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0.01초 소드마스터 93화
“라할이시여!”
“라할이시여!!”
성전 안은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듯 기도를 하는 자가 넘쳐났다.
“대체 왜들 이러고 있는 것이냐?”
이제 막 성전으로 들어온 몇몇 장로는 이 상황을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못 보셨나 보구려. 라할께서 이 성전 위에 임재하셨었소!”
“라할이? 그게 무슨······.”
“경전에 나온 대로 그분께서는 그 경이롭고 두려운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셨소. 그 신성한 눈빛을 마주하니, 마치 벌거벗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더군.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면박을 주고 싶다만, 이들의 표정을 보면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신의 모습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이들은 경외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라 그 눈동자를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땅에 머리를 조아린 채 감히 일어나지도 못했다.
“라할께서는 우리를 항상 지켜본다고 하셨습니다.”
“역시 그분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계셨어.”
“오오. 라할이시여.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당신의 재림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돈 많은 권세가부터 저 아래 밑바닥에 있는 백성까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고하고 기쁨으로 라할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었다.
“허. 이거야 원.”
대체 저들이 무엇을 봤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그 상황을 직접 보지 못해 아쉬운 장로들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계속 이럴 게 아니라, 오늘의 할 일은 해야 하지 않소? 모두 들어가서 회의를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그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여러 제사장과 장로들이 모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강렬하고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회의장 분위기가 뜨거웠다.
“라할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그냥 눈동자만 나타나고 말았다면 이렇게까지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눈동자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온몸을 마비시키고 머릿속을 울리는 그런 목소리였다.
신의 목소리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걸 단번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토록 이들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 하는 것이었다.
“제 오랜 세월 제사장 일을 하면서 마음 한켠에는 의심도 있었습니다. 라할의 존재가, 그분의 빛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로 저는 보았습니다. 라할의 위대한 존재를 말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회의를 진행해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간증만 쏟아지고 있으니, 도무지 안건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흠흠. 일단 다들 알겠소. 모두 자중하시오.”
대장로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자, 우리가 지금 제일 먼저 다뤄야 할 것은 바로 일라이 왕국의 아슬란에 관한 문제요. 알다시피 그는 무력으로 할라즈 왕국을 정복했소. 더는 이 대륙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교단의 뜻을 철저히 무시했지!”
그는 준비된 각본대로 핏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오직 교단에서만 만들 수 있는 성수를, 아슬란이 직접 만들 수 있다고 속여 자기 백성들에게 성수를 뿌리고 있소. 그 가짜 성수를 우매한 자들이 진짜인 줄 알고 믿고 있다는 것이 문제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뿐이오? 놈은 계속해서 대륙에 혼란을 주고자 악마가 존재한다 외치고 있으며, 온 왕국을 어지럽히고 있소. 이건 우리 교단에 대한, 그리고 라할에 대한 도전이요!”
대장로의 말에 방금 전까지 간증을 하던 장로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라할께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 무엇이?”
“그건 어쩌면 아슬란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 교단은 지금껏 너무 아슬란에게만 집착했습니다. 한 차례 그와 크게 부딪혀 기사단을 잃지 않았습니까?”
“예. 그리고 그가 주장하던 대로 대륙 곳곳에서 악마가 출몰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는 중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우린 그것을 거짓이라 부정할 것입니까!?”
“라할께서 그러한 우리의 행동을 바로 잡고자 직접 나타나신 게 분명합니다!”
대장로는 이런 장로들과 제사장들의 반응이 어이가 없었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대장로와 같이 핏대를 세우며 아슬란을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 눈동자를 보고 난 이후, 완전 새사람이 되어 버렸다.
“교단에서는 끝까지 악마를 부정하고 있는데, 혹 누군가 악마와 결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라할께서 이 시기에 갑자기 나타나신 건 그것을 경고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내부 조사를 실시하여 누가 악마를 옹호하고 있는지 파헤쳐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를 이교도로 몰려는 것인가!”
“왜? 그쪽은 악마와 정말 결탁하고 있는 모양이지? 만일 그렇다면 빛의 심판이 떨어질 것이다!”
“뭐, 뭐라고!?”
이 이상은 회의 진행이 불가능할 것 같아 대장로는 상을 탕탕 치며 말했다.
“쯧. 그만! 다들 너무 흥분해 있군. 일단 머리들을 식히고 오는 게 어떤가? 오늘 회의는 잠깐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대장로 아르케인의 명령에 장로들과 제사장들은 옥신각신하며 회의장을 나갔다.
“후우- 이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군.”
