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0.01초 소드마스터 98화
[불의 룬]
-마력 수치에 따라 불을 일으킬 수 있게 됩니다.
-여러 스킬과 혼합이 가능합니다.
불의 룬.
게임에서도 룬이라는 것은 플레이어 몸에 이식되어 사용된다.
설명에 있는 것처럼 다른 스킬에 혼합이 가능하고, 내 무기에도 룬을 입혀 능력 사용이 무궁무진한데,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이건 마력을 써야 한다는 거지.”
그건 바로 마력의 유무였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인간은 마력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수치로 나올 정도인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고 아슬란은 사실상 마력이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다른 룬은 마력이 필요 없는 걸로 아는데.”
이렇게 원소를 다루는 룬은 마력이 필수였다.
“그럼 나한테는 쓸모없는 능력 아닌가?”
나는 내 몸에 빨려 들어간 불의 룬을 발동시켜 보았다.
그러자 몸 안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입에서는 탄 맛이 나고 손가락 끝이 따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파앗-!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감촉들과는 달리 일어나는 불의 크기는 매우 작았다.
그냥 손가락 끝에 불꽃이 올라와 일렁이는 것이 전부.
그마저도 얼마 안 가서 픽- 꺼져버리고 말았다.
“무슨 성냥이냐?”
성냥도 이거보단 오래 가겠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빨간 불길이 아니라 성 속성 영향을 받아 황금빛 불꽃이라는 거 정도?
“담배 같은 거 피울 때 편하긴 하겠네.”
물론 내가 담배를 피지 않아서 그마저도 쓸모가 없어 보이긴 한다.
“잠깐. 근데 다른 스킬과 혼합이 가능하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찰나의 괴력과도 같이 쓸 수가 있다는 뜻인가?
지금 내가 다양한 스킬을 찰나의 괴력가 섞어 쓰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가능할지 않을까?
“오. 그럼 당장 여기서 해봐야······. 아니지.”
그러나 이곳은 나의 왕국이 아니다.
마음대로 집무실을 부숴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불의 룬이 찰나의 괴력에 영향을 받아 그 크기가 무지막지하게 커져서 다른 곳에 피해를 주면?
그랬다간 외교 문제로 퍼지게 된다.
“그래도 궁금하긴 한데.”
어디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한번 써봐야 하나.
그리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대기사단장님. 하리엘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갑작스러운 하리엘의 방문에 잠잠하던 허세가 치솟으면서 나는 손가락 끝에 일렁이던 불꽃을 끄고 흐트러져 있던 자세를 다 잡았다.
그리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라.”
“예.”
하리엘은 문을 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딱딱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을 텐데, 뭔가 장난기 많은 소녀가 된 듯한 발걸음이었다.
그냥 기분 탓인가?
“무슨 일이지?”
“음. 꼭 일이 있어야만 와야 하는 건가요?”
“······?”
얘가 오늘 벼락이라도 맞았나.
왜 이래?
“그냥 대기사단장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생긴 것도, 목소리도, 말투도, 하리엘과 다를 바 없었다.
겉모습은 누가 봐도 하리엘이었으나, 내 눈은 일반적인 눈과 다르지 않던가.
“대기사단장님은 싫으신가요?”
“······.”
이곳 캐릭터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머리 위에 떠 있는 정보.
그곳에서는,
[나타샤]
뭔가를 잘못 먹어도 한참 잘못 먹은 거 같은 이 여자가 하리엘이 아닌, 다른 캐릭터라는 것을 내게 알려 주었다.
“우리도 이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되지 않았나요? 대기사단장님도 제가 먼저 해주기를 기다렸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녀는 은근슬쩍 내가 가까이 다가와 마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걸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지?
“그러니까 이제 서로 솔직하게······.”
그런 고민도 잠시.
“장난이 과하군.”
그녀의 속삭임에 이성에게 느끼는 흥분감보다는, 강렬한 허세가 타올랐다.
“······네?”
“이따위 장난이 통할 거라 생각했는가? 나타샤.”
내 말에 하리엘, 아니. 나타샤는 몸을 움찔거리며 애써 모른 척을 했다.
