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0.01초 소드마스터 95화
“에인소프 왕국의 국왕, 카르팰은 이번 마법 축제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서신이 왔습니다.”
“카르팰, 그 나대기 좋아하는 놈이?”
샤나 왕국의 대마법사이자, 이곳에서만큼은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나타샤.
그녀는 오늘도 어김없이 맨살 곳곳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채 발톱에 직접 색을 바르고 있었다.
‘끝없는 매혹’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그녀는 본능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색기를 내뿜었다.
매번 나타샤를 지켜보는 부하들도 그 성별을 가리지 않고 나타샤를 바라보며 침을 삼켜야만 했다.
“이상한 일이군. 그놈이 이런 자리에 빠지려 하지 않을 텐데?”
그녀가 고개를 들자 백옥 같은 피부의 쇄골이 드러났다.
그런 나타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부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을 이었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카르팰이 머무는 침소 안으로 황금빛 눈동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황금빛 눈동자? 잠깐. 설마 신전을 뒤집어 놓았다는 그 라할의 눈동자 말이냐?”
“예. 또한 거기서 나오는 목소리가 성 전체를 흔들었고, 카르팰만이 그 눈동자를 마주하며 결국 실신했다고 합니다.”
“실신까지?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왕족답게 자존심 강하고 음흉한 놈이 실신까지 했다라.
하지만 재밌는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카르팰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말만 반복하며 혼자 방에 틀어박혀 떨고 있으며, 이런 말도 함께 했다 합니다.”
“어떤 말을?”
“아슬란은 라할의 화신이라는······.”
“뭐? 푸흡-!”
나타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궁전을 가득 채웠다.
“라할의 화신?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구나. 내가 아슬란을 모를 줄 아느냐? 놈은 어떤 신의 피도 섞이지 않는 순수 혈통의 인간이다. 제아무리 요즘 아슬란의 명성이 드높아졌다고 해도 라할의 화신이라니. 카르팰 그놈, 제대로 맛이 가버린 모양이군.”
나타샤는 발톱과 손톱에 골고루 바르고 있던 색이 마음에 든 것인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처럼 마법의 끝에 다다른 자는 자연스레 느끼게 되지. 이 세상에 간섭하고 있는 신들의 기운을 말이다. 하지만 다른 신들은 이따금 조금이나마 그 존재를 느꼈었지만, 단 한 번도 라할의 존재를 느낀 적은 없었어.”
고대부터 내려오던 나타샤 가문은 신의 기운을 느낄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선조들로부터 그 기운을 전해 받은 나타샤였지만, 그들이 느껴왔던 라할의 기운을 이제껏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라할은 죽었다.”
“네?”
“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얘기는 틀린 것일 수도 있어. 타락한 신이라 불리는 ‘아마데르’도 결국 소멸되지 않았느냐? 그 점을 미루어 봤을 때, 신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다. 라할 역시 마찬가지였던 게지. 그런데 라할의 화신? 지나가던 똥개가 비웃겠구나.”
나타샤의 목소리에는 신에 대한 증오심이 물씬 풍겨 나왔다.
“이제 가자. 지금쯤이면 손님들이 다 모였을 테니.”
“예.”
나타샤는 전각을 나와 성대한 파티가 진행 중인 메인 홀로 이동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마저 매혹적으로 퍼뜨리던 그녀가 홀 안에 들어오자 그 달콤한 향기에 모두 이끌리듯 시선을 옮겼다.
“오오. 역시 대륙의 홍염이십니다.”
“어쩜 이리도 아름다우신지.”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지셨군요.”
그들은 입에 침이 마를 새도 없이 칭찬하기 바빴다.
그만큼 나타샤의 외모는 감히 비견할 자가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녀의 도발적인 옷차림은 사내들의 눈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나타샤는 도도한 얼굴과 발걸음으로 그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참여해줘서 고마워요, 카르만.”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바로 국왕 카르만이 있는 곳이었다.
“······초대해줘서 고맙소.”
“그럼요. 제가 예전에 아주 귀여워하던 제자를 보는 건데. 어떻게 초대를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아카데미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마법을 가르친 그녀였기에 카르만 역시 오래 전 그녀에게 마법의 기초를 배웠었다.
나타샤는 가느다란 손으로 카르만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카데미 때도 당신보다 늠름한 사내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네요. 그때 차라리 확 유혹해볼 걸 그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오?”
“호호호. 궁금하지 않아요? 제 모습이 밤에는 어떻게 변하는지.”
“크, 크흠! 농이 지나치시구려.”
“뭐, 싫다면 어쩔 수 없죠.”
새침하게 돌아서는 나타샤를 바라보며 카르만은 잠시 놓고 있던 정신줄을 붙잡았다.
역시 매혹의 마법사답다.
천하의 카르만도 나타샤 앞에서 서면 정신을 다잡기가 힘들 정도였다.
“흐음- 그런데 그 녀석이 안 보이는구나.”
“그 녀석이라고 하시면······.”
“오늘 이 무대의 주인공 말이다.”
그 말에 부하들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짧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마치 그 말을 들었다는 듯,
“일라이 왕국 대기사단장, 아슬란 가드 베라크!”
입구에 서 있던 병사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아슬란이 안으로 들어왔다.
“······.”
그토록 시끄러웠던 연회장에 일순 고요해졌다.
그저 들리는 것이라고는,
펄럭~!
화려하게 펄럭이는 아슬란의 붉은 망토와 격조 있는 그의 발소리뿐.
그는 부하들과 함께 홀 안으로 들어오며, 용맹하고 지조 있는 얼굴로 오직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이 수많은 사람이 오직 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발아래라는 것을 표방하듯, 그의 오만하면서도 기품 있는 눈동자는 한 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과연 오늘 무대의 주인공답구나.”