오늘 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고 아슬란을 탄압하기 위해 모든 왕국의 힘을 모으는 것이 대장로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의견이 모이지 않으면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대장로님.”
그때 대장로파인 얀센 장로가 쭈뼛거리며 대장로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저도 방금 회의 때 나온 의견대로 아슬란 탄압은 이제 그만 멈추는 것이······.”
“뭐, 뭐라? 자네도 설마 진짜로 라할이 재림을 했다고 믿는 건가?”
“대장로님은 못 보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정신 차리시게!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라할은 이미 소멸한 지 오래된 신이야. 우리가 이제 따라야 할 것은 어둠의 권좌란 말일세!”
“아닙니다. 라할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릴 지켜보고 계신단 말입니다! 대장로님께서도 속죄를 받으시고 다시 한번 그분을 믿으십시오!”
얀센은 그리 소리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드디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라할이······.”
대장로는 혼란스러웠다.
* * *
“그, 그럼 가겠습니다. 대기사단장님!”
“부담 갖지 말고 와라.”
열 명의 기사가 나를 포위한 채 검을 쥐었다.
그들 중 하나가 달려들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혹시 힘을 과하게 쓰신다던가. 혹은 검강이라도 날리시는 날에는 저흰 다 죽은 목숨입니다!”
위급하면 쓰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지?
“건방지구나.”
“예?”
“내가 너희 상대로 그 정도도 조절할 줄 모를 것 같으냐?”
“소, 송구합니다!”
“잔말 말고 들어오기나 해라.”
“예!”
그들은 일제히 내게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죽음의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내 눈동자가 타오르는 통증을 새롭게 뜨였다.
그리고 홀로그램처럼 저들이 어떤 식을 움직이며, 어떤 공격이 나를 해할지 전부 다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이 순간만큼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 능력에 순순히 몸을 맡겼다.
뻐억-! 파바박-!
그러자 일시적으로 스텟이 상승한 내 몸은 마치 자동전투처럼 알아서 몸을 움직이며 내게 달려드는 기사들을 맨손으로 무력화시켰다.
10명이라는 숫자가 무색하게, 순식간에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채 짧은 신음을 토해냈다.
이것이 바로 천상의 눈빛이 가진 또 다른 능력이었다.
홀로그램에서 봤던 대로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해내고 반격을 자동으로 해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편한 능력이란 말인가.
“와아-”
“이야. 역시 대기사단장님!”
“엄청난 몸놀림이다!”
심지어 내게는 대악마 라이텐에게서 얻은 신속 능력도 있어 재빠른 몸놀림을 보일 수가 있었다.
‘이 정도 실험했으면 됐겠지.’
일부러 훈련장까지 찾아와서 기사들과 가벼운 대련을 펼친 성과가 있었다.
이 정도면 실전에서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터.
단점이 있다면 이 능력을 사용하게 되면 눈동자가 황금 불꽃처럼 타오른다는 것이었다.
“대기사단장님! 제게도 가르침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 갑자기 아론이 나섰다.
‘아론은 좀.’
아무리 천상의 눈빛이라고 해도 아론은 나보다 스텟이 훨씬 높다.
더군다나 지금 나는 검도 없는 맨손이지 않은가.
이 눈깔만 믿고 싸웠다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기에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펄럭~
붉은 망토를 과하게 펄럭이며 몸을 돌리던 나는 이미 치사량에 달하는 허세에 취해 있는 상태였다.
“네 알량한 검술이 얼마나 늘었는지 한번 보겠다. 오너라.”
이런 모욕적인 언사가 또 좋다고 아론은 싱글벙글 웃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예! 이 부족한 놈을 마음껏 꾸짖어 주십시오!”
잠깐. 이건 계획에 없었던 일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1분이 지나지 않아 천상의 눈빛이 발동 중이라는 것이다.
“제가 그동안 갈고 닦은 검술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론은 내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재빠른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강렬한 죽음의 위기를 감지했습니다.]
아론 저놈이 잔뜩 흥분해 적당히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듯, 천상의 눈빛이 내게 경고했다.
그리고 놈이 어떤 검술을 날리는지도 미리 내 앞에 보여 주었다.
수십 번이나 검을 허공에 휘두르며 무엇이 진짜 공격인지 숨기다 그사이에 공격을 섞어 내가 차마 시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서 검끝을 날리는 것.
이것이 아론이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었다.
촤아아아-!!
아론의 검이 허공에서 춤을 추며 차마 내 눈으로 좇아갈 수 없을 정도로 휘둘렀다.
대체 언제 저기서 진짜 공격이 날아 들어온다는 거지?
