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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 소드마스터-104화 (104/200)

104화

0.01초 소드마스터 104화

내가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된지도 어느새 보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이렇다 할 사건은 없었다.

정말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나날이었다고 해야 할까.

마치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왕을 뵙습니다.”

“위대하신 왕을 뵙습니다.”

내가 잠시 밖으로 나가면 왕궁 안을 거닐던 기사들과 신하들이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제 그들이 나를 부르는 칭호는 대기사단장이 아닌, 바로 ‘왕’.

이 게임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직업을 가졌었다.

당연히 왕도 해봤고, 제국의 황제도 해봤다.

하지만 그땐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냥 게임 속 직업일 뿐이니,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상 속에서 나는 왕이 되었고, 그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임감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어쩐다.’

이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는 메인 퀘스트를 완료해야만 한다.

이 중에서 가장 쉬운 메인 퀘스트를 꼽으라고 한다면 당연히 주인공 알렉산더를 도와 테키나 족속의 진격을 막고 대륙을 구하는 것.

그것이 이 게임을 상징하는 엔딩이기도 하고, 제일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나와야 할 엔딩 퀘스트는 안 나오고 황제가 되어 대륙을 정복하라거나, 지옥왕이 되어 대륙을 파괴하라는 퀘스트만 나오고 있으니······.

‘이건 억까야.’

이건 개발자가 의도적으로 날 궁지에 내모는 것 같았다.

이 게임을 클리어할 수 없도록 말이다.

“으아악!”

차가운 공기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잠시 상념에 잠겨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들리는 비명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 소리가 나오던 곳을 바라보고 있자 얼마 안 있어 기사 몇몇이 누군가를 밧줄로 묶어 데려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소란이냐?”

내 물음에 그들은 몸을 숙이며 답했다.

“위대하신 왕을 뵙습니다. 첩자를 잡아 고문실로 데려가는 중입니다.”

“첩자?”

“예. 놈이 훈련장에 돌아다니고 있는 키루를 보고 깜짝 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여 부하들과 함께 제압해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붙잡힌 놈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왕이시여! 저는 첩자가 아닙니다. 대체 제가 왜 붙잡혀야 한단 말입니까!”

“닥쳐라! 네놈이 입고 있는 복장은 신입들이 입고 있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는 건 키루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것일 텐데도, 네놈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긴.

오밤중에 푸른 빛을 번쩍이며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사파이어 자쿤을 보면 놀랄 법도 하지.

그러나 우리 기사들은 워낙 그런 키루의 모습을 많이 봐와서 전혀 놀라지 않는다.

즉, 키루를 본적이 없는 첩자 놈들만 그것을 보고 놀란 반응을 보인다는 것.

그렇기에 이토록 쉽게 첩자를 색출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가서 어떤 놈이 첩자를 풀었는지 소상히 알아 오라.”

“예.”

이런 방식으로 키루가 첩자를 잡는 일이 꽤 있었다.

그리고 이건 키루 뿐만이 아니었다.

“으, 으아아아!!”

“꺄아아악!!”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윽고 거센 바람과 함께 플레임이 그 육중한 몸통으로 내 앞에 쿵! 착지했다.

“아슬란.”

드래곤의 묵직한 음성이 사위를 갈랐다.

플레임은 자기가 붙잡아 온 놈들을 내 앞에 던져 놓았다.

“요즘 따라 여기 왕국에 쥐새끼들이 많은 거 같군.”

“······이놈들도 널 보고 비명을 질러댔나?”

“그래. 겁먹은 모습이 귀여워 한입에 먹어 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키루와 마찬가지로 플레임도 왕국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는 첩자들은 드래곤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라며 발작해대다 이렇게 붙잡혀 오는 경우가 요즘 많아졌다.

물론 우리 왕국에 드래곤이 드나든다는 소문이 퍼지긴 했지만, 막상 드래곤을 눈앞에서 보면 오금이 저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훈련을 한다고 해도 그것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을 느끼도록 설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 왕국을 경계한다는 것이겠지.”

“후후. 강대국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 같은 건가? 아무튼 오늘 공적을 세웠으니, 내일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오도록 하지.”

플레임은 날개를 펄럭이며 훨훨 날아가 버렸다.

나는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첩자들을 내려다보았다.

“드, 드래곤이라니.”

