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0.01초 소드마스터 82화
할라즈 왕국은 내가 이 게임에 던져졌을 때 처음으로 맞붙은 곳이다.
내 일격에 죽었던 소드마스터 유한의 왕국, 그리고 지금은 나의 든든한 기사가 된 아론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내게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글은 길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사방에서 출몰하는 악마들 때문에 지금 왕국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할라즈 왕국이 예전이랑 많이 다르긴 하지.’
유한이 죽고 아론이 우리에게 투항한 뒤부터 할라즈 왕국은 일라이 왕국보다 약한 곳이 되었다.
이제 그곳이 대륙 최약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대마법사 켈린이 있긴 하지만, 그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순 없을 터.
더군다나 마기를 뒤집어쓴 악마들이 쳐들어오면 우리 왕국처럼 마기 훈련을 하지 않는 한, 아무리 실력자라도 처음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두 왕국 사이가 나쁜 건 아닌데.’
검의 원탁에서 켈린은 나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렸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할라즈 왕국과는 간간이 교역하며 별다른 다툼 없이 지내왔다. 하지만,
‘구원군을 요청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지 않나?’
유한이 내 손에 죽은 것도 있고, 아론과 몇몇 기사가 내 밑으로 들어온 것도 그렇고.
칼을 겨누며 싸우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하 호호거릴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딱 중간 부분에 놓인 사이라고 해야 하나.
딱히 놈들과 친하게 지낼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구원군 요청이라.
[빛의 기사라 칭송을 받으며 악마 처단에 앞장선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부디 할라즈 왕국을 가엽게 여기시어 악마로부터 저희를 구원해 주십시오.]
서신에 적힌 내용 중 일부다.
간절함이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슬슬 왕국끼리 연대할 때가 온 건가.’
왕국의 연대.
원래 스토리대로 게임이 흘러갔다면, 보통 플레이어는 각 왕국을 정벌해 힘을 규합하고 테키나 족속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낸다.
하지만 지금 스토리가 미쳐 날뛰는 중이라 사실상 당장 왕국 정벌을 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만약 왕국을 정벌하지 않고 외교적 화합을 이루었다면 왕국 간의 연대를 통해 테키나 족속을 막는 방법도 있다.
이 게임은 생각보다 선택할 수 있는 루트가 많고, 클리어 방법도 무조건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근데 이거 함정 아니야?’
의심병이 도질 수밖에 없다.
이놈의 난이도가 얼마나 내 뒤통수를 쳐왔던가.
‘퀘스트가 뜬 걸 보면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황제의 길] 퀘스트.
이 게임의 엔딩으로 달려갈 수 있으며, 이 아슬란의 몸으로 맞이하는 첫 메인 퀘스트였다. 문제는 이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 아슬란의 몸으로 제국을 세운다?
‘차라리 내가 신이 된다고 해라.’
카르만 같은 괴물과 맞붙었다가 무슨 꼴을 당하려고.
운 좋게 내가 찰나의 괴력으로 상대를 죽인다고 한들, 그 뒤에 있는 수만, 수십만의 대군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나저나 이를 어쩐다.’
황제의 길은 둘째 치고 할라즈 왕국을 어떻게 할 건지, 그게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할라즈 왕국을 돕는 것을 성공하면 무려 10골드를 준다.
‘좀 있으면 상점을 다시 열 수 있을 텐데.’
이번 퀘스트를 끝내고 보상을 받은 뒤, 조금 더 노가다를 하면 상점 오픈이 가능해진다. 그럼 그때 새로운 아이템과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가 있다.
‘하지만 할라즈 왕국의 영토를 잘못 밟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지.
그게 걱정이었다.
“대기사단장님.”
그때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론이었다.
나는 그에게 손짓해 내 곁으로 오게 했다.
그는 부름을 받은 강아지마냥 헐레벌떡 내게 달려왔다.
“아론.”
“예, 대기사단장님. 부르셨습니까?”
“이걸 한번 보거라.”