내 실력으로는 그걸 방어할 수 없을 텐······.
턱-!
“!?”
바로 그때.
언제 날아왔는지 모를 아론의 검끝이 얼굴에 닿기 전, 내 두 손가락에 걸리고 말았다.
‘미친. 뭐, 뭐야.’
내가 의도해서 잡은 것이 아니다.
천상의 눈빛이 대신 내 몸을 움직여 방어를 해준 것이었다.
“와······.”
아론은 멍하니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황금색 불길이 일렁이는 이 눈동자가 그리도 신기해 보였던 것일까.
나는 그 틈을 타 아론의 몸을 발로 차버렸다.
“윽!”
아론은 검을 놓친 채 뒤로 밀려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1분 동안 이어진 천상의 눈빛이 꺼졌다.
‘이게 문제라니깐.’
이 능력은 진짜 말도 안 되게 좋은데, 지속시간이 1분밖에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기사가 검을 놓치다니. 수치스럽구나, 아론.”
“소, 송구합니다.”
“무슨 검술인가 해서 봤더니, 고작 이런 걸로 날 넘어서려 했던 것이냐? 가소롭다.”
나는 검을 아론 앞에 던지며 말했다.
“앞으로 내게 검술을 보이고 싶거든, 저 레바노스부터 꺾고 오너라.”
멀찍이 자리에 앉아 구경만 하고 있던 레바노스는 몸을 들썩였다.
아론은 전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꼭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저 뒤에 있는 레바노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휴. 이렇게 하면 당분간 안 덤비겠지.’
그렇게 안심하며 몸을 돌릴 때였다.
“저, 저도 가르쳐 주시면······.”
그곳에서는 알렉산더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었다.
* * *
“라할의 눈?”
에인소프 왕국, 카르팰 왕자, 아니. 이제는 왕이 된 카르팰은 들어온 보고에 미간을 좁혔다.
“예. 그로 인해 신전이 지금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슬란에 관한 건?”
“그쪽에서도 결국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라할이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지금 진행 중인 모든 걸 중단 시켰다고······.”
“하!”
라할이라니.
웃기는 일이었다.
신화 속에서만, 그저 경전에서만 존재하는 상징적인 존재나 다름없는 그가 갑자기 신전에 모습을 드러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면 아슬란을 공격하기 힘들어지지 않느냐?”
처음에는 아슬란을 위협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친하게 지내려 했던 것이 카르팰의 목적이었다.
그의 힘을 검의 원탁에서 직접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슬란이 할라즈 왕국을 정복하면서부터 일이 꼬여 버렸다.
“놈과 우리 왕국 간의 거리는 너무나도 짧다. 할라즈 다음으로 우리 왕국을 목표로 삼는다면······. 무척 힘들어질 터.”
그래서 카르팰도 생존을 위해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믿었던 교단이 갑자기 저 자세로 나오고, 각 왕국끼리 힘을 모아 아슬란을 처단하고자 했던 계획도 어그러졌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인가.”
카르팰은 저 멀리서 훈련 중이던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 손짓하자, 그 먼 거리에서 순식간에 세 사람이 카르팰 앞까지 당도했다.
“너희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어쩌면 대륙 최강자일지도 모르는 자의 목을 베는 것이다.”
그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할 수 있겠느냐? 눈으로 쫓기 힘든 너희의 발놀림과 검술이라면 단숨에 그의 목을 베어 버릴 수도 있을 터. 아슬란은 샤나 왕국 마법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날 것이다. 그때 놈을 노리면 된다.”
“······마법 방어진이 펼쳐져 있다면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카르팰이 음흉한 웃음 소리를 냈다.
“우리와는 다르게 아슬란은 행군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의 주변으로 보호 마법을 친 적이 없다고 한다. 보통 군의 지휘자라면 선두에 서지 않고 가운데에 서서 모두의 보호를 받는 것이 마땅하나, 그는 항상 선두에 있지.”
어떤 보호 마법도, 방어 대책도 없이 선두에 서서 행군을 이끄는 아슬란.
기사로써 참으로 멋있게 보일 순 있겠으나, 카르팰처럼 지도자의 눈으로 봤을 땐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 공격이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기습 공격에 무조건 면역인 것은 아니다.
“그를 지키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너희가 놈의 숨통을 한번 끊어 보거라. 그럼 너희 셋 중 하나는 대륙 소드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
카르팰의 달콤한 속삭임에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란. 너의 오만함이 널 죽이게 될 것이다.”
카르팰은 벌써부터 아슬란이 죽고 난 뒤에 일라이 왕국을 어떻게 할지를 구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