“호호. 무, 무슨 말씀을-.”
“다른 이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다. 이런 장난을 하면서까지 내가 스승으로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냐?”
“잘못 보신 거예요. 제가 어떻게 나타샤라는 거죠?”
“끝까지 밝히기 싫다면 이 검으로 그 가증스러운 몸뚱이를 갈라서 확인시켜 줄까?”
하리엘의 청순한 얼굴이 악마처럼 비틀어졌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하리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옷을 그냥 걸치는 수준으로만 입고 나온 나타샤가 그곳에 서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나타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아무리 좋은 눈썰미를 가졌어도 내 마법을 파악할 순 없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보아하니 변환 마법 물약을 마신 것 같은데. 하리엘은 어디에 있지?”
변환 마법 물약.
대마법사급만이 만들 수 있다는 신비스러운 물약.
변환을 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물약에 섞어서 마시면 된다.
일반 변신 마법과는 다르게 구분할 수 없으며, 상대의 진의를 꿰뚫는 스킬이 있어도 그 마법을 절대 알아차릴 수가 없다.
지속 시간은 하루.
다음날 또 변신을 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양의 포션을 마셔줘야만 한다.
이 게임을 플레이했던 고인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물약이었다.
“넌······. 보면 볼수록 놀랍군. 이 물약에 대한 정체도 알고 있다니.”
물론, 이 게임 내에서는 물약에 대한 정체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밝혀지지 않았기에 다들 모르고 당하는 경우가 많다.
“신의 눈을 속일 순 있어도, 감히 이 아슬란의 눈을 속일 순 없다. 나타샤.”
내 대답에 나타샤가 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허세에 절여진 내 대답이 그토록 웃겼던 것일까.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그래, 늘 그런 자신감이 나를 흥분케 만들었지. 지금도 그렇고.”
“넌 아직 내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하리엘은 어디에 있지?”
“흐응~ 백마 탄 왕자님처럼 가서 하리엘을 구해 주고 싶은 것이냐?”
“말장난은 거기까지 해라. 여기서 하리엘을 내놓고 끝낸다면 옛정을 생각해서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나타샤는 다시 한번 깔깔 웃으며 내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거 감격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차라리 여기 침소에 확 누워 버릴까? 이곳은 내가 너를 위해 별도로 준비한 곳이거든. 어때? 지금이라도 그 계집은 잊고 나와 함께 진홍빛 시간을 보내 보는 것이? 나와 손을 잡는다면 샤나 왕국은 앞으로 너를 따르게 될 것이다, 아슬란.”
나타샤의 목소리에 마력이 흘러넘쳤다.
상대를 매혹하고, 끝없는 갈증에 시달리게 하는 것이 그녀의 마법이다.
내가 다른 캐릭터였다면 저 목소리에 넘어가 타는 갈증을 풀고자 그녀에게 매달렸겠지만-.
“마지막 경고다.”
이 대륙을 통틀어 최고의 정신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병적인 허세를 뚫을 순 없었다.
“이곳에서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하리엘을 데려오너라.”
나를 유혹하던 나타샤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놈의 하리엘, 하리엘! 넌 그렇게 그 계집이 좋은 것이냐? 넌 대체 왜 내 유혹에 덤덤할 수 있는 거지? 이 대륙에 있는 그 어떤 남자도, 여자도 내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그런데 너는······!”
난 그런 나탸샤에게 얼굴을 맞대며 그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했다.
방금 전까지 나를 도발하고자 했던 그녀는 몸을 들썩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그런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나의 긍지는 그 어떤 것으로도 깨부술 수 없다. 그 어떤 사악한 마법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신념을 꺾을 순 없다.”
“······.”
“그것이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자와 나의 차이점이다.”
병신 같은 허세를 부렸다.
“······.”
나타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곧 체념하듯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품을 방법은, 너의 그 고고한 의지를 짓밟을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이냐?”
“건방지구나, 나타샤.”
“뭐?”
“저 하늘의 신들조차 꺾지 못하는 것을 네가 어떻게 꺾는다는 것이냐?”
“······!”