할라즈 왕국에서 보낸 서신을 읽은 아론의 눈동자가 조금씩 커졌다.
난 그런 아론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넌 이들을 돕고 싶나?”
“······.”
잠시 말이 없던 아론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전부 옛날 일입니다. 저는 아슬란 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얻었고, 제 고향과 삶의 터는 할라즈가 아닌, 이곳 일라이 왕국입니다. 그러니 저 때문에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런가.”
나는 힐끗 입꼬리를 올렸다.
거기서 마음을 정했다.
‘원래는 안 가려고 했지만.’
나도 청개구리인가.
아론이 저렇게 말하니, 왠지 가야 할 거 같단 말이지.
심지어 지금 내 곁에는,
‘레바노스가 있다.’
그냥 존재 자체가 깡패인 레바노스.
사르디엘의 핏줄이라 빛의 힘을 이용할 줄도 알기에 악마에 최적화된 놈이다.
웬만한 악마는 혼자서 다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레바노스는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 할 수 있었다.
“레바노스.”
“예.”
“네 실력을 증명할 때가 된 거 같군.”
“······?”
“난 아직 네 실력을 모른다. 나는 짐덩이를 곁에 두고 싶지 않구나. 그러니 이번 출정에 따라와 네 실력을 보여 보거라.”
그러자 레바노스는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대꾸했다.
“제 실력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저는 이 대륙의 소드마스터입니다.”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제 실력을······.”
바로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허세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
“네 말에 목숨을 걸 수 있느냐?”
“······?”
“다음 할 말을 조심하거라, 레바노스여.”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의 간단한 일격조차 받아내지 못한 놈이 감히 내 앞에서 실력을 운운하는 것이냐?”
레바노스는 주춤거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이 억울하다면 언제든 내게 도전해도 좋다. 단,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스르릉-
그와 동시에, 내 옆에 놓여 있던 검이 검집에서 나와 허공 위를 두둥실 떠다녔다.
그것을 보고 레바노스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서 네 목숨을 걸고 증명해 보이겠느냐, 아니면 전장에서 악마를 상대로 보여 주겠느냐?”
레바노스는 위협적인 칼끝을 보이고 있는 검을 바라보며 이내 대답했다.
“전장에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전장에서’라는 말을 유독 강조했다.
착-!
검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럼 결정되었군. 우린 할라즈 왕국으로 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펄럭이며 훈련장을 나섰다.
그러면서 내 허리춤에 있는 칼을 꽉 붙잡았다.
‘야. 너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튀어나오래? 깜짝 놀랐잖아.’
[······.]
놈은 역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미친놈 아니야, 이거.’
나와 의지를 공유하는 검.
이놈도 점점 허세가 심해져서 큰일이다.
* * *
“캬오오오-!!”
“키에에엑-!!”
시커멓게 사방에서 몰려드는 악마 군단.
정확히 말하자면 저 안에 섞여 있는 건 절반이 악마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마기에 중독된 몬스터들이다.
범람하는 몬스터 웨이브와 함께 악마 군단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케, 켈린 님. 놈들이 다가옵니다!”
“이곳은······. 이곳만큼은 지켜야 한다.”
이미 할라즈 왕국에 소속된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고, 다른 성들도 벌써 악마 군단에 의해 무너진 상태.
이제 남은 거라고는 여기 이곳 왕궁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저 많은 악마 군단이······.”
언제 어떻게 저 많은 군단이 생겨난 것일까.
저 정도의 군단을 모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렸을 텐데, 그 어떤 정보망에도 걸리지 않았다.
“악마라니. 그냥 다 헛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교단에서는 매일 같이 아슬란이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륙 사방에 이야기를 전파했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고, 아슬란이 맞았다.
악마는, 테키나 족속은 정말로 부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할라즈 왕국을 무너뜨리고자 다가오는 중이다.
“목숨을 다해 막아라! 여기가 뚫리면 할라즈 왕국의 멸망이다!”
“예!!”
켈린은 대마법사라는 위용에 걸맞게 광역 마법을 뿌려대며 미친 듯이 달려오는 몬스터들에 천벌을 내렸다.
