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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 소드마스터-89화 (89/200)
  • 89화

    0.01초 소드마스터 89화

    “나의 소중한 레어가······. 나의 새로운 둥지가 어떤 자에 의해 잔인하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분노를 어찌 내가 다 풀어낼 수 있을까.”

    이글거리는 화염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그 때문인지 주변 공기가 후끈해진 기분이다.

    그리고 난 지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이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그런 거 같은데.’

    플레임의 증언과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본 결과, 그가 새로 만들고 있었던 레어를 부순 건 내가 그날 성질나서 던져 버린 아란의 창인 것 같았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아란의 창이 그런 거라고 하면······안 믿겠지?’

    좋든 싫든 그 창의 주인은 나고, 내가 던진 것도 맞기 때문에 발뺌하긴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모른 척하기!’

    그냥 처음부터 모르쇠로 나가면 될 일.

    레어를 부쉈다는 아란의 창은 내게 귀속되어서 내 명령 없이는 절대 밖으로 나올 일이 없다.

    그런데,

    “어차피 놈을 잡는 건 내게 일도 아니다. 그 정도의 힘이 가해졌다면 필시 흔적이 남아 있을 터. 이 드래곤의 눈을 피할 순 없지.”

    플레임이 뭔가 불안한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내 마력장을 펼친다면 금방 드러날 것이다.”

    드래곤의 마력장!

    그게 여기서 펼쳐지면 나 같은 놈은 버티지 못하고 몸이 바스라진다.

    설사 그것을 신성한 보호와 수호의 방패로 버틴다고 해도······.

    ‘마력장이 추적 능력 같은 것도 있었나?’

    이 모든 사달이 전부 나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는 걸 플레임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내가 여기서 당장 마력장을······.”

    “잠깐.”

    나는 손을 뻗어 아란의 창을 소환했다.

    “혹시 네 레어를 파괴했다는 창이 이것이냐?”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아란의 창을 보고 플레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다! 그놈이다.”

    “정말? 확실한가?”

    “그래. 내가 그 창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플레임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그걸 왜 네가 갖고 있는 거지?”

    “······.”

    스멀스멀 플레임의 뜨거운 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내가 성에 있을 때 어디선가 위험한 기운이 느껴져서 이 창을 보냈던 것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네 둥지를 파괴했던 모양이군. 그럴 의도로 벌인 짓은 아니었다.”

    “뭐? 그럴 의도가 아니었어? 그럼 결국 내 둥지를 파괴한 건 네놈이 맞다는 뜻인가?”

    “정황상 그런 거 같군.”

    콰앙-!

    급기야 놈은 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저 작은 몸으로 내려친 상이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졌다.

    “감히 인간이······. 인간 따위가 내 둥지를 건드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럴 의도로 한 것이 아니었다.”

    “웃기지 마! 그래서 없던 일로 넘어가겠다는 것이냐? 이 건방진 놈.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 주마.”

    플레임이 내뿜는 기운이 점점 더 거대해지고 흉포해지는 중이었다.

    그냥 끝까지 모른 척을 할 걸 그랬나.

    그 마력장인지 뭔지를 내세워서 내가 범인이라는 걸 알아 차라기 전에 그냥 자수한 것뿐인데.

    ‘이러다가는 저놈이 내뿜는 기운만으로도 타 죽겠다.’

    활활 타오르는 플레임의 붉은 기운이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포악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중하거라, 드래곤.”

    상대방의 기운이 뜨겁게 타오를수록 나의 허세 역시 미친 듯이 치솟았다.

    “자중 같은 소리하네. 넌 내가 누군지 알고 감히 그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것이냐?”

    “그래 봐야 네 명줄만 재촉할 뿐이다.”

    문제는 이놈의 허세가 미쳐 날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플레임을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행위가 되어 버렸다.

    “아까 그 한번으로 네가 날 압도했다 생각하느냐? 천만에! 그저 인간 따위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워 놔뒀을 뿐이다. 그러나 유흥은 여기까지다. 네놈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어.”

    그 말과 동시에,

    쿠쿠쿵-!!

    플레임은 작은 몸에서 벗어나 저 천장과 양옆에 벽을 뚫을 정도로 거대한 레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종족, 드래곤이다! 너희 인간들은 감히 바라볼 수도, 넘볼 수도 없는 ‘신’이란 말이다!”

    그 웅장하고 위엄 넘치는 드래곤의 형체와 거기서 터져 나오는 포효에 세상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네놈의 건방진 오만함은 여기서 끝이다, 인간.”

    플레임은 나를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개미가 인간을 바라보고 있으면 딱 이런 느낌일까.

    나를 이곳에서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듯, 플레임이 입을 쩍 벌렸다.

    피이이잉-!!

    그리고 그 안에서 붉은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런 씹-’

    모든 것을 파괴하고 태워 버린다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 * *

    레바노스는 이 왕국 생활이 썩 편안하진 않았다.

    방랑자라는 이름답게 그는 어디에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익숙치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에 남은 건,

    ‘아슬란.’

    바로 그 남자 때문이었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신비스러운 남자.

    성수를 만들어낸 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이후에도 아슬란은 기묘한 힘들을 보여주며 점점 더 그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인간은 아닌 거 같은데.’

    순수한 혈통의 인간이라고는 보기 힘든 힘을 가지고 있는 사내다.

    자기처럼 천계의 힘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강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런 고민도 잠시.

    “레바노스.”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잔소리꾼이 서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놈팽이처럼 놀기만 할 겁니까?”

    하리엘의 핀잔에 레바노스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이지?”

    “당신이 오늘도 할 일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온 겁니다.”

    “내가 딱히 할 일이 있나?”

