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0.01초 소드마스터 97화
“여기 어디쯤이었던 거 같은데······.”
샤나 왕국은 모든 곳이 미로처럼 만들어져 있다.
곳곳에 마법이 심어져 있어 침입자에게는 지옥의 환상을 보여 주고, 손님에게는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누군가가 길을 잘 알려 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헤맬 수도 있는 곳이라 늘 조심해야 했다.
“여기다, 하리엘.”
그때 뒤에서 들리는 고혹적인 목소리에 하리엘은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 옛날처럼 여심마저 흔드는 기운을 내뿜고 있는 나타샤가 있었다.
“이런, 내가 불러주지 않았다면 길을 잃을 뻔했구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타샤 님.”
“그래. 그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넌 귀엽구나. 그 볼따구를 꼭 깨물어 주고 싶다니깐?”
“그, 그렇습니까?”
“호호. 당황하는 모습도 옛날이랑 똑같아.”
나타샤는 하리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신전에서 그 잘난 라할의 축복을 듬뿍 받은 것인지, 머릿결이 무척 곱구나. 나와는 다르게 너에게는 청순한 매력이 있어. 그 녀석도 그것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것일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호호. 내가 말하는 그 녀석이라면 너도 잘 알지 않느냐? 네가 지금 주군으로 섬기고 있는 바로 그 녀석 말이다.”
하리엘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래서, 넌 어떻지? 그 녀석이 널 좋아하는 만큼, 너도 그 녀석을 좋아하고 있나?”
“무, 무, 무슨 마, 마, 말씀이십니까!”
“당황하는 것을 보아하니, 너도 결국 넘어갔구나. 하긴. 사랑을 위해 평생을 섬겨온 교단까지 버린 너이지 않느냐?”
“그, 그건 그, 그럴만한 사정이!”
“내게 숨길 필요 없다. 난 100년을 넘게 살아온 마법사이니까.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것쯤은 일도 아니지. 너도 참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그때는 싫다고 피해 다녔던 녀석이 말이다.”
“······.”
하리엘은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나타샤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 왜 저를 부르신 겁니까?”
“흐응~ 왜일까? 그냥 오랜만에 제자가 보고 싶어서? 아니면······. 질투가 나서?”
“네?”
“오래 나이를 먹으면 말이다, 하리엘. 누군가는 현자가 되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더 고약해지기 마련이란다. 생각해 보거라. 그 고고한 아집과 탐욕이 100년이란 세월 동안 묵혀 있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지독해져 있을지.”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하리엘은 느낄 수 있었다.
나타샤에게서 흘러나오는 섬뜩하고 서늘한 기운을.
“안타깝게도 나는 전자가 아닌, 후자란다. 대륙의 이익이라든지, 왕국의 대의라든지 그런 건 솔직히 안중에도 없단다. 그저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 난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탐욕을 따라 살아왔지.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건 변하지 않더구나.”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윽!”
나타샤가 허락도 없이 하리엘의 머리카락을 몇 가닥 뜯어가 버렸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흐응. 향기로워라. 이렇게 얼마 되지도 않는 머리카락에서도 네 순수한 향기가 진하게 맡아지는구나.”
머리카락 향기를 맡고 있는 나타샤의 광기 어린 행동에 하리엘은 소름이 돋았다.
“무슨 짓을 꾸미시려는 겁니까? 장난은 여기까지 하십시오.”
“음. 조금 음흉한 짓을 해보려고.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난 탐욕을 따라 사는 여자란다. 그리고 지금 내가 몸이 뜨거워질 정도로 원하는 게 하나 있지.”
“······?”
나타샤는 하리엘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너를 애절하게 사모하고 있는 아슬란이란다.”
“······에?”
순간 당황하여 하리엘은 말이 헛나왔다.
“아, 아슬란 님을요? 하지만 그분께서는 저를 사모하지 않는······.”
“호호.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아슬란이 슬퍼하겠구나. 네게 마음을 고백한 그날 이후부터 그는 단 한 번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
“참으로 놀라운 정신력이지. 사내가, 그것도 왕국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작자가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순진한 너도 짐작할 순 있겠지?”
“그, 그게 저 때문이라고요?”
“그래. 지금도 아슬란이 여인을 가까이하더냐? 혼인은 했고?”
“······.”
나타샤의 말에 하리엘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이상한 일이긴 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데 정작 그는 혼인도 하지 않고 가족도 꾸리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정말로-
‘나 때문에?’
그 모습을 나타샤가 놓치지 않았다.
“나는 말이다, 하리엘. 그런 아슬란의 올곧은 마음을, 그가 지키고자 하는 그 순정을 갖고 싶다.”
“······네?”
