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0.01초 소드마스터 108화
‘엥? 이, 이게 뭐시여.’
나와 레헤나가 떨어진 곳은 다름 아닌 전장 한복판.
그것도 악마들이 득실거리는 곳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 같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내 계획은 저 성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공간 이동을 하여 레헤나에게 악마 군단의 실체를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악마들이 가득 찰 정도로 숫자가 많을 줄은 몰랐다.
원래는 잠깐 보여 주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려 했던 건데······.
“키에에엑!”
악마들은 아주 뜨겁게 우리를 반겨 주었다.
빛의 표증답게 공간 이동을 할 때 성스러운 빛이 잔뜩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옵션 부가 설명에 달린 ‘빛의 증표가 활성화됩니다.’가 무슨 뜻인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빛의 기둥처럼 생긴 것이 내려오는 것에 모자라, 아기 천사들이 그 위를 비행하며 성스럽게 합창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빛의 권능이로군요.”
교황은 또 그 모습을 은혜롭게 바라보다 주변에 시선을 돌렸다.
“여긴······.”
그녀는 사방에 가득 모여 있는 악마들을 마주하며 놀란 눈빛을 띠었다.
“이들이 악마들입니까?”
“그래. 이곳 ‘만’ 왕국을 짓밟고자 모인 악마들이다.”
“이럴 수가······. 이렇게나 많은 악마가 이 대륙에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레헤나는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악마들이 괴성을 지르며 물러났다.
“하지만 역시 이들은 빛을 두려워하는군요.”
그거야 당연하다.
빛이 어둠을 두려워하듯, 어둠 역시 빛을 두려워한다.
거기다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인간계 빛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이지 않은가?
“그것도 당신의 빛을 말입니다.”
음? 내 빛을?
“이들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겁니다. 당신이 빛의 선택을 받은 분이라는 것을. 당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강력한 신성력에 이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있어요.”
아무리 봐도 그쪽 빛을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들이 내 빛을 두려워하든, 교황의 빛을 두려워하든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린 적진 한가운데에 떨어졌고, 악마들이 잠시 주춤거리고 있지만 언제든 우리를 덮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꼼짝없이 여기서 저놈들에게 뜯어 먹혀 죽어야만 한다.
“악마들을 보고 감탄만 하고 있을 건가?”
“······아니요. 잠시 놀라긴 했지만, 오늘 제가 당신을 만나 이곳에 온 것은 모두 빛의 뜻이겠지요. 바로 이들을 모두 정화하라는-”
교황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런 뒤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우자,
파앗-!!
그녀의 신성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악마들을 빛으로 정화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캬오오!!”
과연 교황인가.
그녀의 성스러운 힘이 닿자 악마들의 몸이 녹아내리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인간 중에서는 가장 높은 신성력을 지녔다는 교황.
그 명성이 거짓이 아님을 이곳에서 보여 주고 있었다.
“빛을 부정하고 이 대륙에 어둠을 일으키는 존재들이여. 빛의 심판을 받으라.”
교황의 선언에 따라 오로라처럼 펼쳐진 빛이 악마들에게 쏟아져 내려왔다.
이 정도로 광활한 광역 스킬이라니.
엘프의 여왕, 엘티히에게서 보던 그 미친 광역 스킬을 보는 것만 같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콰아아아-!!
레헤나는 직접 악마들 속으로 들어가 여러 신성 마법을 구사했다.
하늘에서 황금빛 낙뢰가 내려치고, 신성력으로 가득한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치는 등, 빛을 활용한 마법은 전부 쓸 줄 아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악마들도 마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콰앙-!!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창이 그녀의 신성 방어막을 반쯤 꿰뚫었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그 창끝이 저 아름다운 레헤나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곧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며 무언가가 빠르게 낙하하는 것이 보였다.
쿵-!!
게 발을 연상시키는 열 개의 발과 큼직하고 흉측한 몸통.