    “여기서 누워 있지만 말고 나가서 백성들의 불편함을 해결해 주십시오. 그것이 싫다면 기사단 훈련에 참여하시든가요. 그것이 이 왕국을 위한 일입니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점은 아슬란 밑에 있는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일라이 왕국과 백성들을 아낀다.

    당장 이 왕국에서 제일 높은 사람인 아슬란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성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일을 도와주고 있으니, 그 밑에 있는 사람들까지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다.

    레바노스는 사실 그게 제일 고역이었다.

    아슬란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있긴 하지만, 가끔은 이러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백성들이 고맙다며 인사를 할 때는 또 뿌듯함마저 드는 것이 참 신기했다.

    “내가 소드마스터라는 건 알고 있나, 하리엘?”

    “그대는 내가 당신보다 직급이 높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레바노스. 예의를 갖추십시오.”

    “쩝.”

    괜히 말만 꺼냈다가 욕만 먹었다.

    “계속 그런 자세로 있는다면 대기사단장님께 제가 직접 보고를 올릴 겁니다. 그분께서는 제가 하는 말이라면 귀담아 들어주시거든요.”

    “풉.”

    “왜, 왜 웃는 겁니까?”

    “아니. 대기사단장님이 널 편애한다고 생각하냐?”

    “그건······.”

    “네가 그분을 사모하는 건 잘 알겠는데, 그분도 너와 똑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

    레바노스가 그리 충고를 주고 있을 때였다.

    “레바노스님.”

    그의 부하 기사 한 명이 들어와 말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왕궁으로 돌아가고 계십니다.”

    “그래? 오늘 할 일은 끝났나 보군.”

    그제서야 그는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나 먼저 들어가 보지. 그대는 여기 계속 남이 있든가, 알아서 해.”

    레바노스는 잠시 넋이 나가 있는 하리엘을 놔두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아슬란의 뒷모습에 그 뒤를 따르려는데,

    “음?”

    아슬란 옆에 있는 꼬맹이가 눈에 띄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꼬맹이 밑으로 드리워진 흉포한 그림자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저, 저건 설마?”

    저리도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지닌 건 악마나 천사가 아니라면 드래곤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 저건 분명히 인간의 탈을 쓴 드래곤이리라.

    그런데 드래곤이 왜 아슬란 옆에?

    “설마 모르시는 건가?”

    레바노스는 재빨리 뒤를 따라가 보았다.

    아슬란은 저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드래곤과 단둘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알려야 하나?”

    그랬다가 자칫 드래곤을 자극할 수도 있는 일.

    그 존재는 레바노스도 어찌하지 못 하는 이 대륙의 영물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일단 이대로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크롸라라라라-!!”

    레드 드래곤이 본모습을 드러내며 포효했다.

    “역시나!”

    그 사악한 이빨을 드러내는 것인가.

    레바노스는 얼른 대검을 꺼내려 했지만,

    “윽-!”

    레드 드래곤이 포효하며 펼치는 드래곤 피어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건 깜짝 놀라하며 칼을 뽑고 있던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

    모두 제자리에서 괴로운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피이이잉-!!

    그러는 동안 드래곤은 입가에 브레스를 가득 머금은 뒤,

    콰아아아아-!!

    그대로 아슬란이 있는 곳을 향해 쏟아냈다.

    “이런!”

    무려 드래곤 브래스다.

    그 용암보다 뜨겁고 파괴적인 브레스가 일직선으로 아슬란에게 꽂혔으니, 아무리 그라도 저 정도 위력의 브레스를 온전히 막아내는 건 어려울 터.

    “이렇게나 허무하게······?”

    그 남자가 죽는단 말인가?

    그렇게 쭉 이어지던 파멸적인 브레스가 드디어 멈췄다.

    이미 집무실은 완전히 날아가 버렸고, 뜨거운 연기만이 그 위에 뿌옇게 나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

    그곳에는 멀쩡하게 서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뭐지?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냐? 인간.”

    드래곤의 당황한 목소리가 마치 레바노스의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만 같았다.

    아슬란은 덤덤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다 천천히 칼을 뽑으며 말했다.

    “가소롭구나.”

    키이이잉-!!

    그리고 그가 가볍게 휘두른 검끝을 따라 드래곤의 몸통만 한 검강이 앞으로 솟구쳐 나갔다.

    “흐읍-!”

    콰아아앙-!!

    붉은 쉴드와 충돌한 검강!

    그것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방어막을 파고 들자, 드래곤의 이마에 박혀 있는 붉은 수정이 번뜩이며 쉴드에 강한 힘을 불어넣었다.

    콰콰콱-!!

    그런데도 검강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했다.

    절대 뚫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 다른 누군가의 것도 아닌, 바로 저 드래곤의 쉴드가 검강에 의해 균열이 일고 차츰 망가져 갔다.

    그 검강은 여려 겹으로 만들어진 방어막을 순식간에 뚫어내며 마침내 드래곤의 몸통 앞에 다다랐다.

    “!?”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거라는 것을 직감한 것일까.

    드래곤은 재빨리 어린아이의 몸으로 돌아와 황급히 몸을 옆으로 던졌다.

    콰아아아아-!!

    검강은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 땅을 갈라 버렸다.

    “허억- 허억-.”

    아이로 다시 변신한 드래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 갈라져 버린 땅처럼 자신의 몸 또한 똑같이 두 개로 나뉘어졌을 것이다.

    “대,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저런 힘을······!”

    레바노스는 자신의 앞에 굴러떨어진 드래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두 눈동자를 보았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드래곤이 지금 공포에 떨고 있다.

    바로,

    “가소로운 힘이로구나, 미물이여.”

    둔중한 음성과 함께 연기가 걷히며 걸어 나오고 있는 인간, 아슬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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