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0.01초 소드마스터 113화
[라일라칸]
300년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대륙 최강자라 불리는 사나이.
악마와의 대전쟁이 끝난 뒤, 그는 거의 신처럼 수많은 이들에게 떠받들어졌지만, 그 역시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얼마 안 가 사망하고 만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다.
“빛의 예언이 있은 뒤, 라일라칸이 자발적으로 후일을 대비하고자 했음을 난 알고 있다.”
“그게 의문이라는 것이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는 것이냐? 라일라칸의 후손이라는 저 카르만도 그 일을 모르고 있을 터인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래. 넌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했지.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는······. 더 캐묻지 않겠다.”
당연히 모를 수가 없지.
라일라칸의 부활은 이 대륙에 있어서 엄청난 사건이니.
“라일라칸이 잠들어 있는 곳이 어딘지도 넌 알고 있겠구나.”
“아스렐 섬에 있지 않느냐?”
“그래. 라일라칸의 무덤이 있는 곳이지. 그곳에서 눈을 뜨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라일라칸은 최강자이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웃긴 캐릭터였다.
대전쟁이 끝난 뒤, 라할에게서 내려온 예언서를 받은 교단은 또 다시 악마가 침공할 것임을 예고했고, 그 당시 전쟁을 막았던 영웅들은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온 결론은 먼 훗날을 대비해 이 대륙 최고의 무기를 보존하자는 것이었다.
“라일라칸은 스스럼 없이 자원했다. 자신이 몇백 년이든 잠이 들어 훗날 위기에 빠진 대륙을 구하겠다고 말이야.”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라일라칸이 대륙을 사랑하는 마음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고 생각하겠지만.
‘게임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지.’
사실은 다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오직 이 세계에서 라일라칸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
자신 이외에 이 세상에는 강자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특성이다.
그렇기에 그는 한때 대륙의 모든 왕을 자신의 아래로 생각했고, 심지어 악마들도 자신의 아래라 생각했으며, 천계의 있는 자들도 자신의 아래로 여겼다.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는 인물.
어디서 많이 본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 건 아슬란이랑 비슷하지. 아니. 똑같다고 해야 하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슬란은 허세를 부리는 것이고, 라일라칸은 진짜 자신의 힘에 취해 오만함을 부린다는 것이다.
쥐뿔도 없는 아슬란에 비하면, 라일라칸은 정말로 자신의 말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리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특성에 걸맞게 수많은 사기적인 특성들이 한 데 집약되어 있는 놈이 바로 라일라칸이었다.
오히려 주인공 알렉산더보다 라일라칸의 특성이 더 좋으며, 그 어떤 캐릭터로 플레이를 해도 라일라칸은 절대 이길 수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완전 게임 설정인 거지.’
이 대륙에서는 일대일로 라일라칸을 이길 수 있는 자가 없다.
그것이 바로 이 게임의 설정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게임을 수월하게 플레이하기 위해서는 라일라칸의 존재가 꼭 필요했고, 그를 통해서 바빌론들을 잡고 나아가 악마들의 왕이라는 레메게톤을 죽여야 한다. 그는 이 게임 스토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이라는 것.
‘그러니까 무조건 깨워야지.’
놈을 깨워서 골수까지 털어먹을 생각이다.
앞으로 맞부딪히게 될 강적이란 강적은 전부 라일라칸에게 몰아주면 된다.
어차피 오만함에 극치를 달리고, 자신보다 강한 적을 용납하지 않으며, 명예에 심취하는 놈이라 그런 싸움을 무척 좋아한다.
‘제발 그만 좀 싸우고 싶다고 빌 때까지 싸우게 해주마.’
* * *
칼라 왕국의 함대가 항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들의 상징적인 푸른 깃발이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고, 화창한 날씨가 오늘은 순항하게 될 것을 알려 주었다.
‘라일라칸······. 그분이 살아 계셨다니.’