콰쾅-! 콰콰쾅-!!
“캬오오오!!”
그러나 아무리 대마법사 켈린이라고 한들, 저 많은 몬스터의 진격을 혼자 막을 순 없는 노릇.
그는 마법의 힘을 터트리고, 또 터트리며 조금이라도 더 몬스터들을 죽여 나갔다.
하지만,
“노, 놈들이 올라온다!”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라!”
마침내 그들이 성벽에 다다라 서로의 등을 밟으며 그곳을 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놈들에게서 흐르고 있는 마기에 병사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읍!”
“마, 마기가!”
“크악!”
켈린은 그것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아······.”
여기까지인가.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자존심까지 버리며 아슬란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지만, 그는 끝끝내 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 그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할라즈 왕국이 이대로 멸망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한 것이겠지.
“할라즈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마지막 마력까지 쥐어짜며 몬스터 군단을 막아 세워 봤지만, 결국 켈린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끝없이 몰아치는 저들을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만일 이때 유한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을까.
“······.”
여러 성과 마을을 지키고자 뛰어다니며 마력을 쥐어짠 탓에, 이제는 간단한 파이어볼조차 만들 수 없는 실정.
그는 덤덤하게 할라즈 왕국의 멸망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쐐애애액-!!
허공을 가르는 거친 소리에 고개를 위로 올렸다.
“저건 뭐지?”
투석인가?
아니. 뭉텅이로 뭔가 날아오는 거 같은······.
퍼펑-! 퍼퍼펑-!!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들이 하늘 위에서 폭발했다.
그 강한 폭발음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도, 그 위를 올라와 공격하던 몬스터들도 전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쏴아아아-!!
“······황금비?”
황금빛으로 물들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중,
“키에에엑!!”
“캬오오!!”
몬스터들이 그 비에 맞으며 괴로워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빗물에 닿은 몸은 녹아내리며 연기를 뿜어냈고, 마기는 정화되어 사라졌다.
“서, 설마 이게 전부 성수인가?!”
하지만 어떻게 저 많은 성수를 뿌릴 수가 있는 거지?
대체 누가? 어디서?
그제서야 켈린은 저 멀리 여러 대의 투석기와 함께 다가오는 기사단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위로 붉은 망토를 휘달리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 * *
‘많이 늦진 않았군.’
할라즈 왕궁이 악마 군단에 의해 넘어가기 직전에 도착한 것 같았다.
‘여기서 할라즈 왕국이 멸망하면 골치 아파진다.’
내가 굳이 이 위험을 무릅쓰고 온 이유는, 레바노스의 존재 때문도 있지만 할라즈 왕국이 멸망하면 저곳을 기점으로 테키나 족속이 몬스터를 무한으로 생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건 그러니까······. 앞마당 멀티 같은 거지.’
악마들은 성안에 있는 민간인들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을 악마를 소환하고 몬스터를 만드는 재료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짜 무서운 점이었다.
한 왕국이 통째로 악마 손에 넘어가는 순간, 우후죽순 몬스터 숫자가 한꺼번에 불어나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싹을 자른다.’
그렇기에 나의 자랑스러운 기사단과 네임드 캐릭터들이 나서 줄 차례였다.
“대기사단장님! 모두 돌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아론은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
자기는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아무래도 본인의 고향이다 보니 당연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이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니깐.’
이 수천 명의 사람이 오직 나를 바라보고 있으며, 나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순간만큼은 정수리를 뚫을 것처럼 고양감이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허세와 심취는 덤덤하고 차갑게 그들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
여기서 장황하게 연설을 늘어놓거나, 대단하게 뭔가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으니까.
그러므로 나는,
“전군-!”
가볍게 손을 들어 앞으로 뻗었다.
“진격.”
그러자,
“일라이 왕국을 위하여!!”
아론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아슬란 님을 위하여!!”
기사단 전체가 함성을 지르며 용맹하게 악마 군단을 향해 쇄도했다.