자신이 보통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듯,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지독한 마기가 빛을 몰아내고 있었다.
“크흐흐. 교황 레헤나. 네가 설마 이곳에 나타나다니.”
나는 그 끔찍한 면상을 보자마자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대악마 뮤티렐!’
저 게 껍데기 같은 발에서 먹물같이 끈적이는 독을 내뿜고, 강력한 마기로 흑마법을 부리는 굉장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다.
그래. 이 정도로 많은 악마 군단이 있는 곳에 대악마가 없으면 섭섭하지.
교황과 대악마가 일대일로 붙는 거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겠다만-
‘악마들의 숫자가 너무나도 많다.’
심지어 대악마 곁에는 보좌관들이 있어서 그들이 힘을 보탠다면 교황 혼자서 저 대악마를 상대하기에는 무척 힘이 들 것이다.
‘지금이라도 다시 교황을 데리고 튀어야 하나?’
쿨타임을 초기화시킨다면 공간 이동을 한 번 더 쓸 수 있게 된다.
그럼 이곳에서 빠져나가 왕국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지.
하지만,
“크웨에엑-!”
마치 그런 내 생각을 잃었다는 듯 놈은 역겨운 소리를 내며 독을 사방에 뿜어냈다.
어느 정도는 레헤나의 방어막이 막아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바닥에 흩뿌려져 나와 레헤나 사이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내 첫 출진에서 교황이라니. 아주 귀하구나. 널 잡아가면 그분께서 무척 좋아하시겠어.”
잘그락 소리를 내며 뮤티렐이 다가오자 교황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촤아악-!
그녀의 신성력이 앞으로 솟구쳐 나가 뮤티렐의 몸에 닿았다.
뮤티렐은 그 강력한 신성력에 인상을 찡그렸다.
“쯧. 역시 교황은 교황인가? 제법이구나. 귀찮게시리.”
그러나 대악마급이라면 교황의 단발성 공격에 쓰러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공략해야만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악마이지 않던가.
내가 게임을 하면서 저놈에게 수없이 죽었던 것이 PTSD처럼 떠올랐다.
“그냥 순순히 어둠에 굴복하거라!”
뮤티렐은 제 부하들과 함께 지독한 마기를 발산하며 교황을 공격했다.
교황은 빛의 보호막을 펼쳐 막아보려 했으나,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윽!”
교황은 결국 그 힘에 밀려나 내가 있는 곳까지 튕겨 나왔고 바닥에 고여 있는 뮤티렐의 먹물 독이 그 가냘픈 몸에 달라붙었다.
“아······.”
먹물 독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마치 염산에 타들어 가는 듯이 그녀가 입고 있는 교황복을 뚫고 있었다. 그러자 몸으로 파고들려는 독을 막고자 레헤나는 신성력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인 것인가.
점점 독이 그녀의 몸에 잠식하려 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저것은 교단을 대표하는 교황의 눈동자가 아닌, 도움을 바라는 한 여인의 간절한 눈빛이었다.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나약하구나, 교황이여.”
내 몸에 잠들어 있던 허세가 꿈틀거리며 솟구쳐 올라왔다.
“하지만 인간답게 보이기도 하는구나.”
“······.”
나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그곳에 묻어 있는 독이 내 손을 타고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졌으나,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들어내게 다가오고 있는 악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또 뭐야?”
어느새 뮤티렐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그 고개를 내렸다.
“이놈과 찐득한 사이라도 되는 것이냐? 어디 너의 여인을 구하기 위해 뭐라도 해보거라. 내 즐겁게 구경을 해 줄 테니.”
“끼히히. 뮤티렐 님. 차라리 저 두 놈의 살갗을 벗겨 걸어 두시지요!”
“뮤티렐 님의 몸에 장식으로 써도 될 것 같습니다.”
뮤티렐의 입에서 나오는 검은 연기와 악취.