“내가 탐욕을 부리고 있는 건 아슬란이 가진 바로 그 마음이다. 그것을 철저히 부숴 버리고 짓밟으며 그가 내 아름다움에 푹 잠겨 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게 무슨······.”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네 머리카락이 조금 필요했다. 이 못난 스승을 용서해라.”
위협을 감지한 하리엘은 허리춤에 얼른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검이······.”
허리춤에 항상 매달려 있던 두 단검이 잡히지 않았다.
“너무 녹슬었구나, 하리엘. 그래도 한때 교단의 검이었던 아이가 이리도 무방비여서야. 아니면 나를 너무 믿었느냐? 넌 그게 문제다. 마음이 순수해서 사람을 너무 잘 믿어.”
하리엘의 두 단검은 저 천장 위에서 두둥실 떠다녔다.
나타샤가 손가락을 튕기자 두 단검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도, 돌려주십시오!”
“싫은데?”
“······!”
하리엘은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 손바닥 안으로 신성한 힘이 모여들더니, 곧 황금빛을 내뿜는 검이 만들어졌다.
나타샤는 흥미롭다는 듯 그것을 살펴보았다.
“신성력으로 만든 검이라- 이건 귀하구나.”
“어서 돌려주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후후. 이 스승 앞에서 제자가 재롱을 떨어 보려는 것이냐? 어디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볼까?”
하리엘은 입술을 깨물며 나타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나타샤가 펼친 붉은 방어막에 부딪혀 부러지고 말았다.
“이, 이렇게나 쉽게······!”
“우리 귀여운 하리엘. 미안하지만,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란다.”
그녀가 한번 더 손을 튕기자 바닥 아래에서 올라오는 붉은 사슬들이 하리엘의 양팔을 잡아당기며 묶어 버리고 두 다리마저 칭칭 휘감았다.
나타샤는 허공에 흩어지는 신성력을 바라보며 말했다.
“빛의 마법이라는 건 참 신기하지 않으냐? 그 원천은 라할로부터 온다는데, 정작 라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란 말이지. 그런데도 빛의 마법은 여전히 작동을 한다라- 그렇다는 건 라할이 빛의 마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 빛의 마법이 라할을 만든 것일까?”
“얼른 풀어 주십시오!”
“미안하지만, 지금은 풀어 줄 수 없단다. 아! 물론 너와 아슬란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야. 그냥 내 지독한 욕망을 풀고 싶을 뿐이랄까? 호호. 그러니 일이 다 끝날 때까지 여기 가만히 갇혀 있거라.”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읍읍!”
나타샤는 하리엘의 입을 봉인한 뒤 머리카락을 가지고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갔다.
“조금만 기다려라, 아슬란. 너에게 즐거움을 선사해 주러 갈 테니까.”
깔깔거리는 그녀의 웃음소리 뒤로, 두 뿔이 달린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 * *
마법 축제에서는 정말 볼거리가 많았다.
신비한 마법 축제라는 것이 걸맞게 모니터에서만 봤던 것들이 실제로 펼쳐지니, 눈이 즐거웠다.
“이건 우리 마법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라파엘은 나와 함께 돌아다니며 여러 마법 도구를 찾아냈다.
모두 왕국 마법 연구에 도움이 되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흠. 모두 구입하거라.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돈을 아끼지 않아도 된다.”
“네!”
라파엘은 만세를 외치며 이것저것 왕국에 필요한 것들을 사들였다.
저것으로 조금 더 우리 마법 병단이 강해지고, 왕국에 쓸모 있는 것들이 생겨난다면 나도 돈이 아깝지 않았다.
“아이고 쌉니다, 싸요. 제가 특별히 개발한 것들을 한번 보고 가십시오~!”
잡화상처럼 열심히 물건을 팔고 있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딱히 알고 있는 이름들이 없어 그냥 지나치려고 했는데-
[페드리드]
어떤 이름 하나에 발걸음을 멈췄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힘없이 바닥에 앉아 있는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어떤 노인이었다.
‘은둔의 마법사, 페드리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겉모습으로 보면 형편없어 보이지만, 플레이어에게 쓸모 있는 아이템을 판매하는 캐릭터!
난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인기척을 냈는데도 노인은 여전히 고개만 숙여댔다.
“노인장.”
“······.”
혹시 죽었나?
“이보시오, 노인장!”
그러자 내 뒤에 있던 기사가 호통치듯 그를 불렀다.
페드리드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이런, 손님이 온 것도 모르고.”
아무래도 잠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페드리드가 내놓은 물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가 내놓은 물품은 총 5개.
그중 4개는 아무짝 쓸모도 없는 거였고, 나머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룬의 원석]
룬의 원석?
아이템에 이식할 수 있는 그 룬의 원석인 건가?
“이걸 사고 싶은데. 얼마인가?”