“대, 대체 여긴 어떻게 되어 먹은······.”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것도 귀찮아서 나는 뒤에 있던 기사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방금 붙잡혀 온 놈과 똑같이 이놈들도 고문을 받으며 누가 감히 내 왕국에 첩자를 보낸 것인지 알아낼 작정이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겉은 얼음물에 들어가도 멀쩡할 것처럼 생겼지만, 사실 안은 나약한 놈이기에 이런 추위에 잘못 노출되면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그전에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왕이시여.”

그때 아론이 다가와 내게 정중한 예의를 갖췄다.

“보고드릴 것이 있어 왔습니다.”

“말하라.”

“교황이 할라즈 성을 지났다고 합니다.”

그 말에 관자놀이에서부터 통증이 느껴졌다.

교황, 레헤나.

내가 교단이랑 한바탕 싸웠어도 가만히 있던 게 갑자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는 스토리에 따라 아예 안 나올 때도 있던데.’

교황 레헤나는 폐쇄적인 인물이다.

교단의 얼굴이 되어야 하는 교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세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게임적으로 알려진 이유로는, 자신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 라할보다 더 숭배를 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 때문에 은둔 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물론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고 성물 역시 교황과 함께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성물이었다.

레이어스 교단의 성물.

라할이 레이어스 교단에 약속의 증표로 남겨 주었다는 성물은 순금으로 덧씌워져 있는 동상 같은 것이었는데, 그것을 황금으로 만들어진 막대에 끼워 네 명이서 어깨에 메고 운반을 해야만 했다.

워낙 신성한 물건이라 항상 신전에만 머물러 있었고, 허락받지 않은 자가 그것을 만질 시에는 라할의 진노가 내려와 그 몸을 불살라 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얘기만 들으면 순뻥처럼 느껴지겠지만······.’

성물의 힘은 진짜다.

그걸 멋모르고 만졌다가는 어마어마한 힘이 가해져 그 자리에서 죽게 된다.

그리고 이 성물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성물이 스토리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알렉산더에게 말이지.’

성물에는 한 가지 비밀스러운 힘이 있는데, 바로 빛의 기둥이라는 것을 떨어뜨려 상대가 라할에게 선택을 받은 영웅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가 있게 한다.

그리고 이 빛의 기둥은 오로지 알렉산더에게만 적용이 됐다.

아무리 내가 신성력을 쌓고 인덕을 쌓으며, 온갖 백성들에게 명성을 얻어도 알렉산더가 아니면 절대 빛의 기둥을 통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럼 이걸 알렉산더에게 써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아도 황제 퀘스트, 그리고 지옥왕 퀘스트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 알렉산더가 성물을 통해 영웅으로 인정을 받고 이 대륙을 구원하기 위한 길이 열린다면?

‘그렇게만 되면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뜨게 되겠지?’

머리에서 바쁘게 돌아가던 계산기가 멈췄다.

나는 근엄한 목소리로 아론에게 말했다.

“교황의 길을 막지 말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아론도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교단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기는 했어도 상대는 교황이다.

레이어스 교단을 싫어하는 사람도 교황만큼은 인정할 만큼, 이 게임 내에서 교황의 명성은 무척 높다.

또한 그녀가 현재 운송 중인 것은 무려 성물.

만일 그것을 이곳에 가져와 힘을 개방한 뒤 알렉산더에게만 써준다면······.

‘이 지긋지긋한 게임도 이제 안녕이다!’

* * *

교황 레헤나와 그의 성기사들은 할라즈 성을 넘어 일라이 왕국이 있는 곳으로 행군을 이어갔다.

그녀는 주변을 스윽 살펴보다 옆에 있던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이상하구나.”

“예? 어떤 것이 말입니까?”

“내가 밖으로 자주 나가는 일이 없긴 하다만, 보통 내가 나오면 항상 왕국에서는 호위병들을 보냈다. 하지만 일라이 왕국 영토에 들어서니, 전혀 그런 것이 없구나.”

“······.”

“심지어 기사들의 표정도 많이 안 좋아 보이고.”

그녀의 말에 기사단장이 우물쭈물 거리다 대답했다.

“교황님. 아슬란과 일라이 왕국은 교단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성기사들은 아슬란을 무척 두려워합니다. 최정예 성기사단이 아슬란에 의해 도륙을 당했으니까요.”

“나도 그 얘기는 들었다. 아슬란이 단신으로 그 많은 군대를 휩쓸었다지?”

“예. 부끄럽지만, 그로 인해 아슬란에 대한 두려움이 이들 깊은 곳까지 자리 잡았습니다.”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고, 교단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각오하는 성기사들이 고작 인간 하나를 극도로 두려워 한다라.