카르만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엘티히와 아슬란이 나타나 라일라칸에 대해 얘기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는 믿지 않았다.
이미 300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 사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대륙을 위기에서 구하고자 잠들어 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국에 있던 고대 서적을 뒤지고 나서야 그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렇게 라일라칸의 무덤으로 가고자 함대를 준비시킨 것이었다.
그의 무덤은 이 바다 너머에 있는 아스렐 섬에 있기 때문이다.
“카르만.”
“왔군.”
아슬란과 그의 호위 기사들.
그리고 엘티히가 이곳 칼라 왕국 항구에 당도했다.
“쓸데없이 함대를 많이도 준비했구나.”
“가장 위대하신 선조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이 정도의 예우는 차려야겠지.”
수십 척의 함대.
수만 명의 군사.
이번 출정으로 칼라 왕국의 위엄을 온 대륙에 보여 주며, 동시에 라일라칸에게 얼마나 로크 가문이 막강해졌는지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너희들이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 함선들을 골라 놓았으니, 타거라.”
“그러지.”
아슬란은 꽤 여러 기사를 데리고 왔다.
하지만 그중 눈에 띄는 건,
‘어린아이?’
한 아이가 아슬란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인가?’
그러기에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었다.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카르만은 금방 신경을 끊었다.
“그럼 출발한다.”
“예!!”
모두 배에 올라탄 뒤, 카르만의 명령에 함선들이 돛을 높이 올리며 출항을 시작했다.
빠르게 물살을 가르면서 함대가 나아가니, 그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순풍이 불고 있으며, 바다도 매우 잔잔합니다. 오늘은 아주 훌륭한 항해가 될 것 같습니다, 왕이시여.”
항해는 무척 순조로웠다.
무려 칼라 왕국의 함대가 바다를 가르고 있으니, 해적들은 감히 그 주변으로 얼씬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가면 금방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전망하던 중.
“음?”
“엇.”
배 위로 휜 눈이 송송 내리기 시작했다.
“눈?”
“아니. 이 날씨에 눈이 온다고?”
그 광경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기이했다.
이 따뜻한 계절에 어떻게 눈이 내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내리게 하는 것이 분명했다.
“······.”
카르만 역시 자신의 손아귀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꽉 쥐며 하늘을 살펴보았다.
분명 방금 전까지 아름답고 화창했던 날씨가 금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 안에서 불길한 그림자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건······.”
이윽고,
“크롸라라라라-!!”
낙뢰가 내려치면서 바다가 흔들리고, 그 위로 두 날개를 넓게 뻗은 드래곤이 괴성을 질러댔다.
“으, 으아아악!”
“드, 드래곤! 드래곤이다!!”
온몸이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그 눈동자는 핏물보다 진했다.
아이스 드래곤, 프렐리온!
그 위험천만한 존재가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아, 아니. 대체 드래곤이 왜 이런 곳에!”
드래곤은 자신의 레어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으며, 특히 바닷가 같은 곳에서는 더더욱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어찌된 경우인지 프렐리온이 바다 위에서 나타나 무서운 눈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궁병 앞으로! 마법병도 준비하라!”
그러나 심하게 출렁이는 파도와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그들은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어려웠다.
더군다나 드래곤의 출현에 모두 우왕좌왕 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때 드래곤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감히 나의 영역을 침범하다니. 모두 이곳에서 영원한 얼음이 되어 죽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담긴 드래곤 피어가 더욱 병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에 지지 않고 카르만이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동요하지 마라. 우리 칼라 왕국의 함대를 막는 것은 그 누구라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맞서 싸워라!”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시원치 않았다.
제아무리 왕의 목소리라고 해도 이렇게 파도가 출렁이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에 모자라 드래곤까지 앞에 있다면 누구라도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래곤은 이들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가만있지도 않았다.
콰아아아-!!
“으아아악!!”
혹한의 브레스가 몰아치면서 함선이 얼어 버리고, 그 위에 있던 병사들 역시 기괴한 모습으로 얼어붙었다.