그리고 그의 양옆에 있는 보좌관들의 목소리.
그것들은 내게 두려움을 주기는커녕, 가뜩이나 터질 것만 같이 차오른 내 허세를 더욱 자극했다.
나는 머리가 아려올 정도의 묵직한 허세의 끓어 오름을 느끼며 말했다.
“역겹구나.”
“뭐라?”
“너희의 존재는 태초부터 역겨웠다.”
레헤나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손이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하지만 이것은 뮤티렐의 독 때문이 아닌,
“그러니 너희를 모두 정화시켜 이 대륙에서 없애 버릴 수밖에.”
바로 불의 룬에 의해 내 손에서 타고 있는 불길 때문이었다.
“사라져라.”
그 말과 동시에,
화아아악-!!
황금빛 불길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악마들을 덮쳤다.
“키에에엑!!”
“꺄아아악!!”
파도처럼 몰아치는 그 거센 불길에 맞은 악마들은 괴성을 질러댔다.
찰나의 괴력과 불의 룬이 합쳐진 이 염화는 보좌관들의 두 날개를 불태웠으며, 그들의 몸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뮤, 뮤티렐 님!!”
“끼아아악!!”
그들은 애처롭게 뮤티렐을 불러 보았지만 그마저도,
“으아악! 뜨, 뜨거워! 뜨거워!!”
불길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염화]
-15초 동안 반경 150m까지 강력한 염화를 일으킵니다.
나타샤의 매혹 마법을 태워 버렸던 바로 그 스킬.
염화, 그것도 성 속성이 더해진 이 성스러운 불길은 악마들을 고통스럽게 정화시키고 있었다.
“주,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겠어! 네놈을!!”
그 불길의 힘은 대악마 뮤티엘에게도 통했다.
놈은 고통 속에서 괴성을 지르며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난 그런 그를 보며 천천히 칼을 빼어 들었다.
“그만 닥치거라.”
그리고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콰아아아-!!
놈의 몸이 두 동강 나면서 불길에 완전히 잡아먹혀 버렸다.
그렇게 15초라는 짧은 시간이 지났다.
화르르르-
거센 불길은 사라지고 이제 잔 불씨만 바닥에 남아 있을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악마들의 숫자는 많았다.
하지만 내게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스킬이 없었다.
그러나,
“오너라.”
이 허세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본좌가 이곳에서 네놈들의 존재를 전부 말살시켜 줄 테니.”
* * *
콰아아아-!!
크라엘과 그의 기사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불의 폭풍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저, 저게 대체······.”
“어찌 저런 힘이 가능할 수가.”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얼마나 신성력이 강하면 저 악마들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고, 저 거대하고 흉측한 대악마마저 정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소,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나?”
“아슬란은 정말로 라할의 화신이었던 건······.”
빛의 주인이자 창조주인 라할이 아니고서야 저런 신성력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다.
기사들은 그 전능한 힘 앞에 몸을 잘게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크라엘 역시 큰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슬란······. 역시나 당신은······.”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예?”
“모두 화살을 쏴라! 그리고 성문을 열어라!”
그는 칼을 뽑아 들고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지금이야 말로 이 전세를 뒤집을 유일한 기회다! 모두 말에 오르거라! 이 대륙을 더럽히는 악마들을 섬멸하러 갈 것이다!”
“하, 하지만 대기사단장님. 이대로 나가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너희는 눈도 없느냐? 저곳을 보거라. 빛의 주인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지 않느냐!”
그 말에 기사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외쳤다.
“맞습니다!!”
“빛의 기사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나가서 싸우자!!”
“오오오!!”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하늘을 찌를 듯이 기세가 드높아져 있었다.
크라엘은 말 위에 올라타 성문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모두 진격!! 빛의 화신을 도와 우리 왕국을 구원하자!!”
“우와아아아-!!”
그 뒤로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지르며 병사들이 악마 군단을 향해 뛰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