그 등장만으로도, 그 존재만으로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내.
그것이 바로 저 아슬란이었다.
언제 봐도 흥분감에 몸을 달싹이게 만드는 놈이었다.
“아슬란. 어서 오너라. 이리도 자리를 빛내주니, 기쁘구나.”
“······.”
아슬란의 저 거만한 눈빛은 나타샤의 몸을 더욱 뜨겁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초대해줘서 고맙소.”
“후후. 이제 스승에게 존대하는 것도 싫다는 것이냐?”
나타샤는 여전히 꼿꼿한 아슬란의 자세와 그 얼굴빛에서 드러나는 위압감에 미소를 지었다.
세상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마치 드래곤을 닮은 듯한 저 두 눈동자는 모든 것을 굽어보는 것만 같았다.
정녕 이 세상에서 자신을 두렵게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표현하듯이 말이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그리고 저 거만하기 짝이 없는 태도 역시 왠지 그와 잘 어울려 보였다.
나타샤는 매정하게 몸을 돌리는 아슬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더 어울리다 가거라. 이럴 때를 위해 축제를 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한 색욕을 뿌리며 아슬란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거칠 것 하나 없고, 두려울 것 하나 없는 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 * *
‘어후. 완전 괴물 소굴이 따로 없네.’
홀에 딱 들어서는 순간부터 괜히 왔다는 후회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네임드가 득실거리는 이 끔찍한 장소.
‘부담스럽게 왜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거야.’
거기다 그들은 나 하나만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웃긴 건, 이 와중에도 병적인 허세와 심취가 팔팔하게 끓어 올라 아주 당당한 자세로 그들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겉과 속이 따로 노는, 그야말로 겉바속촉이 따로 없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발을 들이려고 했을까.’
그놈의 골드에 잠깐 눈이 멀어서 그만······.
‘근데 이 할망구는 무섭게 왜 이래?’
나는 미간을 좁히며 내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나타샤를 쳐다보았다.
색욕의 마녀, 홍염의 대마법사, 유혹의 악마,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그녀는 대륙 최고의 미녀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미모를 가졌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100살 넘은 할머니로 보일 뿐.
오히려 이런 터치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 게임을 오랫동안 플레이 한 고인물이기에 잘 알고 있지 않던가.
그녀를 가까이했다가는 얼마 못 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많은 플레이어가 저 미모에 홀딱 넘어가서 죽곤 했지.’
저 아름다운 미모에 속아 나타샤에게 몸을 던지는 순간, 색욕의 노예가 되어 모든 정기를 흡수당하고 종국에는 죽임을 당한다.
그래서 그녀의 이런 가벼운 스킨십도 내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언제 어떻게 정기가 빨려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난 빠르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나타샤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법 축제에 앞서 열리는 회의에 다시 참석하도록 하지.”
“흥.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손을 너무 매정하게 뿌리쳐서 기분이 상했던 것일까.
그녀의 눈동자가 악독하게 변했다.
괜히 불똥이 튈까 두려워 나는 얼른 이 숨 막히는 곳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쿵-!
둔중한 발소리와 함께 내 앞을 가로막는 덩치가 있었다.
“아슬란.”
그는 다름 아닌 칼라 왕국의 국왕, 카르만이었다.
“인사도 없이 그냥 가려 했는가?”
“······오랜만이군.”
내 오만한 대답이 신경을 건드린 것일까.
카르만 뒤에 있던 기사들이 먼저 역정을 냈다.
“국왕께 그 무슨 무례입니까!”
“말을 높이십시오!”
웃기는 놈들이다.
제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서로 왕국이 다르면 무조건 말을 높일 필요는 없다.
그저 칼라 왕국이 대륙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기에 저런 같잖은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다.
“네 부하들이 여전히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건 똑같구나.”
“!?”
“지, 지금 뭐라고!”
부하들이 흥분하며 나서려고 하자 카르만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끼어들지 말거라.”
“소, 송구합니다.”
카르만은 힐끗 입가를 비틀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너 역시 건방진 건 똑같군. 감히 누구 앞에서 그렇게 혀를 놀리는 것이냐?”
그 흉포한 눈동자에 나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허세는 기름을 부은 듯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상대가 누구든 내 태도는 항상 똑같다. 왜 너라고 다를 거라 생각하는 거지? 오히려 건방진 건 네가 아닌가?”
“뭐라? 네놈? 사람들이 네가 나와 필적하는 힘을 지녔다며 칭송한다고 해서 정말 그런 줄 알고 착각하는 것이냐?”
냉철해 보이기만 하던 카르만의 얼굴에 금이 갔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투기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특성 중 하나인 [위압]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숨이 턱 막히고 양어깨는 쇳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워졌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한번 허세에 사로잡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받아치며 그의 위압에 맞서 나도 혼돈의 피어를 발동시켰다.
쿠우웅-!!
혼돈의 피어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자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거렸다.
카르만 뒤에 있던 부하들도 신음을 토해내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
그러나 카르만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결코 바닥에 무릎을 꿇는 추태를 보이진 않았다. 그의 수많은 사기적인 특성 중 하나인 [불굴]이란 능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이리라.
그는 내 피어에 대항하고자 더욱 강한 위압을 뿜어냈고 동시에 두 다리로 꼿꼿하게 버텨내기 위해 힘을 주자 이 고급스러운 대리석 바닥이 콰직!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
그렇게 15초란 시간이 훌쩍 지나간 뒤.
내 피어가 사라지면서 카르만의 위압 역시 함께 사라졌다.
“우욱-!”
“크읍!”
여기저기서 토악질을 하는 사람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나는 카르만의 이마에서 흐르는 한 줄기의 땀방울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대화는 충분히 한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