히는 미물이여.”
그 검끝은 프렐리온의 이마에 숨겨져 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푸른 보석으로 향했다.
“이제 사라져라.”
푸욱-! 콰직-!
그 보석을 깨뜨리며 칼이 프렐리온의 이마 깊숙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것이 프렐리온의 숨통을 끊진 못했다.
“고작 인간의 검으로 이 몸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음흉한 웃음 소리를 내며 프렐리온은 입가에 브레스를 모았다.
그러나,
“알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드래곤을 죽이기 어렵다는 것을.”
아슬란은 냉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힘이라면 말이지.”
“······뭐?”
그리고 그가 검을 비트는 순간.
콰아아아-!!
드래곤 안에 있던 그 넘칠 듯한 힘과 생명력이 아슬란의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 지금 무슨 짓을-!”
“잘 보아라, 미물이여. 이것이 바로 네가 무시하던 인간의 힘이다.”
발버둥을 치며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플레임이 목덜미를 강하게 붙들고 있어 빠져 나가지도 못하는 프렐리온이었다.
“크, 크아아악!! 안 돼!!”
그렇게 프렐리온에게 있던 힘이 전부 사라지면서 그곳에 남은 건 그저 얼어 있는 껍데기뿐이었다.
쿠웅-!!
플레임이 입을 열면서 빈 껍데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혹한의 제왕이라 불렸던 아이스 드래곤, 프렐리온.
영원불멸이라 여겨졌던 드래곤의 죽음은 플레임이게도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드래곤이 다른 드래곤을 죽이는 것도 무척 어려운데, 고작 인간이 드래곤을 죽일 줄이야.
플레임은 힐끔 아슬란을 쳐다보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왜 그러지?”
[흠흠.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방의 시야를 가로 막던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플레임은 어느새 아이의 몸으로 돌아왔다.
“끄응. 하필이면 싸워도 놈한테 유리한 바다 위에서 싸우는 통에 죽을 뻔했군.”
하늘에서 싸웠다면 지금과는 결과가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바다 위라는 것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런데도 아슬란이 저놈을 쓰러뜨렸단 말이지.
“한 가지만 묻겠다, 아슬란. 대체 아이스 드래곤을 어떻게 죽인 거지? 드래곤은, 특히 아이스 드래곤은 이 바다 위에서 끊임없이 몸을 재생시킬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 이건······.”
기이한 일이었다.
아무리 아슬란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드래곤의 숨통을 이렇게 한번에 끊어 놓을 순 없다.
하지만 그 물음에 아슬란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저 잡기술일 뿐이다.”
“······.”
무려 드래곤을 죽였는데, 그것이 잡기술이란 말인가.
그 당당함에 피식 웃음을 흘러나왔다.
“그래, 네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하지만 그 상대가 아슬란이라면 왜인지 이해가 갔다.
저 사내는 매번 상상을 초월하는 힘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니까.
콰콰쾅-!!
“아니. 이번에는 또 뭐야.”
파도가 출렁이는 폭발음에 플레임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앙칼진 목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와라, 드래곤! 이곳에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응?”
온몸에 날카로운 마력을 일렁이고 있던 엘티히는 눈을 껌뻑이며 함선 위로 천천히 내려왔다.
“이게 무슨······. 설마 드래곤을 네가 죽인 것이냐, 아슬란?”
엘티히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빈 껍데기만 남은 드래곤의 몸통과 아슬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늦었군. 도망이라도 간 줄 알았다, 엘티히.”
“도, 도망이라니! 이놈이 내게 뿌려댄 더러운 마력을 떨쳐 내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놈을 죽인 네가 이상한 거라고.”
말을 해 놓고도 이상했다.
아이스 드래곤에게 강한 공격을 맞긴 했으나, 엘티히는 금방 회복하고 여기까지 날아왔다. 그런데 그사이에 벌써 아슬란이 저놈을 죽였단 말인가.
“대체 너란 인간은······.”
이 대륙 역사상 인간이 드래곤을 죽인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아니. 그 어떤 종족도 드래곤에게 상처를 입힌 적은 있어도, 그것을 사냥하는 데에 성공한 적은 없었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그 위대한 업적을 저 아슬란이 해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슬란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망토를 펄럭이며 제 부하들에게 다가갔다.