드래곤의 날갯짓에 얼음 송곳들이 날아 들어가 병사들의 몸을 뚫었으며, 그 위로 쏟아지는 거대한 고드름은 함선을 파괴시키기에 이르렀다.
“막아라!!”
“마법병들은 얼른 마법을 펼쳐 얼음을 녹여라!”
“하, 하지만 파도가 너무 거칠어 마법을 쓸 수가······으아악!”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혹한의 혼돈.
천하무적이라 자부하던 칼라 왕국의 함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침몰하고 있었다.
“크롸라라라-!!”
또 다시 들려오는 드래곤의 포효 소리.
그런데 이건 아이스 드래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
아이스 드래곤과 비슷한 덩치의 레드 드래곤이 괴성을 지르며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으, 으아아아!”
“또, 또 다른 드래곤이다!”
“이, 이게 대체!”
한 마리의 드래곤을 만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건만, 무려 두 마리의 드래곤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레드 드래곤은 인간을 공격하지 않고 아이스 드래곤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하늘 아래 두 개의 제왕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콰아아아-!!
두 마리의 드래곤이 거친 파도 위에서 서로를 향해 날개를 휘두르고 브레스를 날리며 지옥도를 펼쳤다.
그 덕분에 주변에 있던 배들이 파괴되는 중이었고, 파도는 더욱 거칠게 몰아쳐댔다.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
하지만 아이스 드래곤이 지형적으로 너무나 유리했다.
[감히 인간을 돕다니!]
프렐리온이 일으키는 마법에 반응하여 파도가 소용돌이치면서 거대한 회오리가 레드 드래곤을 덮쳤다.
“크롸롸라-!”
레드 드래곤이 물보라에 갇혀 저 바다 깊은 곳에 끌려가고 있을 때,
“어딜!”
퍼엉-! 퍼펑-!!
이번에는 엘티히가 나서서 아이스 드래곤을 저지하려 들었다.
그녀의 강력한 마법이 연달아 프렐리온을 공격했지만-
[이 물 위에서 고작 마법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엘프여!]
최강의 마법사라는 엘티히조차 지형적으로 유리한 프렐리온의 힘을 막아내긴 버거워 보였다.
결국 그녀도 프렐리온이 쏘아대는 브레스에 저 먼발치까지 날아가 그 생사를 알 수가 없게 되었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카르만은 어떻게 도움을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직접 찾아올 필요도 없다는 듯,
[네가 이들의 대장인가?]
프렐리온은 이 함선 중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게 꾸며진 카르만의 함선 위로 올라왔다.
“와, 왕이시여!”
“피하십시오!”
기사들이 소리치며 카르만을 지키고자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프렐리온은 씨익 웃으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윽!”
“모, 몸이······!”
프렐리온이 내뿜는 드래곤 피어에 그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여. 너희가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다.]
프렐리온의 웃음소리가 낙뢰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이지?’
카르만은 잠시 머리가 새하얗게 질려가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이제 칼을 뽑을 수 있는 건 자신 혼자뿐.
저 드래곤을 죽인다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오리라.
스르릉-
칼은 뽑았으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역시 드래곤 피어에 노출되어 발밑부터 몸이 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용없는 짓이다. 내 피어를 마주하는 생명체는 모두 영원한 얼음이 되어 버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만은 불굴의 정신으로 칼을 높이 들며 힘을 끌어모았다.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을 저 드래곤에게 날리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힘은?”
드래곤은 카르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놈이 바라보는 곳은 카르만이 아닌, 저 옆에 있는 다른 함선이었다.
프렐리온은 곧 카르만에게서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바라보고 있던 함선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슬란?”
이 혼돈 와중에도 꼿꼿하게 망토를 펄럭이고 있던 아슬란이 있었다.
* * *
‘시, 시방. 이게 대체 뭔 일이여.’
따스한 햇살과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항해를 나아가던 중,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갑자기 아이스 드래곤이 출현했다.