늘 강직한 성기사들의 모습만 보다 이런 나약한 모습을 보게 되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곳이 바로 일라이 왕국입니다, 교황님.”

그리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어느새 교황은 일라이 왕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성안에 있는 백성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교황?”

“또 교단이야?”

“이번에는 또 뭘로 우리 왕을 괴롭히려고!”

교단의 대주교만 방문해도 그 성의 백성들은 한동안 난리가 날 정도로 환대를 한다. 하물며 교황이 방문하면 얼마나 기뻐하겠는가.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교황을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살벌한 눈초리를 보내기까지 했다.

때로는 살기까지 느껴져 교황을 호위하던 성기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경계를 설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크롸라라라라-!!”

“!?”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어마어마한 포효에 교황은 하마터면 타고 있던 마차에서 떨어질 뻔했다.

“이, 이 목소리는 설마······.”

땅을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저 푸른 하늘을 새빨갛게 만들어 버리는 붉은 비늘.

하늘의 제왕이자 대륙의 재앙이라 불리는 레드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며 성으로 내려와 앉았다.

“드, 드, 드래곤이다!!”

“모, 모두 전투 준비!!”

드래곤의 출몰에 깜짝 놀란 성기사들이 각자 무기를 꺼내고 대형을 갖췄다.

“모두 대피하시오!”

그리고 바깥에 가만히 서 있는 백성들을 향해 얼른 피하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얼른 피하라니깐!”

“여기 있다가 다 죽고 싶은 것인가!”

오히려 성기사들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쳐다보았다.

“괜찮소. 우리 플레임 님은 일반 백성을 해치는 나쁜 분이 아니오.”

“맞아요. 우리 왕국의 왕을 섬기는 분이라고요!”

“······?”

백성들의 기이한 반응에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드래곤이 나쁘지 않다고? 심지어 왕을 섬겨?

하나 같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드래곤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수틀리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존재이지 않던가.

그런데 어째서 이들은······.

“뭐야? 네놈들은.”

사뿐히 내려앉아 백성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냠냠 먹던 플레임은 성기사들이 내뿜는 살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살기를 보내고 있는 거야?”

성이 난 드래곤이 둔중한 발걸음으로 성기사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으, 으어······.”

그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에 성기사들은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뭣들 하느냐!! 당장 대형을 갖춰라!”

기사단장의 외침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는 드래곤 주변을 빠르게 포위했다.

교황도 힘을 보태고자 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신성력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일전에 들은 적이 있어.’

레드 드래곤이 할라즈 성에 한 번 출몰했다가 일라이 왕국에도 나타났다고 말이다.

아슬란이 왕으로 취임을 할 때도 레드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 이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 의심스러워 거짓 정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허황된 줄로만 알았던 정보들이 사실은 다 진실이었던 것일까.

여기 백성들은 저 드래곤이 아니라 오히려 신성한 교단에게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호오. 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여기서 한번 해보자는 것이냐?”

드래곤의 붉은 기운이 서서히 끓어 오르고 있었다.

과연 대륙 최강의 종족답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무시무시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성기사들이 명령만을 기다리며 드래곤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그만.]

사방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공간을 울리다 못 해 하늘과 땅을 뒤흔들어 놓는 그 엄청난 음성이었다.

삐이이-!!

그 한 마디에 귀가 먹먹해지고 두 개 골이 흔들려 기사들은 차마 제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린 채 두 귀를 막고 무릎을 꿇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으, 으아악!”

“크악!”

그건 기사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심부를 파고드는 그 목소리에 숨이 막혀 오는지 신음을 토하며 간신히 말 고삐를 붙잡고 버텨내는 중이었다.

교황도 신성력으로 그 강압적인 힘을 버텨내고 있을 뿐.

대체 이 힘이 누구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앞을 보라.

저 대륙 최강이라는 드래곤마저 몸을 떨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지는 것이 보였다.

펄럭~

휘날리는 붉은 망토와 함께 바람을 타고 있는 은빛 머리칼.

성기사들과는 다르게 이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있던 백성들이 그 존재를 보고 일제히 소리쳤다.

“왕께서 오셨다!!”

“아슬란 님이시다!!”

“와아아아-!!”

감히 저 드래곤 머리 위를 밟고 있는 사람이 그 아슬란?

교황 레헤나는 자신을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슬란과 눈을 마주쳤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그녀의 심장이 고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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