“와, 왕이시여.”
“몸은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아이스 드래곤이 죽자, 혹한의 속박에서 벗어난 그의 부하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다른 함선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얼어붙어 버린 몸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았다.
“일라이 왕국의 기사라는 자들이 이런 거 하나 버티지 못해서야.”
“소, 송구합니다.”
“다음에는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예!”
상대는 무려 드래곤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천운인 셈.
그런데도 각박한 아슬란의 태도에 엘티히는 혀를 내둘렀다.
저것이 단 한 번도 약자로 지내본 적이 없는 강자의 마음이라는 것일까?
* * *
“카, 카르만 님.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카르만과 그의 부하들은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다.
아이스 드래곤이 갑작스레 나타난 것도 그렇고, 저 아슬란이 드래곤을 쓰렸다는 것도 그러하다.
그들이 봤던 것이라고는 길길이 날뛰던 아이스 드래곤이 아슬란의 검에 의해 쓰러졌고, 그 머리를 짓밟혔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몰아친 눈보라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눈보라가 걷힌 뒤에야 아이스 드래곤의 시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아슬란이 드래곤을 죽인 것입니까?”
“······그래. 그런 것 같군.”
“그,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아슬란은 대륙 역사상 최초의 드래곤 슬레이어입니다!”
드래곤 슬레이어.
늘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으나,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하고,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업적.
그것을 아슬란이 이뤄냈다.
그런데도 저자는,
“······.”
기뻐하는 기색이나, 흥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항상 그렇듯 꼿꼿하고 기품 있게 서 있을 뿐이다.
‘그릇부터가 다른 것인가.’
어쩌면 아슬란은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가 붙든 말든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언제든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이룰 수 있는 업적일 테니.
‘이렇게 함대를 끌어모아 온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는군.’
이토록 많은 함선을 이끌고 온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라일라칸에게 가문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 주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카르만은 아슬란에게 칼라 왕국의 힘을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일궈 낸 이 왕국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뼛속 깊이 깨달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너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는구나.’
그러면 그럴수록 아슬란의 놀라운 힘만 깨달을 뿐이었다.
카르만은 왠지 입맛이 씁쓸하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대체 아슬란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 * *
‘아오. 발 시려워.’
설마 동상이라도 걸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뭔 똥폼을 부리겠다고 갑자기 아이스 드래곤 머리 위로 발을 올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발이 꽁꽁 얼어붙어 잘려나갈 뻔했다.
‘플레임이 나서 주지 않았으면 진짜 위험했다.’
아이스 드래곤을 찰나의 괴력으로 저 바다 밑까지 처박았으나, 놈은 금세 몸을 회복해 일어났다.
그 위험천만한 순간에 플레임이 나서서 놈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줬고 덕분에 기회가 생겼다.
‘드래곤도 마기 포식이 되는 건 처음 알았네.’
마기 포식자.
이 능력은 오직 악마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능력은 드래곤도 악마의 일종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인지, 아이스 드래곤의 힘을 전부 빨아들였다.
찰나의 괴력도 전부 다 써버리는 바람에 아이스 드래곤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몰랐는데, 다행히 마기 포식으로 놈을 없앨 수가 있었다.
‘찰나의 괴력이 있었어도 죽이긴 힘들었을지도.’
드래곤의 생명력은 굉장히 높다.
대악마들과 마찬가지로 드래곤은 끝없이 몸을 재생시키고 아무리 짓밟아대도 살아난다. 그래서 이 게임을 플레이할 때, 아무리 스펙업을 해도 드래곤을 잡는 건 엄청나게 힘든 일이라 별의별 영웅들과 마법들을 다 써 가며 잡아야 한다.
‘그런데 난 그걸 한번에 해냈단 말이지.’
이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시스템적 오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건, 내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마기 포식을 하면서 얻은 것도 있었다.
[혹한의 룬]
그건 바로 아이스 드래곤의 힘이자, 그 원천이 되는 능력이었다.
“저기 섬이 보입니다!”
잠시 스킬창을 확인하고 있을 때, 어느덧 함선은 라일라칸이 묻혀 있다는 아스렐 섬 근처에 도착했다.
드디어 대륙 최강자를 마주할 때가 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