“그만 돌아가라. 하리엘을 무사히 놓아준다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
나타샤는 결국 포기하듯 뒤돌아섰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면서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아직 난 포기하지 않았다, 아슬란.”
“······.”
그 말이 굉장히 매혹적이면서도 공포스럽게 다가왔다.
* * *
“후우-”
처소로 돌아온 나타샤는 오랜만에 파이프를 물고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그 연기마저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은 그녀의 마력 때문이리라.
“하늘의 신들조차 꺾지 못해?”
언뜻 들으면 여느 남정네와 마찬가지로 잔뜩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슬란이라면······.”
아슬란. 그 남자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그 무게부터가 다르다.
그러므로 저것이 허세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정말로 신들과 마주해 본 적이 있는 듯한 말투였지 않은가.
특히 그 신들조차 아래로 보는 어투에서 나타샤는 그것이 단순한 허세가 아님을 느꼈다.
“보면 볼수록 궁금하구나.”
담배 연기는 더욱 자욱해져만 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흐읍-!”
그제서야 속박에서 벗어난 하리엘이 표독스럽게 나타샤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사람을 이렇게 묶어 놓다니!”
“그래. 미안해. 알겠으니까, 그만 돌아가.”
“지금 이런 짓을 벌여 놓고 고작 그런 말로······!”
“그럼 어떡해? 돈이라도 줄까? 아니면 대가리라도 박아?”
“······.”
“아, 맞다. 이것도 가져가야지.”
그녀는 선심 쓰듯 무기도 돌려주었다.
하리엘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제 머리카락으로는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음, 글쎄. 네 모습으로 변장을 했었는데, 상대한테 전혀 안 먹히더라고.”
“네에!?”
“아~ 근데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리 뛰어난 눈을 가지고 있어도 이 물약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데. 심지어 이 물약의 정체는 또 어떻게 안 거야?”
나타샤는 생각할수록 궁금증만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그렇게 그 남자에게 자존심이 짓밟혔는데도 더욱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갈망을 느끼고 있었다.
하리엘은 나타샤가 혼잣말로 뭐라고 떠들어 대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게 다 무슨 소리입니까? 눈? 물약?”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장난친 건 미안해. 사과할게.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거야. 약속.”
뻔뻔한 나타샤의 행동에 하리엘은 할 말을 잃었다.
아카데미 때에도 저랬지.
저 여자는 항상 자기 마음대로였다.
“그래도 사과의 보상은 해줘야겠지? 이거 받아.”
나타샤는 하리엘에게 병 하나를 던져 주었다.
“이게 뭡니까?”
“음~ 쉽게 말하자면 이성을 더욱 쉽게 매혹시킬 수 있는 향수라고나 할까? 무려 내 마력이 들어간 향수이니, 그 효과는 아주 확실해.”
나타샤는 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하리엘의 눈빛에 반짝이는 것을 말이다.
“너도 역시 여자긴 여자구나. 앙큼한 년. 아주 좋아라 하네.”
“무, 무슨 마, 말씀입니까. 누, 누가 좋아했다고······.”
“그래도 함부로 뿌려대진 마. 괜히 이상한 남자들만 꼬일라. 이제 그만 나가. 나도 좀 쉬자.”
“······.”
얼떨결에 하리엘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밖으로 나갔다.
애지중지하며 향수를 챙기는 모습이 귀엽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심이 폭발했다.
저 녀석이 저 향수를 누굴 위해 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년은 되고 난 안 된다 이거지?”
빠직-!
물고 있던 파이프가 부러졌다.
끓어 오르는 화를 진정시키며 그녀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바로 그때 스멀스멀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당신의 욕망을 이대로 포기할 생각입니까?]
부드러운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
나타샤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그 음성에 반응했다.
“너 뭐야?”
[저는 당신의 소원을 이뤄주고자 있는 존재. 당신의 영원한 노예입니다.]
“저번부터 누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거 같은 느낌이 들었더니. 그게 너였구나?”
[하지만 당신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 당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당신은 절 계속 놔두셨던 것이고요.]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귀찮았을 뿐이야. 그런데 네가 날 위해 뭘 해줄 수 있는데?”
그러자 그 목소리가 더욱 강렬하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