난이도가 극악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내가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는 몰라도 하필이면 최악의 위치에서 최악의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온통 물밖에 없는 곳에서 아이스 드래곤이라니!’
이미 최강인 놈에게 최강의 무기까지 건네준 꼴이었다.
그로 인해 레드 드래곤조차 제대로 상대를 못 하고 저 밑에 수장되고 말았다.
‘이럴 때 밥값 하라고 데려왔던 놈인데, 몇 대 때리지도 못하고 당하다니.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엘티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마법 역시 아이스 드래곤의 지형적 유리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아니.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물보라에 휘말려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
‘엘티히도 늙었구나.’
물론, 젊은 엘티히가 왔었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이 바다 위에서만큼은 프렐리온이 가히 최강이라 할 수 있을 테니까.
‘이제 어떡하지?’
때마침 드래곤은 저 대장 함선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라도 여기서 탈출을 하면 되지 않을까?
내게는 공간 이동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장소를 상상만 한다면 금방 이곳을 빠져나갈 수가 있다.
문제는,
‘여기 있는 사람들을 다 놔두고 가야 한다는 거잖아.’
아론, 알렉산더, 하리엘, 레바노스 등등.
내가 가진 최고의 네임드들을 전부 버려야만 한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알아서 잘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공간 이동을 써서 이곳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쿠웅-!!
얼어붙은 바다 위에 더 이상 출렁이지 않던 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뒤에서 불길한 시선이 느껴졌다.
“와, 왕이시여!”
“저, 저런!”
부하들은 까무러치게 놀란 얼굴로 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거기서 난 직감했다.
프렐리온 이놈이 기어코 내 쪽으로 왔구나.
카르만 그놈은 뭘 하고 있기에 이놈을 붙잡아 놓지도 않고 있었던 거야?
[네놈이로구나, 인간. 너에게서 라할의 냄새가 난다. 그 역겹고도 가증스러운 힘의 냄새가 말이다.]
드래곤의 음성이 고막을 찢어발겨 놓는 것만 같았다.
또한 놈이 내뿜는 피어가 배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고 대항을 하고자 칼을 뽑아 든 내 부하들을 열려 놓고 있었다.
“아, 아슬란 님.”
“피, 피하십······.”
이미 몸 절반 이상이 얼어붙어 버린 아론과 알렉산더가 침통한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저들 말대로 더 늦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금이라도 당장······.
[신기하군.]
“······?”
[네놈 부하들처럼 너도 지금쯤 몸이 얼어 버려야 하는데, 왜 멀쩡한 거지?]
그거야 당연히 신성한 보호가 나를 몇 초 동안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꺼지면 수호의 방패를 켜지 않는 이상 나도 똑같이 얼어 죽을 것이다.
[역시 냄새가 난다 했더니, 기이한 힘을 가졌구나, 인간.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너 역시 이곳에서 죽는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였다.
“건방지구나.”
드래곤의 음성이 냉기에 얼어붙어 있던 내 허세를 일깨운 것이 말이다.
나는 천천히 등을 지고 있던 몸을 놈의 앞으로 돌렸다.
내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거대한 드래곤의 몸통과 두 다리였다.
“미물 따위가 감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니.”
드래곤은 그 말이 웃겼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뭐라? 크크크. 미물이라고 했느냐? 재밌는 놈이로군.]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며 천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내려와라.”
놈의 두 다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
그러자 앞으로 세차게 뻗어 나간 검강이 놈의 툭 튀어나온 배를 자르고 그 아래 있던 두 다리를 잘라 버렸다.
쿠웅-!!
[크헉!]
놈이 신음을 터트리며 철푸덕 배 위에 쓰러졌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머리가 내 발 앞으로 떨어지면서 바닥이 움푹 내려앉았다.
나는 놈의 머리 위로 발을 올린 뒤, 흔들리는 놈의 붉은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올바른 눈높이가 되었구나, 미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