노인은 끌끌 웃으며 대답했다.
“2억 골드입니다.”
······죽일까?
말도 안 되는 금액에 나는 미간을 좁혔다.
2억 골드라면 우리 왕국에서 1년 동안 거두는 세금의 절반이나 되는 금액이었다.
“양심 없는 가격이군.”
그런 내 살기를 느낀 것인지 노인은 다시 말했다.
“그 원석은 룬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사용할 수가 없지요. 심지어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조차 그 영험한 힘을 다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게 팔지 않겠다는 건가?”
“2억 골드를 주시면 팔겠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다 생각되신다면 그 원석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럼 싸게 넘기겠습니다.”
그러자 라파엘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룬의 힘이라고요? 정말 여기에 룬의 힘이 깃들어 있어요?”
“허허. 속고만 살았나. 이 늙은이가 그런 걸로 거짓을 고하겠소?”
“그, 그럼 제가 한번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부터 해볼게요.”
라파엘은 룬의 원석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그 안에다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원석이 붉게 타오르며 그녀의 힘을 강하게 거부했다.
“헉! 지, 진짜였잖아?”
라파엘이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룬은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그 사용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죠. 저 같은 마법사는 이 안에 있는 힘을 흡수하려고 했다가는 지금처럼 거부 반응이 일어나고요. 그래서 지금도 연구가 활발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라파엘 정도나 되는 마법사도 룬의 원석을 흡수하지 못한다는 건가?
“전설에 의하면 선택받은 사람만이 이 힘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해요. 물론, 그게 진짜 전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런가?
나는 전혀 몰랐던 이야기다.
룬의 원석은 플레이어들이 항상 파밍을 하면 흡수를 해왔던 아이템이기에 당연히 라파엘과 같은 캐릭터도 원석을 흡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룬의 원석은 개발자가 플레이어를 위해 만들어 둔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오직 플레이어만이 흡수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해둔 아이템.
문제는,
‘설마 나도 거부하는 건 아니겠지?’
이 게임이 나를 플레이어로 인식하지 않고 아슬란으로 인식을 한다면 이 원석도 나를 거부한다는 뜻이 아닌가?
“흠.”
나는 라파엘에게서 원석을 가져와 손에 쥐어 보았다.
[룬의 원석]
-흡수하기 전까진 어떤 힘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험을 해봐야 하는 것인가.
이 게임이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말이다.
나는 세게 원석을 쥐고 그 안에 있는 힘을 흡수하려고 했다.
그러자,
화르륵-!
원석이 강하게 저항하며 타올랐다.
“어맛! 거부 반응이에요! 얼른 원석을 내려놓으세요!”
룬의 원석은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즉, 이 게임은 나를 플레이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이 게임의 NPC 중 하나인 아슬란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얼른 원석을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 강한 열기에 이미 피부를 뚫고 원석이 손바닥에 달라붙고 말았다.
‘미쳐 버리겠네.’
불에 타는 고통이 제일 고통스럽다고 했던가.
그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손에서부터 번져 나가는 불길이 내 온몸을 태워 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병적인 허세가 작은 신음조차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기사단장님! 얼른 놓으세요! 아니면 그대로 부숴 버리세요!”
“룬의 원석은 인간의 힘으로 부술 수 없소. 그 어떤 것으로도 파괴가 불가능하지. 그렇기에 신비한 원석으로 불리는 것이오.”
노인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화마는 내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남김없이 태워 버리고자 아가리를 벌렸다.
그 순간,
화아아악-!!
신성한 보호가 발동되어 그 맹렬한 불길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었다.
문제는 이 불길이 꺼지지 않으면 신성한 보호가 곧 꺼지면서 내 몸도 함께 가루가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쳤다.
이렇게 허무하게?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탐욕은 항상 불길처럼 일어나 인간을 태워 버리기 마련이오. 안타깝지만, 당신의 명운도 거기까지인 듯하군.”
바로 그때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
“감히 누가 내 명운을 결정한다는 것이냐? 이깟 불길이 정녕 이 아슬란을 집어삼킬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이 뜨거운 불길보다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은 나의 허세였다.
“나의 죽음은 하늘도 감히 결정할 수 없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도 날 죽일 수 없다. 하물며 이깟 돌덩이 따위가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나는 손에 들린 원석을 꽉 쥐었다.
노인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만두시오.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부술 수······.”
하지만 그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콰콱-! 콰직-!
“!?”
내 손에 달라 붙어 있던 원석이 서서히 균열을 일으키더니, 머지않아 부서지고 바스러지며 그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아아-!!
그러자 내 몸을 집어삼킬 듯 타오르던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더니, 곧 내 안으로 파고들어 흡수되었다.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넋을 놓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가격 흥정은 이 정도면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